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권 제 4장 이자테스가 그의 신하들에게 배반당하고 아랍인들과 싸우게 되었으나 하느님의 섭리로 구출된 것에 대하여

 


 제 4 장



이자테스가 그의 신하들에게 배반당하고 아랍인들과 싸우게 되었으나 하느님의 섭리로 구출된 것에 대하여



1. 이자테스의 형 모노바주스와 그의 친척들이 유대교로의 개종을 계획하다



 이자테스의 형 모노바주스(Monobazus)[㈜ 미쉬나, \’Yoma\’ iii. 10에는 그가 후에 예루살렘 성전을 위해 후한 선물, 즉 속죄일(the Day of Atonement)에 사용되는 용기들을 위한 황금 자루를 선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와 그의 친척들은이자테스가 하느님께 대한 경건으로[㈜ 발췌문은 \”그리고 그의 모든 길에 있어서 마음의 선함\”을 추가한다. 그러나 본문과 다음 단락에서 발췌문이 추가한 것들은 니이제(Niese)가 3권 서문에서 지적했듯이 삽입된 것이 분명하다.] 만인으로부터 크게 존경받고 있음을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버리고 유대의 풍습을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발췌문은 \”그들은 이 계획을 완전히 수행했다\”는 것을 추가한다.] 글나 그들의 그러한 행위는 이자테스 신하들 특히 고관들은 매우 불쾌하였고 그들에대한 분노를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고관들은 비밀스런 음모를 세우고 그들을 처벌할 적당한 기회를 얻고자 하였다. 따라서 고관들은 아랍의 왕 아비아(Abias)에게 편지를 보내어 만일아비아왕이 이자테스왕을 대항하여 원정한다면 거액의 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심지어 이자테스왕이 자신들의 종교적 예배를 증오하기 때문에 이자테스왕을 처단하고자 한다고 단언하였다.그래서 맨 먼저 이자테스왕을 버릴 것을 아비아왕과 약속하였던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맹세로써 서로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하였고 아비아왕이 서둘러 이러한 계획을 실행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아비아왕은 그들의 요구에 응하여 전장으로 많은 군대를 보내어 이자테스를 향하여 행군하게 하였다. 맨 먼저 군사들이 근접 전투를 할 때에 고관들은 마치 자신들이 극도의 공포에 질린 것처럼 적들로부터 등을 돌려서 달아났다. 그러나 이자테스는 이 일로 당황하지 않았고, 고관들이 자신을 배반했다는 사실을 알고서 진지로 돌아와서는 그 문제를 조사하였다. 이자테스왕은 아랍왕과의 공모에 가담했던 자들이 누구라는 것을안 즉시 혐의 있는 자들을 처단했다. 이자테스왕은 다음날 전투를 다시 시작하여 대부분의 적들을 살해하였다. 이자테스왕은 또한 아비아왕을 추적하여 아르사무스(Arsamus)라는 요새로그를 몰아 넣고 맹렬하게 포위 공격하여 그 요새를 점령했다. 그리고 그 요새에 있던 적지 않은 전리품을 탈취한 후 아디아베네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자테스왕은 아비아왕을 생포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아비아왕은 자신이 사방으로 완전포위된 것을 깨닫고 자결했기 때문이었다.



 2. 파르티아 왕 볼로게세스(Vologeses)도 이자테스를 공격하도록 설복당하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심으로써 아디아베네의 고관들은 비록 첫 번째 계획에서 실패했지만 그들은 조용히 있지 못하고 또 다시 파르티아 왕 볼로게세스(Vologeses)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자테스왕을 살해하고 파르티아계의 다른 유력자에게 왕권을 이양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자테스왕이 선조들의 법을 폐기하고 이방의 풍속을 받아 들였기 때문에 이자테스왕을 증오한다고 말하였다. 파르티아 왕이 이러한 소식을 듣고 이자테스왕과 대담하게 전쟁을 하였는데 이 전쟁에 대한 어떤 정당한 구실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서신을 보내어 부친이 이자테스왕에게 선사한 영예스런 특권을 되돌려 줄 것을 요구했고 그 사항을 거절할 경우에는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위협했다. 이러한 소식을 접하고서 커다란 곤경에 처하게 되었는데 이자테스왕은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을 파르티아 왕에게 양도하게되면 자신을 겁쟁이라고 비난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비록파르티아 왕이 그러한 영예를 되돌려 받는다 할지라도 그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자테스왕은 삶의 위험에 처할 때마다 자기를 보호해 주신 하느님께 위탁하기로 결심했다. 이자테스왕은 하느님을 자신의 중요한 원조자로 존중하고 그의 자녀들과 아내들을 매우 견고한 요새에 피신시킨 후 성(城)에다 곡식을 비축하였고 또한 작전상 건초와 풀은 태워 버렸다. 그리고 이자테스왕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전열을 가다듬고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파르티아 왕은 예상했던것보다 빨리 보병과 기병의 큰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왜냐하면파르티아 왕은 매우 서둘러서 행군했기 때문이었다) 아디아베네(Adiabene)와 메대(Media)의 경계인 강에 둑을 쌓았다. 이자테스는 6,0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멀지 않은 곳에 진을 쳤다.그 때 파르티아 왕이 보낸 사신이 이자테스에게 와서 파르티아왕의 지배영역이 유브라데(Euphrates)강에서 박트리아(bac-tria)에[㈜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북쪽과 러시아(Russia)투르케스탄(Turkestan)에 있음.] 이를 정도로 광활하다는 것과 파르티아 왕에게 속한 백성이 얼마나 되는지를 이야기했다. 또한 그는 주인에 대해 배은 망덕할 때는 처벌받아야 한다고 이자테스왕을 위협했고 이자테스왕이 섬기고 있는 하느님은 파르티아 왕의 권력이 자신보다 강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하느님이 만인보다도 더 강력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자테스왕은 그에게 이렇게 대답한 다음 하느님께 탄원하였고 땅에 엎드려져 낭패의 증거로그의 머리에 재를 뿌렸다. 그리고 그의 아내들과 아이들도 같이 금식하였다. 그리고 나서 이자테스왕은 하느님께 부르짖으면서 말하기를 \”오 나의 주이시며 나를 주관하시는 하느님! 만일 내가 당신의 선하심을 헛되이 의뢰하지 않았다면[㈜ 리챠드(Richards)와 슈트(Shutt)는 \”나는 당신의 선하심에 동반자가 되어 왔다\”로 수정한다. 페터슨(Petersen)교수는 \”나는 당신의 선하심을 옹호해 왔다\”라고 제안한다.] 그리고 당신만이 주이시며 만물의 지배자이심을 내가 바르게 믿고 있다면 지금 나를 도우셔서 나를 위해서 뿐 아니라 당신의 권세에 대한 적들의 무례한 행위에[㈜ \’초판(editio princeps)은 \”그리고 호언장담하는 말에 벌벌 떠는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인다. 이자테스의 기도는 산헤립(Sennacherib)에 의해 공격받고 있을 때 했던 히스기야(Hezekiah)의 기도(왕하 19: 15-19)와 유사한데, 이방인들이 벌받지 않고 하느님을 공격하거나 조롱하지 않도록 하느님을 나타내시기를 애원했음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산헤립(왕하 19 : 36)과 볼로게세스 둘 모두 얼마 후에 유대 왕에 대한 공격을 하지 않고 떠나게 되었다.] 대해서도 나를 적들로부터 보호해 주소서. 적들은 당신을 대항하여 자만하고 방자한 혀를 놀리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탄원하였다.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 바로 그날 밤 볼로게세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신을 받았는데 그것은 다하이(Dahae)와 사카이(Sacae)의[㈜ 이 스구디아의 유목민 부족들은 고대. 19권. 4 : 4(100)에도 나온다.] 큰 군대가 그를 경멸하면서 고국으로부터 장거리 여행을 떠나 원정하여 파르티아를 황폐화 시켰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그래서 볼로게세스는 어떤 시도도 해보지 못하고 되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이자테스왕은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파르티아의 위협으로부터 구원될 수 있었다.



 3. 이자테스와 헬레나가 죽어 예루살렘 부근에 매장되다



 오래지 않아 이자테스는 55세의 생애를 살면서 24년간을 통치하고 그 생을 마감하였다. 이자테스왕은 24명의 아들과 24명의딸이[㈜ 성경과 탈무드 전승에 있어 완전 수(a round munber)로서의 \’24\’에 관해서는 긴즈버그(L.Ginzberg)의 \’Legends of the Jews,\’ vii, 1938, p.484의 색인을 보] 있었지만 그의 형 모노바주스가 자기의 뒤를 이어 왕국을 계승하도록 명하였다. 그렇게 해서 형에게 보답하려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부친이 죽은 후 자기가 없는 동안 자신을 도와충성스럽게 왕국을 지켜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자테스의모친 헬레나는 그렇게 신실했던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큰 비애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장자가 왕위를 이었다는 소식은 헬레나에게 위안이 되었다. 따라서 헬레나는 서둘러 모노바주스에게 가서 아디아베네에 도착했다. 그러나 아들보다 더 오래 살아 있지는 못하였는데 연로함과 슬픔의 고통이 무거운 짐이 되었던 것이다. 긴즈버그는 여러 예(例)들 중, 시편을 작곡하고 그것들을 성전에서 부르도록 위임받은 고라의 24후손들을 인용하고 있다. \’24\’에 대한 다른 예들은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내리셨던 스물 네 번(혹은 스물 두 번)의 축복들, 요셉이 감옥에서 지냈던 24일, 목재(cedar) 24종, 솔로몬 왕권을 넘어서는 24포도나무, 애굽인들을 괴롭힌 24가지의 질병, 이스라엘이 포로로 끌려가기 이전에 분열된 24분파, 변절자를 신뢰할 수 없다고 보는 기간인 24세대등이 있다. 이 목록에 왕이 자기 아들 결혼 축제에 랍비 유다(Judah)에 의해 쓰여진 240,000,000데나리온이 첨가 되어야 한다(바벨론 \’Nedarim\’ 50b). 아들들과 딸들의 동일한 숫자에 관해서는 30명의 아들들과 30명의 딸들을 두었던(삿 12 :9) 베들레헴의 사사 입산(Ibzan)을 참조하라.[㈜ \”그러나 아들보다…되었던 것이다\”라는 절은 단지 한 사본, 즉 암브로시아(Ambrosian) 사본에서만 발견되는데 그곳에는 지운 흔적이 있다. 니이제(Niese)는 자기 판(版) 3권, p.33의 머리말에서 그것은 진본이 아니지만 암브로시아 사본이 XVIII-XX권에 대해서는 분명 가장 좋은 사본이며, 누구든지 그것을 쉽게 부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모노바주스는 동생 이자테스의 뼈 뿐만 아니라 모친 헬레나의 뼈를 예루살렘으로 가져 가서 모친이 세운피라미드(pyramid)에 묻게 했다. 피라미드는 세개였으며[㈜ 아마 헬레나와 그녀의 두 아들, 이자테스(Izates)와 모노바주스(Monobazus)를 위한 것일 것이다. 헬레나의 \”기념비들\”은 전쟁. 5권. 2 : 2(55), 4 : 2(147)에 언급되어 있는데 그녀의 무덤은 전쟁. 5권. 3: 3(119)에서는 한 이정표로서 주목된다.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이 피라밋들을 왕들의 무덤으로 보는데, 이 피라밋에서 솔시(F.de Saulcy)가 1865년에 시체를 담고 있는 개봉되지 않는 석관(石棺)을 발견했는데, 그 시체는 공기에 노출되자 부스러지고 말았다. 석관 위에 적힌 비문은 아람어(Aramaic)나 팔미레네(Palmyrene)어 문자가 포함되어 있엇는데, 그 단어들은 \”여왕 헬레나\”를 의미하였다. 클라크(N>P>Clarke)는 \”Helena\’s ] 예루살렘으로부터 3퍼얼롱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그것들에 관해서는 후에 설명하겠다. Pyramids,\” \’Pal. Explor, Quart.\’1xx, 1938, pp.88-89에서 피라밋들을 왕들의 무덤으로 보는 것을 반대한다. 왜냐하면 이 곳은 다메섹의 관문(the Damascus Gate)으로부터, 즉 헤롯의 문(Herod\’s Gate)으로부터 약 4.5퍼얼롱이 되며(헤롯의 문으로부터 요세푸스가 분명히 측정했다), 반면에 본문에서 요세푸스는 그 거리가 3퍼얼롱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클라크는 그 거리가 잘 알려져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한다. 그런데 석관 위의 비문이 헬레나가 왕들의 무덤에 묻혔음을 명확히 하려 했으면 왜 1.5퍼얼롱이 틀리는지 묻는다. 클라크는 p.103에서 티투스(Titus)가 예루살렘의 세 번째 성벽을 공격하기 전에, 그는 헬레나의 피라밋들을 포함해서 그 벽 앞의 전 지역을 평평하게 만들었으며, 전쟁 후에는 헬레나의 친척들이 그 여왕을 왕들의 무덤으로 이장(移葬)했다고 본다. 클라크에 의하면 헬레 나의 무덤을 언급하고 있는 파우사나이스(Pausanias, viii 15.5)는 그때 피라밋을 본 것이 아니라 왕들의 무덤을 본 것이라고 한다.[㈜ 요세푸스가 66년에 있었던 혁명에<전쟁. 2권. 26 : 2(520), 4권. 9 : 11(567), 6권. 6 : 4(356)> 참여한 모노바주스 가족에 대한 짧은 언급을 기억하고 있지 않으면, 그러한 설명은 요세푸스의 현존하는 작품들에서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피터슨(Petersen)은 앞 글 pp.273-274에서 요세푸스는 그 약속을-고대. 20권. 5 : 4(114), 7 : 3(147), 그리고 아마 자서 11(53)에도 나오는-지키려고 했었으나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변명(apologia pro vitasua)을 표현하려는 그의 열망 때문에 그의 원래 계획을 수정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자서전은 우리가 보는대로 처음부터 변명하려는 듯이 보이고 그 약속들을 수행하려는 계획의 어떤 증거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요세푸스는 분명히 자서에서 그것이 나중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 약속들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주제에만 몰두했다. 우리는 타키투스의 \’연대기\’ xv. 1,xv.14로부터 모노바주스 통치하의 사건들에 관한 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그곳에는 티그라네스(Tigranes)에 대항하기 위한 원조를 위해 파르티아 왕 보로게세스(Vologeses)에 대한 그의 호소가 기록되어 있는데, 티그라네스는 로마가 아르메니아(Armenia)를 통치하도록 임명한 자로, 62년에는 아디아베네(Adiabene)의 영토를 약탈하고 있었다. 탈무드는 \’Menahot\’ 32b에서 모조바주스의 집 식구들은 너무 경건해서 메주자(Mezuzah)를 지니고 다녔고, 그들이 머무는 여관에서는, 그것이 그처럼 일시적 거주지에는 필요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세워두었다. 모노바주스의 통치 후 얼마 안되어 아디아베네는 트라얀(Trajan)에 의해 정복되었고 앗수르 지역을 로마의 일부분으로 만들었다. 탈무드 문헌에는 (예\’Shabbath\’ 68b) 여러번 모노바즈(Monobaz)라고 불리는 랍비 아키바(Rabbi Akiba)의 2세기의 제자들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아키바는 일반적으로 모조바주스의 후손으로 간주되었다. 참). 예, B.J.Bamberger, \’Proseltism in the Period\’, 1939, 228.]



이 글은 카테고리: TN-catholicdictionary-C1, 신학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