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선거 Papstwahl

  교황 선거  敎皇選擧 Papstwahl

  초대 교회의 경우 로마의 주교는 로마 도시에 거주하던 성직자와 백성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이러한 선출 방식은 가끔 매우 격렬한 대결 양상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관철시키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대결 양상이 노출될 경우 국가 권력이 개입하였다. 국가는 교회의 일치가 국가의 일치를 위한 토대가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이단설 – 아리우스주의, 단성론 등 – 을 둘러싼 신학적인 대결 역시 교황 선거와 관련해서 불리한 영향을 미쳤다. 황제들은 자신들에게 호의를 표명하는 지원자들을 교황으로 선출시키려고 시도하였다.


  교황 다마소(Damasus) 1세는 자유로운 교황 선거를 요구하기 위해 378년 로마에서 개최되었던 시노드의 결정과 관련해서 황제의 동의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 선거에 대한 황제의 영향력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황제의 영향력은 교황 선거에 대한 황제의 추인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또는 교황 선거와 관련된 모든 언급은 항상 황제의 칙령에 근거하고 있었다. 황제 호노리오(Honorius)는 420년, 앞으로 논쟁의 소지를 안고 있는 교황 선거의 경우 두 지원자 가운데 아무도 교황으로 선출될 수도 없고, 그 대신 새로운 교황 선거가 실시되어야 한다는 규정을 반포하였다.


  교황 심마쿠스(Symmachus) 재임시 499년 3월 1일 로마에서 개최되었던 시노드 역시 이와 동일한 의미의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즉 논쟁의 소지를 안고 있는 교황 선거의 경우 먼저 합의를 도출해야 하며, 합의를 도출하기 전 두 지원자 가운데 아무도 교황으로 선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이것은 교황 선거와 관련해서 반포된 최초의 교황령이었다.


  교황 보니파시오 3세 재임시 607년 로마에서 개최되었던 시노드의 결정에 의하면, 교황의 생존시에 후임자에 관해 논의해서는 안 되며, 전임자의 장례식이 끝난 3일 후에 새로운 교황 선거가 자유로운 상태에서 실시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교황 스테파노 3세는 769년 4월에 개최된 로마의 시노드에서, 교황 선거권은 오로지 성직자들에게만 유보되며, 피선거권은 사제 추기경과 부제 추기경에게만 유보된다는 새로운 교황 선거 규정이 반포되었다.


  중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 비잔틴의 황제는 새로 선출된 교황이 황제에게 교황 선출 사실을 고지하고 추인을 청원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는 동로마 황제가 교황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할 때까지, 그리고 교황에 대한 보호 의무를 이행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계속되었다. 교황들의 정치적인 노선이 프랑크 쪽으로 돌려진 후 독일의 황제 로타르 1세는 자유로운 교황 선거를 보장하였으나, 교황으로 선출된 자는 즉위 이전에 충성 서약을 이행할 것을 의무 규정으로 요구하였다. 실제로 교황 에우제니오 2세(824~827년)는 충성 서약을 이행하기도 하였다.


  논란의 소지를 안고 있는 교황 선거의 재발을 예방하기 위해 독일의 황제 로타르 1세는 – 교황 세르지오(Sergius, 844~847년) 2세 재임시에 – 교황의 즉위는 오로지 황제의 허락하에, 그리고 황제가 파견한 특사의 임석하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규정을 반포하였다. 교황 요한 9세(898~900년)의 재임 시기에 개최된 시노드는 교황 선거에 관한 규정을 새롭게 손질하였다. 즉 주교들과 성직자들은 백성의 동의를 얻어 교황을 선출해야 하며, 교황의 즉위는 황제가 파견한 사절의 임석하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962년 2월 13일 개최되었던 시노드에서 반포된 오토 특전 역시 이와 동일한 방향을 지향하고 있었다. 즉 교황은 교회법에 입각해서 선출되어야 하며, 선출된 교황은 즉위 전 황제에게 충성 서약을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059년 4월 라테라노에서 개최되었던 시노드에서 교황 니콜라오 2세가 반포한 법령은 교황 선거사에서 매우 획기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주교 추기경들은 교황 선거에서 예비 결정권을 행사하고, 다른 추기경 성직자들에게 예비 결정의 결과를 제출한다. 그리고 로마의 성직자들과 백성들은 교황 선거의 결과에 대해 동의한다는 것이었다. 이 법령은 독일의 국왕의 역할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매우 중요한 변화의 시도였다. 즉 독일의 황제 하인리히 3세 이후 독일의 국왕들은 교황의 지명권을 별다른 논란 없이 행사해 왔다. 그런데 추기경들이 교황 선거에 가담함으로써 이 지명권의 행사가 중지되었다. 하지만 이 법령은 다음 교황 선거에서 효력을 상실하였다. 왜냐하면 1073년 라테라노 성당에서 진행되었더너 교황 알렉산데르 2세의 장례식에서 백성들이 ꡐ힐데브란트(Hildebrand)를 교황으로ꡑ라는 구호를 외침으로써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이 탄생되었기 때문이었다.


  교황 선거와 관련해서 독일 국왕의 영향력이 감소되고, 추기경단에게 교황 선거권이 이양됨으로써 매우 심각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예를 들어 가끔 교황의 공위 기간이 장기화되는 경우가 발생하는가 하면, 서방 교회의 분열을 초래하기도 한 이중의 선거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1241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 서거 후의 경우도 그러하였다. 그 당시 12명의 추기경들이 교황 선거에 참가하였으나 – 이들 가운데 2명은 황제에 의해 감금 상태에 있었다 – 2/3의 찬성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추기경들은 교황궁의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공간에 감금되었다. 이것이 바로 교회 역사상 최초의 봉쇄 교황 선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의 대립이 깊어, 합의는 빠른 시일 내에 도출되지 못하였다.


  1274년 리옹 공의회는 교황 선거를 새롭게 규정한 헌장 Ubi Periculum을 반포하였다. 이 새로운 규정에 의하면, 교황청에 거주하는 추기경들은 교황 서거 후 다른 추기경들의 도착을 10일 이상 기다려서는 안 된다. 그리고는 교황 선거가 끝날 때까지 외부 세계와 단절된 공간 – 봉쇄 교황 선거 – 에 머물러야만 한다. 외부 세계와의 모든 접촉은 차단되고, 선거가 오래 지속될 경우 추기경들의 생활 조건은 점점 열악한 수준으로 떨어진다. 뿐만 아니라 추기경들은 교황의 공위 기간 동안 수입을 상실한다. 국가에는 이러한 규정의 이행 여부와 준수 여부를 감독해야 하는 과제가 위임된다. 이러한 선거 규정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본질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276년 교황 하드리아노(Hadrian) 5세는 그레고리오 10세가 마련한 교황 선거 규정을 ꡐ이행하기 어려운 규정ꡑ이라는 이유로 폐기시켰다. 그 결과로 교황 하드리아노 5세 서거 후 추기경들은 4주일 후 봉쇄 교황 선거에 참가하기 위해 모였고, 이 선거에서 교황 요한 21세가 선출되었다. 그레고리오 10세의 교황 선거 규정 – 이 규정은 교황 하드리아노 5세에 의해 폐기된 바 있다 – 은 1294년 교황 첼레스티노 5세에 의해 다시금 그 효력을 되찾았다. 1433년 바젤 공의회는 교황 선거를 위한 새로운 규정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 새로운 규정은 한 번도 실천되지 못하였다. 교황 율리오 2세는 1504년 1월 13일 교황 선거와 관련해서 중세기의 상당 기간 동안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었다. 성직 매매를 금지시켰다. 교황 그레고리오 15세는 교황 선거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교황은 1621년 11월 15일 반포한 교황 선거 칙서를 통해, 비밀 투표 용지의 사용에 대해 규정하였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75년 10월 1일 사도 헌장을 통해 그레고리오 10세의 교황 선거 규정을 수정하였다. 이 수정에 의하면, 한 교황의 서거 후 빠르면 15일째 날, 늦어도 20일째 날에 봉쇄 교황 선거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80세에 도달하지 않은 모든 추기경에게는 선거권이 부여되었고, 선거에 참석한 모든 참석자들은 선거에 관해 비밀을 유지할 것을 선서해야 한다고 하였다. 비밀 유지에는 송․수신기, 영화 촬영기의 사용 금지도 포함되어 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3가지 방식의 교황 선출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첫 번째 가능성은 매우 일반적인 방식으로서 투표에 의한 찬반으로 결정하되, 이 경우 2/3 찬성에 1표의 찬성이 더 요구된다. 두 번째 가능성은 구두 동의에 의한 방식이다. 즉 추기경들은 공개적으로, 자발적으로 일치하여 큰 목소리로 유력한 교황 후보 추기경을 교황으로 호명하면서 외치는 것이다. 세 번째 가능성은 조정 선거에 의한 방식으로서 추기경들은 홀수로 구성되는 몇몇 추기경들에게 자신들을 대신해서 교황을 선출하도록 전권을 위임하는 방식이다.


  투표에 의한 찬반이 교황 선거 시작 후 3일 이내에 결정되지 않을 경우 4일째 되는 날에는 다시금 기도와 협의의 시간을 가진다. 그런 다음 추기경들은 결선 투표를 결정할 수 있다. 즉 후보자 가운데 최다 득표를 얻은 자를 교황으로 선출할 것인지, 아니면 절대 다수표에 1표를 더 얻은 후보를 교황으로 선출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


  교회 역사상 같은 해에 두 번의 교황 선거가 있었던 해는 다음과 같다.


  708년: 시신니오(Sisinius), 콘스탄티노(Constantin) 1세


  752년: 스테파노, 스테파노 2세


  827년: 발렌티노, 그레고리오 4세


  896년: 보니파시오 6세, 스테파노 6세


  897년: 로마노, 테오도로 2세


1187년: 그레고리오 8세, 클레멘스 3세


1276년: 인노첸시오 5세, 하드리아노 5세


1503년: 비오 3세, 율리오 2세


1555년: 마르첼로 2세, 바오로 4세


1590년: 우르바노 7세, 그레고리오 14세


1605년: 레오 11세, 바오로 5세


1978년: 요한 바오로 1세, 요한 바오로 2세                     




이 글은 카테고리: 신학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