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권 제 10장 대제사장들의 명단에 대하여

 


제 10 장



대제사장들의 명단에 대하여



1. 첫 번 성전 완공까지의 대제사장들의 목록



 이는 대제사장들에 관한 설명을 덧붙이는 것이 유대역사에 있어서 필요하고 타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대제사장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대제사장의 자격을 갖춘 사람은 어떤 이들이며, 그리고 유대와 로마간의 전쟁이 끝날 무렵에[㈜ 이곳에서의 대제사장에 대한 요세푸스의 설명이 단순히 그의 이전 설명의 요약이 아니라는 것은 서도 다른 점과 현재의 목록에서 새로운 사실들이 추가되었다는 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대제사장의수는 얼마나 되는지에 관해 언급하려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역사를 통해서 모세(Moses)의 형 아론(Aron)이 하느님께 대제사장으로서 직무를 행하였으며 아론이 죽은 후 그 아들들이 그뒤를 이었으며, 그리고 그들로부터 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대제사장직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론의 혈통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대제사장이 될 수 없는 것이 유대의관례였다. 왕이라 할지라도 다른 가계의 사람들은 결코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미 앞에서 첫 대제사장으로 언급된아론으로부터 반란에 의한 전쟁 기간 동안의 대제사장이었던 파나수스(Phanasus)에[㈜ 다른 사본에서는 페나수스(Phena년), 피네에수스(Phinessus), 피나수스(Finasus). 전쟁. 4권. 3 : 8(155)에서 그는 사무엘의 아들 파니<Phanni, 혹은 파니테스(Phannites)>로 불린다. 그는 열심당에 의해 제비뽑혔고, 대제사장들의 후손이 아닐 뿐 아니라 대제사장직에 요구되는 어떤 것도 구비하지 못한 촌뜨기였다.] 이르기까지 모든 대제사장의 수는 83명이었다.[㈜ 바벨론 \’Yoma\’ 9a에 의하면 제2성전 기간 동안에만 300명이 넘는 대제사장들이 있었다. 그 팔레스틴 \’Yoma\’ I. 1에서 그 숫자는 80명과 85명 사이라고 했다.] 그들 중 13명은[㈜ \’유대고대사\’ 전반부의 서술에서 요세푸스는 13명을 열거하고 있다. 즉, 아론(Aaron), 엘르아살(Eleazar), 비느하스(Phinees), 아비에셀(Abiezer), 북기(Bokki), 웃시(Ozis), 엘리(Eli, 5권. 361-362), 예수(Jesus, 8권12), 아히야(Achias, 6권. 107), 아히둡(Achitob, 6권. 122), 아비멜렉(Abimelech, 6권. 242), 사독(Sadok, 7권. 110), 그리고 아비아달(Abiathar, 7권. 110)이다. 그러나 예수(Jesus, 8권. 12)는 아비에셀(Abiezer, Marcus의 각주를 보라)과 동일인일 것이다.] 장막이 광야에 있던 모세의 시대로부터 백성들이 유대로 들어와 솔로몬왕이 하느님의 성전을 건조할 때까지 대제사장직을 수행하였다. 그것은 비록 생전 (生前)에후계자가 있다 할지라도 그 당시 대제사장들은 종신(終身)토록 그 직을 수행하였기 때문이었다. 아론의 두 아들의 후손이었던 이 13명의 대제사장들은 차례로 대제사장직을 계승하였다. 그들의 첫 통치 형태는[㈜ 모세와 여호수아(Joshua)의 통치하에서<고대. 6권. 5 : 4(84)> 이전의 유대 법령에 대한 열거에서 요세푸스는 여호수아의 죽음 후에 18년 동안 무정부 상태가 있었다고 말한다<고대. 6권. 5 : 4(84)>.] 귀족정치였고 그 다음에는 군주정치였고[㈜ 아마도 일시적으로 통치하는 것을 표현하는 사사들의 통치. 이것은 요세푸스가 이 기간 동안에 유대인들은 \”사사들과 군주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의해 통치되었다고 말했음이 자명하다<고대. 11권. 4 :8(112)>. 참). 고대. 6권. 5 : 4(85), 그곳에서 요세푸스는 이 시간적 간격 동안에 국가가 \”전투에서 용감하게 자기자신을 가장 잘 나타냈던 사람에게 최고의 사법권을 맡기는 귀족주의적 통치로 돌아갔고, 바로 이것이 그들이 자기들의 정치적 삶의 이 시기를 사사들의 시대라고 불렀던 이유이다\”라고 말한다.] 세 번째는 왕정이었다. 모세의 지도하에 선조들이 애굽을 출발하여 솔로몬왕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조할 때까지이러한 13명의 대제사장들이 재임(在任)한 기간은 612년이었다.[㈜ 참). 아피. 2권. 2(19), 그곳 또한 출애굽으로부터 솔로몬의 성전 건축까지를 612년으로 본다. 고대. 8권. 3 : 1(61)에서 요세푸스는 592년이라 한다. 성경은 (왕상 6 : 1)480년으로 본다.]



 2. 첫 성전 완공부터 안티오쿠스 유파토르까지의 대제사장들의 목록



 이러한 13명의 대제사장 이후 18명이[㈜ 고대. 10권. 8 : 6(152, 153)에 의하면 그 수는 17명이다. 참). 마르쿠스(Marcus)의 각주. 탈무드 \’Yoma\’ 9a는 첫 번째 성전 기간 동안에는 18명의 대제사장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요세푸스에 동의하고 있다.] 솔로몬왕의 시대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원정하여 성전을 방화하고 유대 민족을 바벨론으로 끌고갈 때 대제사장 여호사닥(Josadakes)을[㈜ 성경의 여호사닥(Jehozadak, Jazadak, Josedech), 요사다코스(Josadakos)로 쓰고 있는 고대. 10건. 8 : 5, 6(150, 153)과 요세데코스(Josedekos)로 쓰고 있는 11권. 3 : 10(73).] 생포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Nebuchandnezzar)에 이르기까지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직을 수행하였다. 유대인들이 왕정하에 있는 동안 대제사장들이 재직한 총기간은 466년[㈜ 참). 고대. 10권. 8 : 5(147)에 대한 각주(470년 6개월 10일). 요세푸스는 실수로 성전 근속 기간에서 4년을 더하지 않고 뺐다. 즉 총합은 474년 6개월 10일이어야 한다. 탈무드 \’Yoma\’ 9a는 첫번째 성전이 410년 동안 지탱했다고 말한다.] 6개월 10일이었다. 그러나 바벨론의 통치를 받던 70년간의 포로기 후에[㈜ 고대. 11권. 1 : 1(1)도 동일함.] 바사의 고레스(Cyrus)왕은 유대인들을 바벨론으로부터 다시 고국으로 돌려보내 주었고 유대인이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하였다. 유대인들이 귀국하였을 때[㈜ 발췌문은 \”포로로 잡혀가고, 귀환한 이들 중의 한명인 요세덱(Josedek)의 아들(Jesus)\”로 표현하고 있다.] 여호사닥의 아들 예수는[㈜ 참). 고대. 11권. 3 : 10(73)이하.] 대제사장직에 오르게 되었다. 안티오쿠스 유파토르(Antiochus Eupator)왕까지[㈜ 164년이나 163년. 참). 고대. 12권. 9 : 2(360, 361).] 여호사닥과[㈜ 바벨론 사람들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고 이전에(고대. 20권. 10: 2(231)) 언급된 사람은 요사다케스(Josadakes)이다.] 모두 15명의 후손들이 414년 동안[㈜ 요세푸스가 바벨론 귀환(주전 537년)에서 안티오쿠스 유파토르(Antichus Eupator)때까지 계산한다면 그 연수는 373년이 되고, 포로기부터 시작한다면 443년이 되고, 포로기 끝에서부터 계산하여 전쟁. 1권. 3 : 1(70)에서 암시하고 있는 연대와 일치시킨다면 411년이 되며, 고대. 13권. 11 : 1(301)에서 암시하고 있는 연대와 일치시켜 계산한다면 421년이 될 것이다. 고대. 13권. 11 : 1(301)에서 암시하고 있는 연대와 일치시켜 계산한다면 421년이 될 것이다. 고대. 13권. 11 : 1(301)에서 요세푸스는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 I세가 그 정부를 왕국으로 바꾸었다고 말하는데, 요세푸스가 그 민주국가를 포로기 끝에서부터 아리스토불루스의 통치가 시작되는 해(주전 104년)로 길게 본다면, 433년이 될 것이다(요세푸스는 그곳에서 실제로 481년이라고 하고 전쟁. 1권. 3 : 1(70)에서는 471년이라 하고 있다).] 민주정권하에서[㈜ 요세푸스가 귀환 후부터 하스모네안(Hasmonaean)왕조까지의 정부 형태가 백성들의 우두머리인 대제사장들과 함께 귀족정치와 과두정치의 혼합이었다고 말하는 고대. 11권. 4 :8(111)을 대조해 보라.] 제사장직에 있었다.



 3. 대제사장직에 오른 여러 인물들



 당시에 앞서 언급한[㈜ 그러나 고대. 12권 5 : 1(237-241)과 15권. 3 : 1(41)에 의하면 첫 번째로 대제사장을 폐위시켰던 사람은 바로 안티오쿠스 유파토르의 아버지인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였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Jesus, 혹은 야손(Jason)>를 쫓아내고, 오니아스<Onias, 혹은 메넬라우스(Menelaus)>를 대신했기 때문인다, 이 오니아스는 안티오쿠스 유파토르와 루시아의 명령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으로 여기서 언급되고 있다.] 안티오쿠스와 그의 군대장관 루시아(Lysias)는 멘클라우스(Menclaus)라고 불리우는 오니아스(Onias)를[㈜ 고대. 12권. 9 : 7(384, 385)에서, 루시아(Lysias)는 유파토르에게 유대인들을 평화스럽게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메넬라우스를 죽이라고 조언하는데, 왜냐하면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조상 종교를 포기하도록 강요하라고 에피파네스를 설득함으로 그에게 온갖 어려움을 야기시킨 것이 바로 메넬라우스였기 때문이라고 루시아는 말한다. 그러므로 함축된 의미는 그를 제거하는 것이 정당화되었다는 것이다.] 대제사장직에서 파면하고 베뢰아(Beroea)에서[㈜ 수리아에 있는 알레포(Aleppo). 참). 고대. 12권. 9 :7(385). 그것은 같은 이름의 마게도냐 도시(Macedonian city)를 기념하여 셀류쿠스 니카토로(Seleucus Nicator)에 의해 그렇게 불리워졌다.] 살해하였다.[㈜ 고대. 12권. 9 :7(383-385)를 보라.] 또한 그들은 오니아스Ⅲ를 몰아내고 오니아스의 가계(家系)가 아니라[㈜ 고대. 12권. 9 :7(387)도 마찬가지이다.] 아론(Aron)의 혈통인 야키무스(Jacimus)를[㈜알키무스(Alcimus)의 히브리 동의어(즉 요아킴. Joachim). 고대. 12권. 9 : 7(385)에는 그 이름이 여기의 발췌문에서처럼 여러 사본과 같이( )로 나온다.] 대제사장직에 임명했다. 이러한 연유로,[㈜ 체리코버(V. Tcherikover)는 \’Helenistic Civilization and the Jews\’, 1959, p.277에서 오니아스는 성전이 다시 한번 적당한 제 기능을 하고 있었고, 하시딤(Hasidiim)조차도 알키무스(Alcimus)를 대제사장으로 인정하던 기간 동안에(주전 약 152-160년) 애굽으로 달아났기 때문에, 팔레스틴을 떠나는 그의 동기가 더럽혀진 성전을 새롭게 정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체리코버는 대제사장직을 오니아스의 가문에서 박탈했다는 사실에 오니아스가 불만족해 하고 있다는 본문에 나오는 하나의 실제적 이유를 무시하고 있다. 오니아스는 일단 애굽에 도착하자 성전을 세우려는 다른 이유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개인적 영광에 대한 열망<고대. 13권. 3: 1(163)>. 애굽에 있는 유대인들이 애굽의 통치자들의 번영을 위해 모여서 기도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려는 욕망과레온토폴리스(Leontopolis)에 있는 유대인 군사 식민지를 위한 성소를 지으려는 갈망등이었다.] 살해된 오니아스의 조카이자[㈜ 고대. 12권. 9 :7(387).] 부친과 동일한[㈜ 고대. 13권. 5 : 1(237, 238)의 설명처럼 오니아스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형 둘 다 오니아스로 불리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크라우스(S.Kauss)의 \”Onias Ⅲ\”, \’Jewish Ency.\’ ix, 1905, p.403에서 이러한 혼란은 친척 이름들인 요하난(Johanan), 호냐(Honya)와 네호냐(Nehonya)에 대한 헬라어 사본에서 일어났다고 말을 한다. 오니아스의 아버지를 시몬이라고 부르는 전쟁. 7권. 10 : 2(423)의 설명으로부터, 그 성전은 오니아스 Ⅳ세의 아버지 오니아스 Ⅲ세에 의해 건축되었음을 알 수 이TEk.] 이름을 지닌 오니아스는[㈜ 오니아스 Ⅳ세.] 애굽으로 가서 톨레미 필로메토르(Ptolemy Philometor)와[㈜ 주전 182-146년에 통치.] 그의 아내 클레오파트라(Cleopatra)와 교분을 나누었고 그들을 설득하여 헬리오폴리스(Heliopolis)에[㈜ 나일강 델타(the Nile Delta) 남쪽 끝에 있는 오늘날의 텔 엘-예후디에(Tell 디-Yehudiyeh)로 추정되는 레온토폴리스(Leontopolis)에 있음.] 성전을 세우고 대제사장이 되었다. 이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을 모방하였다. 그러나 애굽에 세워진 이 성전에 관하여는 앞서 자주[㈜ 고대. 12권. 9 :7(387, 388), 13권. 3 : 1-3(62-73), 10 : 4(2850, 전쟁. 1권. 1 : 1(33).] 언급하였다. 야키무스는 3년간[㈜ 일년의 일부가 전체 일년으로 계산되고 있는 고대. 12권. 10 : 6(413)에서는 4년.] 대제사장직에 머무른 후 죽었고, 그의 뒤를 이을 대제사장이 없어서[㈜ 야키무스(Jacimus)의 죽음 이후, 마카비 유다(Judas the Maccabee)가 3년 동안 대제사장으로 일했다는 기록이 있는 고대. 12권. 11 : 2(434)를 대조해 보라. 그러나 주전 159년의 유다의 죽음과 주전 152년에 요나단이 대제사장이 되었다(마카비 1서 10 : 21)는 가정 사이에는<고대. 13권. 2 : 3(46)에서 언급된 4년이 아니라> 7년의 간격이 있다.] 예루살렘은 대제사장 없이 7년을 지냈다. 전쟁에서 마게도냐인들을 격퇴하고 정권을 장악한 아스모나이오스(Asmonaeos)의 후손들이 요나단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여[㈜ 고대. 13권. 2 : 2, 3(45, 46) 의하면 요나단을 대제사장으로 부른 것은 하스모네안 사람들이 아니라,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아들 알렉산더 발라스(Alexander Ballas)였다.] 요나단은 7년간 통치하였다.[㈜ 고대. 13권. 6 : 6(212)에 의하면 4년, 숫자 계산은 둘 다 잘못되었다. 즉 요나단은 주전 152년에서 143년이나 142년까지 10년동안 대제사장으로 있었다. 고대. 13권. 6 : 6(212)에 대한 마르쿠스의 각주58을 보라.]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고대. 13권. 6 : 1-6(187-212), 그 이야기는 전쟁. 1권. 2 : 1(49)에서도 또한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요나단이 트리포(Trypho)의 반역 음모에 의해 살해되었고 그의 형제 시몬이[㈜ 고대. 13권. 6 : 7(213).] 대제사장직을 이었다. 그러나 시몬이 자기의 형제보다[㈜ 고대. 13권. 7 : 4(228)에서도 그렇다. 시몬은 주전 142년에서 135년까지 일했다.] 1년간을 대제사장직에 더 머무르다가 사위의[㈜ 톨레미(Ptoloemy)라고 불림<고대. 13권. 7 : 4(228).] 반역에 의해 절기시 살해되자[㈜ 고대. 13권. 7 : 4(228).] 아들 힐카누스Hycarnus)가[㈜ 고대. 13권. 8 : 1(230).] 시몬의 뒤를 이었다. 힐카누스는 30년간 대제사장직을 맡은 후 늙어 죽었다.[㈜ 고대. 13권. 7 : 4(299) 서두에서는 힐카누스(Hyrcanus)가 오래 살았다는 사실을 생략하고 있다. 그의 통치는 주전 135년부터 105년까지 계속되었다.]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라 부르는 유다가[㈜ 유다라는 다른 이름에 대해 그가 단순히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라고 불리어지는 고대. 13권. 11 : 1-3(301-319)의 초기 설명에서는 상세한 설명이 없다.] 그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되었다. 유다는 왕정과 함께 대제사장직을 맡아오다가 중병으로 죽었다.

1년 동안[㈜ 주전 104-103년, 고대. 13권. 11 : 3(318)과 동일] 왕과 제사장 직위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최초의[㈜ 고대. 13권. 11 : 1(301)과 동일] 사람이었다. 그의 뒤를 이어받은 사람은 아우 알렉산더였다.[㈜ 얀네우스(Jannaeus), 고대. 13권. 12 : 1(320).]



4. 알렉산더가 죽은 후 대제사장직의 계승



 알렉산더(Alexander)는 왕과 대제사장을[㈜ 고대. 13권. 16 : 1(407)과 동일] 27년간[㈜ 주전 103-76년까지 고대. 13권. 12 : 1(320).] 겸임하고서 세상을 떠나면서 아내 알렉산드라(Alexandera)를 대제사장직에 임명하였다. 알렉산드라는 다시 힐카누스를[㈜ 고대. 13권. 16 : 2(408).] 대제사장직에 임명하고 그녀 자신은 9년간[㈜ 주전 76-67년, 고대. 13권. 16 : 6(430)과 동일] 왕권을 수행하고 세상을 떠났다. 알렉산드리의 아들 힐카누스는 더 이상 대제사장직을 지속하지 못하였다.[㈜ 고대. 15권. 6 : 4(180)에 의하면, 그는 알렉산더가 죽은 후 3개월 동안 재임했다.] 왜냐하면 알렉산드라가 죽은후 형제인 아리스토불루스가 힐카누스를 대항하여 공격하였고 그로부터 대제사장직을 박탈하였기[㈜ 고대. 14권. 1 : 2(4-7). 참). 전쟁. 1권. 6 : 1(120-122). ] 때문이었다. 아리스토불루스는 통치권을 장악하였을 뿐 아니라 대제사장직을[㈜ 고대. 14권. 3 : 2(41), 6 : 1(97)과 동일] 수행하였다. 그러나 아리스토불루스가 통치 2년 3개월에[㈜ 주전 65-63년. 문자적으로는 \”그의 통치 3년 3개월 후에.\” 고대. 14권. 1 : 2(5)에 대한 마르쿠스의 각주 7은 수정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문에 맞추기 위해 인용하고 있는 고대. 14권. 6 : 1(97)은 \”아리스토불루스가 3년 6개월 동안 재임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폼페이(Pompey)가 쳐들어 와서[㈜ 주전 63년. 고대. 14권.(34-79)와 전쟁. 1권. (127-158)을 보라.] 무력으로 예루살렘을 정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불루스와 그의 자녀들을 결박하여 로마로 끌고 갔다. 폼페이는 힐카누스를 대제사장에 복위(復位)시키고 유대의 통치자가 되게 하였으나 왕관 쓰는 것은 금하였다. 힐카누스는 첫 통치 9년을 포함해서 24년간 다스렸다.[㈜ 주전 63-40년. 고대. 15권. 6 : 4(180)에 의하면 40년.] 힐카누스는 파르티아의 군대장관 바르자파르네스(Barzapharnes)와[㈜고대. 14권. 13 : 3(330)에서 바사 총독이라고 불리는 바르자프라네스(Barzaphranes).] 파코루스(Pacorus)가[㈜ 참). 고대. 14권. 13 : 4(340)이하.] 유브라데 강을 건너서 힐카누스와 접전하여 그를 생포하였고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 안티고누스(Antigonus)를 왕으로 임명하였다. 안티고누스가 통치한지 3년 3개월이[㈜ 주전 40-37년. 안티고누스(Antigonus)의 통치 기간은 그의 죽음에 대한 요세푸스의 설명이 나오는 고대. 14권. 16 : 4(487-491)과 15권. 1 : 2(8-10)에 나오지 않는다. 하스모네안 왕조가 요나단부터 시작해서 통치한 총 햇수는 112년 반이다. 고대. 14권. 16 : 4(490)에는 총 합계가 126년으로 나온다. 그러나 고대. 17권. 6 : 3(162)에 죽었던 마타디아스(Mattathias)를 대신해서 인도했던 유다를 포함한 것 같다. 탈무드 \’Abodah Zarah\’ 8b에는 주전 140년에 로마에 의해 왕조가 공식 인정된 후부터 주전 37년의 하스모네안 안티고누스(Antigonus)에 대한 로마 장군 소시우스(Sossius)의 승리까지를 계산하여(J. Lehmann, \”Quelques Dates importantes de la chronologie de 2 Temple\”, \’Rev. d. El juiv.\’ xxxvii, 1898, pp.1-44도 동일) 하스모네안 왕조가 103년 존속했다고 본다.] 되었을 때 소시우스(Sossius)와 헤롯이[㈜ 참). 고대. 14권. 16 : 1(468)이하와 전쟁. 1권. 22장(345)이하.] 그를 포위하여 사로잡았다. 그때 안토니(Antony)는 안티고누스를 안디옥으로 끌고 가서 그곳에서 처형하였다.



 5. 평범한 대제사장들을 임명한 헤롯의 정책



 헤롯은 로마인에 의해 왕이 되었지만 더 이상 아사모네우스의 가계에서 대제사장을 임명하지는 않았다. 헤롯은 아리스토불루스에게 대제사장직 주는 것을 제외하고는 저명한 혈통이 아닌 단지 제사장의 혈통인[㈜ 참). 헤롯이 아나넬루스(Ananelus)라고 불리는 바벨론에서 온 낯선 제사장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함, 고대. 15권. 2 : 4(22)를 보라.] 사람에게 대제사장직을 맡겼다. 헤롯이 파르티아인들에게 사로잡힌 힐카누스의 손자인 아리스토불루스를 디제사장에 임명하고 그의 누이인 마리암메(Mariam-me)와 혼인한 것은 그의 조부인 힐카누스에 대해 좋은 추억을가지고 있는 백성들의 호의를 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후 헤롯은 백성들이 아리스토불루스에게로[㈜ 알렉산더와 알렉산드라(Alexandra)의 아들. 참). 고대. 15권. 3 : 1(39-41).] 기우는 경향이 보이자우리가 이 사건에 대해 이미 언급한 것처럼[㈜ 고대. 15권. 3 : 3(51-56). 참). 전쟁. 1권 22 : 2(437).] 여리고에서 수영하고 있는 아리스토불루스를 질식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여 살해하였다. 아리스토불루스 이후로 헤롯은 아사모나이오스의 후손들에게는 결코 대제사장직에 임명하지 아니하였다. 헤롯의 아들인 아켈라오(Archelaus)는 그후 유대를 직접 관할했던 로마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부친과 같은 방법으로 대제사장직을 임명하였다. 따라서 헤롯의 시대부터 티투스(Tit-us)가 성전과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방화했을 때까지 대제사장의 수는 전부 28명이었고[㈜ 유용한 목록과 요세푸스의 목록의 가치에 대한 비평적인 평가를 위해서는 휠셔(G. Holscher)의, \’Die Hohenpriesterliste bei Josephus und die evangelische Chronologie\’, 1940, 특히 pp. 9-19를 보라. 요세푸스에 의하면<고대. 20권. 19 : 1(227)> 아론부터 제2성전의 파괴까지 대제사장들의 총수는 83명(알키무스(Alcimus)를) 포함하면 84명>이다. 위에서 본 것처럼 바벨론 탈무드, \’Yoma\’ 9a는 제 2성전 기간에만도 300명 이상이었다고 말한다. 팔레스틴 탈무드 \’Yoma\’ 1은 80명대의 숫자를 기록하지만, 그것은 제 2성전 기간 동안의 수치이다. 블로흐(H. Bloch)는, \’Die Quellen des Flavius Josephus\’, 1879, pp.149-150에서 요세푸스는 임의로 대제사장 목록을 정했다고 하면서 아피. 1권. 7(30)이하를 지시해 준다.] 그들의 재직기간은 107년간이었다.[㈜ 주전 37년-주후70년. 탈무드, \’Abodah Zarah\’ 8b는 아마 주전 37년부터 혁명이 시작되는 주후 66년까지 계산하여 그 수치를 103년으로 본다.] 비록 헤롯과 아켈라오가 죽은 후 정부가 귀족정치가 되어 대제사장들의 유대를 통치했지만 헤롯과 그의 아들 아켈라오가 통치할 당시에도 이들중 몇몇은 백성들의 정치적 통치자들이었다. 대제사장에 관한 것은 이 정도로 거론하는 것이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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