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권 제 9장 살로메의 죽음과 헤롯과 빌립이 세운 도시들, 그리고 빌라도가 소요를 일으키게 한 것과 디베료가 아그립바를 감금했으나 가이우스가 그를 풀어주고 왕으로 세운 것과 헤롯 안디바가 추방된 것에 대하여

 


제 9 장



살로메의 죽음과 헤롯과 빌립이 세운 도시들, 그리고 빌라도가 소요를 일으키게 한 것과 디베료가 아그립바를 감금했으나 가이우스가 그를 풀어주고 왕으로 세운 것과 헤롯 안디바가 추방된 것에 대하여



1. 분봉왕 빌립과 헤롯 안디바



 아켈라오의 영역이 한 지방으로 줄어들 때도, 빌립과 헤롯 안디바 등 다른 두 왕자들은 각자의 영역을 계속해서 다스렸다. 살로메는 죽을 때[㈜ 제2대 행정 장관인 암비비우스(Ambivius, 주후 9-12)의 치하에서 일어난 죽음. 고대. 18권. 2:2(31). 헤롯 왕국 분할에 있어서 그녀의 몫에 관하여는 전쟁. 2권. 6:3(98)을 보라. 얌니아(Jamnia)는 블레셋의 저지대(lowland)와 요르단 계곡의 파사엘리스(Phaselis)에 있었다. 고대 18권 31에는 아르켈라이스가 율리아의 유산 목록에 추가되어 있다.] 자신의 영토를 얌니아(Jamnia)와 파사엘리스(Phasaelis)의 작은 정원과 함께 아구스도의 아내인 쥴리아에게 남겨주었다. 아구스도가 57년 6개월 2일 동안의 통치 끝에죽게 되자[주후 14년],[㈜ 고대.18권.:2(32)에서도 재언급되고 있는 이 숫자는 대략 한달이 더 길게 기록되어 있다. 가이사(Caesar)가 죽은 때(주전44년 3월 15일)로부터 아구스도(Augustus)가 죽은 때(주후 14년 8월 19일)까지의 기간은 57년 5개월 4일에 해당한다. 이것은 가르드타우센(Gardthausen)이 제안한 대로 2일간의 차이는 가이사의 유언장이 공개된 3월17일부터 계산하여 4일이 2일로 감소되었기 때문에 나온 수치일 것으로 라이나흐는 말한다. 또 한달의 차이는 5와 6을 혼동해서 착오를 일으킨 것이라고 주장한다.] 로마의 황제권은 율리아의 아들인 디베료에게 넘어갔다.[㈜ 그녀의 전 남편인 디베료 글라우디오 네로(Tiberius Cladius Nero)의 아들.] 그가 즉위한 후로도 헤롯(안디바)과 빌립은 계속해서 자기 영역을 다스리며, 도시를 건설하였다. 빌립은 파네아스(Paneas) 지역의 요단강 수원지 부근에 가이사랴를[㈜ 신약의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 Philippi).] 세우고, 또 가울라니티스 저지대에 율리아스를[㈜ 요단 동편, 갈릴리 바다 어귀의 북부에 위치한 벳새다 율리아스(Bethsaida Julias). 고대. 18권. 2:1(28)에 의하면 이 지방의 이름은 아구스도의 딸인 율리아(Julia)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쉬러(Schurer)는 그녀가 주전 2세기에 추방되었기 때문에 이 도시가 필립에 의해 재건된 시기는 이 때보다 더 이전임에 분명하다고 추정한다.] 건설했다. 헤롯은 갈릴리 디베랴를, 또 페라이아 지역에 역시 율리아의 이름을 딴 도시를 건설하였다.[㈜ 페라이안 율리아스. 전쟁.2권. 4:2(59)에 보면 이전의 이름은 베다라마다(Betharamatha)였는데 여리고(Jerico)의 맞은 편에 있는 곳으로서 여제(女帝)인 율리아(Julia) 또는 리비아(Livia)와 동일 인물<고대. 18권. 2:1(27)>의 이름을 따라서 붙여진 것이다. 다른 작가는 이를 리비아스(Livias)로 부르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이 도시의 창건자의 이름을 따 붙인 것일 것이다.]



 2. 가이사의 동상 사건으로 유대인을 분노케 한 빌라도 (A.D. 26-36)



 디베료의 명으로, 유대 총독으로 부임한 빌라도는 밤을 타서 몰래 가이사의 동상들을 예루살렘으로 들여왔다.[㈜ 고대.18권. 3:1(55)에는 보다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기둥이 부착되어 있는 가이사의 흉상(혹은 초상화)\” 타키투스(Tacitus)의 저술에 보면 어떻게 이러한 황제의 초상이 시민들에 의하여 파손되어졌는가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 날이 밝아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대인들 사이에 심한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현장에 모인 유대인들은 도시에 그 어떤 형상도 세워선 안된다며, 그들의 율법이 묵살당하는 것에 대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도시인들의 분노는 각지의 백성들까지 뒤흔들어 놓았고, 계속해서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유대인들은 가이사랴로 몰려가서 빌라도에게 가이사의 동상을 없애고 조상들의 율법을 지키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빌라도가 이를 거절하자 그의 집 주위에 엎드린 채 5일 동안 밤낮 가리지 않고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있었다.



3. [동상을 세우지 못함]



 다음날 빌라도는 광장의 재판석에 앉아 군중들을 소집하여 그들에게 분명한 뜻을 밝히기 위해 무장한 군인들을 동원해 유대인들을 둘러싸게 했다. 군인들에 의해 겹겹히 포위당하자, 유대인들은 이 뜻하지 않은 상황으로 몹시 당황해 했다. 이에 대해빌라도는 가이사의 동상을 받아들이길 거절한다면 모두 처형시켜 버리겠다고 위협하면서 군인들에게 칼을 뽑도록 명령했다.이렇게 되자 유대인들은 한결같이 광장 가운데서 목을 내밀며율법을 어기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면서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이같은 종교적 열정에 경악을 금치 못한 빌라도는 즉시 예루살렘에서 가시아의 동상을 치우도록 명령했다.



4. 수로(水路) 사건



 그 뒤, 그는 수로 공사에 코르보나스(Corbonas)라고 알려진 성소의 보물을 비용 충당을 위해 처분함으로써, 또 한번의 소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공사는 약 400퍼얼롱(1퍼얼롱은 1/8마일 정도의 길이단위) 정도 떨어진 곳에서 물을 끌어오는 것이었다. 이에 분개한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빌라도가 찾아오자 매우 분개하며 빌라도의 법정을 에워싸고 그를 포위하려고 하였다.사태의 심각성을 판단한 빌라도는 군인들을 무장시키고, 일반시민의 복장으로 위장해서 군중들 속으로 투입시켜 칼을 쓰지는말고 진압봉만을 사용하여 선동자들을 잡아들일 것을 명령했다. 미리 약속한 대로 빌라도가 재판석에서 신호를 보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그 중에는 맞아 죽은 사람도 있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자기네들끼리 깔려서 죽었다. 이렇게 많은 희생자들이 나오게 되자 겁에 질린 유대인들은 그제서야 잠잠해졌다.



5. 로마의 헤롯 아그립바[주후 36년]



 이때, 아버지 헤롯에 의해 죽임을 다한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인 아그립바는[㈜ 전쟁.1권.27:6 (551).] 디베료를 찾아가서, 분봉왕 헤롯을 비난하고 나섰다.[㈜ 고대.18권에 보면 전체 이야기에 관하여 보다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의 방문의 목적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의 방문은 \”디베료가 죽기 이전 해\”에 이루어 진 것이다. (고대.18권. 5:3(126)).] 그런데 황제가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아그립바는  계속해서 로마에 머물며 여러 유명인사들에게 이 문제를 제기했는데 특히 게르마니쿠스의 아들인 가이우스에게 적극적으로 호아그립바는 헤롯왕의 손자이며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이다 그의 할머니는 하스모네안 왕가의 마지막 남은 마리암메이다. 그는 어떠한 공격도 막을 수 있는 높이의 예루살렘 성벽을 쌓고자 했으나 공사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소하였다. 당시 그는 일개 시민일 뿐이었다. 한번은 가이우스를만찬에 초대하여 환대하였는데, 아그립바가 일어나서 갖은 찬사를 가이우스에게 베풀고, 잔치가 끝날때 쯤 하늘을 향하여 양손을 들고 디베료가 죽고 가이우스가 황제가 되기를 원한다는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이 소식이 아그립바의 한 식솔에[㈜ 그의 해방 노예이자 마부인 유티쿠스(Eutichus). 고대.18권. 6:5(168)에 나온 설명에 의하자면 이러한 말들은 저녁 식사시에 한 것이 아니라 마차를 타고 가면서 한 것이다.] 의해 디베료에게 전해지자 분노에 찬 디베료는 당장 아그립바를 감옥에처넣고, 자신이 죽을 때까지 6개월 동안 혹독하게 다루었는데,디베료는 22년 6개월 3일간을 통치하고 막을 내렸다.[㈜ 고대.18권.6:10(224)에 보면 22년 5개월 3일로 나와 있다.(숫자5를 6과 혼돈하고 있는 사실에 관하여는 전쟁.2권. 9:1(168)각주90)을 참조하라). 그러나 어떠한 진술도 우리의 일반 역사 자료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 통치 기간은(아구스도가 죽은) 14년 8월 19일로부터 37년 3월 16일(타키투스 ; 혹은 3월 26일,Dion)까지 즉 22년 6개월 28일 (혹은 2년 7개월 7일)간이었다.][주후 37년 3월].



6. 가이우스가 즉위하여 아그립바를 석방시켜서 왕이 되게 하다



 가이우스가 황제에 즉위한 후 아그립바를 풀어주고 그에게 왕의 칭호와 함께 얼마 전에 죽은 빌립의 영토를 주어 다스리게 했다.[㈜ 그는 디베료의 재위 20년 되는 해, 즉 주후 33-4년에 죽었다(고대.18권. 4:6(106)).] 아그립바가 그의 영토가 된 지역에 도착하자[㈜ 주후 38-39년] 분봉왕 헤롯이 그를 시기하고 자신도 야심을 품게 되었다. 게다가 누구보다도 아내인 헤로디아가 그를 부추기어 왕위를 넘보게 했다. 헤로디아는 그냥 주저앉아 있는 그를 나무라면서 당장 마음을 잡고 그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가이사를 찾아가라고 했다. \”아무것도 아닌 아그립바를 왕으로 삼았다면, 분봉왕에게도 기꺼이 같은 지위를 줄 것입니다.\”라면서 그녀는 헤롯을 부추기었다. 이러한 간청에 못이겨 헤롯은 가이우스를 찾아갔다. 그러나 가이우스는 헤롯의 탐욕을 비난하고 이를 구실로 그를 스페인으로[㈜ 고대. 18권. 7:2(252)에 의하면 골(Gaul) 지방에 있는 리용(Lyons).] 유배를 보내버렸다. 뿐만 아니라 가이우스는 헤롯을 비난하기 위해달려온[㈜ 고대. 18권. 7:2247)에 보면 아그립바(Agrippa)는 안디바(Antipas)를 용서하기 위하여 해방 노예인 포르투나투스(Fortunatus)를 보냈다.] 아그립바에게 헤롯의 영토까지도 주어 다스리게 하였다. 따라서 부인 헤로디아도 헤롯이 유배된 스페인으로 추방당하였으며 마침내 헤롯은 그곳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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