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권 제 7장폼페이가 어떻게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게 되었고 성전을 (무력으로) 탈취했는지, 어떻게 지성소에 들어갔는지, 또한 유대에서 그의 다른 행적들에 대하여

 


 제 7 장



폼페이가 어떻게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게 되었고 성전을 (무력으로) 탈취했는지, 어떻게 지성소에 들어갔는지, 또한 유대에서 그의 다른 행적들에 대하여



1. 폼페이의 예루살렘 포위 공격〔주전 63년〕



 이런 아리스토불루스의 처사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폼페이는 아리스토불루스를 체포하여 가두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들어가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공격 방법이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하였다. 이유는 예루살렘의 성벽이 매우 견고해서 쉽게 정복할 수없을 것 같았으며 성벽 앞에 있는 골짜기는 매우 위험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계곡 한 가운데에 있는 성전은 매우 견고한 벽으로 둘러쳐져 있어서 만일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더라도 적들이 퇴각할 수 있는 제2의 피난처가 될 수 있을 정도였다.



2. 〔예루살렘 성 내부 백성들 사이에 일어나 소요〕



 그런데 폼페이가 이 문제에 빠져 있는 동안 예루살렘 성 안에서는 내분이 일어났다. 아리스토불루스를 추종하는 세력은 폼페이와 일전을 벌여 갇혀 있는 아리스토불루스 왕을 구출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힐카누스를 추종하는 무리들은 성문을 활짝 열어 폼페이를 맞이해야 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잘 훈련된 로마 병사들의 모습을 지켜 본 성 안의 백성들은 두려워 떨면서 힐카누스 추종자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숫자가 점점 늘어났다. 이에 세의 열세를 느낀 아리스토불루스파는 계곡 한 가운데에 있는 성전으로 피신한 후 그 곳과 예루살렘을 잇는 다리를 절단하고 끝까지 항전할 태세를 추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로마군을 예루살렘이 받아들이고 궁전을 폼페이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폼페이는 자기 휘하의 훌륭한 장군인 피소 (Piso)를 군대와 함께 그 궁전으로 들여보내고 예루살렘 주위에 수비대를 주둔시켰다. 그는 예루살렘 성 주변 곳곳에 감시병을 세웠으며, 성전 안으로 피신한 아리스토불루스 파에 대한 투항 설득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들을 섬멸하기 위하여 성전 주변에 필요한 모든인원과 장비를 배치하였다. 이 일에 힐카누스 파는 조언과 봉사를 아끼지 않으면서 적극적으로 피소를 지원하였다.



. 〔성전까지 공격해 들어간 로마군〕



 한편 폼페이는 북쪽 편에 위치하면서 병사들로 하여금 참호를 메꾸고 계곡을 돌이나 자갈로 모두 메우도록 명령하였다. 그런데 사실 골짜기를 메우기란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는데, 이는 골짜기가 깊기도 하였지만 유대인들이 지형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하면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여 그 작업을 방해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폼페이가 유대인들은 매주 7일째 되는 날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모든 일을 쉬는 점을 이용하지 못했더라면 로마군들의 노력은 끝없이 지속되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7일째 되는 날은 공격을 받기 전에는 절대로 먼저 공격을 해오지 않는다는 관습을 알게 된 폼페이는 병사들에게 7일째 되는날도 계곡을 메꾸어 올리는 작업을 계속하되 이날 만은 유대인들을 자극하는 일이 없도록 명령하였다. 그렇게 하면 유대인의 저항없이 계곡을 메꾸어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요령으로 계곡을 메운 폼페이는 그 위에다 높은 망대를 세우고, 투석기(ballistae)[㈜ 돌이나 창 등을 던지는 데 사용된 군사 도구들.]로 성벽 꼭대기에 모여 있는 유대인들을 공격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두로(Tyre)에서 들여온 공성기구들을 이용하여 성벽을 헐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성전은 여느 성벽과는 달리 매우 견고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그들의 세찬 공격을 받고도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다.



4. 〔폼페이가 성전을 점령하다〕



 반면 로마군은 매우 큰 저항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폼페이는 유대인들의 굽히지 않는 불굴의 정신과 특히 사방에서 창들이 날아오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결코 자신들의 종교의식을 그만두지 않는 것을 보고는 찬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시에 완전히 평화가 찾아온 것처럼 유대인들은 매일 드리는 제사와 정결예식 그리고 모든 종교 의식들을 하나도 생략하지 않고 하느님께 드렸기 때문이다. 또한 성전이 실제로 함락될 때까지 그들은 매일 제사에서 번제를 드렸으며 율법에 규정된 예배의식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고대.14권.(66)에 보면 정확한 연대(올림피아드,179년 63년의 로마집정관들)를 말해 주고 있으며 아울러 \”금식일\”, 즉 \”속죄일\”에 이 일이 행해졌음을 덧붙이고 있다.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 xxxvii.16에서는 \”안식일\”에 관하여 말해 주고 있다. 또한 요세푸스가 사용한 비유대인 자료에 \”금식\”이라고 불리워진 것은 \”안식일\”을 의미한다. 이것은 헬라-로마 세계에 유대인들은 안식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Sch?rer).] 로마군은 성전을 포위한지 3개월만에야 매우 큰 어려움 끝에 망대 중의 하나를 부수고 성전에 진입할 수 있었다. 제일 먼저 성벽을 넘어 성전으로 들어가는 모험을 감행하는 자는 실라(Sylla)의 아들인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Faustus Cornelius)였으며, 그 다음은 두 명의 백부장인 푸리우스(Furius)와 파비우스(Fabius)였다. 이들 모두는자신의 병사들을 대동하여 성전 뜰을 완전히 포위한 후 유대인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들 중 일부 유대인들은 성전으로 도피하다가 죽었고, 일부는 한동안 대항하다가 죽음을 당했다.



5. 〔죽음 앞에 선 제사장들의 자세〕



 한편 많은 제사장들은 로마군들이 손에 칼을 들고 자기들을 향해 돌진해 오는 것을 보고도 전혀 동요됨이 없이 하느님께 계속 제사륻 드렸으며, 전제(drinkoffering)를 드리며 향을 피우다가 죽임을 당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구차히 유지하기 보다는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의 의무를 행하다가 숨지기를 원했다. 그런가 하면 많은 유대인들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자결했다. 또 어떤이들은 너무나 큰 혼란에 어쩔줄 몰라 하다가 성벽근처에 있는 건물에 불을 지르고는 함께 타죽기도 했다. 12,000명의 유대인이 죽임을 당했고 로마군은 부상자는 다수가 발생했으나 전사자는 매우 적었다.



 6. 〔공개된 성전의 모습과 폼페이에 의해 힐카누스가 다시 대제사장이 됨〕



 유대인들이 이때 당한 재난 중에서 여태껏 아무도 들여다 볼수 없었던 성전이 이방인들에게 노출되어야만 했던 것만큼 유대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재난은 없었다. 왜냐하면 폼페이와 그 휘하 참모들이 성전 안으로 들어갔는데 이 성전은 대제사장 외에는 결코 어느 누구도 감히 들어갈 수 없는 곳으로, 이들은 성전에 들어가서 그 안에 놓여있는 것들을 보았다. 거기에는등잔, 촛대, 진설상, 그릇과 향료 등이 있었는데 모두 금으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상당히 많은 향료가 쌓여 있었으며 2천 달란트의 거룩한 돈이 있었다. 그러나 폼페이는 돈이라든가 그곳에있던 어느 것도 손대지 않고 성전을 장악한 바로 다음날에 제사장들에게 성전 주위를 깨끗이 하고 계속 제사를 드리라고 명했다. 그리고 폼페이는 포위 공격시 대단한 지략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사정이 달랐더라면 아리스토불루스를 위해 싸웠을지도 모를 많은 유대인들을 저지시킨 수단을 인정받은 힐카누스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이런 수단으로 인해 폼페이는 명장의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억압보다는 유화정책을 써 유대 백성과 화해하려고 했다. 포로들 중에는 아리스토불루스의 장인이 있었는대 이 자는 아리스토불루스의 숙부가 되는 사람이었다.[㈜ 압살롬이라고 칭해짐(고대.14권. (71)).] 가장 죄가 많다고 생각되는 자들을 폼페이는 참수했으며 파우스투스(Faustus)와 또 용감하게 싸운 자들에게는 영광스런 선물로 포상했고 유대와 예루살렘에도 공물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7. 유대 땅의 재분배



 폼페이는 또한 유대인이 이전에 장악했었던 코엘레수리아(Coele-Syria)에 속했었던 모든 도시들을 빼앗아 그때에 로마총독으로 임명되었던 자에게[㈜ \”특별히\”, 혹은 추측컨대 \”그 지역에 배치되었던 로마의 총독.\”] 귀속시키고 유대를 원래의 경계선으로 한정시켰다. 그는 또한 가다라(Gadara)를 재건하였는데, 이 가다라는 유대인들이 파괴했었던 곳인데 폼페이가 이 곳을 재건한 이유는 그곳 주민이었으며 자유인이었던 데메트리우스(Demetrius)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또 중부지역에 있던 다른 도시들도 유대인들의 영역에서벗어나게 해주었는데 이 도시들은 파괴되지 않았던 도시들로써히포스(Hippos)와 스구도볼리(Scythopolis) 또한 펠라(Pella)와[㈜ 고대.에는 디움(Dium)을 덧붙이고 있다.] 사마리아(Samaris)와 얌니아(Jamnia)와 마리사(Marisa)와 아소도(Azotus)와 아레두사(Arethusa) 그리고 해변가에 위치한 도시들 가사(Gaza), 욥바(Joppa), 도라(Dora)들이었고,또 이전에는 스트라토의 망대((Strato\’s Tower)라고 불렀으나후에 큰 건물들을 건축하여 재건한 헤롯 왕이 가이사랴(Cae-sarea)라고 명명한 곳도 유대에서 벗어났다. 폼페이는 모든 도들을 원래의 주민들에게 돌려주었으며, 이 모든 도시들을 수리아의 직권 하에 두었다. 유대와 더불어 애굽(Egypt)과 유브라데(Euphrates)강까지 폼페이는 이 도시들의 총독으로 스카우루스(Scaurus)를 임명하고 그를 위해 2개의 군단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폼페이는 아리스토불루스와 그 자녀들을 포로로 잡고 길리기아(Cilicia)를 거쳐 로마로 서둘러 갔다. 아리스토불루스는 아들 둘, 딸 둘의 자녀가 있었는데 두 아들 중 알렉산더(Alexander)는 포로로 끌려가던 중 탈출하였으나 다른 아들 안티고누스(Antioonus)는 누이들과 함께 로마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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