■ 종교 재판 – 이단 심문 宗敎裁判-異端審問 Inquisition
교회는 이단은 교회의 일치를 해치는 중대한 범죄라는 견해를 고수해왔다. 로마의 황제들은 4세기에 들어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 교회의 이러한 견해를 자신들의 정책에 이용하였다. 로마의 황제들은 교회의 일치를 통해서 제국의 일치도 보장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로마의 황제들은 교회와 국가가 항상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교회의 일치 – 교회의 가르침의 일치까지도 포함 – 를 해치는 모든 시도는 국가에도 중대한 위협을 초래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의 황제들은 이단자를 국가를 반대하는 범죄자로 여기고 중벌로 다스렸다. 이단을 처벌해야 한다는 태도는 중세기를 지배한 하나의 일관된 이념이었다. 그래서 국가는 교회의 이단자를 다스리는 엄격한 처벌 규정을 제정하여 반포하였다.
13세기 초엽 순결파 이단이 프랑스 남부 지역과 이탈리아 북부 지역을 휩쓸었을 때 로마에는 종교 재판소가 생겨났다. 1179년에 개최되었던 제3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이단에 대해 파문의 처벌을 내리기로 결정한 바 있다. 교황 루치오(Lucius) 3세는 1184년 베로나(Verona)에서 개최되었던 시노드에서, 라테라노 공의회가 결정한 파문의 처벌 규정을 모든 교회의 축일에 모든 본당에서 공표할 것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 파문의 처벌 규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자 1215년에 개최되었던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파문의 처벌 규정을 재확인하고 강화시켰다.
알비파와의 전쟁이 끝난 다음 1229년 툴루즈(Toulouse)에서 개최되었던 공의회에서 종교 재판소의 설치 준비가 시작되었다. 교황 그레고레오 9세는 1233년 종교 재판소의 설치 및 운영을 도미니코 수도회에 위임하였다. 이 위임은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 의해 거듭 확인되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교서 Ad exstirpanda를 통해 종교 재판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특별 규정을 제정해서 반포하였다. 고문도 심문 절차의 수단으로서 규정되었다.
스페인의 종교 재판소는 로마의 종교 재판소와는 별개였다. 페르디난도(Ferdinand) 국왕은 교황 식스토(Sixtus) 4세에게 독자적인 종교 재판소의 설치를 청원하였다. 교황은 1478년 11월 1일 교서를 통해 이단을 심문할 수 있는 고위 성직자의 임명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이들 고위 성직자들에게 종교 재판권을 위임하였다. 위에 언급한 이단이란 공적으로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고백하지만 내적으로는 여전히 유다교를 고수하는 유다인을 지칭하였다. 종교 재판소는 교황으로부터 그 권위를 인정받았으나, 임명은 세속의 권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렇게 스페인의 종교 재판소는 국가와 교회의 합작에 의한 산물이었다. 1480년 세비야에 최초의 종교 재판소가 설치되었다. 심문은 매우 잔학하게 진행되었고, 그 결과 수많은 탄원이 로마로 올라왔다. 교황 식스토 4세는 종교 재판소가 정당한 절차를 준수하도록 경고했으며, 세비야의 대주교에게 항소심의 재판권을 관할하는 책임을 위임하였다. 1492년 수많은 회교도들이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외견상으로만 개종했을 때 종교 재판은 이들에게도 확대되어 적용되었다. 이단자에 대한 최초의화형은 1197년 아라곤(Aragonien)의 왕 페드로 2세에 의해 지시되었다. 독일의 황제 프리드리히(Friedrich) 2세는 1220년 이단에 대한 화형의 처벌은 모든 제국에 확대되어 실행되어야 한다는 법령을 반포하였다. 그러므로 이단자 화형은 국가의 법령으로 명령되었다. 그리고 교황들 역시 이 법령에 동의를 표하였고, 국가의 관리들로 하여금 이 법령을 준수하도록 요구하였다.
1542년 교황 바오로 3세는 종교 재판의 규정을 새롭게 개정할 것을 지시하였다. 즉 6명의 추기경을 포함하는 로마의 중앙 관리들에게 전체 교회의 신앙을 수호하는 임무가 부여되었다. 1542년 스페인에서는 종교 개혁자들을 대상으로 해서 종교 재판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이 종교 재판소의 설치자는 카라파(Johann Peter Caraffa)였고, 그는 스페인의 종교 재판소를 광신적인 정신으로 무장시키는 데 앞장섰다. 카라파는 나중에 교황 바오로 4세로 선출되었고, 그의 재위 기간 중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종교 재판은 가장 무자비한 재판으로 악명을 떨쳤다. 나중에 종교 재판의 이념은 마녀에 대한 박해와 화형에서도 나타났다.
15세기 말엽에 이르러 독일에서는 이른바 마녀 박해를 위한 특별한 종교 재판이 등장하였다. 교황 인노첸시오 8세는 1487년 독일에서의 마녀 박해에 관한 교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1487년에 『마녀 망치』라는 제목의 책이 간행되기도 하였고, 이 책은 마녀 박해의 실상을 성서에 근거해서 입증하려고 시도하였다. 예수회 회원 스페(Friedrich Spee, †1635년)에 의해 편집되었으나 익명으로 출판된 『범죄의 담보』(Cautio criminalis)로 마녀 박해는 그 종지부를 찍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