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권 제 5장 분봉왕 헤롯이 아랍왕 아레타스와 전쟁을 하였으나 패전한 것과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하여, 비텔리우스가 예루살렘에 올라온 것에 대하여, 아그립바와 대헤롯의 후손들에 대하여

 


제 5 장



분봉왕 헤롯이 아랍왕 아레타스와 전쟁을 하였으나 패전한 것과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하여, 비텔리우스가 예루살렘에 올라온 것에 대하여, 아그립바와 대헤롯의 후손들에 대하여



1. 분봉왕 헤롯이 아레타스의 딸과 이혼하고, 이복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다



 이때 페트라(Pera)의 왕인 아레타스(Aretas)와[㈜ \’연대기\’ xvi. 294에는 그가 아라비아(Arabia)의 왕으로서 오보다스(Obodas)를 계승했다는 것과 그의 이전의 이름이 아이네아스(Aeneas)였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헤롯 사이에 다툼이 생겼다. 분봉왕 헤롯은 아레타스의 딸을 아내로 맞아 오랫동안 함께 살았었다. 그런데 헤롯이 로마로 가게 되었을때 그의 이복형제인 헤롯(Herod)의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복동생 헤롯은[㈜ 헤로디아(Herodias)의 남편의 이름은 마가복음 6장 17절의 모든 사본에는 빌립(Philip)이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누가복음 3장 19절의 가장 좋은 사본과 마태복음 14장 3절의 D사본과 라틴역본에서는 그 이름이 생략되어 있다.(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다른 사본에는 마가복음으로부터 그 이름이 제공되었다.). 이곳에서와 \’연대기\’ xvii. I. 148에 나온 그 이름에 대한 요세푸스의 권위는 대부분의 권위자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지는데, 그는 마가복음의 본문을 헤로디아의 남편과 양자 사이를 혼동한 것에 기인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양자의 이름은 실제로 빌립이었던 것이다. 택커래이(Thackeray)의 \’Selections from Josephus,\’ pp.191~192를 보라.] 대제사장 시몬의 딸에게서 낳은 아들이었다. 헤롯은 거기서 이복형제 헤롯의 아내인 헤로디아(Herodias)를 사랑하게 되었다. 헤로디아는 이 두형제의 형인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의 딸이었으며, 아그립바(Agrppa)왕의 누이였다. 헤롯은 뻔뻔스럽게도 헤로디아에게 청혼하였다. 그녀는 이청혼을 받아들이고 헤롯이 로마로부터 돌아오는 대로 그를 따라가겠노라고 맹세했다. 그러나 그녀는 한가지 조건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헤롯이 현재의 아내인 아레타스의 딸과 이혼을 하라는 것이었다. 헤롯은 그녀에게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을 하고로마로 향했다. 로마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헤롯에게, 헤롯이헤로디아와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이미 전해 들은 그의 아내는이 사실을 모른 체하고 자기를 아레타스 영토와 헤롯 영토의 경계선인[㈜ 글루이크(N. Glueek)는 \”Explorations in the Land of Ammon,\” \’Bull. of the Am. Sch. of Orient. Res.\’ 1xviii, Dec. 1937, p.15에서 그 지역의 고고학적인 탐사에 근거해서, 요세푸스가 마카이루스(Machaerus)의 위치를 아레타스(Aretas)와 헤롯의 영역 사이의 경계선상으로 잡은 것은 대충 옳았지만, 그 위치를 수 마일 떨어져 있는 아레타스의 영역 안에 놓은 것은 잘못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마카이루스(Machaerus)로[㈜ 사해의 동쪽에 있던 이 요새에 대한 설명을 보려면, 전쟁. 7권. 6 :1(164)이하를 보라] 보내줄 것을[㈜ 또는 \”그녀를 호위할 것을.\”] 요청했다. 그녀가 그 목적에 대해서는 함구하였기 때문에, 헤롯은 그녀가 꾸미려는 음모를 모른 채 그녀가 마카이루스로 가는 것을 허락했다. 그녀는 자신의 도착 날짜보다 좀 더 일찍, 그 당시 아버지의 통치를 받고 있던[㈜ 필사본에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속한 그에게로\”라고 되어 있다.] 마카이루스(Machaerus)에 사신을 보내 자기가 그 곳에 도착하는 즉시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군대장관의 호위를 받으며 아랍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바타이아의(Nabataea) 비문에는, 존스(Jones)의 \’Cities\’, p.92에서 지적된 것처럼, 공직자들이 에파르코스(e[parco\”)와 스트라테고스(strathgov\”)라는 명칭과 함께 언급되어 있다. 헬라어 단어가 나바타이아어로 그렇게 음역된다는 것은 그 제도가 본래 외국의 것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존스는 나바타이아의 왕들이 그들의 왕국을 헬라적인 모델을 중심으로 성공적으로 조직하려고 한 후에, 지방의 촌장들에게 \”다스리는 자\”라는 칭호를 주었다고 설득력있게 추측한다. 아마도 스트라테고스들의 행정장관 위원회와 유사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 위원회는 대개 다섯병의 구성원으로 되어 있으며, 수석 스트라테고스가 의장을 맡는데, 소 아시아와 그의 다른곳의 헬라 도시들을 다스렸다.<매기(Magie)의 \’Roman Rule, I. 643!~644를 보라>. 쿠크(G. A Cooke)는 \’Textbook of North-semitic Inscriptions,\’ 1903, pp.247~248에서, C.I.S. ii 169에서 언급된 두 명의 스트라테고스가 아레타스의 딸을 도와주었을 가능성을 제안한다. 왜냐하면 마카이루스(Machaerus)의 요새는 아마도 그들 중의 한명의 지역인 야암루(Yaamru)에 있었기 때문이다. 북부의 요단 동편지역 테고스를 언급하는 또 하나의 비문은 모리(L. Mowry)에 의해서 \’Bull. of the Am. Sch of Orien. Res.\’ cxxii, Dec. 1953, p.34~!41에서 언급되었다.] 그녀는 서둘러 아버지 아레타스에게 도착하여 헤롯이 계획하고 있는 일련의일들을 모두 고해바쳤다. 이 사건은 아레타스와 헤롯이 다투는결정적인 이유가 되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아레타스는 가발리스(Gabalis)[㈜ 필사본에는 가말라(Gamala)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지역은 빌립의 이전의 영토에 속해 있었으므로, 아레타스와 헤롯 사이의 논쟁거리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쉬러(Schurer)는 갈라디티스(Galaaditis, 길르앗 : Gilead)으로 교정했는데, 이 교정은 지리학적으로는 가능하지만 고문서학적으로는 가발라(Gabala)만큼 필사본의 기록에 근접하지는 못한다. 이 가발라 지역은 모압(Moabitis)의 남쪽 지역인 이두매(Idumaea)지역에 위치한다. 참)> 고대. 2권. 1 : 2(6).] 지역에서 국경 문제로 시기가 불편한 터였다.그래서 두 나라는 모든 군대를 동원하고 군대장관들을 앞세워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의 결과는 아레타스가 승리했는데, 헤롯의 군대가 패배한 원인은 전에 빌립의 영토에서 넘어와 헤롯의 군대에 편입된 군사들 중 일부가 헤롯을 반역하여 적진 분열을일으켰기 때문이었다. 헤롯은 사람을 보내어 디베료 황제에게이 사실을 상세히 보고하였다. 이 일을 전해 들은 디베료는 크게분노하여 아레타스를 적대자로 간주하고 진노하였다. 이에 그는 비텔리우스에게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가서 가능하면 아레타스를 생포하여 잡아오고 여의치 않으면 그의 목을 베어서라도 가져오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2. 헤롯의 패배는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벤 것에서 시작하다



  [㈜ 비록 그락츠(Gractz)가 요세푸스는 세례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 없이 요한을 세례자라고 부르기를 원치 않았으며, \”세례\”라는 용어를 위한 다른 형태의 용어를 사용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해서 그의 최근판들에서 고대. 18권. 5: 2(116-119)의 유명한 구절을 가짜라고 간주할지라도 대체로 세례자 요한의 살해에 관한 이 구절은 진정성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모든 움직임을 설명하지 않으며 그리고 세례를 나타내는 확정된 헬라어 단어가 없었으므로 그는 세례라는 단어의 두 가지 다른 형태의 단어들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 중의 일부는 헤롯의 군대가 패배한 것을 세례자(the Baptist)라고 불리던 요한의 목을 벤 헤롯에 대한 하느님의 확실한 응징이라고 생각했다. 세례자 요한은 선한 사람이었고,[㈜ 슬라브역 요세푸스는 그것의 가치가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계속적으로 의문시되고 있지만, 요한을 거칠은 사람(!avgrio\”)으로 언급한다. 아이슬러(Eisler)는 교회가 부주의하게 거칠은 사람(!avgrio\”)을 선한 사람(ajgaqov\” )으로 바꾸었다고 한다(그의 책, p.248).] 유대인들을 의로운 삶으로 인도하고, 사람들에게 공의를행할 것과 하느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도록 훈계하며, 세례로 연합하게 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례에 의해 연합되는 것\”이라는 번역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요한이 집단 세례를 옹호했다는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헤롯은 억울하게 그를처형한 것이다. 요한은 세례가 하느님께 용납되어지기 위해서는앞서 말한 선한 행실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요세푸스는 세례를 가리키기 위해 이 구절에서 두 가지의 다른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밥티스모스(baptimov\”)와 밥티시스(bavptisi\”)이다.] 요한은사람들이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한 수단으로서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행동으로 인해 영혼이 이미 깨끗함을 입은 것처럼 몸의 정화를 위해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다른 무리들이[㈜ 이러한 다른 사람들의 정체는 수수께끼이다. 아마 의롭지 못한 사람들을 언급하는 것일 것이다. 아이슬러는 그의 책 p.247에서, 라틴어 번역을 따라서, \”군중들\”이란 용어로 수정을 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란 용어는 요한의 설교의 선동적인 영향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기독교인이 변경시킨 것이라고 주장한다.] 요한의 고상한 설교를 듣고 고취되어[㈜ 또는 \”고양되다\”(uplifted)이다. \”몹시 기쁘게 되다\”(overjoyed)로 변형될 수도 있다. 아이슬러는 그의 책 p.246에서 필사본의 기록인, \”그들은 자극되었다\”(aroused)라는 기록을 옹호한다. 그는 요세푸스에게서도 발견되는 \”그들은 몹시 기쁘게 되었다\”라는 유세비우스의 기록은 교회가 요한을 백성들을 혁명으로 선동하는 사람으로서보다는 종교적인 개혁자로서 생각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진 수정이라고 설명한다. 쉬러(Schurer, I.438 주2)와 니이제(Niese)는 요세푸스가 백성들을 그렇게 움직였던 사람을 동정심을 가지고 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유세비우스의 수정을 받아들였다.] 이미 모여든 수많은 군중들과 합세하자, 헤롯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복음서들은 왜 헤롯이 요한의 활동에 경계를 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언급하지 않는다. 마가복음 6장 17!~21절에 따르면, 요한은 헤롯이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에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리고 살로메(Salome)가 요한의 머리를 요구했다는 마가복음 6장 22~28절의 내용은 요세푸스에는 없다. 그러나 요한이 죽게 된 이유에 대해서, 복음서들과 요세푸스의 기록 사이에는 필연적인 모순같은 것은 없다. 기독교인들은 그가 지도자에 대해서 항거했다는 도덕적인 책임을 강조하기를 원했고, 반면, 요세푸스는 그가 헤롯시대에 일으켰던 정치적인 두려움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요한의 설교가 자칫하면 구름떼같이 모여든 그처럼 많은 사람들을 자극하여 소요를[㈜ \”폭동\”(revolt)으로 변형될 수도 있다. 아이슬러는 그의 책 p.248에서 필사본의 기록인 \”선동(sedition)이 유세비우스의 기록인 \’폭동\'(revolt)보다는 혁명을 나타내는데 더 명확한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기독교인들이 \’그들이 자극되었다\'(!hvrqhsan)과 \’선동\'(stavsei)를 본문에서 유지하기 위한 주요한 논증은 그것들이 필사본의 전승에 의해서 지지된다는 것이다.]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헤롯의 눈에는 백성들의 모든 행위가 마치 요한때문에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헤롯은 어려운 국면에 빠져 나중에 후회하는 것 보다는 사전에 요한을 제거하는 것이더 낫겠다고 생각하고 그를 없애기로 결심하였다. 결국 요한은 헤롯의 이 의심하는 성격 때문에 앞에서 언급했던 마카이루스(Machaerus)에 있는 감옥에 갇혀있다가 거기서 죽음을 당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헤롯의 군대가 패배한 것은 요한의 죽음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3. 디베료의 사망 소식을 듣고 비텔리우스는 아레타스를 치려던 계획을 포기하다



 비텔리우스는 아레타스를 치기 위해서 중무장한 2개 군단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경무장한 보병과 기병을 예비로 그들에게배속시켰다. 비텔리우스는 로마령에 속한 왕국으로부터 행진하여 페트라(Petra)로 진격하고 톨레마이스(Ptolemais)를[㈜ 톨레마이스(Ptoloemais)는 오늘날 하이파(Haifa) 만(彎)의 북쪽 끝부분에 위치한 악카(\”Akka)라는 곳인데, 이곳에 대한 설명을 보려면 전쟁. 2권. 10 : 2(188-191)을 보라.] 점령하였다. 비텔리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유대땅을 통과하려 했으나, 유대의 고위층들이 비텔리우스를 만나 그의 군대가 유대땅을통과하지 말도록 요구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군기에는 유대 율법이 허용하지 않는 형상(image)들이 그려져 있으므로, 그들의땅을 통과하는 것을 용인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유대인 편에서 유대(Judaea)에 부여된 군기에 그려진 형상을 반대한 것에 대해서는 고대. 18권. 3 : 1(55-59)을 보라.] 이에비텔리우스는 그들의 간절한 부탁을 받아들여 그의 행군 계획을바꾸어 대평원(the Great Plain)을[㈜ 대개 사마리아(Samaira)와 갈릴리(Galilee) 사이의 지역을 언급한다(예를 들면, 고대. 5권. 1 : 22(83). 그러나 때로는 요단 계곡을 가리키기도 한다<예를 들면, 전쟁. 4권. 8 : 2(455-458)>. 이곳에서는 어느 곳을 의미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통과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는 동안 그 자신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명절을 맞아 분봉왕 헤롯과 또 그의 친구들과 함께 하느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그는 유대 군중들로부터 특별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거기서 3일을 유하면서 요나단(Jonathan)을 대제사장에서 물러나게 하고 그의 형제인 데오필루스(Theophilus)를 그 자리에 앉혔다. 4일째 되는 날, 그는 디베료 황제의 죽음을[㈜ 디베료(Tiberius)는 주후 37년 15일에 사망했다.] 알리는 전갈을 받고 백성들로 하여금디베료 황제의 뒤를 이은 가이우스(Gaius)황제에게도 충성을다하겠다는 맹세를 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군대를 해산시켜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명령하였다. 이는 정권이 가이우스에게로 넘어갔으므로, 이제 그에게는 군대를 일으켜 전쟁할 권한이없어졌기 때문이다 한편, 비텔리우스의 군대가 원정온다는 소식을 들은 아레타스는 그의 군대가 결코 페트라로 진입할 수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에게 보고된 바에 따르면,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이 죽을 것인데, 전쟁을 일으키라고 명령한 자가 죽든지 아니면 그 명령에 따라 군대를 소집하여 전쟁을 수행할 비텔리우스가 죽든지간에 둘 중에 한 사람은 죽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본문은 의심의 여지가 있다. 그리고 나는 해석에 있어서 페터슨(Hans. Petersen) 교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hjv ejf!oJnv으로 되어 있는 필사본들은 해석될 수가 없다. 은 단지 \”~에 대항하여\”라는 것만을 의미할 수 있다. 그리고 로마인들은 페트라(Petra)로부터 끌어내지는 않았던 사건인, 그 자신의 죽음의 가능성을 아레타스(Aretas)가 미리 예고하였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은 희박하다. ejf!oJnv을 \”~를 위하여\”라고 번역하여서 헤롯(Herod)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hvkaiv는 소문자에 있어서 혼동되기 쉬운 것들이므로 페터슨 교수는 kaiv(and)라는 것은 디베료나 비텔리우스 중의 한 명에 죽음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제안한다.] 결국 디베료가 죽게 되자 비텔리우스는 안디옥(Antioch)으로 철수하고말았다. 한편,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의 아들 아그립바(Agr-ippa)는 왕실에서 몇가지 이권을 얻기 위해[㈜ 이것이 재정적인 수단을 언급하는 것인지 아니면 권세나 기회를 언급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디베료 황제가 죽기 약 1년 전에 로마로 갔었다.[㈜ 또는 \”황제와 몇몇의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서\”라고도 할 수 있다. 병행구절인 전쟁. 2권. 9 : 5(178)에서 우리는 아그립바(Agrippa)가 방문한 이유는 분봉왕 헤롯을 고소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나는 헤롯과 헤롯 가문의 특성에 대해 보다 자세히 설명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역사를 서술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며 또한 하느님의 섭리를 잘 말해주는 산 증거가 된다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즉 아무리 후손이 많을지라도 하느님의 도우심을 향한 인간의 경건한 자세가 없으면 그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을 헤롯과 그의 가문이 잘 보여 주었던 것이다. 특별히 우리가 주목할 것은 헤롯이 병으로 죽고 난 100년 사이에 그렇게 많던 헤롯의 자손들이 불과 몇 명 남지 않고 모두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그들이 당한 불행이 무엇인지를 배움으로써 인류에게 던져주는 커다란 도덕적 교훈을 얻게 될 것이다. 최고위직에서 권력을 누렸던 아그립바(Agrippa)에 대한 이야기를말한다면 더 큰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그립바는 보잘것 없는 낮은 위치에서부터 출발하여 모든 사람이 그를 알아볼정도로 놓은 자리에 올랐으므로, 그는 기고만장하여 그에게 주어진 부와 권력을 마음껏 누렸던 사람이었다. 나는 앞에서 이문제에 대해 잠시 언급한 적이 있으나[㈜ 고대. 17권. 1 : 2, 3(12-22).] 여기서는 이를 좀더자세히 언급하고자 한다.



4. 헤롯가(家)의 계보



  [㈜ 헤롯의 가계(家系)에 대해서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의보다 자세한 부분을 보라.]



 헤롯왕은[㈜ 오직 이 구절(고대. 18권. 5 : 4(130, 133, 136)에서만 헤롯에게 \’대왕\'(oJ mevga\”)이라는 칭호가 주어졌음을 지적할 가치가 있다. 이 칭호가 비문이나, 동전, 또는 요세푸스에 있어서 다른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에발트(H. Ewalt)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Geschichte des Volkes Israel), iv, 1867, p.546에서 \’대제\'(oJ mevgav\”)이라는 칭호는 헤롯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의 아들들과 비교해서, \”장자\”(the elder, 라틴어로는 maior)라는 것을 가리킨다고 그럴 듯하게 추측을 한다. \”장자\”로서 oJ mevga\”가 사용된 것에 대해서는 고대. 18권. 6 : 1(143)의 \”장자 드루수스\”(Drusus the Elder)를 참조하라.] 힐카누스(Hyucanus)의 딸인 마리암메(Maria-mme)를 아내로 맞이하여 두 딸을 낳았다. 그 중의 하나인 살람프시오(Salampsio)는 그녀의 사촌이면서 헤롯 형제의 아들인파사엘(Phasael)과 결혼했는데, 이 결혼은 그녀의 아버지가성사시켰다. 또 다른 딸인 키프로스(Cypros)도 역시 사촌지간이면서 헤롯의 누이 살로메(Salome)의 아들인 안디바(Ant-ipater)와 결혼했다. 살람프시오 파사엘은 안티파테르, 알렉산더 그리고 헤롯 등 세 아들과 알렉산드라(Alexandra)와 키프로스(Cypros)라는 두 딸을 두었다. 키프로스의 남편은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인 아그립바였다. 알렉산드라의 남편은 키르로스의 티미우스(Timius)였는데 그들은 자녀가 없었다. 아그립바 키프로스는 두 아들과 세 딸을 낳았는데, 두 아들의 이름은 아그립바와 드루수스였고, 세 딸의 이름은 베레니케(Berenice)와 마리암메(Mariamme), 그리고 드루실라(Drusilla)였다. 이들 중에서 드루수스는 청년이 되기 전에 죽었다.[㈜ 니이제(Niese)는 이 문장의 끝부분에 하나의 공백이 있음을 지적하는데, 그 이유는 요세푸스가 살람프시오(Salampsio)와 파사엘(Phasael)의 자손을 살람프시오 의 딸인 키프로스(Cypros)와 결혼을 하였던 아그립바(Agrippa) 형제들 속에 적어 넣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요세푸스가 아그립바의 아버지인, 아리스토불루스(Aristoblus)의 가족에 대해서 단편적으로 언급하기를 원치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요세푸스가 파사엘과 살람프시오 자손들의 이름을 정리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고대. 18권. 5 : 4(138)이, 요세푸스가 파사엘과 살람프시오의 직계가족 이름들을 결론짓는 고대. 18권. 1 :3(13)그의 뒤에 와야할 가능성을 제안한다. 그러나 이렇게 고대. 18권. 5 : 4(133-138)에서 본제를 벗어나 지엽적인 것으로 흐른 것은, 요세푸스가 고대. 18권. 5 : 4(131, 132)에서 키프로스의 남편인 아그립바를 언급했고, 이제는 후자의 가족을 언급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근친상간이 많이 일어나고 헤롯의 가족내에서 이름들이 자주 되풀이되므로 혼동될 수가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의 족보는 바라기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다.] 아그립바는[㈜ 헬라어 본문으로부터 이 사람은 고대. 18권. 5 : 4(132)에서 언급된 아그립바, 즉 키프로스의 남편인 아그립바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아그립바는 형제 드루수스(Drusus)가 있는 반면에 본문에 나오는 아그립바에게는 헤롯과 아리스토불루스(Atistobylus)라는 이름의 형제들이 있다. 그러므로 본문의 아그립바는 대헤롯의 아들인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이다. 헬라어에서의 변화는 뜻밖의 것처럼 보이며, 아마도 그곳에는 하나의 공백이 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분명하다.] 그의 형제 헤롯과 아리스토불루스와 모두 함께 아버지의 휘하에서 성장하였다.[㈜ 아리스토불루스를 가리킨다. 참). 전쟁. 1권. 28 : 1(552). 이곳에는 그의 자손이 기록되어 있다.] 코스토바르(Costobar)와 헤롯의 누이 살로메의 딸인 베르니케와 헤롯왕의 아들인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들도[㈜ 필사본에는 \”헤롯의 이 아들들, 대헤롯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여러 명의 헤롯 중에서 그 이름이 누구를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유리는 고대. 18권. 5 : 4(136)에 이르러, 대헤롯의 아들인 헤롯에 대한 언급이 처음으로 나타나기 전까지는 대헤롯의 아들 헤롯에 대한 어떤 언급도 볼 수 없다. 발췌본의 위치가 바뀐 것은 라틴역본에 있어서 단어들의 순서에 의해서도 지지되는데, 완전한 의미를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 언급은 대헤롯의 아들 즉 키프로스의 남편 아그립바의 아버지인 아리스토불루스를 가리킨다.] 함께 자랐다. 이들은 내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고대. 16권. 11 :7(394).] 아리스토불루스가 그의 형제 알렉산더와 함께 아버지 헤롯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 때까지 유아로 남아 있었다. 그들이 성인이 되어아그립바의 형제인 헤롯은 헤롯왕의 딸인 올림피아스(Olmpi-as)와 헤롯왕의 조카인 요셉(Joseph)사이에서 낳은 딸인 마리암메와 결혼하였다. 그 후 그는 마리암메를 통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은 아리스토불루스(Aristoblus)라 하였다. 아그립바의 또 다른 형제인 아리스토불루스는 에메사(Emesa)의[㈜ 오론테스(Orontes)의 동편 연안에 있는 수리아(Syria)의 어느 도시나 지역을 말한다.] 왕 삼프시게라무스(Sampsigeramus)의 딸인[㈜ 참). 고대. 19권. 8 : 1(338-341).] 오타페(Jotape)와[㈜ 매커디(G. Macurdy)는, \”Iotape\”, \’Jour. of Rom. Stud\’ xxvi, 1936, p.40에서 메대 사람 요타페(Jotape)는 삼프시게라무스(Sampsigeramus)와 콤마게네(Commagene)의 안티오쿠스 Ⅳ세(Antiochus Ⅳ)의 처제인 요타페(Jotape)의 할머니였다고 제안한다.] 결혼했다. 그들은 요타페(Jotape)라고 하는 같은 이름을 가진딸을 두었는데, 그녀는 농아였다. 지금까지는 헤롯의 부계(父係) 후손을 살펴보았다. 다음은 헤롯의 모계(母係) 후손들을 살펴보겠다. 헤로디아는 헤롯왕과 대제사장 시몬(Simon)의 딸인 마리암메 사이에서 태어난 헤롯과 결혼하여[㈜ 마가복음 6장 17절에 언급되어 있는 헤롯(빌립)이다.] 살로메라는[㈜ 우리는 마가복음 6장 22절에 언급되어 있는 헤로디아(Herodias)의 딸의 이름을 살로메로 알고 있다.] 딸을 낳았다. 그녀를 낳은 헤로디아는 유리 조상들의 생활양식을 비웃기라도 하듯 남편의 이복형제인 헤롯(Herod)과 또 다시 결혼함으로써 살아있는 남편의 곁을 떠났다. 헤롯은 당시 갈릴리 지방의 분봉왕이었다. 그녀의 딸인 살로메는 헤롯의[㈜ 대헤롯의.] 아들이자 드라고닛(Trachonitis)의 분봉왕인 빌립(Philip)과 결혼했다. 빌립이 자녀없이 죽자, 아그립바의 형제인 헤롯의 아들 아리스토불루스가 그녀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낳았는데, 헤롯 아그립바 그리고 아리스토불루스가 그들이다. 이것이 파사엘(Phasael)과 살람프시오(Salampsio)의 계보이다. 안티파테르의 아내 키프로스는 딸을 낳은 후, 자기의 이름을 본떠 키프로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녀는 알렉사스(Alexas)의 아들인 알렉사스 헬키아스(Ale-xas Helcias)와 결혼하여 딸을 낳았는데, 그녀를 다시 키프로스(Cypros)라고 불렀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대. 18권. 5 : 4(131).] 안티파테르의형제인 헤롯과 알렉산더는 자식없이 죽었다. 헤롯 왕의 아들이면서도 아버지에 의해 죽음을 당한 알렉산더는 갑바도기아왕인 아르켈라우스의 딸과 결혼하여 알렉산더(Alexander)와 티그라네스(Tigranes)라고 하는 두 아들을 두었다. 아르메니아의 왕인 티그라네스(Tigranes)는 로마로부터 고소당한 끝에[㈜ 타키누스는 \’연대기\’ vi.40에서 이러한 고소에 대해서 언급한다.] 자식없이 죽었고, 알렉산더에게는 그 형 티그라네스(Tigranes)와 이름이같은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네로(Nero)황제의 명령에 따라 아르메니아의 왕이 되기 위해 파송된 인물이었다.[㈜ 타키투스는, \’연대기\’ xiv. 26에서 티그라네스(Tigranes)는 네로(Nero)에 의해 왕좌에 오르도록 선택되었다는 것을 언급한다. 타키투스는 티그라네스가 볼모로서 로마에 오랫동안 머무르는 것은 그에게 비참한 굴종을 주었으며 로마인의 선택에 의해 그들이 파르티아의 지배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아르메니아인에 의해서 그가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덧붙인다.] 이 티그라네스에게는 알렉산더라고 하는 아들이 있았는데 그는 콤마게네(Commagene)의 왕인 안티오쿠스의 딸 요타페와 결혼했다. 베스파시안(Vespasian)황제는 이 알렉산더를 길리기아(Cilicia)에있는 케티스(Cetis)의[㈜ 필사본의 기록은 잘못된 것이다. 다음의 세 가지 중의 하나가 적합할 것이다. 에르네스티(Ernesti)가 수정한 \”islit\”(Elaiussa-Sebaste : Wilhelm의 \’Arch. Epigr. Mitth.\’ 1894, p.5를 보라), 또는 빌헬름의 \”Cietis\”(타키투스의 \’연대기\’ xii.55에서 길리기아의 야만족으로 묘사된 Clitae와 동일시 될 수 있는 타키투스의 \’연대기\’ vi.41에서 언급된 Cietae족에 대한 언급) 또는 빌헬름의 \’Cetis\'(죤스의 \’Cities\’, p.438 주. 30에서 받아들여진 것).] 왕으로 임명했다. 그후 알렉산더의 후손들은 날 때부터 물려받았던 유대교의 삶의 양식을 버리고 헬라 전통으로 삶을 바꾸었다. 한편 헤롯왕의 나머지 딸들은 모두 자식없이 죽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지금까지 내가 살펴본 헤롯의 후손들 가운데는 아그립바 대왕이 왕위에 오를 당시까지 살아 있었던 자들도 있었다. 지금부터는 아그립바에 대하여 살펴보겠는데 수많은 어려움이 놓여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떻게 이를 극복하고 마침내 가장 놓은 지위와 권력을 손 안에 넣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밝히고자 한다.



이 글은 카테고리: TN-catholicdictionary-C1, 신학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