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예루살렘 시민들이 성문을 닫아버리자 폼페이가 도시를 포위하고 무력으로 함락시킨 것과, 또한 그가 유대에서 행한 다른 일들에 대하여
1. 아리스토불루스가 폼페이와의 협정을 실행하지 않아 구금되다.
그리고 나서 폼페이는 여리고 근처에서 진을 쳤는데 에서는 미드리다테스가 그의 아들이 반역을 일으킨 후 호위병에 의해 자신의 요청으로 죽었다고 한다.[㈜ 전쟁 1권.(138)에 의하자면 미드리다테스(Mithridates)의 사망 소식은 여리고 근처의 폼페이에게 이르렀다.]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종려나무와 가장 탁월한 연고(軟暠)인 오포발사뭄(opobalsamum)을 경작하였는데, 그것은 날카로운 돌로 관목들이 상처를 입게 될 때, 수액과 같이 스며나오는 것이다. 새벽에 폼페이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여리고 지방과 그 지역의 식물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전쟁. 4권.(459-475)에 나와 있다.] 그리고 아리스토불루스는 자기의 계획을 썩 좋게 여기면서[㈜ 전쟁 1권.(139)에는 그는 \’두려워 했다\’고 나와 있다.] 폼페이에게로 나아가 그에게 돈을 주고 예루살렘으로 그가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리고 폼페이에게 전쟁을 멈출 것과 그가 소원하는 대로 평화적으로 행할것을 간청하였다. 아리스토불루스가 이러한 요청을 하자 폼페이는 그를 용서하였고 가비니우스와 약간의 병사들을 보내어 돈을 받고 그 도시를 접수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약속들 중 아무것도 실행되지 않았고 가비니우스는 그 도시에 들어가지 못했으며 돈은 받지 못한 채 돌아왔다.왜냐하면 아리스토불루스의 병사들이[㈜ 다른 본문에는\’잔당들\’ 이것은 전쟁. 1권. (140)의 내용과 더욱 가깝다 ] 그 협정들이 실행되어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55-79)의 내용은 전쟁. 1권. (141-158)과 병행구이다.] 폼페이는 이 일에 대하여 크게 분노하여 아리스토불루스를 구금한 후 자신이 그 도시로 나아갔는데, 그 도시는 약한 북쪽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강하게 방비되어 있었다. 그 곳은 성전이 자리잡고 있는 넓고 깊은 협곡과 암벽으로 둘러싸여 아주 강하게 방비되어 있었다.[㈜ 전쟁. 5권.(136-141)에 나오는 예루살렘과 그 성읍의 자연스런 구분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참조하라.]
2. 아리스토불루스의 군대들이 폼페이에 맞서 저항할 준비를 하다.
그러나 그 도시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알력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들의 상황에 관하여 한마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 도시를 폼페이에게 넘겨주는 것이 최선으로보였지만 아리스토불루스를 동정하는 사람들은 그가 아리스토불루스를 죄수로 가두었기 때문에 폼페이에 맞서서 그에게 전쟁을 선포하기를 촉구하였다. 첫 행동을 개시하여 성전을 점령한사람들은 주전파들이었는데, 그들은 성전과 도시를[㈜ 서편 언덕에 위치한 상부 도시.] 연결하고있는 교량을 파괴하고 포위공격에 대비하여 스스로 준비하였다.그러나 다른 당파의 사람들은 폼페이의 군대를 받아들여 그에게그 도시와 궁전을 넘겨주었다. 거기에 폼페이는 그의 보좌관인피소를 군대와 함께 보내어 그 도시와 궁전을[㈜ 하스모네안가(Hasmonaeans)의 궁전. 참). 전쟁. 2권. (344).] 방어하게 하였고 성전에 잇대어 있는 집들과 성전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 장소들을 요새화하였다. 그의 첫번째 조치는 성전 안에 있는 사람들 을 회유하는 것이었지만,[㈜ 투키디데스를 따르는 조수(Thucydidean)의 기록에 나오는 내용(Thuc. 5. 76. 1).] 그들이 그의 제안을 듣지 않으려고 하자, 그는 벽돌로 둘러싸인 장소들을 요새화하였으며 힐카누스 는 기꺼이 모든 방면에서 그를 지원하였다. 그리고 새벽에[㈜ 다른 본문에는 (그 성읍) \’안에\’로 나와 있다.] 폼페이는 성전의 북쪽 지역에[㈜ 참). (57).여기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폼페이가 그 신전을 공략했던 것은 북쪽에서는 물론 서쪽에서도 했던 것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의 진을 쳤는데 그곳이 취약지 역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커다란 탑들이[㈜ 전쟁.에는 이 탑들에 관한 설명은 나와 있지 않다. 이것들은 신전 북서편에 있던 하스모네안의 요새(후애는 안토니아)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참). 고대. 13권.(307) 각주 396.] 있었고 참호가 파져 있었으며, 성전은 깊은 협곡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것은 다리가 파괴된 후 그 도시를 향한 쪽에 가파른 비탈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지점에서 폼페이는 수많은 노동력을 동원 하여 매일 매일 토목공사를 하였는데, 그것을 위하여 로마군인 들이 주변의 나무들을 잘라내었다. 호가 너무 깊어 어려움이 많 았지만 토성이 어느 정도 높이 쌓이게 되자 그는 두로에서 가져 온 전쟁도구들과 포위공격 기계들을 들어올려 설치하고는 석궁 (石弓)을 사용하여 성전을 때려 부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안 식일에 쉬는 것이 유대 민족의 관습이 아니었더라면 유대인들은 이것을 방해했을 것이므로 그 토목공사는 결코 끝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 율법은 전쟁을 걸어오거나 우리를 공격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스스로를 방어하는 것은 허용하고 있지만 그 밖의 것들에 대해서는 적들과 싸우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 문이다.[㈜ 참), 고대. 12권.(277).]
3. 폼페이가 예루살렘을 약탈한 일과 유대 제사장들의 영웅주의
[㈜ 고대. 14권.(64-68)의 내용에는 전쟁. 1권.(146-148)에 나오는 축어적인 병행본문 몇개만이 나온다.]
이러한 사실을 로마인들은 잘 알고 있었으며, 우리가 안식일이라고 부르는 그 날에 그들은 유대인들을 쓰지 않거나 혹은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전투를 통하여 대결하였으며, 그 대신 토목공사(토루)와 탑을 쌓아 올렸고 포위공격용의 기계들이 그 다음날 작동될 수 있도록 전진시켰다. 포위되어 공격을 받는 가운데서도 제사장들이 겅외심을 가지고 거룩한 예전들을 집례하는 일을방해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하여 사람들은 우리들이 하느님께지극히 경건하고 율법을 엄격히 지킨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예전들은 하루에 두번 즉, 아침과 제 9시에[㈜ 오후 3시. 이 매일 드리는 제사에 관하여는 고대. 3권.(237) 각주를 참조하라.] 드려지는데제사장들은 제단에서 거룩한 예전들을 집례하였고 심지어 공격을 받아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결코 아무런 예전도 빠뜨리지 않았다.그리고 실제로 그 도시가 제179회 올림피아드 때, 즉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집정관으로 있던때[㈜ 주전 64년 7월부터 63년 7월까지 속개되었던 제179회 올림피아드의 첫번째 해. 안토니우스(Antonius)와 키케로(Cicero)의 임기는 주전 63년이었다. 이 두 시기를 종합해 보면 이 성음이 포획되었던 시기는 주전 63년 상반기 였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본문에서 요세푸스가 디스리월(대략 10월) 10일인 속죄일을 의미한다면 금식일의 언급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 난해성에 따라 가장 그럴싸한 설명은 오래전 해르츠펄트(Herzfeld)에의해 제시되었다(쉬러 i . 208주 23과 라이나흐가 인용함). 금식일로 안식일을 잘못 언급한 많은 이방 작가들과 같이 본문에서 요세푸스는 스트라보(Stra)와 여타의 역사가들의 기록에서 나온 니콜라스의 설명을 보충하고 있다. 참). 스트라보 xvii. 763에서는\’\’유대인들이 모든 일을 쉬는 금식일에\’ 폼vp이가 예루살렘을 장악했다고 한다. 또한 디오 카시우스xvii 16에서는 \’크로노스(Kronos)날(안식일)에\’ 도시가 장악되었다고 한다 요세푸스가(혹은 니콜라스) 기록하듯이 그 포위가 ]째 달 3개월 지속되었다면 도시는 주전 63년 7월 함락되었을 것이다. 폼페이는 주전 63 년 봄에 작전을 개시하였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각주 77을 보라.[㈜ 우리가 전쟁. 1권. 7 : 4(149)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유대력의 3번째 달(대략 6월경)이 아니라 점령된 지 3개월. 다음 각주를 참조하라] 금식일에 공격을 받아 적들이 밀려들어와 성전에서 유대인들을 살륙하고 있을 때, 희생제로 인하여 분주하였던 제사장들은 그런 와중에서도 계속해서 거룩한 예전들을 집례하고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생명의 위협에 의해서거나 다수가 이미살해되었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달아나려 하지 않았으며, 규례들을 무시하는 것보다는 제단 곁에서 그들이 고난당하는 것을 견디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헛된 경건을 칭찬하기 위한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품페이의 공적들을 진술하는 모든 사람들에 의하여 증거되어진 진리이다. 그 사람들 가운데에는 스트라보와 니콜라스, 그리고 로마역사의 저자인 티투스리비우스도 끼어 있다.
4. 로마군인들이 성전의 방어자들을 살륙하다
그런데 공성 망치로 공격을 가하자 탑들 가운데 가장 높은 탑이흔들리더니 무너져 크게 갈라진 틈이 생기자 그들을 통하여 적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 가운데 첫째 사람은 술라의 아들인 코넬리우스 파우스투스였는데, 그는 군사들과 함께 벽을 타고 올라왔으며, 그 뒤를 이어 백부장 푸리우스가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올라왔고, 다른 편에서는 그들 사이에 또 다른 백부장인 강하고 건장한 신체를 지닌 파비우스가 올라왔다. 그리고 모든 곳에서 살륙이자행되었다. 어떤 유대인들은 로마인들에 의하여 살해되었으며, 다른 유대인들은 반대편 동족들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즉 전쟁. 1권.(150)에서 살펴 보았듯이, 반대 당파의 유대인들에 의한 살해.] 어떤 이들은 스스로 벼랑 아래로 몸을 던졌으며,[㈜ 투키디데스의 구절(Thuc. vii 44. 8). 이는 유대전쟁사에서도 나오는 병행구이다.] 자기 집에 불을 지르고스스로 불 속에 뛰어들어 죽어 갔다. 그것은 그들의 운명을 견딜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유대인들 가운데 약1,200여명이 쓰러져 갔지만,[㈜ 다른 본문에는 \’22,000명\’, 전쟁.에는 \”12,000명\”.] 로마인들은 단지 극소수 만이 죽었다.[㈜ 전쟁.에서는 \’많은 로마인들이 부상당했다\’는 사실이 첨가되어 있다.] 포로로 잡힌 사람들 가운데 한사람은 압살롬으로 아리스토불루스의 삼촌이자 동시에 장인이었다.[㈜ 참). 고대.13권.12 : 1(83).] 지성소에[㈜ 참). 고대. 8권. (71)에서는 to aJgi;on으로 칭해지는 성전 건물 자체.] 대하여 저질러진 죄악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곳은 이전에는 결코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고 보아서는 안되는 곳이었다. 폼페이와그의 병사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곳에 들어가서 대제사장이외에는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불법이 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금상(金床)이 거기 있었고 거룩한 등대와 성배(聖杯)들과 상당한 양의 향료들과 이것들 이외에도 보물 중에는 2,000달란트에 상당하는 거룩한 금전이 있었지만 그는 경건하였기 때문에아무것도 손대지 않았으며,[㈜ 키케로(Cicero)또 \’Pro Flacco\’67에서 동일하게 기록함. 그러나 디오카시우스(Dio Cassius) xxvii. 16. 4에서는 \’이 모든 것들은 약탈한 것들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무렵에 기록된 위경 솔로몬의 시편(Psalms of soomon)에는 폼페이의 약탈행위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듯하다.] 이런 점에서 그는 또한 고결한 성품을 나타낼 만한 양식으로 행동하였다.[㈜ 폼페이의 \”경건성\”과 \”고결한 성품\”에 관하여는 전쟁. 에 언급된 사실이 없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폼페이는 성전의 종들에게 성전을 청결케 하고 또한 하느님께 드리는 관례적인 제사들을 드리도록 명령하였다. 또한 대제사장직을 힐카누스에게 회복시켰는데, 그것은 여러 면에서 그가자기에게 유용하였으며, 특별히 그가 전국을 통하여 유대인들이아리스토불루스의 편에서 싸우지 못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진 해당자들에게는 참수형으로 처형하였다.폼페이는 또한 민첩하게 성벽을 타고 올라갔던 파우스투스와 다른 병사들에게 그들의 용맹성에 비견할 만한 보상을 해주었다.그리고 그는 예루살렘을 로마의 속국으로[㈜ 여기서 말하는 속국(uJpotelh\’ fovrou)은 병행본문인 전쟁. 1권.(154)에는 사용되지 않은 투키디데스식의 구문(Thuc. i.66)이다] 만들었고 그들이 이전에 정복하였던 코엘레-수리아의 도시들을 그 거주민들로부터 빼앗아[㈜ 참) 고대. 13권.(395)에 기록되어 있는 정복한 도시들의 부분 목록.] 자신의 총독[㈜ 수리아 지방의 대사. 참). 고대 14권.(76).] 휘하에 두었으며 이전에는 스스로 그렇게 높았던(고고하였던) 전국가(全國家)를 자신의 지경내에 가두어 버렸다. 그는 또한 가다라를[㈜ 참). 고대. 13권.(356). 여기에는 이 지역의 점령에 관한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이 성읍의 파괴에 대해서는 나와있지 않다.] 재건하였는데, 그것은 얼마 전에 파괴되었던 것으로서 그의 자유민인 가다라인(Gadarene) 데메트리우스(Demetrius)를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또한 그는 마리사(Marisa)와 아소도(Azotus),얌네이아(Jamnela), 아레두사(Arethusa)와[㈜ 디움(Dium)은 전쟁. 의 병행구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또다른 도시들인 히푸스(Hippus)와 스구도볼리(Scythopolis),펠라(Pella), 디움(Dium),[㈜ 이전에 고대. 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던 아레두사(Arethusa)는 목록에 나와 있는 위치로 판단해 보건데 해안에 위치한 도시였을 것이다. 따라서 북부 수리아 지방에 위치한 에메사(Emesa) 근처의 아렉투사[오늘날의 레스탄(Restan)]와는 다른 지역으로 추정된다.] 사마리아를 본 거주자들에게 돌려주었다.[㈜ 쉬러(Schurer)가 논평한 대로 우리는 이 도시의 명단에다 데가볼리(Decapolis)의 몇 도시의 이름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참). Schuer i . 299 주 25. 이 시기는 폼페이에 해방과 띠를 같이한다. 요세푸스는 여기에서 이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의 이름들만을 언급한 것이다.] 그리고 폼페이는 내지에 있는 이 도시들 뿐만 아니라 파괴되었던 이러한 도시들 외에 가사와 욥바, 도라와 스트라톤망대와 같은 해변의 도시들-이 마지막 도시는 헤롯이 웅장하게 재건하였고 항만들과 성전들로서 칭송을 받았던 도시로서 나중에는 가이사라로 개칭되었는데[㈜ 참). 고대. 15권.(331) 이하.]_을 해방시켜서 그 지방에 합병하였다.[㈜ 전쟁. 1권.(157)에서 명백히 지적하고 있듯이 수리아의 지방. 주전 63년에서 37년까지의 유대시민들의 지위와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유대 주변 지역들에 관하여는 부록에 인용되어 있는 서적들을 보라.]
5. 국가적인 재난에 대한 유대인 지도자들의 책임
[㈜ 고대. 14권. (77, 78)에 대한 전쟁.의 병행본문은 없다.]
예루살렘이[㈜ 다른 본문에는 \’예루살렘 사람들로\’ 나와 있다.] 당한 이러한 재난에 대해서, 힐카누스와 아리스토불루스는 의견의 차이를 보였던 까닭에 그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유를 잃어버렸고 로마의 속국이 되었으며 우리가 전쟁을 통해 수리아인들에게서 탈취해서 얻은 땅도 그들에게돌려주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로마인들은 우리에게 10,000달란트 이상을 거두어갔다. 또한 대제사장들 출신들이그전에 가졌던 권력과 임무는 보통사람들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이점에 대해서는 적당한 곳에서[㈜ 고대. 15권.]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한편[㈜ 고대. 14권.(79-126)과 전쟁. 1권.(157-186) 사이의 병행구에 대해서는 라쿠오이어의 책 pp.163-165를 보라.] 폼페이는 코엘레-수리아(Coele-Syria)와 유브라데강과애굽에까지 이르는 나머지 수리아 땅을[㈜ 니이제(Niese)에 의해 추정된 구문. P사본에 보면 코엘레수리아 뒤에 나오는 \’…\’와(and)\’가 생략되어 있다. 다른 사본들에 보면 \’~와 수리아의 나머지 지역\’이 생략되어 있다. 니이제의 추정은 전쟁. 1권. (157)의 내용에 의해 뒷받침 된다.] 스카우루스에게 주었다. 또한 폼페이는 2개의 로마부대도 함께 준 뒤, 길리기아(Cil-icia)를 거쳐 급히 로마로 되돌아갔다. [㈜ 폼페이는 주전 63-62년의 겨울을 소아시아에서 보냈다. 그리고 주전 62-61년 사이의 겨울이 되어서야 로마에 도착했다. 그러므로 고대. 14권. (34)에서와 마찬가지로 여 기에서도 요세푸스의 연대기가 혼돈을 일으키고 있는 듯하다.] 폼페이는 아리스토불루스를 쇠사슬에 결박한 채 그의 가족들과 함께 포로로 로마에데리고 왔었다. 아리스토불루스는 딸2명과 여러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들 중에서 알렉산더는 도망쳤으며 막내아들 안티고누스는 누이들과 함께 로마로 호송되었다.[㈜ 안티고누스(Antigonus)는 나중에 그의 아버지와 함께 로마에서 도망가 버렸다. 참). 고대. 14권.(9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