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권 제 2장 헤롯이 가이사를 기념하는 여러 도시들을 건축한 것에 대하여, 제사장들과 총독들의 계승에 대하여, 그리고 프라아데스와 파르티아인들에게 일어난 일들애 대하여

 


제 2 장




헤롯이 가이사를 기념하는 여러 도시들을 건축한 것에 대하여, 제사장들과 총독들의 계승에 대하여, 그리고 프라아데스와 파르티아인들에게 일어난 일들애 대하여




 1. [헤롯과 빌립에 의해서 도시들이 건설되다]




 이제 구레뇨는 아켈라오의 재산을 처분하였다. 가이사가[㈜ 아구스도이다. 인구조사는 주후 6년쯤에 시행된 것으로 계산될 수 인다. ] 악티움에서[㈜ 주전 31년 9월2일 이었다. 악티움(Actium) 전투의 시기는 전쟁 1권20; 4.(398)을 보라. 요세푸스는 매 4년마다 악티움에서 개최되었던 경기인 악티아드(Actiads)에 의해서 연대를 계산하고 있다. ] 안토니를 패퇴시킨지 37년째 되는 해에 처음 시행하였던 이 재산의 등록은 이 때에 완결되었다. 구레뇨는 백성들에 의해서 세워진 대제사장 요아자르(Joazar)가 권력을 남용하였기 때문에[㈜ 고대 18권. 1 : 1(3)을 참조하라.] 해임시키고, 셋(Seth)의[㈜ 헬라어 본문에는 세티(Sethi)로 되어 있다 ] 아들 아나누스(Ana-nus)를[㈜ 그는 주후 6년부터 15년까지 대제사장으로 있었고, 주후 15년에 발레리우스 그라투스(Valerius Gratus)총독에 의해서 면직되었다. (고대. 18권. 2:2.(34)) 그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대제사장 안나스(Annas)와 동일시 되는데(눅3 : 2, 요 18 : 13,24, 행 4 : 6)이 사람앞에 예수께서 첫 심문으로 끌려 가셨다. 그의 다섯 아들들은 모두 대제사장이 되었다(고대. 20권. 9 · 1(198)), 그리고 그의 사위 (요 18 : 13)인 성(姓)이 가야바(눅 3 : 2)인 요셉(Joseph)은 마찬가지로 이 심문에 참여하였다. 아나누스(Ananus)가족은 그 숫자의 많음과 부, 권력등으로 인하여 잘 알려져 있다(Bab. Talmud ,\’Pesahim\’ 57a와 Tosefta· \’Menahot\’· 13 : 18을 보라).특별히 그들의 탐욕은 랍비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Mishnah \’keritot\’ i : 7). 그리고 그들의 재산은 결국 열심당에 의해서 파괴되었다(Jerus. Peah\’ ii·; · 16과 Sifre Deut.\’ xiv : 22). 구트만(J.Gutmann)즉 \’아나노스\”(Ananos)를 보라.\’Ency. Jud.\’ ii . 1928, pp.765-766.]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고대. ·18권. 2 : 1. (27,28)은 전쟁. 2권. 9 : 1(167,168)과 병행되는 부분이 다. ] 헤롯과[㈜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를 칭한다. ] 빌립은 각기 그들의 영토를 받았는데, 헤롯은 갈릴리 전지역의 요충지로 세포리스(Sepphoris)를[㈜ 상부 갈릴리지방에 있으며, 현대의 사푸리야(Saffuriyah)와 동일한 곳으로 파악 되고 있다. 참). 자서. 3(30)과 기타 여러군데. 쉬러(Schurer) ii : 209-213을 보라.]

 요새화하고 직할도시 (Autocratoris)로[㈜ \”황제의 도시 \” 혹은 \”수도\”. Aujtokravtwr는 아구스도 칭호 중의 하나인 황제와 동일한 의미인 헬라어 이므로, 칭호 Aujtokratoriv\” (라틴어로 Imperatoria)는 아구스도를 명예롭게 한다가 될 것이다. 반면에 \”그는 그것을 자치구로 만들었다\”. 그러나 쉬러, ii : 211, 주 496에서 그 이후의 역사는, 당시 에 갈릴리의 나머지 지역이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하였다 고(자치구가 되는것 ) 밝히고 있다. ] 만들었다. 헤롯은 또다시 베다람프다(Betharamphtha)에[㈜ 성경에는 벧 하람(Beth-haram수 13 : 27)으로 되어있고, 요단의 동편에 있다. 탈무드에는 벧람다(Bethramtha)로, 유세비우스도 벧람다(Bet-hramtha)로 기록 하였다. 쉬러 ( ii ; 213-216)를 참조하라.] 성벽을 쌓아 요새를 만들고, 황제 아내의 이름을 본따 율리아스(Julias)[㈜ 아구스도의 부인인 율리아(Julia), 혹은 리비아(Livia)에 대해서는 고대. 16권. 5 : 1(139)를 보라. 유세비우스의, \’Onom. Sac.\'(라슨과 파르데이(Lar-son and Parthey) 판)pp.112-113에 보면 도시 이름을 리비아스(Livias)라했다. 존스 (A.H.M.Jones)는 \’로마 동부지역의 도시들\'(The cities of the Eastern Roman Provinces, 1937, p.275)에서 원래 헤롯이 도시 이름을 리비아를 기리기 위하 여 리비아스라고 재명명하였으며, 후에 (주후 14) 율리안이 리비아의 뒤를 잇게 되자, 명칭을 율리아스(Julias)로 바꾸었다. 이 이름은 1세기 동안에는 공식용어 로 쓰였으나, 결국 리비아스로 다시 불리어지게 되었다. ]라고 불렀다. 빌립(Philip) 또한 요단강의 근원지에서 가까운 파네아스(Paneas)에[㈜ 원래 동굴의 이름은 근처 산위의 판신(Pan, 헬라 신화에 나오는 산야(山野)와 목양의 신 -역자주)에게 바쳐진 것이었다. ] 도시를 건설하고 가이사랴(Caesarea)라고[㈜ 가이사랴 빌립보이다(Caesarea Philippi, 마 16 : 13, 막 8 27). 현대의 바니아스 (Banias)와 동일한 곳이다. 참).쉬러 ii : 204-208.] 불렀다. 그는 또한 게네사렛(Gennesa-ritis)호수의[㈜ 갈릴리 바다를 말한다] 근처에 주민들의 도움으로 도시의 면모를 갖춘 벳새다(Bethsaida)라는[㈜ 요단의 동쪽, 갈릴리 바다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벳새다와 동일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쉬러는(ii : 208)그의 주에서 율리아는 주전2년에 추방당하였으므로, 율리아-벧새다의 건설은 그때까지 계속되었던 것같다고 한 다.] 마을을 세우고, 요새화시켜 강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 도시를 황제 딸의 이름을 본따서 율리아(Julia)라고 불렀다.




2. 사마리아인들이 성전 뜰에 사람의 뼈를 버리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구레뇨와 함께 코포니우스(Coponius)가 유대의 통치자로 있을 때 한 사건이 일어났다. 나는 이제부터 이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유월절이라고 부르는 무교절 축제때 제사장들이 밤 12시 같다고 한다.[㈜ 자정이 시작될 즈음에. 참). 미쉬나 \’Yoma\’ i : 8. 이 문은 세 절기 때(유월절 오순절,장막절)만 열었다. 첫째밤이 지나고 나면 제사장들은 다음 날의 예배를 위하여서 성전을 준비하기 시작하곤 했다. 첫 닭 우는 소리가 들리면 성전은 사람들로 가득 찼으나, 성전의 문이 언제 열렸는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는다. 유월절에는, 사람들이 각자의 가정에서 유윌절양(the paschallamb)을 먹느라 부산했다. 그들은 이 양을 한밤중까지는 모두 먹어치워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성전에는 한밤중 이후에야 모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 이후에도 성전문을[㈜ 성전 언덕의 다섯개의 문이다(미쉬나,\’Middot\’ i : 3). 축제일이 되면 사람들은 성전에 올라와 머물되, 성전안으로 완전히 들어 가지는 않았다. 참). 바벨른Chagigah\’26 a.] 열어 두는 관례가 있었다. 그런데 그 문이 처음 열렸을 때, 몰래 예루살렘에 들어와 있던 몇명의 사마리아인들이 죽은 사람의 뼈들을 성전 여기저기에 흩어놓기 시작했다.[㈜ 본문에는 탈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그래서 제사장들은 유례없이 성전에서 모든 사람들을 추방하고 성전을 한층 더 철저히 보호했다. [㈜ 이 구절은 사본들에 나타나 있는대로 어려운 부분이다. 상당히 많은 주석가들은 이곳에 탈문이 있었다고 제시하고 있다. 카르코피노(J.Carcopino)는\’매장(埋葬) 의 계약위반에 대한 황제의 칙령서(Encore le rescrit imperial sur les violations de sepulture, \”Rev. hist. \’clxvi, 1931) p.90에서 전쟁.2권. 8 : 1(117)에 다음 구절을 삽입하려 한다. \”로마인들은 뼈를 흩은 자들을 죽이라고 명령하기 시작하였다. \” 카르코피노는 이 사건을 팔레스틴에서 발견된, 아구스도 통치 마지막 해 혹은 조금 더 후에 쓰여진 것으로 추측되는 헬라어 사본과 연결 시키려 한다(쿠몽(F, Cumont)에 의하여 출판됨. Rev. hist.\’clxiii, 1930, pp.241-266), 이와 같은 비문은 죽은 자들에 대한 모독이라고 해서 이미 매장된 자들의 시신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금하는 칙령이다. \”에스겔 37장의 부활과 듀라-유로포스의 그림에서의 부활\'(The Res-urection in Ezekiel xxxvii and in the Dura-Europos Paintings) \’Upp-sala Univ. Arsskrift\’, no. 11, 1948, pp.36-37에서 리센펠트(H.Rie-senfeld)는 주(註)에서 마른 뼈들의 골짜기에서의 에스겔의 이상은(37장) 선지자들에 의해서 유월절(의 중간 안식일에)에 읽혀 지도록 지정되었고, 부활신앙의 메시야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리고 유월절과의 연합을 강조한다고 한다.] 얼마후에 코포니우스가 로마로 돌아가고, 그의 후임자로 마르쿠스암비불루스가 [㈜ \”Amlbibulus\” 또는 \”Ambivius\”라고 쓸 수 있다. 그는 주후 9-12년 사이의 총독이었고, 이외의 다른 사실들은 알려져 있지 않다. ] 총독으로 부임해 왔다.[㈜ 고대. 18권.2 : 2(31, 32)는 전쟁, 2권. 9:1(167,168)과 병행구절이다. ] 그가 통치하는 동안에 헤롯의 여동생인 살로메가 죽었는데, 그녀는 율리아에게[㈜ 아구스도의 아내인 리비아(Livia)이다. 고대. 18권.2 : 1(27)을 보라.] 얌니아(Jamnia)와 그 주변 전 지역, 그리고 평지인 파사벨리스(Phasaelis)와, 종려나무가 많이 있고 최고급의 열매가 맺히는곳인[㈜ 장로 플리니(Plimy the Elder)도 아켈라이스 시대의 명성을 언급한 바 있다(\’Hist. Nat.\’xiii. 44).] 아켈라이스(Archelais)를 물려 주었다.[㈜ 얌니아(Jamnia)는 해안선을 따라 필리스티아(Phitistia)에 위치 해 있다. 파사엘리스(Phasaelis)와 아켈라이스(Archelai\’s)는 요단 계곡에 있다(참).고대. 17권. 13 : 1(340) ).] 암비불루스(Ambivulus)의 후임자로 안니우스 루푸스(Annius Rufus)가[㈜ 주후 12-15년 사이의 총독이었다라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바 없다. ] 왔고, 그의 통치기간 중에는 로마 제국의 두번째 황제인 가이사가[㈜ 아구스도이다. 여기서는 그의 통치기를 율리우스 가이사(Julius Caesar)가 죽은 주전 44년부터 그의 죽은 시기인 주후 14년까지로 잡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잡고 있는 그의 통치기간은, 택커래이가 병행구인 전쟁. 2권. 9 : 1(168)의 주(註)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약 한달 정도를 길게 잡고 있다. ] 죽은 것이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가이사는 57년 6개월 2일을 황제로 재임했는데, 안토니는 이 기간 중에 14년 동안 가이사와 더불어 권력을 누렸다. 그리고 가이사는 그의 나이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가이사의 후임자로 세번째 황제는 가이사의 아내 율리아에게서 낳은 디베료 네로(Tiberius Nere)가 되었다. 네로는 안니우스 루푸스(Annius Rufus)의 후임으로 발레리우스 그라투스(Valerius Gratus)를[㈜ 주후 15-26년 사이의 총독이었다는 사실 외에는 말려 진 바 없다. ] 유대인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라투스는 아나누스(Ananus)를 대제사장직에서 몰아내고 파비(Pha-bi)의 아들인 이스마엘(Ishmael)을[㈜ 주후 15-16년 사이의 대제사장이었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바 없다. 그러나 아그립바 Ⅱ세(Agippa H)에 의해서 주후 59년에 임명되었던 이스마엘 벤 파비(Ishmael ben Phabi, 파비외 아들 이스마엘-역자주)과 동일인물은 아닐 것이다(고대.20권.8 : 8(179)). ]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얼마 후 그는 다시 이스마엘을 해임시키고 대제사장이었던 아나누스[㈜ 주후 16-17년 사이의 대제사장이었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바 없다. ]의 아들 엘르아살(Eleazar)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1년 후에 그라투스는 또 다시 그를 해임시키고 카미드(Camith)[㈜ 주후 17-18년 사이의 대제사장이었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바 없다. ]의 아들 시몬(Simon)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그도 1년이 못되어 쫓겨나고, 이번에는 가야바(Caiaphas)라고[㈜ 아나누스(Ananus)의 사위이다. 주후 18-36년 사이에 대제사장이었다. 안나스(Annas, 아나누스(Ananus))와 가야바(Caiaphas)를 대제사장으로 언급한 누가의 진습은(3 : 2) 많은 주석가들로 하여금 안나스(Annas)가 그의 사위의 배후세력 이었다고 생각하게끔 하고 있다. 그는 예수를 심문할 때에 산헤드린공회에서 사회를 보기도 하였다(마 26 : 57). 그는 또한 요한에 의해서도 언급되고 있으나 (11 ; 49, 18 : 13, 24, 28) 마가와 누가에서는 예수의 십자가와 관련되어 연급되고 있지 않다. ] 불리우는 요셉(Joseph\’)이 뒤를 이었다. 그라투스는 11년 동안 유대를 통치한 후 로마로 갔고,[㈜ 물러가다\'(withdrew)또는 \”소환되다\”(returned) 등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

 그의 후임자로 본디오빌라도(Pontius Pilate)가 유대 총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주후 26년이었다. 그러나 아이슬러(R.Eisler)는 그의 논문 \’메시야, 예수\'(The Messiah Jesus), 1931, p.17에서 이 연대를 거부한다. 그는 막시미니안(Maximinian), \’Acta Pilati\’에 기초하여서 십자가 사건이 주후 21년에 일어 났으며, 빌라도는 주후 18년경에 총독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을 헤들리(P.L.Hedley)에 의해서 완벽하게 반박당하였다. \’Jour. of Theol. Stud.\’xxxv, 1934, pp.56-57에 나오는 \”유대의 빌라도 부임\'(Pilate\’s Arrival in Judaea)이라는 그의 논문에서 주후 17-18년 사이에 찍혀져 나온 총독기념주화가 주후 24-25년까지 계속 쓰였고, 이 주화가 완전히 새롭게 바뀐 것은 주후 29-32년 사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주후 25-29년사이에 새로운 총독이 부임하였으리 라고 믿고 있다.]




 3. 분봉왕 헤롯이 건설한 디베랴




  [㈜ 고대.18권.2 : 3(36)은 전쟁.2권.9 : 1(168)의 병행구이다. ]




 디베료(Tiberius)의 친구들 가운데 고위직을 얻은 본봉왕 헤롯은 도시를 건설하고 디베랴의 이름을 본따서 디베랴(Tib-erias)라고 불렀다. 그 도시는 게네사렛 호수 근처 갈릴리지방의 가장 좋은 지역에 건설되었다. 엠마오(Ammathus)라고[㈜ 디베랴와 가다라지방 사이에 있다. 이 명칭은 아마도 히브리어인 하마드(hamath=따뜻한(봄))에서 파생된 것일 것이다. 이 명칭이 탈무드에서도 몇차례 언급된다(예를 들어\’ Moed Katan\’ 18a). 그러나 유대의 엠마오와는 혼돈되지 않는다. ] 하는 마을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는 온천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갈릴리 사람들뿐 아니라 여러 계층의 외부인들도 거주하고 있었으며, 특히 이 사람들 중에는 행정장관도 있었다. 헤롯은 여러 지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 중에 가난한 사람도 그곳에 거주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헤롯은 많은 사람을 자유민으로 만들어주고 그들이 그 도시를 떠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매우 좋은 집도 지어 주고 땅도 주었다. 그러나 이 곳을 주거지로 만드는 것은 유대 율법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디베랴를 도시로 만들기 위해서 이곳에 있던 무덤들을 파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율법책에 보면[㈜ 민 19 ; 11-16을 보라] 무덤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7일간 부정하다고 기록되어 있다(민 19 : 11)




 4. 프라아타케스와 데스무사에 관한 이야기




  [㈜ 요세푸스가 왜 이처럼 파르티아의 일들에 정열적으로 많은 지면을 할애할까\’ 아마도 그 첫째 주요 원인은 파르티아인들에게 지배를 받았던 바벨론의 유대 공동체의 수효와 그 중요성 때문일 것이다 <고대. 18권. 9 : 1(313)>. 아르타바누스 3세(Artabanus Ⅲ, 고대. 18권. 2 : 4(48))때에 파르티아 왕조의 분열은 극에 달하였었다. 이때 아르타바누스3세는 유대 형제들인 아시나이우스와 아닐라이우스(Asinaeus and Anilaeus)가 바벨론에서 독립국가를 세울 때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주었다(고대. 18권.9 ; 3(325) )]




 이때 파르티아(Parthians)[㈜ 요세푸스가 사용한 파르티아 역사에 대한 자료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테베보이세(N.C. Debevoise)의 논문을 보라. \’파르티아의 정치역사\'(A. Political History of Parthia), 1938, p.29의 주(註)에는 요세푸스의 기술과 고전학(古錢擧), 그리고 자료들과 얼마나 잘 일치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토이블러(E. Tauuer)의 논문인 \’요세푸스에 의한 파르티아 보고\'(Die Parthernachrichten bei Josephus, 1904)도 또한 참조하라.]의 왕인 프라아테스는 그의 아들인 프라아타케스(Phraataces)의 배반으로 죽음을 당했는데 자세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참). Dio Cass. 1v. 10a, 4.] 프라아테스에게는 여러명의 아들들이 있었다. 특히 율리우스 가이사가[㈜ 아구스도] 그에게 보내준 선물들 중에 데스무사(Thesmusa)라고[㈜ 나중에 데스무사(Thesmusa)는 왕비가 되었고, 기념주화에 의해서 알 수 있듯이 후에 테아 무사(Thea Musa)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가드너(P.Gardner)위 ; \’파르티아의 화폐제도(Parthian Coinage) 1887, p.46을 참고 하라>.그러나 그녀는 왕비가 아닌 첩으로 소개되었기 때문에, 그녀의 이름은 \”여신\” 이라고 불릴 수 없었다. 고대 18권.2 : 4(42)에 나오는 사본들의 동일한 전승은 데스무사를 좋게 평가하고 있으며, 여기에서도 역시 그렇게 보인다.] 불리우는 젊은 이달리야 여인이있었는데, 프라아테스는 그녀를 첩으로 맞아들였다.[㈜ 상황으로 볼 때 \”~와 사랑에 빠지다\”라는 본문이 요구된다. 그러나 헬라어 본문에는 이 본문이 탈락되어 있는 것 같다.] 그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빠져 늘 그녀와 함께 지냈고, 그녀를 통해 프라아타케스라는[㈜ ejk Qraavtou는 잘못된 것이다 <반 헤르베르텐(H. Van Herwerden)의 \”Commentationes Flavianae Duae, \’Mnemosyne\’, 1893, p.232>. 데베보이세(Debevoise)p.143 주(註)2에서 프라아타케스(Phraataces)를 벧 아라마야의 셀류키아와 크테시폰(Seleucia and Ctesiphon of Beth Aramaya)을 통치하였던 아프라핫의 아들 아프라핫(The Aphrahat the son of Aphrahat)과 동일시하고 있다. 이는 마르 마리(Mar Mari)에 의해서도 주장된 것이다<\’Acta Martyum et Sanctorum\’, ed. p. Bedjan, I. 1890, 68, 고대. 18권. 1 : 1(17)>.] 아들을 낳았다. 그는 데스무사를 정식 부인으로맞아들이고 그녀를 명예롭게 해주었다. 데스무사는 자기가 원하는 어떤 것도 왕이 허락해 주는 상황에 이르자, 그녀가 낳은아들이 파르티아를 통치하게 해 달라고 끈질기게 졸라댔다. 그러나 프라아테스의 적자들이 먼저 없어져야만 이 일이 가능한것을 깨닫고 적자들을 볼모로 로마에 보내자고 왕을 설득했다.마침내 왕은 데스무사의 설득에 못이겨 적자들을 로마로 보냈다.[㈜ 프라아테스가 그의 네 아들들을 로마로 보낸 또 다른 이유는 일종의 볼모였다(아구스도, Res Gestae 32 : Vell Pat. ii, 94 : Suet. Aut. 21 : Tac. Ann. ii, 1) 또한 그가 그의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는 아르사키드(Arsacid)와 동맹을 맺지 않는 한 독립운동으로는 파르티아인들로 다시 되돌아오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스트라보(Strabo) xvi, 748 : 타키투스 \’연대기\’ ii : 1>.] 그러나 프라아타케스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정식으로 왕위를 계승하기까지는 너무 지루하다고 생각하고 어머니의 협조 아래 아버지에게 반역하는 음모를 꾸몄다. 그리고 일설에 의하면 어머니와도 정을 통했다고도 한다.[㈜ 주후 2년에 데스무사(Thesmusa)는 프라아타케스(Phraataces)와 함께 파르티아의 주화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데베보이세(Debevoise)는 p.149에서 프라아타케스는 데스무사와 혼인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조로아스터교(Zoroasterianism) 내부에서 다른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것에 의해서 마기승족(僧族 : 옛 바사의 한 부족-역자주)에게만 제한되었던 관습(근친간의 혼인도 이중에 하나다)이 일반 백성들에게까지도 유포되었다. 이것이 데베보이세의 견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이러한 사건에 대해서 보인 파프티아인들의 반응이 아주 지독한 것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매우 의심스럽고, 미덥지 못한 것이다. 레위(H. Lewy)는 그의 논문 \”결점 투성이인 바사 연대기의 근원\”(The Genesis of the Faulty Persian Chronology),, \’Jour. of the Am. orient. Soc.\’ 1xiv, 1944, p.211 주(註) 132에서 프라아타케스와 데스무사의 결혼 이야기와 다리우스 I세<그의 전임자인 밤비에스(Cambyses)의 먼 친척>와 캄비세스의 누이요 아내였던 아토싸(Atossa)와 그의 누이인 아르티스토네(Artystone)와의 결혼이야기를 비교하고 있다(Herodotus iii :88, vii : 69, 72).] 프라아타케스는 어머니와 간통하는 근친 상간이 그의 아버지를 살해한 것만큼이나 중한 죄이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세력을 확장하기도 전에 내란이 일어나 왕위에서 쫓겨나고 죽음을 당했다.[㈜ 주후 4년이었다. 참). 가드너(P. Gardner)의 \’파르디아의 화폐제도\'(Parthian Coinage) p.46을 보라. 아구스도의 Res Gestae 32에는 프라아타케스(여기에는 프라아테스라 되어있다)가 탄원하기 위해 로마로 도망갔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파르티아 사람들 가운데서도 귀족들이 모여 숙의한결과 왕이 없는 정부는 불안하므로 관습대로 아르사키데(Ars-acidae)가문에 속해 있는 사람 중에서 왕을 모셔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그들은 왕이 이달리야 여종과 결혼해서 자식을 낳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로들은 사람들을 보내어 아르사키데의 가문 중에 한 사람인 오로데스(Orodes)를 왕위에 추대했는데, 오로데스는 잔인한 행동을 서슴치 않고 화도 잘 내서 일반 백성들에게는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도 역시 죽음을 당했다.[㈜ 주후 6년이었다<에베보이세(Debevoise) p.151과 동일함>.] 한 기록에 의하면, 축제일 때 칼을 들고 가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칼을 들고 술을 마시다가[㈜ 또는 \”그가 탁자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 때\”라고도 한다.] 죽음을 당했다는 말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그를 사냥놀이에 유혹하여 죽였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이에 장로들은 로마로 시신을 보내어 볼모로 있는 사람들 중에 한명을 그들의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그 결과 보노내스(Vonones)가 그 형제들 중에 선택되어 파르티아로 파송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위대한 제국으로부터 왕위를 수여받을 만한자격이 있는 자로 보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야만인들에게는 변덕스러운 성질이 있는지라 그를 왕으로 추대하는것에 대해서도 모욕감을 느꼈다.[㈜ 타키투스의 \’연대기\’ ii : 2에는 파르디아인들이 보노네스(Vonones)를 혐오했던 부가적인 이유들, 즉 그의 사냥, 말타기, 파르디아인들의 축제에 대한 흥미결여, 그의 헬라 수행원들의 들것 사용을 인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외국에 볼모로 잡혀 노예생활을 하던 자의[㈜ 다른 본문에는 \”볼모를 노예의 신분과 동일하게 간주하여\”라고 되어 있다.] 명령에 순종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전시 상황에서가 아니라 평화로운 시기에 왕을 세운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또는 \”로마에 호소하는 치욕에 분개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아르사키데의 가문이면서 메대(Me-dia)의 왕인[㈜ 아트로파테네<Atropatene, 현대의 아제르바이잔(Azerbaijan)>의 왕인 아르타바누스 3세(Artabanus Ⅲ)이다. 슈르(W. Schur)는 그의 논문 \’네로황제시대의 동방의 정치\'(Orientpolitik des kaisers nero, 1923, pp.70이하)에서 타키누스의 진술을 근거로 하여 아르타바누스가 메대(Media)의 왕이었다는 요세푸스의 기술의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아르타바누스(Artavanus)를 왕으로 추대했다.아르타바누스는 이에 동의하고 군대를 이끌고 진격해 왔는데,보노내스가 그에 대항했다. 처음에는 파르디아이 백성들이 보노내스 편에 가담했기 때문에[㈜ 또는 \”다수의 파르디아인들이 아르타바누스에게 충성을 맹세 했지만\”.] 보노내스는 당당하게 전투에서 승리하고 아르타바누스를 메대의 국경에까지 쫓아 버렸다. 그러나 머지 않아 전력을 재정비한 아르타바누스는 보노내스 군을 대패시켰으며, 이에 보노내스는 소수의 부하들을 데리고 셀류키아(Seleucia)로[㈜ 티그리스(Tigris)강 서편 제방에 있는 도시로서 셀류쿠스 니카토르(Seleucus Nicator)에 의해서 세워졌으며 현재 바그다드(Baghdad)시의 남쪽으로 약간 떨어져 있다. 참). 고대. 18권. 9 : 8(372)이하.] 쫓겨 달아났다. 아르타바누스는 야만인들을 위협하기 위해서 폭도들을 무수히 살해한 후, 군대를 이끌고 크테시폰(Ctesiphon)으로[㈜ 셀류키아(Seleucia)와 바벨론의 북동부 근처 티그리스강에 있다. 현재 바그다드에서 16마일 아래에 있으며 현재의 타키 케스레(Taki Kesre)지점이다.] 철수하였다. 보노내스가 아르메니아(Armenia)로[㈜ 이 당시 아르메니아(Armenia)에는 통치자들이 계승하여 다스렸던 이후로는<마지막 통치자는 여자로서, 에라토(Erato)였다>왕이 없었다. 왕이 대부분은 단기간의 통치 이후 찬탈되었다. 참). 타키누스의 \’연대기\’ ii : 304와 Aug. \’Res Getae\’ 27.] 피해간 동안 아르타바누스는 파르티아를 지배하였다. 보노내스의 본래 의도는 아르메니아를 차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 로마로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디베료 황제는 보노내스를 겁쟁이로 보았고, 또 파르티아 왕이 자기에게 사신을 보내어 만일 보내누스를 원조해 준다면 전쟁도 불사할것이라고 위협을 해서 보노내스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이리하여보노내스는 왕위를 지킬 만한 수단도 없었고,[㈜ 다른 사본에는 \”또다른 왕국을 찾이 아니하고\”] 또 니파테스(Niphates)근처에[㈜ 아르메니아의 산들은 타우루스산맥(Taurus Chain)의 한 갈래인 마시우스<Masjus, 현재의 카라디예-다그(Karadjeh-Dog)>에 속해 있다. 이 산맥은 현재의 투르압딘(Tur Abdin)에 근접해 있다. 참). 보에트거(G. Boettger),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성경 지형-역사 사전\'(Topographisches-historisches Lexicon zu den Schriften des Flavius Josephus), 1879, pp. 193-194. 그런데 니파테스(Niphates)가 알려지지 않은 아르메니아의 지도자 이름일 수도 있다. 이 경우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아르메니아 귀족집단과 함께 있는 니파테스\”.] 살던 아르메니아의 귀족들이 아르타바누스와 연합했기 때문에 그는 수리아의 총독인 실라누스(Silanus)에게 피신하여 있게 되었다[㈜ 보노내스(Vonones)는 아르메니아의 왕좌를 잘 지켰으나 결국 주후 15년 혹은 ] 보노내스는 로마에서 교욱을 받은 것 때문에 수리아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었다. 16년에 퇴위하였다. 타키누스의 연대기 ii : 4에 의하면 보노네스가 항복한 것이 아니라 크레티쿠스 실라누스(Creticus Silanus)가 그를 불러서, 그의 감독하에 그의 왕좌나 명예를 유지하도록 허락하여 주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 이후의 보노내스의 삶에 대해서는 타키누스의 \’연대기\’ ii ; 58, 68, Suet. \’Tib.\’ 49를 참조하라.] 한편, 아르타바누스는 자기 아들 중 하나인 오로데스(Orodes)에게 아르메니아를 주었다.[㈜ 어떤 학자들은(\’Prosopog. Imp. Rom\’, I, 1155[pp.229-230]와 ii. 102[p.439)]이 본문이 위치가 잘못되었다고 추측한다. 즉 이 본문은 실제로는 아르타바누스가 그의 아들인 오로데스(Orodes)를 아르메니아로 보낼 때인 주후 35년에 해당되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토이블러(E. Taubler, \’요세푸스에 의한 파르디아의 역사\'(Die Parthernachrichten bei josephys pp. 9-10)는 고전학적(numismatic, 古傳學)이유로 이것에 반대한다. 오로데스는 15또는 16년부터 18년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에 게르마니쿠스(Germanicus)는 아르메니아인들 속에서 성장한 폰투스의 제노(Zeno of pontus)를 아르메니아인들이 받아들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아르탁시아스(Artaxias)의 이름으로 왕위에 올랐다. 참). 타키투스의 \’연대기\’ ii : 56 Suet. \’Gaius 1. Strabo xii. 555.]




 5. 콤마게네 왕인 안티오쿠스의 죽음




 이즈음 콤마게네(Commagene)의[㈜ 콤마게네(Commagene)에 대하여는 전쟁. 5권. 11 : 3(461)의 주(註)를 참조하라.] 왕인 안티오쿠스(Antio-chus)가 죽었다. 그래서 군중들과 귀족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백성들과 귀족들은 각기 사신을 보내어 그들의 요구를 말했는데, 재산을 많이 가진 귀족들은 그 지역을 로마의 한주(州)로 편입시켜 주기를 요구했고 반면에 군중들은 그들 조상들이 대대로 해오던 방식대로 왕이 통치해 주기를 요구했다.[㈜ 타키투스의 \’연대기\’ ii : 42는 콤마게네에서의 의견의 분열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마의 법에 복종하기를 원하였으나, 소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왕의 통치를 받기 원하였다.]




 [게르마니쿠스의 죽음]

 로마 원로원은 동방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투표를 통해 게르마니쿠스(Germanicus)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주후 19년이었다.] 그가 동방에도착해서 개혁정책을 거의 완수했을 때 다른 이들이 서술한 대로[㈜ 게르마니쿠스의 동부지역에서의 임무에 대해서는 타키누스의 \’연대기\’ ii : 43을 보라. 원로원의 법령포고는 게르마니쿠스로 하여금 지방 총독들을 면직시킬 수 있는 권력을 주었다. 피소(Piso)의 게르마니쿠스에 대한 적대이야기는 타키누스의 \’연대기\’ ii : 43 이하에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나키누스의 피소가 게르마니쿠스를 독살하였다고 직접적인 표현을 쓰지 않고 있지만, 그의 글을 쓰는 양식을 고려해볼 때 그러한 사실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연대기\’ ii : 69).] 피소(Piso)에 의해서 독살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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