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권 제 5장 드다와 갈릴리 유다의 아들들과 유월절에 유대인들이 당한 재난에 대하여

 


제 5 장



드다와 갈릴리 유다의 아들들과 유월절에 유대인들이 당한 재난에 대하여



 1. 거짓 선지자 드다(Theudas)가 파두스에 의해 처형당하다



 파두스(Fadus)가 유대의 총독이었을 때 [㈜ 참). 고대. 19권. 9 : 2(363), 1 : 1(8), 1 : 2(14).] 드다라고 하는[㈜ 참). 행 5 : 36.] 어떤 마법사가[㈜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govh\”라는 용어는 고대 헬라 문헌에서는 마술사나 요술쟁이(나중에는 협잡꾼이나 사기꾼)을 가리킨다.<참). 예, 헤로도투스 iv. 105는 스구디아족의 이웃이었던 네우리족들(the Neuri)이 마법사(govhte\”)일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일년에 한번 늑대로 변한다고들 하기 때문이다.> 그 용어는 70인역(Septuagint)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도시데우스(Dositheus)와 소시파테르(Sosipater)의 손에 빠졌던 티모데우스(Timotheus)가 그들이 자기를 풀어주지 않으면 자신의 수중에 있는 그들의 부모와 형제들을 해칠 것라고 위협하면서, 많은 꾀로(meta; pollh\’\” gohteiva\”) 그들을 다루었다는 기록이 마카비 2서 12 : 24에서 발견된다. govh\”라는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는 딤후 3 : 13에서 유일하게 사용되는데, 모든 믿는 자들은 박해를 당하게 될 것임을 말하면서,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gohte\”)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에 나타난다. 필로(Philo)의, \’Spec. Leg.\’ I : 315에는 그 용어가 거짓 예언자라는 의미로, 그리고 profhvth\”(예언자)의 정반대어로 사용된다 : \”만일 자신을 예언자의 이름과 용모로 숨기고,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어떤 사람이 여러 도시들에서 인정된 신들을 예배하라고 우리를 이끌면, 그의 말을 들어서는 안되며 예언자의 이름으로 속임을 당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의 예언과 말한 것들은 자기가 만들어낸 거짓들이며, 그러한 사람은 예언자가 아니라 속이는 자(govh\”)이기 때문이다.\” 킷텔(Kittle)의 \’Theologisches Worter buch zum Neuen Testament\’에 나오는 델링(Delling)의 s.v. goh\”를 보라.] 있었는데 그는 많은 무리를 꾀어서[㈜ 행 5 : 36에 의하면 약 400명,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요세푸스를 인용했다는 견해가 마침내 크렝켈(M. Krenkel)의, \’Josephus und Lucas\’, 1894d서 제기되었고, 슈키델(P.W.Schmiedel)의 \”Theudas\”, ency. Bibl.\’ iv. 1903, pp.5051-5036과 버킷(F.C.Burkitt)의 \’The Gospel History and Its Transmission\’, 1906, pp. 106, 108에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토레이(C.C. Torrey)가 \’Composition and Date of Acts\’, 1916, p.71에서 그리고 태커레이(H.St. J. Thackeray)가 \’Selections from Josephus\’ 1919, p.194에서 올바로 평가하고 있는 것처럼 요세푸스가 아닌 다른 자료를 194에서 올바로 평가하고 있는 것처럼 누가는 요세푸스가 아닌 다른 자료를 이용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누가는 숫자에 있어 정확한 반면, 요세푸스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름들이 일치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지만, 드다(Theudas)라고 불리는 두 다른 사람이 언급되고 있을 가능성도 물론 분명히 있는 것이다. 또한 헤들램(A.C.Headlam)이 \”Theudas\”, \’Hastings\’ Dict. of the Bible, iv, 1903, p.750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처럼 요세푸스와 사도행전 사이에는 연대적인 모순이 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의 드다에 대한 언급은 가말리엘(Gamaliel)이 주후 37년 이전에 했어야 하는 연설에서 발견되는 반면에, 요세푸스에 의해 언급된 반란은 주후 45년이나 46년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또한 20권. 5 : 2(102)에서 요세푸스는 드다의 사건을 자세히 말한 뒤 거의 즉시 갈릴리 유다(Judas the Galilaean)의 \’아들들\’의 십자가 처형을 언급하지만, 가말리엘은 드다 이후 갈릴리 유다가 인구조사 시기에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불일치로 인해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에서 언급된 드다는 요세푸스가 말하는 드다가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슈미텔이 p.5051에서 지적하듯이 드다라는 이름은 상대적으로 흔하지 않은 이름으로, 사도행전에서 가말리엘이 인용하는 드다는 주요한 혼란을 야기했음에는 틀림없다. 그 예는 어떤 효과를 지니는데, 요세푸스가 그것을 지나쳤을 것 같지는 않다.] 요르단(Jordan)강으로 따라 오도록 하였다. 드다스는 무리들에게 자신은 예언자이며 자신의 명령으로 강을 갈라서 쉽게 강을 건널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말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드다의 말에 현혹되었다. 그러나 파두스는 유대인들이 드다의 무모한 시도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기병을[㈜ 500명 아니면 1,000명. 참) 고대. 19권. 9 : 2(365).] 보내어 그들을 공격하였다. 뜻하지 않게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고 그들중 많은 사람들은 생포되었다. 기병들은 또한 드다를 생포하여 참수(斬首)하였고 그의 머리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왔다.[㈜ 행 5 : 36에 의하면, 드다 자신도 살해되었고 그의 추종자들은 흩어졌다.] 이것이 쿠스피우스 파두스

 그 후에 디베료 알렉산더(Tiberius Alexander)가[㈜ 철학자 필로의 조카. 약 46-48년의 행정 장관, 전쟁. 2권. 6 : 6(220)에서, 쿠스피우스 파두스(Cuspius Fadus)처럼, 알렉산더도 유대 관습에 참견을 하지 않음으로 국가를 평화롭게 유지했다고 요세푸스는 말한다. 알렉산더는 후에(63년) 아르메니아에 있던 코르불로(Corbulo) 밑에서와 (타키투스, 연대기, xv : 28), 이집트의 장관으로서<참). 전쟁. 2권. 15 : 1(309)와 18 :7, 8(492-498))> 봉사했다. 베스파시안(Vespasian)이 황제로 선포되자, 알렉산더는 황제에게 충성을 서약할 군단과 백성을 요청했다<전쟁. 4권. 10 : 6(616, 617)). 후에 그는 티투스(Titus)밑에서 군대 사령관이 되었다(전쟁. 5권 1 : 6(45, 46)등).] 파두스의(Cupius Fadus)의 통치 시기에 유대인에게 있었던 일이었다.



 2. 디베료 알렉산더(Tiberius Alexander)가 총독으로 임명되다



후계자로 부임하였는데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최고 행정장관인 알렉산더(Alexander)의 아들이었다.[㈜ 참). 고대. 18권. 6 : 3(159, 160), 8 : 1(259). 그리고 19권. 5 : 1(276, 277).] 부친 알렉산더는 당대의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혈통과 부에 있어서 뛰어난 사람이었다.그는 또한 경건에 있어서도 아들 알렉산더보다 훨씬 훌륭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나라의 종교에 계속 머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디베료 알렉산더가 통치하는 동안에[㈜ 이것은 발췌문의 본문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사본들은 레이크(Kirsopp Lake)에 의해 표명되었고, 잭슨(Foakes Jackson)과 레이크의 앞 글, v.454에 나타난대로 \”이 환경들 하에서\” 나 \”그들의(즉 파두스나 티베리우스 알렉산더의) 통치시기에\”를 의미할 수 있는 ejpi; touv toi\”로 나온다. 그 의미가 후자라면, 그 기근은 45년에 시작했을 것이다.] 유대에 큰 기근이 일어났고 내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기근의 때에 왕후헬레나가 큰 경비를 들여 애굽에서 곡물을 사들여 와서 궁핍한자들에게 분배해 주었다. 그리고 이 일 외에도 이전 책에서 살펴본 것처럼[㈜ 전쟁. 18권. 1 : 1(4)이하.] 구레뇨(Quirinius)가 유대인들의 인구를 조사하러왔을 때 유대인들로 하여금 반란을 종용했던 자가 유다였다.[㈜ 앞의 각주에 기록한 대로 누가는 요세푸스처럼 드다 사건 후에 유다를 언급한다(행 5 : 37). 그러나 누가의 자료는 요세푸스가 아니다. 왜냐하면 누가는 죽은 것은 유다(Judas)였다고 말하지만 요세푸스는 처형 당한 것은 유다의 아들들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유다의 아들들의 이름은 야고보(James)와 시몬(Simon)으로, 알렉산더는 그들을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명했다.[㈜ 다른 본문에는 \”처형 당하였다.\”] 칼키스(Cha-lcis)의 왕 헤롯은 카메이(Camei)의[㈜ 사본들에는 Camoei, Camudus, Camede, 참). 20권. 1 : 3(16) 그러나 라틴판은 카미(Cami)로 읽는데, 이전의 20권 1 : 3(16)에서는 이름이 카메이(Camei)이다.] 아들 요셉(Joseph)에게서 대제사장직을 박탈하여 후임으로 데바이우스(Debaeus)의아들 아나니아(Ananias)를[㈜ 참). 20권. 6 : 2(131). 9 : 2(205)이하. 66년에 일어났던 약탈자에 의한 그의 죽음이 전쟁. 2권. 17 :9(441)에 서술되어 있다. 그를 나르바이(Narbai, 혹은 나드바이)의 아들 요하난(Johanan)으로 부르는 탈무드, \’Pesahim\’ 57a는 그가 통치하는 동안 제물들은 태워 없애도록 규정된 시간 이후에 남겨져서는 안된다는 법이 항상 지켜진 것을 주목함으로써 그를 칭찬하고 있다. 한편, 그의 광대한 식욕도 인용하고 있는데, 그의 가족에 대해 말하고 있는 난외주에 의하면, 그는 한끼식사에 송아지 삼백마리를 썼고 포도주 삼백 배럴(barrel)을 마셨고 디저트로 아기 새(bird) 40스아(Se\’ah, 스아는 곡식의 부피 단위로 약 7에 해당한다-역자주)를 먹었다고 한다. 그는 아마 하닌 밴 마트론(Hanin ben Matron)과 동일 인물일 것인데, 므나헴(mehahem, 전쟁. 2권. 17 : 8(434)에 의하면 므나헴은 아마 로마에 반항하는 반란군의 사령관이었을 것이다)의 동생 유다가 벤 마트론을 암살한 것은 미드라쉬 작품 \’Shir Hashirim Zuta\’의 끝에 언급되어 있다. 리버만(S. Lieberman)은 \’Greek in Jewish Palestine\’, 1942, p.181. n. 188.에서 \”벤 마트론\”은 Mevtrio\”, 즉 \”절제하는 자\”였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것은 그의 폭식을 가리켜 신랄하게 비꼬는 것이라고 본다.혹은 리버만이 제안하는 것처럼, 그 용어는 문자적 의미 그대로 로마와의 전쟁을 즐겼던 극단론자를 반대하는 의미였을지도 모른다(참). 전쟁. 2권. 17 : 10(455)는 \’중도자들\’을 oiJmevtroi로 말하고 있다>. 아나니아(Ananias)가 신약성경에서는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을 치라고 명령한 대제사장(행 23 : 2-5)과, 로마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는 사람들 중의 한명(행 24 : 1)으로서 언급된다.] 임명하였다. 그리고 쿠마누스(Cumanus)가90) 주후 49년 행정 장관이었던 벤티디우스 쿠마누스(Ventidius Cumanus). 그의 사악함으로 인해 그를 맹렬히 공격했던 타키투스의 \’연대기\’ xii.54에 의하면 그는 갈릴리에서만 총독으로 지냈다.

 디베료 알렉산더의 후임으로[㈜ 참). 병행구, 전쟁. 2권. 11 : 6(221).] 부임하였고, 아그립바(Agrippa) 대왕의 형제인 헤롯이 가이사 글라우디오의 통치 8년째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주후 49년.] 헤롯은 세 명의 아들을남겼는데, 그들의 이름 은 첫 아내와의[㈜ 마리암메(Mariamme).] 사이에서 낳은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와 자신의 형제의 딸인 베레니케(Ger-enice)와의 사이에 낳은 두 아들 메레니키아누스(Berenicia-nus)와 힐카누스(Hyrcanus)이다. 그러나 가이사 글라우디오는 아그립바Ⅱ세에게 헤롯의 영토를 주었다.



 3. 한 로마 병사의 저속함으로 인하여 유월절 기간 동안에 발생한 유대인의 재난



[㈜ 20권. 5 : 3(105-117), 6 : 1-3(118-136), 7 : 1(137)과 함께, 참). 병행구, 전쟁. 2권. 12 : 1-8(223-247).]



 유대가 쿠마누스ICumanus)의 통치를 받고 있는 동안 예루살렘에 큰 소요가 일어나서 많은 유대인들이 살해되었으나 나는먼저 그러한 소요가 일어난 동기를 설명하고자 한다. 누룩을 넣지 않은 떡(무교병)을 먹는 것이 풍습인 유월절이라고 불리우는절기가 다가와, 많은 무리들이 산지사방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자, 쿠마누스는 그들이 혹시 반란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쿠마누스는 일개 연대의 군사들을[㈜ tavxi\”는 128명의 파견대이다.] 무장토록 하여 어떤 반란의 조짐만 일어나면 진압하려고 성전 회랑에 배치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이전 총독들이 유대인의 절기가 되면[㈜ 그 절기 동안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민요(民搖)에 관해서는 휘스톤(Whiston)에 의해서 인용된 마 26 : 5을 보라.] 취하였던 조치였다. 그러나 유월절 절기의 나흘째 되는 날 어떤 한 병사가 바지를 내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음부(陰部)를 노출했는데,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격분하여 이러한 불경한 행위는 자신들을 모욕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욕한 것이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유대인들 중 일부는 쿠마누스를 비난하였고 병사의 그러한 행위도 쿠마누스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쿠마누스가 이러한 비난을 들었을 때 그 또한 자신에 대한 이러한 비난에 적지 않게 화가 났지만 쿠마누스는 그들에게 그러한 선동을 중단하고 유월절 기간동안은 어떤소요도 일으키지 말아줄 것을 간절히 호소했다. 그러나 쿠마누스는 그의 이러한 호소에도 유대인들이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않자[㈜ 요세푸스는 이곳에서 병행본문인 전쟁. 2권. 12 : 1(225, 226)에서 보충되는 상세한 셜명을 생략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군중 속에 있는 몇몇의 성급한 젊은 혁명가들이 실제로 싸움을 시작했는데, 돌을 들어 군인에게 던졌다는 것이다. 쿠마누스가 종원부대를 청했고, 그들이 도착했을 때 유대인들 사이에 공포감이 일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전군에게 완전무장하여 이미 언급한 대로[㈜ 고대. 15권. 11: 4(403-409), 고대. 13권. 11 : 2(307), 15권. 8 : 5(292), 18권. 4 : 3(91), 20권. 1 : 1(6)] 성전이 내려다 보이는 안토니아(Antonia) 망대로 진격할 것을 명하였다. 유대 무리들은 병사들이 그곳으로 오는 것을 보고 그들을 두려워하여 서둘러 도망쳤다. 그러나 통로는 좁은데다 적들이 뒤쫓아오는 줄 알고 서로 먼저 도망치려하다 보니 통로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그 결과 많은 유대인들이 그 좁은 통로에서 압사(壓死)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소요로 처형당한 자가 20,000여명에 달했다.[㈜ 병행본문인 전쟁. 2권. 12 : 1(227)에서는 그 숫자가 몇 사본들의 30,000보다, 그리고 다른 사본들의 10,000보다 더 많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이 날이 축제일이 아니라 애도일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기도와 번제드리는 것도 잊어 버리고 슬픔과 통고에 잠겨 있었다. 한 병사의 불경스런 음란한 행위가 그러한 엄청난 재난을 유대인들에게 가져왔다.



 4. 쿠마누스(Cumanus)가 율법서 사본을 파기한 병사를 처형하다



 이러한 비탄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재난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전에 소요를 야기시킨 자들의 일부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100퍼얼롱[㈜ 약 12마일.] 떨어진 공공 도로를[㈜ 전쟁 2권. 12 : 2(228)은 이것이 벧호론(Bethhoron)으로 인도되는 공공 도로라는 상세한 설명을 해 준다.] 따라 여행하다가 그곳을 지나가는 가이사의 하인 스테파투스(Stephanus)를 협박하여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조리 강탈하였다. 쿠마누스(Cumanus)는 이 일을 듣고 즉시 병사를 보내어 이웃 마을을 약탈할 것과 그 마을 사람들 중 가장 유력한 자들을[㈜ 전쟁. 2권. 12 : 2(229), \”결박되어 있는 그에게로 주민들을 끌고 가라는 명령과 함께\”.] 결박하여 데려올 것을 명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유린을 자행하던 병사들 중의 한명이[㈜ 발췌문은 \”그들 중 한명, 성급한 젊은이\”를 포함하고 있다.]그 마을에 있던 모세율법의 사본을 발견하고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비난섞인 말과 독설을 퍼부으면서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발췌문은 \”그리고 개가 짖는 것과 같이 절제하지 못한 외침에 빠졌다\”가 첨가되어 있다. 전쟁. 2권. 12 : 2(229)에서는 그가 그(율법의)사본을 불속에 던졌다는 것을 첨가하고 있다.] 이 소식이 유대인들의 귀에 들려지자 그들은 떼를 지어 쿠마누스가 있는 가이사랴(Casarea)로 달려갔다. 유대인들은 쿠마누스에게 자신들의 원수가 아닌, 그율법이 모욕당한 하느님의 원수를 갚아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들은 만일 선조의 율법이 이러한 식으로 모욕당한다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에 쿠마투스는 유대 무리들이 소요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친구들의 조언 때문에 마침내 율법을 모욕했던 그 병사들을 참수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두 번째로 촉발될 수 있었던 소요를 가까스로 진정시킬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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