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펠라지우스주의 Pelagianismus
펠라지우스는 5세기 초엽 로마에서 살았던 평신도 수도승이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스스로 죄를 피하고 구원을 위한 공로를 쌓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펠라지우스는 은총의 필요성을 부인하였다. 펠라지우스는 인류의 원조가 지은 죄는 최초의 두 원조 각자의 개인적인 죄에 지나지 않으며, 죄의 결과도 단지 두 원조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 펠라지우스는 그리스도교의 구원론 전체를 문제삼았다. 고트족의 침공을 피하여 펠라지우스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416년 카르타고로 왔다. 펠라지우스 자신은 그사이 팔레스티나에 정착하였고, 415년 예루살렘에서는 펠라지우스의 주장을 논의하기 위해 시노드가 개최되었다. 하지만 이 시노드는 펠라지우스에 대해 아무런 단죄도 결정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펠라지우스의 주장에 동조하였던 예루살렘의 시노드는 펠라지우스에게 가해진 모든 협의를 벗겨 주었고, 교회 공동체 내에 머물 수 있도록 도움을 제공하였다. 펠라지우스의 주장은 그의 제자들이 북아프리카에서 주장하였던 내용과 비교해 볼 때 온건한 편이었다.
펠라지우스는 하나의 이론을 정립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현실적인 실제의 생활에 관심을 기울였다. 다시 말해 펠라지우스는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은총을 부인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단지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구원을 ꡐ더 용이ꡑ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히포의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이 스스로 은총을 체험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해서 펠라지우스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였다. 아우구스티노는 416년에 개최되었던 시노드에서 펠라지우스의 주장을 단죄하였고, 그 결과를 교황 인노첸시오 1세에게 보고하였으며, 교황은 펠라지우스와 그의 제자들을 파문시켰다. 아우구스티노가 교황의 파문 결정 소식을 듣고 ꡒ로마에서 발언했으니 사건은 끝났다ꡓ(Roma locuta, causa finita)라는 유명한 격언을 남겼다고 한다.
아우구스티노는 이 발언으로 교황의 교도권을 결정적으로 표현할 의도는 없었다. 그는 단지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 발언하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교황의 단죄에도 불구하고 종결되지 않았다. 펠라지우스는 하나의 신앙 고백문을 작성하여 제자를 통해 로마로 보냈다. 그 결과 펠라지우스는 새로 선출된 교황 조시모(Zosimus)의 호감을 얻었다. 교황은 로마에서 개최되었던 시노드에서 펠라지우스와 그의 제자들을 복권시켰다. 그리고 아프리카 주교들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펠라지우스와 그의 제자들을 다시금 교회 안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였다. 아우구스티노는 교황의 이러한 잘못된 결정에 대해 매우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418년 5월 1일 214명의 추기경들이 참석한 시노드가 카르타고에서 개최되었고, 아우구스티노의 지휘 아래 은총과 원죄에 대한 9개의 명제를 작성하였다. 이 시노드의 결정이 로마에 전달되었을 때 교황 조시모는 사안을 다시금 반전시켰고, 그전에 자신이 내렸던 결정을 수정하였다. 그리고 카르타고 시노드의 결정을 추인하였다. 이로써 펠라지우스주의의 이단적인 생각이 재확인되었고, 이 이단의 주모자는 파문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