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권 제 9장 아그립바가 죽은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아그립바 Ⅱ세가 어리고 유능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글라우디오가 어떻게 유대와 전왕국을 다스리는 총독으로 쿠스피우스 파두스를 보냈는지에 대하여

 


 제 9 장



아그립바가 죽은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아그립바 Ⅱ세가 어리고 유능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글라우디오가 어떻게 유대와 전왕국을 다스리는 총독으로 쿠스피우스 파두스를 보냈는지에 대하여



1. 아그립바가 죽은 후에 일어난 일들



 이것이 아그립바왕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참). 병행구, 전쟁. 2권. 11 : 6(220).] 아그립바 왕은17세인 한명의 아들[㈜ 또다른 아들 드루수스(Drusus)는 청년이 되기 전에 죽었다(고대. 18권. 5 : 4(132)).] 아그립바와 세명의 딸을 남겨 놓았다. 그들중 한명인 16세의 베레니케(Berenice)는 숙부인 헤롯과[㈜ 칼키스(Chalcis)의 통치자.] 결혼했고, 결혼하지 않은 나머지 두딸인 마리암메(Mariamme)와드루실라(Drusilla)는 각각 10살과 6살이었다. 마리암메는 헬키아스(Helcias)의[㈜ 여러 사본들에는 Chelcias이지만 고대. 20권. 7 : 1(140)에서는 그 이름이 Helcias로 나옴.] 아들인 율리우스 아르켈라우스(Archelau-s)와[㈜ 참). 고대. 10권. 7 : 1, 3(140, 147). 요세푸스가 자신의 \’유대전쟁사\’ 복사본을 팔았던 사람들 중의 한명으로 그를 지명했던 아피. 1권. 9*51)을 보라.] 드루실라는 콤마게네(Commagene)의 왕 안티오쿠스(Antiochus)의 아들 에피파네스(Epiphanes)와 결혼하기로 아버지와 약속했었다.[㈜ 비록 에피파네스가 혼인을 성사시키려고 아그립바와 만났지만 에피파네스가 유대교로 개종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혼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그립바왕의 죽었다는 소식이 알려지게 되자 가이사랴(Caesarea)와 세바스테(Sebaste)의[㈜ 사마리아.] 주민들은 그의 은혜를 망각하고 가장 적대적인 방법으로 행동했다. 그들은 고인이 된 왕에게 언급하기를 불쾌할 정도로 모욕을주었다. 왕의 군사였던 상당수의 군사들은 집에서 나와 아그립바왕의 딸들의 동상을[㈜ 아그립바 만큼 경건한 사람이 자신의 딸들의 상을 세웠다는 것은 주목할만 한 것 같다. 참). 고대. 129권. 7 :3(331) 그로나 Schurer, I : 1901, p.161에서는 아그립바의 주화에도 동일한 불일치가 있다는 것을 주목하고 있는데,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주조된 주화들은 어떤 상도 없는 반면에 다른 도시의 주화들은 아그립바나 황제의 상이 있기 때문이다.] 매음굴로 가져갔다. 그들은 그것들을지붕 위에다 세우고, 너무 추잡하여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한온갖 욕설을 하였다. 더구나 그들은 공공장소에서 누워서 모든주민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다. 화환을 두르고 기름을 바르면서 그들은 카론(Charon)에게[㈜ 하계(下界)에 있는 스틱스(Styx)나 아케론(Acheron)강을 가로지르는 신화에 나오는 사자(死者)의 사공.] 제주(濟酒)를 부었다 그리고왕의 죽음을 축연의 축배로 바꾸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자신들을 관대하게 대해 주었던 아그립바왕뿐만 아니라 분에 넘치는 비용으로 도시를 건설하고 항만과사원을 건축했던 그의 조부 헤롯왕을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참). 고대. 15권. 8 : 5(296-298).]



 2. 아그립바 Ⅱ세가 어리다는 이유로 쿠스피우스 파두스가 유대 총독으로 임명됨



 고인의 아들 아그립바는 그때에 로마에 있는 글라우디오 가이사의 왕궁에서 양육되고 있었다. 아그립바왕이 죽었다는 소식과 세바스테아 가이사랴의 주민들이 그에게 숱한 모욕을 주었다는것을 듣고 가이사는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고 배은망덕한 그의 부하들에게 분노하였다. 따라서 가이사는 당장 아그립바 Ⅱ세를보내어 그 왕국을 통치하게 하기로 결심하였다. 동시에 그와 맹세한 협약이[㈜ 글라우디오가 로마의 공화광장에서 아그립바와 행한 중대한 조약과 관련된 것임.] 지속되어 지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아그립바Ⅱ세는 자신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던 자유민들과 그의 친구들의 거부로 인해 통치가 좌절되었다. 그들은 아직 그의 나이가 어리고, 소년기도[㈜ 헬라어 어린이(pai\’\”)로 사용된 용어는 16세의 사람에게는 거의 적절치 않다. 그는 실제로 meirakivon, \’풋나기\’였다.] 거치지 않았고, 행정적인 업무를 감당하기가 불가능한 아이에 불과하므로 왕국을 다스리는 크고 막중한 일을 맡기는 것은 위험한 일이며, 심지어 어른에게도 왕국은 감당하기 어려운 직무라고 말했던 것이다.

 가이사는 그들의 요청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쿠스피우스 파두스(Cuspius Fadus)를 유대와 전왕국의 총독으로 급파했다.[㈜ 주후 44년.] 가이사는 아그립바왕과 분쟁이 있었던 마르수스(Marsus)가 아그립바왕의 수도에[㈜ Hudson의 교정에 따르면 \”자신의 왕국 안으로\”임. 즉 글라우디오는 마르수스(Marsus)를 아그립바의 후계자로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아그립바의 죽은 후의 명성을 예우하였다.] 들어가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고인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우선 가이사는고인을 모욕할 뿐만 아니라 아직 살아있는 아그립바왕의 딸에게 과도한 공격을 한 가이사랴와 세바스테의 주민들을 견책할 것을 파두스(Fadus)에게 단호하게 명령했다.

 한편 가이사랴와 세바스테 출신의 사람들로 구성된 기병대대를[㈜ 세바스테의 군대는 요세푸스<참). 전쟁. 2권. 3 : 4(52)각주 26, 그리고 고대. 20권. 6 : 1(122)>와 비문(Schurer, I, p. 주. 51)에서 자주 언급되었다. 그 군대와 가이사랴의 군대는 한 사단으로 구성되었고 가이사랴에 함께 주둔하였다.] 폰투스(Potus)로[㈜ 500명이나 1000명에 달하는 라틴어 ala(기병대대)를 가리킴. 이 기병대대는 여기서와 같이 등록되어 있는 고향을 가리키는 명칭을 지닌다.] 보내었다. 그리하여 5개의 보병대와[㈜ 일개 보병대는 500-600명의 병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5개 보병대는 총 2500-3000명의 병력에 달한다.] 함께 그곳에서 근무하도록 하고 수리아에 있는 로마군단으로부터 적당한 수의 군인을 그들의 지역에 보충하도록 병적에 올렸다.그러나 그 군대는 명령받은 대로 이동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절을 보내어 글라우디오 황제를 진정시켜서 유대에 계속해서 남아있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장차 이들이 플로루스(Florus)[㈜ 64(65)년의 행정장관. 참). 고대. 18권. 1 : 6(25), 20권 11 : 1(252-258) 전쟁. 2권. 14 : 2(277)이하.] 시대에 전쟁의 씨앗을 뿌림으로써 유대인들에게아주 커다란 재난의 원천이 되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앞으로 간략하게 언급되었지만[㈜ 세바스테(Sebaste)인들의 배제에 관한 이야기는 요세푸스의 현존 작품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H. Petersen는 \”요세푸스의 실제 작품과 요세푸스의 것이라고 보여지는 작품,\” \’Am. Jour. of Philol\’. 1xxix, 1958, pp.273-274에서 요세푸스가 자신의 자서전에서 약속하였던 이 작품과 다른 작품을 완성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요세푸스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요세푸스가 아마도 자신의 계획을 변경하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이유로 베스파시안(Vespas-ian)은 왕좌에 오른 후 그들을 그 영토 밖으로 쫓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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