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권 제 11장 글라우디오의 통치와 아그립바의 통치에 대하여, 아그립바와 헤롯의 죽음과 그들의 유족 자녀들에 대하여

 


제 11 장



글라우디오의 통치와 아그립바의 통치에 대하여, 아그립바와 헤롯의 죽음과 그들의 유족 자녀들에 대하여



1. 글라우디오의 즉위



 가이우스가 3년 8개월만에[㈜ 고대.19권. 2:5(201)에 이처럼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3년 10개월을 넘는 기간이다(주후37년 3월 16일로부터 41년 1월 24일).] 암살당하자,[㈜ 마침내 이러한 살해에 관한 이야기는 고대.19권에 실려 있다. 여기에서 이 기사가 책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글라우디오(Claudius)가 등극할 때 아그립바가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고대. 보다도 전쟁.에 잘 나와 있다.] 로마의 군부는[㈜ 집정관의 경호원.] 무력으로 글라우디오를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원로원은센티우스 사투르니우스, 폼포니우스 세쿤두스 등 집정관들의 동의하에 자기들을 따르는 3개 부대에[㈜ 고대. 19권. 2;3(188)에 의하면 4개 군단.] 도시의 방어를 맡겨놓고 카피톨(쥬피터의 신전)에 모여 가이우스의 야만성을 성토하면서 글라우디오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그들은 이전의 귀족정치 체제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투표를 통해 황제가 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을 선출할 것을 결의했다



2. 아그립바가 글라우디오와 원로원 사이의 중재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다



 그 당시에 아그립바는 로마에 있었는데 원로원에서도 그에게 협의를 요청해 왔고, 글라우디오의 진영에서도[㈜ 집정관의 군부대로서 주후 23년 고대 성곽의 바깥쪽, 로마의 북동쪽에 세야누스(Sejanus)가 설립하였다. 그러나 후에 아우렐리안 성곽 안에 포함되었다. 이 터는 오늘날 이달리야 군대의 병영으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 한번 방문해줄 것을 요청했다. 즉 양편 모두가 이러한 위기 상황의 극복을 위해서 아그립바가 나서 줄 것을 간청했다. 이에 아그립바는 일단글라우디오가 그 힘을 배경으로 한 잠정적인 황제임을 인정하면서 먼저 그를 찾아갔다. 글라우디오는 아그립바를 다시 자신의사절로서 원로원에 보내 뜻을 전달하게 했다. 그는 먼저 군인들에 의해 즉위하게 되는 것은 자신도 원치 않지만, 자신의 충복들의 뜻을 배반하는 것 역시 옳지 못하며 주어진 운명을 거스리는것은 오히려 위험스럽기까지 하다는 것이었다.[㈜ 헬라어로는 동사가 없다. 라이나흐는 이 본문에 의문점을 느꼈다.] 또한 글라우디오는 황제의 칭호를 이미 수락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며, 폭군으로서가 아니라 덕망을 갖춘 통치자로서 제국에 선정을 베풀 것이라고 했다. 또한 그는 칭호만으로도 만족할 것이며 모든 일에 백성들의 뜻을 존중하고 가이우스의 종말을 보면서 얻은 교훈대로 항상 중용을 지키며, 신중한 정치를 펼 것이라고 했다.



 3. [원로원의 결심에 대한 글라우디오의 엄포]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원로원은 군대와 모든 지혜를 모아 결코 자청하여 노예 상태로 하락하는 굴복은 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이에 대해 글라우디오는 다시 아그립바를 보내어 그는 결코자신을 전원일치로 황제의 자리에 올린 자들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며,[㈜ 달리 읽는다면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이 된다.]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과 싸울 수밖에 없다고 전하였다. 또한 원로원의 고집으로인해 성지가 자녀들의 피로 물들지 않기를 바란다면 도시 밖에 전투지를 따로 마련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아그립바는이 소식을 가지고 원로원을 찾아갔다.



4. [일부 군인들의 이탈로 아그립바의 중재가 성공함]



 협상하고 있는 도중에 원로원을 따르던 군인 중 하나가 칼을 뽑아들고 이렇게 외쳤다. \”전우들이여 우리에게는 흠잡을 데 없는 황제가 이미 있다. 또한 지금 우리가 전쟁을 벌이려 하는 그들은 우리와는 나눌 수 없는 동지가 아닌가, 그런데 왜 우리가 우리의 형제를 죽이려 하며 왜 글라우디오에게 속한 우리의 친척들을 죽이려고 하는가?\” 이 말과 함께 그는 원로원을 박차고 나가자 뒤를 이어 그의 동료 군인들도 따라나갔다. 갑작스런 이탈에 귀족들은 순간적으로 당황하였다. 그러나 아무 대책도 없는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따라 글라우디오에게로 향했다.이러한 상황에서 출세길을 터 볼려고 하는 군인들이 싸울 태세를 하고 성 밖에서 원로원 의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리하여 아그립바는 즉시 글라우디오에게로 달려가서 상황을 설명하면서 지금 그냥 내버려 둔다면 흥분한 군인들이 귀족들을 모두 죽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는 최고 권력자로서의 영예를 완전히 잃게 되며, 광야의 독불장군 꼴이 되어 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아그립바를 통해 글라우디오가 이 소식을 듣지 못했다면 모든 귀족의 목숨이 위태로웠을 것이다.



 5. 유대 왕이 된 아그립바



 이 소식을 듣고 글라우디오는 즉시 군인들을 진정시키고 원로원 의원들을 진영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나서, 그들을 환대한후 그는 그들과 함께 곧바로 그의 황제 즉위를 감사하는 제사를 드리러 갔다. 곧이어 그는 아그립바에게 그의 조부가 다스리던전 왕국과 함께 아구스도가 헤롯에게 주었던[㈜ 전쟁.1권. 16:3(308).] 드라고닛과 아우라니티스 지역과 리사니아스 왕국이라 이름하던 공국(Prin-cipality)까지 하사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아빌라(Abila)(다메섹의 북동쪽)와 레바논의 일부 지역(고대.19권. 5:1(275)). 칼리굴라가 이미 아그립바에게 주었던 곳이다. 고대. 18권. 6:10(237) ; 글라우디오는 단지 이 선물을 승인해준 것이다.] 글라우디오는 백성들에게 칙령으로 이 사실을 반포하면서 행정관에게 명하여 동판에다 새겨서 카피톨(Capitol)에 갖다 놓으라고 명했다. 더욱이 그는 아그립바의 형제이면서 그 딸 버니게와의[㈜ 버니게(Bernice)는 헤롯의 두번째 아내였다. 그는 이전에 대헤롯의 손녀인 마리암메(Mariamme)와 결혼하였다(고대. 18권. 5:4(134)).] 결혼으로 사위도 되는 헤롯에게는 칼키스 왕국을 주어 다스리게 했다.



 6. 아그립바 Ⅰ세의 통치와 죽음



 엄청나게 늘어난 영토로 인해 부(wealth)가 아그립바에게로 돌아갔지만 그는 모인 재물을 애써 쓰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제그는 그것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두르는 성벽을 쌓으려 했다.[㈜ 성읍의 북서쪽에다 벳세다, 혹은 신도시의 외곽 지역을 둘러싸기 위한 것임(전쟁.5권.4:2(151)이하, 고대.19권.7:2(326)).] 만일 그가 완성을 보았더라면 후일 로마인들이 포위해 왔을 때도 도저히 함락시킬 수 없었을 정도의 큰 규모의 공사였다. 그러나 계획한 높이만큼 쌓아 올라가기 전에 그는 가이사랴에서 죽었다[주후 44년].[㈜ 이 일은 글라우디오의 명령을 받은 수리아의 총독인 마르수스(Marsus)에 의하여 아그립바가 죽기 이전에 중단되었다(전쟁.5권. 4:2(152), 고대.19권. 7:2(326)이하).] 그는 3년 간을 통치하였는데 거기다가 분봉왕으로 있던 3년도 더해야 할 것이다.[㈜ 고대.19권. 8:2(351)에 보면 보다 상세한 설명이 나와있다. 그는 가이오의 전통치 기간(주후 37-41년)인 4년과 글라우디오의 통치하에서 3년(주후 41-44년)동안 통치하였다. 그는 처음 3년 동안 빌립과 리사니아스의 분봉 왕 자리를 장악하였다. 또한 4년째에는 헤롯 안디바의 지역도 차지하였다. 이 구절에 나오는 그의 \”통치\”는 대헤롯의 왕국의 영토를 다스렸던 것만을 의미한다.] 그는 부인 키프로스(Cypros)를[㈜ 조카인 파사엘(Phasael)과 대헤롯의 딸인 살람프시오(Salampsio)의 딸 (고대. 18권. 5:4(130)이하)] 통해 낳은 세 딸-버니게, 마리암메, 드루실라-과 아들 아그립바를 남겼다. 글라우디오는 막내가 너무 어려서[㈜ 그는 17세였다 (고대. 19권. 9:1(354)).] 왕국을 다시 한 지역으로 축소시켜 쿠스피우스 파두스,[㈜ 주후 약 44-45년.] 디베료 알렉산더[㈜ 주후 약 46-48년. 알렉산드리아의 뛰어난 유대인 가족 중에는 알라바르크 알렉산더(Alabarch Alexander)의 아들과 필로(Philo)의 조카를 들 수가 있다. 그들은 로마인으로서의 자격을 얻어내기 위하여 유다이즘을 포기하였다.] 등의 총독을 보내어 다스리게 했는데 디베료 알렉산더는 특히 지역 주민의 전통에 대해 전혀 간섭하지 않음으로써,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후로 칼키스의 왕 헤롯도 죽었는데[주후 48년], 그는 질녀인 버니게와 결혼해서 낳은 두 아들 베르니키아누스와 힐카누스와 그전 부인인 마리암메를 통해서 아리스토불루스를 남겼다. 다른 형제인 아리스토불루스는[㈜ 즉, 아그립바의 형제.] 평범하게 살다가 딸 요타페(Jotape)를[㈜ 그녀의 어머니인 에메사(Emesa) 공주의 이름을 따서 불렀다. (고대. 18권. 5:4(135)).] 남기고 죽었다. 앞서 말했듯이 이들 세 형제는[㈜ 아그립바, 칼키스(Chalchis)의 헤롯, 아리스토불루스.] 헤롯의 아들인 아리스토불루스의 자녀들이다. 아리스토불루스와 알렉산더는 헤롯이 마리암메를 통해서 낳은 자들이며 그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알렉산더의 후손은 아르메니아 제국의 왕위를 이어갔다.[㈜ 알렉산더Ⅱ세(Alexander Ⅱ)와 티그라네스(Tigra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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