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권 제 2장 유다의 후계자인 요나단, 시몬, 요한 힐카누스에 대하여

 


제 2 장

유다의 후계자인 요나단, 시몬, 요한 힐카누스에 대하여



1. 유대 지도자 요나단〔주전 161 – 143년〕



 유다의 동생인 요나단이 그의 뒤를 계승했다. 요나단은 다른많은 일에서도 그랬지만 특히 백성들과의 관계에서 매우 신중하게 처신했다. 그리고 로마와의 우의를 돈독히 함으로 자신의 권위를 견고하게 만들었다.[㈜ 마카비1서 12 : 1~4; 고대. 13권. 5 : 8 (164)] 그는 또한 젊은 안티오쿠스와도[㈜ 헬라어 \”안티오쿠스의 아들\” 즉, 추측컨대 안티오쿠스 Ⅳ세 에피파네스의 아들인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마카비1서 11:57과 고대. 13권 5:4(145)에 언급된 요나단(Jonathan)과 안티오쿠스 Ⅳ세 디오니수스와의 조약을 의미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요세푸스는 안티오쿠스 Ⅴ세와 Ⅵ세를 혼돈해 왔다.] 동맹을 맺었다. 그렇다고 이런 것들이 그의 안전을 지켜주기에 충분한 것은 못되었다. 왜냐하면 안티오쿠스의 아들의 후견인인 폭군 트리포(Trypho)가 요나단에 대해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었고, 이 외에도 요나단과 그 친구들을 이간시키려고 획책했으며 간계를 써서 요나단을 생포하려고 기회를 노렸다. 트리포는 요나단이 자기 동료 몇 명을 거느리고 안티오쿠스가 있는 톨레마이스(Ptolemais)로 가는 도중에 요나단과 그 동료들을 잡아 억류하고, 이어 유대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후에 트리포는 요나단의 형제인 시몬에게 패배하고 말았으며 이 패배에 분격해서 요나단을 죽이고 말았다.[㈜ 참).마카비서 12 : 39이하. 고대. 13권. 6 : 1(187).]



 2. 시몬의 지도력〔주전 142 – 135년〕



 시몬의 행정처리 능력은 탁월하였다. 또한 그는 근방에 위치한 도시들인 가자라(Gazara), 욥바(Joppa), 그리고 얌니아(Jamnia)를 차례로 정복해 나갔다. 그는 또한 수비대를 진압했으며 성들을[㈜ 고대.13권. 6 : 7(215)에 보면 예루살렘이 언급되어 있다.] 파괴했다. 시몬은 후에 트리포와 싸우는 안티오쿠스와[㈜ 고대. 13권. 7 : 2 (223)에 나오는 안티오쿠스 Ⅶ세 시데타스(Ant- iocus Ⅶ Sidetas).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유대고대사와 유대전쟁사 의 기록들이 아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동맹을 맺고, 안티오쿠스가 메대(Medes)를 공격하기전에 도라(Dora)에 있는 트리포를 공격할 때 안티오쿠스를 도왔다. 시몬이 트리포를 죽이는 데 있어 안티오쿠스를 도와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안티오쿠스는 정복의 야심을 부끄러워할 줄 몰랐다. 오히려 안티오쿠스는 자신의 사령관 켄데베우스(Cendebeus)와 군대를 파견시켜 유대를 짓밞고 시몬을 굴복시키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시몬은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젊은이처럼 용맹무쌍하게 전쟁을 지휘하였다. 또한 그는 안티오쿠스에 대항해서 일단의 힘센 젊은이들과 자신의 아들까지 공격에 가담시켰으며,시몬 자신은 부대를 이끌고 다른 방면에서 안티오쿠스를 공격했다. 또 시몬은 산중의 여러 곳에 많은 병사들을 매복시켜 놓았으므로 안티오쿠스를 공격하는 데 우세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몬이 그런 훌륭한 전쟁 방식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을 때 그는 대제사장이 되었으며 170년간 마게도냐인들의 지배를 받던 유대인들을 그들의 손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셀류키드 왕의 통치 원년인 기원전 312년부터 환산한 햇수 : 이러한 계산법에 의하면 시몬의 대제사장직은 주전 142년, 즉 그의 임기의 원년부터 시작된다. 이에 관한 유사한 설명이 고대. 13권. 6 : 7 (213) 에 나와있다. 참). 마카비1서 3 : 41 이하. \”기원전 170년에 이스라엘은 이방인이라는 멍에를 벗게 되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비로소 자신의 신기원을 시작하게 되었다.]



3. 요한 힐카누스(주전 135 – 105년)가 그의 처남 톨레미를 반대하다.



 이러한 시몬도 음모의 희생물이 되어 잔치 석상에서 그의 사위 톨레미 (Ptolemy)에 의해 살해되었다. 톨레미는 자신의 아내와 두 아들을 감옥으로 보냈으며, 힐카누스(Hyrcanus)라고도 불리는 요한(John)을 죽이려고 자객을 보냈다. 그러나 요한은 이 자객들이 자기를 죽이러 온다는 것을 미리 알고 예루살렘으로 피신하였다. 요한은 예루살렘 백성들이 자기 부친의 훌륭한 업적을 기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톨레미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피신한 것이다. 톨레미 역시 다른 통로를 통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이미 힐카누스를 받아들였던 예루살렘 백성들에 의해 격퇴당했다. 그래서 톨레미는 다곤(Dagon)이라 불리는 여리고(Jericho) 바로 위에 있는 요새들중의 하나로 후퇴했다. 한편 힐카누스는 자기 아버지의 대제사장직을 이어받아 하느님께 희생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서둘러서 어머니와 형제들을 구하기 위해 톨레미를 공격하였다.



4. 톨레미가 힐카누스의 인척들을 인질삼아 도망함



 그래서 힐카누스는 요새를 공격하여 여러 면에서 톨레미보다 우세했으나 연민으로 인해 톨레미에게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었다. 왜냐하면 톨레미가 힐카누스의 인척들을 인질로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톨레미는 궁지에 몰리자 힐카누스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요새 앞으로 끌고 나와 성벽 위에 세우고는 모든 사람이보는 앞에서 막대기로 때리며 위협을 하였다. 그리고는 힐카누스가 당장 물러가지 않으면 힐카누스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거꾸로 떨어뜨려 버리겠다고 협박하였다. 이 광경을 보고 힐카누스는 염려와 더불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어머니는 매를맞고 죽음의 위협을 당해도 결코 낙망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두손을 뻗어 자신이 당하는 고통 때문에 아들이 동요되어 이 비열한 톨레미를 살려두는 우는 범치 말기를 하느님께 기도했다. 왜냐하면 그의 어머니는 톨레미의 손에 죽는 것이 구차하게 오래사는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요한의 처지는 난처하게 되었다. 요한은 어머니의 간청을 듣고 용기를 내어 곧바로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요한은 어머니가 계속 매를 맞으며 어머니의 살점이 찢겨져 나가는 것을 보자 이성을 잃고 연민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리하여 포위공격이 늦춰지다 보니 안식년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매 7일마다 쉬듯이 매 7년마다 안식년이라[㈜ 안식년 : 레 25 : 4.] 해서 모든 것을 쉬는 해가 된것이다. 이 안식년을 틈타 톨레미는 포위망을 빠져나와 요한의 모친과 형제들을 죽인 후 빌라델비아(Philadephia)의 압제자이며 코틸라스(Cotylas)라고도 불리는 제노(Zeno)에게로 도망을 하였다.



5. 안티오쿠스 Ⅶ세 시데테스와 벌인 전쟁



 이제 안티오쿠스는 시몬에게 당한 고통에 분개하여 유대를 공격한 후 예루살렘 전방에 진을 치고 힐카누스를 포위하였다. 이에 힐카누스는 이스라엘 역대 왕 중에서 가장 부유했었던 다윗왕의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꺼낸 돈 약 3,000달란트를 주겠다고 안티오쿠스를 꾀었다.[㈜ 고대.7권.15 : 3(393);고대.13권. 8:4 (249)에 보면 이와 유사한 기록이나와있는데, 여기에 보면, 힐카누스(Hyrcanus)는 안티오쿠스가 떠난 후에도 무덤을 개봉하지 않았다. ] 더욱이 힐카누스는 유대인들 중 가장 부유한 자이었으며 외국의 지원군을 고용하기 시작했던 사람이었다.



6. 힐카누스의 승리



 한편 안티오쿠스가 메대를 공략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나자 힐카누스는 이때가 안티오쿠스에 대한 복수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평소 정예부대가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하던 수리아의 도시들을 즉시 공격하였다.[㈜ 고대.13권. 8:4(250) 이하의 내용이 더욱 신빙성 있다. 여기에 보면 힐카누스는 기원전 130년경에 파르티아인들(Parthians)(이책에는 메대인으로 기록됨)을 원정하는 길에 안티오쿠스에 가세하였다;수리아의 성읍들에 대한 그의 공격은 주전 129년경의 인티오쿠스의 사후에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힐카누스는 메다베(Medabe)와 사마가(Samaga), 그리고 근방 도시들과 세겜(Sechem)과알가리진(Argarizin)등을 장악했고, 이외에도 예루살렘 성전을 본따서 건설한 성전 주위에 살고 있던 구다국(the nation of thecuthaeans)까지[㈜ 추방되면서 사마리아로 유입된 이방인들. 왕하 17 : 24. 고대. 9권. 14 : 3 (288).] 장악하였다. 그는 또 아도레온(Adoreon)과마리사(Marisa)와 더불어 이두매(Idumaea)의 많은 다른 도시들도 정복하였다.



7. 〔힐카누스가 자기 두 아들에게 세바스테를 공격하도록 명함〕



 힐카누스는 오늘날 세바스테(Sebaste)라는 도시가 있는 사마리아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이 세바스테는 헤롯 왕이 세운 도시로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힐카누스는 아들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와 안티고누스(Antigonus)로 하여금 그성을 포위하여 봉쇄하도록 명했다. 이들의 완벽한 봉쇄로 그 성은 지금까지 겪지 못했던 기근을 겪었다. 그리하여 성 안의 주민들은 먹을 수 없는 것까지 먹지 않으면 안될 지경이 되었다. 사마리아인들은 키지케누스(Cyzicenus)라고 불리는 안티오쿠스(Antiochus)에게[㈜ 추방되면서 사마리아로 유입된 이방인들. 왕하 17 : 24. 고대. 9권. 14 : 3 (288).]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안티오쿠스는 사마리아인들의 요청을 받고 진군했으나, 아리스토불루스에게 패퇴했으며 이 형제들(아리스토불루스와 안티고누스)에게 스구도볼리(Scythopolis)까지 추격을 당한 끝에 도망을 하고 말았다. 그후 형제들은 사마리아로 돌아왔으며, 사마리아의 대다수 주민들이 또 다시 성벽 안에 갇히게 되었다. 그후 이 형제들은 사마리아를 장악하고 파괴해 버렸다. 그리고 그 곳에 있던 주민들을 노예로 삼았다. 이렇게 힐카누스와 그의 아들들은 공격에 큰 성공을 거두자 더욱더 사기가 충천하여 스구도볼리까지 진군하여 그곳을 공략했다. 그리하여 갈멜(Carmel)산 안쪽에[㈜ 문자 그대로 \”-이내에\”. 즉, \”-의 이편\”] 있는 모든 지역들을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8. 〔요한 힐카누스의 순조로운 통치와 예언 은사〕



 그러나 요한과 그 아들들이 이렇게 성공을 하자 이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유대에서 소요를 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이 결집해서 쉬지 않고 훈련하여 전면전을 시도했으나 요한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 결과 요한은 여생을 편안하게 지냈으며, 31년 동안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나라를 다스리다가 5명의 아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요한은 확실히 매우 행복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없으며, 자신에대해 불평을 늘어놓을 여지를 남기지 않았었다. 요한 자신은 세상에서 더 바랄 것이 없는 세 가지를 가진 유일한 인간이었다.즉 통치권, 대제사장직,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와 대면하여 말씀해 주시는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었다. – 그리고 요한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 예언하는 능력이 있었던 고로 자신의 두아들이 나라의 지배자가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미리 내다보고 예언까지 하였다. 요한의 아들들의 몰락에 관한 이야기는 아버지 요한이 누렸던 행복에 비해 얼마나 비참한 것이었는지를 우리에게 잘 말해주는 가치있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아리스토불루스는 1년간 왕위에 있었지만 이 짧은 기간 동안 갈릴리를 영토에 귀속시켰으며, 포로 귀환 후 처음으로 그 머리에 왕관을 씀.



이 글은 카테고리: TN-catholicdictionary-C2, 신학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