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권 82년 동안의 사건을 다툼
유다 마카비의 죽음부터 알렉산드라 여왕의 죽음까지
제1장
요나단이 형(유다)이 죽은 후 정권을 잡게 된 것과 다른 형 시몬과 함께 박키데스와 싸운 것에 대하여
1. 유다(Judas)가 죽은 후 박키데스(Bacchides)가 유대인들을 압제하다[마카비 1서 9 : 23]
마게도냐인들이 유대를 정복한 이후, 유대 민족이 어떤 방법으로 자유를 얻게 되었는지와 또 유대의 지도자였던 유다가 죽기 전까지 우리 유대 민족을 위하여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얼마나격렬하게 투쟁하였던가에 대해 우리는 이 전권에서 살펴본 바가있다. 이 유다가 죽고[㈜ 주전161년에] 난 다음 그 당시 남아있던 하느님을 경외하지 아니하는 모든 불경한 사람들과 자신의 나라인 유대의 생활 방식을 거부하는 배반자(배교자)들이 유대인들 가운데서 일어나, 각 방면에서 악영향을 끼치며 유대 민족을 위해(危害)하였다.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기근이 엄습하였다. 그 결과 필수물들이 부족하게 되었고 또 기근과 적대자들에 의해 야기된 재난에 끝까지 견딜 수 있는 능력도 상실하여 많은 유대인들은 마게도냐인들에게로 도망쳤다. 그때 박키데스는 자기 나라의 풍습을 포기하고 다른 나라와 같은 생활 방식을 선택하였던 모든유대인들을 규합하였다. 그리고는 그들을 그 나라의 관리로 임명하였다. 그러자 이 사람들은 유다의 친구들과 그에게 동조한 사람들을 불잡아다가 박키데스에게 넘겨주었다. 박키데스는 먼저 그들을 자기 멋대로 고문하고 학대하였으며, 그런 다음 그들을 죽여버렀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래로[㈜ 바벨론으로부터의 귀환은 요세푸스에 의해 \”예언자가 그들 중에 보이지 아니 했 던 시대\”로 대체되었다. 참). 추측컨대 말라기(Malachi)를 언급하고 있는 마카 비 1서 9 : 27] 경험하였던 어떤 경험보다도 가장 지독했던 이같은 환란이 유대인들에게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자 자신들의 민족이 아주 비참하게 괴로워하는 것을 보아온 남아있던 유다의 동료들은 유다의 동생인요나단에게 가서 그에게 유다처럼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의형 유다는 자기 민족이 방어자가 없이 있거나 그 당시의 재난들에 의해 파멸당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지 못하여 그들 모두의자유를 위해서 죽었던, 그야말로 자신의 모든 관심을 자기 민족을 위해 쏟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요청을 받은 요나단은 그 즉시자신도 유대 민족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었노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결코 자기 형에 비하여 열등하지 않다고 여겨질 그때에 유대인들의 지도자로 추대받았던 것이다. [㈜ 마카비 1서 9 : 31은 단순히 \”그때에 요나단이 영도권을 떠맡았다\”로 간딘히 말 하고 있다. ]
2. 요나단이 박키데스로부터 도망하다[마카비 1서 9 : 32]
하지만 박키데스는 이 소식을 듣고 이전에 유다가 자기 앞에서 했었던 것처럼, 요나단이 왕과 마게도냐인들에게 두통거리를 안겨 주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반역에 의해 죽이려고 시도하였다. [㈜ 박키데스(Bacchides)의 두려움과 전율은 마카비1서에서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자신의 의도를 요나단과 그의 동생 시몬(Simon)이 알지 못하도록 했었음에도, 그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자신들의 모든 동료들을 데리고 그 도시[㈜ 드고아(Tekoah)의 베들레헴(Bethlehem)의 남쪽 약 6마일에 위치함. 참), 고대. 9권. (12). 이 광야에 대해서는 참). Abel,\’GP\’i. 436~437]에서 가장 가까운 광야로 서둘러 피하였다. 그들은 아스팔 연못(the Pool of Asp-har)이라[㈜ \’RB\’에서 아벨(Abel)이 \’드고아외 남쪽 약 3마일 지점에 있는 현재의 Birea-Za\’feran과 동일하다고 보았다. ] 불리는 수역(水域, the body of water)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렀다. 그러나 자신들이 거처를 옮겨 지금 있는 그곳에있다는 사실을 박키데스가 알게 되자, 요나단은 그들과 싸우기로 작정하고 자신의 전 군대를 일으켜 요단 건너편에 진을 치고는 거기서 군사들을 쉬게 했다. [㈜ 박키데스(Bacchides)가 \”자기 힘을 믿었다\”는 것은 마카비 1서 9 : 34<참). 고대. 13권. 1 : 3(12)>. kaiv e[gnw Bakcivdh\” th\’ hJmevra tw\’n sabbavtwn, \”그리고 박키데스가 안식일에 대매 알고 있었다\”애 명확하게 근거한 설명이다. 요세푸스의 본문은 루키안처럼 ( )(그날)로 읽고 있음이 틀림 이 없다. 여기서 요세푸스는 박키데스가 안식일을 지켰던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우연히도 박키데스가 유대인들이 거기예 있었던 것을 알게 되기까지 요단을 건넌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이 구절은 부적절한 것이다. 참). 아래. ] 그런 후에 요나단은 박키데스가 자신과 싸우러 왔음을 알고는, 가디스(Gaddis)라고도 불리는[㈜ 참). 고대. 12권. (260). 각주 314. ] 친동생 요한(John)을 나바타이아의 아량인들(the Nab-ataean Arabs)[㈜ 참) 고대, 12권. (355). 각주420. ]에게 보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대인의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박키데스와 대항하여 싸우게 될 때까지 자신의 군장을 그들에게 놓아두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요한이나 바타이아인들(Nabataeans)에게 가는 도중에, 아마라이오스(Amaraios)의[㈜ 성경에는 얌브리(Jrambri : !Iavmbri, 다른 본문에는 !Ambriv) ; Clerrnont- Ganneau는 오래된 Ya\’amru라는 이름에 메드바(Medeba) 가까이에서 나바타이아(Nabataean) 비문을 찾았다고 제안한다. 연로한 학자들중 몇몇은 마카비1서의 본래 히브리어는 요세푸스의 헬라어가 함축한 것처럼 아모리 (Amorite : ( )라고 확중한다. 왜냐하면 메드바(Medeba)는 민 21 : 29-31에 있는 아모리 도시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드바는 일반적으로 모압시로 알려져 있었다. ] 아들들이 메드바(Medaba)[㈜ 사해 북단의 남동쪽 약 12마일 지점에 있는 성경의 메드바(Medeba), 현지명 마다바(M\’dab\’).] 시(市) 외곽에 잠복해 있다가 그와 또 그와 함께 가는 사람들을 습격하여 그들이 가지고 가던 모든 것을 빼앗은 다음, 요한과 그의 동료들 모두를 죽여버렸다. 우리가 곧 살펴보게 되됐지만, [㈜ 고대. 13권. 1 : 4(15-21). 마카비서에서 요나단과 시몬의 복수에 대한 이야기는 요한의 살해 이야기 이후에 나오고 있다. ] 그들도 요한의 형제들의 손에 자신들이 행한 것에 상응하는 처벌을 당하였다.
3. 박키데스가 안식일에 유대인들을 공격하다[마카비 1 서9:43]
요나단이 요단의 습지대에 진을 쳤다는 사실을 안 박키데스는[㈜ 누가 요나단을 요단강을 건너서 트랜스 요르단으로 피신시켰는지 마카비 1 서와 요세푸스에는 명확치 않지만 전투가 요단 동쪽지역애서 일어났음에 를림없다. 참). 아래. 고대. 13권. 1 : 3(14). ] 안식일(the day of the Sabbath)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 다음 그는 요나단이 율법 때문에 그 날(안식일)은 싸우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는 그를 치러 나갔다. 그러나 요나단은 자신들이 강과 적들 사이에 에워싸여 있어서 뒤로 피할 수도 없기 때문에(적은 앞쪽에서 공격하고 있었고 그들의 뒤에는 강이 있었다)[㈜ 주 13을 보라. ]14) 자신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말하면서 동료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께 자신들이 승리하게 해달라고 기도 드린 후에 적과 전투를 시작하였다. 그는 박키데스를 발견하고는 많은 적들을 쓰러뜨리면서 용감하게 그에게로 접근하였다. 그는 그를 향해 자신의 오른손을 내리 치며 일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박키데스는 그의 일격을 피하였다. 그런 후에 요나단은 자기 동료들과 함께 강쪽으로 뛰어가 헤엄쳐 강을 건넜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요단강 건너편으로 도망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적들은 강을 건너서까지 그들을 쫓아오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박키데스는 자기 군사 중 약 2,000명[㈜ 마카비 1서의 대부분위 소사본애놀 1,000으로만 기록됨 (異文에는 3,000). ] 가량을 잃어버린 채 곧장 예루살렘에 있는 성채(citadel)로 돌아갔다. 그 후박키데스는 여리고(Jericho), 엠마오(Errgnaus),[㈜ 다론 본문에는 아마두스(Amath\’s)). 엠마오(Emmaus)는 현재 \’Amww\’s\’이다. 이곳은 예루살램의 북서쪽 20마일 지점에 있다. ] 벧호론(Be-th-boron),[㈜ 참). 고대. 12권. 7 : 1(289) 주 346. ] 벧엘(Bethel), 담나다(Thamnatha),[㈜ 성경에는 딤낫-세라(Timnath-Serah)이고 현재는 Khirbet Tibna이 다. Ab- el,\’GP\’, ii. 482얘 의하면 엠마오(Emmaus)의 북동쪽 약 12마일 지점에 있다. ] 파라도(Pharatho),[㈜ 어떤이들은 이곳을 성경에 있는 피라돈(Pirathon)과 현재의 Far\’ata으로 세겜(Shechem \’현재는Nabl\’s)의 남서쪽 약6마일 지점에 있는 곳과 동일한지 역으로 본다. ; 이렇게 보는 것은 \’BASOR\’, 49(1933. 2), 26에서 알브 라이트(Albright)에 의해서 의문이 제기되었다. ] 토코아(Tochoa),[㈜ 마카비 1서에는 테폰(Tephon) 또는 테포(Tepho)료 되어 있다. 이는 아벨(Abel) 다른 사람들이 성경에 있는 답푸아(Tappuah)와 현재 얘루살렘의 정복쪽 약 25마일에 있는 \’eikh Ab\’ Zarad와 동일하게 보고 있다] 가자라(Gazara)[㈜ 참). 고대. 12권. (308), 각주 378. ] 와 같은유대의 많은 도시들을 점령하고 그 도시들을 요새화하였다. 그는 먼저 그들 각 도시에다 망루를 세웠고, 그 도시들을 빙둘러 튼튼한 성벽을 아주 높게 쌓아 올렸다. 그리고는 그 안에다 군대를 주둔시켜 그 요새들로부터 출격하여 유대인들을 공격할 수있도록 하였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채를 요새화하였다. [㈜ 요세푸스는 벧술(Bethsur)을 생략하고 있다. 미는 마카비 9 : 52에 언급되어 있다. ] 그는 또한 유대(Judaea)의 주요 인물들의 아들들을 볼모로 잡아다가 그들을 성채 안에 가두어 두었다. 그는 이같은 방법으로 그들을 계속해서 붙잡아 놓았던 것이다.
4. 요나단과 시몬이 자신들의 동생 요한을 살해한 자에개 복수하다[마카비 1서 9 : 37]
이 무렵[㈜ 참). 주 12. ]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보고를 가지고 요나단과 그의 동생 시몬에게 왔다. 즉 아마라이오스(Amaraios)의 아들들이 결혼식을 하고 아랍에서[㈜ 마카비 1서는 \”가나안(Canaan)의\”로 되 어 있음. ] 유명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의 딸인 신부를 나바다(Nabatha)[㈜ 어떤 70인역 사본들과 동일 1대부분이 나다바드(Naadabath)로 되어 있다. 다른 본문에는 나바다드(Nabadath), 가바단(Gabadan)으로 표기. 아벨 (Abel),\’GP\’, 지도 viii에는 메드바의 남서쪽 2마일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트랜스요르단에 위치한다는 것 보다 \’가나안의\’로 나타내는 것이 설득력이 크다. Klein,\’EY\’66에서는 가이사랴 해변 근처의 나르바타(Narbatta) 라고 불리는 젓이 옳다. ] 시(市)로부터 e[리고 오고 있다는 것과 그 소녀와 함께 하는 행렬은 화려하고 호화로울 것이라는 보고였다. 동생의 복수를 할 가장 좋은 기회가 찾아 왔다고 생각한 요나단과 시몬은, 그들을 습격함으로써 요한을 죽인 것에 대한 복수를 가장 손쉽고도 만족하게 할 수 있다고 믿고 메드바(Medaba)를 향해\’ 출발하였다. 그리고 그곳의 산중에서 자신들의 원수들을 숨어서 기다렸다. 결혼 예식을 할 때는 보통, 신랑 신부와 그들의 친구들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앞장섰다. 그들은 앞장서서 인도하는 사람들이 보이자 매복해 있던 곳에서 뛰쳐나가 그들을 모두 죽였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장신구와 소유물들을 전리품으로 취한 후 되돌아갔다. 요나단과 시몬은 동생 요한을 죽인 것에 대해 아마라이오스의 아들들에게 이와같이 보복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 아들들과 동행했던 친구들, 그리고 그들의 아내들과 자녀들까지 약400명이나[㈜ 어떤 숫자도 마카비1서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 되는 사람들이 죽었다.
5. 박키데스가 수리아로 되돌아 가다[마카비 1서 9 : 42]
시몬과 요나단은 요단강의 습지대로 되돌아가 그곳에 머물렀다. 반면 박키데스는 주둔군들 두어 전(全)유대를 안전하게 만든 이후에 왕에게로 되돌아 갔다. [㈜ 마카비 1서 (9 : 54)는 셀류키드 제153년(=주전 16/59)에 대제사장 알키무스(Alcimus)의 죽음을 관련시키고 있다 ; 이것은 이미 요세푸스가 고대. 12권. (413)에서 언급한 것이다. ] 그 이후로 2년 동안 유대에는 평온이 깃들었다. [㈜ 마카비 1서에 의하면 2년이 평화는 알키무스 죽음 이후에 온 것이었다. ] 그러나 이 평화 덕분에 요나단과 그의 추종자들이 가장 안전하게 그 나랑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을 보고 배교자와[㈜ 참). 고대. 12권. (252) 주 292. ] 불경한 자들은 데메트리우스(Demetrius)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요나단을 붙잡기 위해 박키데스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같은 요청을 하면서 그들은 왕에게, 예기치 못하는 어느날 밤에 그들을 습격한다면, 그들 모두를 죽일 수 있기 때문에큰 어려움 없이도 요나단을 붙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왕은 박키데스를 보내 주었다. 박키데스는 유대에 오자, 유대인들 가운데 있는 자신의 친구들과 자기편 사람들 모두에게 요나단을 붙잡기 위해 편지를 썼다. 그리하여 그들 모두는요나단을 붙잡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요나단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 왜냐하면 그가 그러한 음모를 알고 자신의 몸을은밀하게 숨겼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경계하는 것은 마카비 1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사항이다. ] – 그러자 박키데스는 배신자들이 이같이 행한 것을 몹시 화내면서 자신과 왕은 속았다고 생각하고는 그들의 지도자들 중에서 50명을 잡아다가 모두를 죽여 버렸다. [㈜ 마카비 1서 9 : 61은 \’그들이 흉악한 지도자들 50명을 잡아 죽였다\’라고 되어있다. 대개의 주석가들은 이것이 요나단이 유대에서 박키데스라고 불리웠던 유대인 50명을 죽였던 것을 의미 한다고 하였다. ] 요나단은 박키데스를 두려워하여 자기 동생과 동료들과 함께 베달라가(Bethalaga)라고[㈜ 마카비 1서에는 벧바시(Bethbasi). 오에스텔레이(Oesterley), \’CAP\’는 드고아(Tekoah)의 동쪽 와디 엘-바샤(Wady el-Bassah)와 인접하여 있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최근에 Pere Abel은 이곳을 더 정확하게 드고아의 동북쪽 약 3마일 지점에 있는 Khirbet Beit-Bassa와 동일하게 보고 있다. Klein, \’EY\’, pp. 56에서는 원지명이 요세푸스에서 발견된 벧 닙산(Beth Nibshan)이었다고 제안한다(수 15 : 62). 그러나 요세푸스 저서에서 베달라가(Bethalaga)는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 하는 광야에 있는 한 마을로피신하였다. 그는 그곳에 망대를 세우고 벽을 둘러 자신을 아전하게 보호하였다. 박키데스는 이 사실을 듣자 친히 군대를 이끌고 나갔다[마카비 1서 9 : 63]. 그는 요나단에 대항하여 싸우러나가면서 그를 추종하는 유대인 협력자들까지 데리고 나갔다.그는 요나단의요새를 여러날 동안 수차례 포위 공격하였다. 그러나 요나단은 그 맹렬한 공격 앞에서도 항복하지 않았다. 요나단은 완강히 저항한 후에, 박키데스와의 싸움을 계속해 나가기 위하여 동생 시몬을 그 도시에서 몰래 떠나 보냈고 그 자신도 은밀하게 그 마을을 빠져 나갔다. 그 후에 그는 자신에게 동조하는사람들로부터 많은 군사를 모은 후,[㈜ 마카비 1서 9 : 66에는 \’그는(요나단) 천막생활을 하고 있는 오도아레스(Odoares)와 그 형제들 그리고 바시론(Phasiron)가문의 사람들을 굴복시켰다. \’ 요세푸스는 ejpavtaxen \’그가 굴복시켰다\’ 대신에 ejpevtaxen로 기록하고 있다. ] 밤중에 박키데스의 진영을 야습하여 그들 중 수많은 사람들을 살육하였다. 그리고 동생시몬에게 자기가 적을 쳐서 쓰러뜨렸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적들이 요나단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저해 들은 시몬과 그의 군대는 사기충천하여 그들도 적진 깊숙이 쳐들어가,마게도냐인들이 포위 공격할 때 사용했었던 병기들을 불태웠고, 수많은 적들을 살육하였다. 박키데스는 적들의 한 무리는 앞에서 밀고 들어오고 또 다른 무리는 뒤에서 압박해 오면서 점점 자신을 에워싸는 것을 보고는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어쩔 줄을 몰랐다. 왜냐하면 이와같은 적의 기습은 전혀 예상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역전이 되자 왕에게 자신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던 사람들에게 화풀이를 하였다. 왜냐하면 자신을 속였던 배반자들이 바로 그들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 참). 주 31. ] 그리고 그는 가능하면 그 싸움을 멈추고 명예를 손상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였다. [㈜ 또는 \’가능하다면 수치를 당치 않고서 공격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
6. 요나단과 박키데스가 화평을 이루다[마카비 1서 9:70]
요나단은 그의 마음을 알고는 그에게 특사들을 보내어 우호적인 결연을 맺을 것과 상대방에게 자신들이 잡아 가두고 있는 포로들을 돌려 줄 것을 제안하였다. [㈜ 문맥, 특히 72절에는 유대 죄수들의 귀환만을 의미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만 요세푸스는 죄수들의 교환을 언급하려고 마카비 1서 9 : 70을 취하고 있다. ] 그러자 박키데스는 이것이 당당하게 철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고는 이를 수락하고 요나단과 친선 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는서로에 대하여 싸움을 일으키지 않겠노라고 서약하였다. 포로들을 서로 교환한 후에 박키데스는 안디옥(antioch)에 있는 왕에게로[㈜ 마카비 1서 \’그의 땅으로\’. ] 되돌아 갔다. 그는 이렇게 철수한 후로는 두 번 다시 유대를 침범하지 않았다. 요나단은 자신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되자 곧 마크마(Machma)[㈜ 성경에는 믹마스(Michmash), 현재는 무크마스(Mukhm\’s). 이곳은 예루살렘의 북서쪽 약 8마일 지점이다. 참). 고대. 6권. (98)의 주. 요나단은 주전 160년에서 153년까지 7년가량 비교적 평화롭게 통치하였다. ] 시(市)에 거처를 정하여, 그곳에서 누적된 민원들을 처리하였고 사악하고 불경한 자들을 처벌하는등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