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권 제 19장 케스티우스가 유대인들에게 저지른 만행과 예루살렘을 공격하다 합당한 이유도 없이 철수한 것과, 또한 철수하다 유대인들에게 당한 엄청난 재난에 대하여

 


제 19 장



케스티우스가 유대인들에게 저지른 만행과 예루살렘을 공격하다 합당한 이유도 없이 철수한 것과, 또한 철수하다 유대인들에게 당한 엄청난 재난에 대하여



1. 케스티우스가 예루살렘으로 진군함



 갈루스는 갈릴리에서 더 이상 반역의 조짐이 없다고 보고 그의군대와 같이 가이사랴로 돌아갔다가 전군을 움직여 안티파트리스(Antopatris)로[㈜ 욥바(Joppa)의 북동쪽 샤론(Sharon)평지.] 진군했다. 그는 아페쿠(Apheku)라[㈜ 혹은 아마도 \”아펙(Aphek)이라는 이름을 따라 명명되었을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같은 이름이 여러 장소들에 붙여 있다.: 이곳은 샤론에 있는 아펙일지도 모른다(수12:18, 몇몇 70인역 사본들). 가이사랴(Caesarea)의 남동쪽 el Mejdel과 확실치 않지만 동일 지역으로 여겨짐.] 불리는 어떤 망루에 많은 유대병력이 모여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들과 싸우기 전에 한 부대를 보냈다. 그러나 이 부대는 싸우기도 전에 유대인들을 위협함으로써 그들을 분산시켰다. 그리하여 로마군이 그곳에 침입했을 때는 유대인들이 막사를 비워두고 아무도 없었다. 이에 로마군들은 빈 막사와 이웃 마을에 불을 질렀다. 그후 케스티우스는 안티파트리스에서 룻다(Lydda)로[㈜ 안티파트리스(Antipatris)의 남쪽에 있는 룻(Ludd)은 북쪽 도로가 욥바로부터 벧호론(Beth-horon)을 경유하여 예루살렘으로 난 경로와 만나는 지점에 있다.] 진군했다. 그러나 그 도시도 텅비어 있었다. 왜냐하면 그곳에 살고 있던 대부분의 주민들이 장막절(Feast of Taberna-cles)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고 없었기 때문이다.이에 케스티우스는 자기 눈에 띄인 주민 50명을 죽이고 도시에 불을 지르고 진군해서 벧호론(Bethhoron)까지 진격한 후 예루살렘에서 50퍼얼롱 거리인 가바오(Gabao)라[㈜ 구약성경의 기브온(Gibeon)은 현지명이 el Jib으로 예루살렘의 5~6마일 북서쪽에 있다 : 고대. 7권(283)에 표기된 거리는 불과 40퍼얼롱(furlongs 또는 stadia)이다. 벧호론(Beth-horon)에 관해서는 전쟁.2권. 19:8 (547) 각주 290을 보라.] 부르는 어떤 도시에 진을 쳤다 [주후 66년 약 10월, 유대력 디스리 월 15~22일].



 2. 예루살렘 지경 밖으로의 유대인들의 성공적인 공격



 그러나 유대인들은 전쟁이 예루살렘에서 머지 않아 터질 것을 알고 절기를 지키는 안식일에는 먼저 적군을 공격해서는 안된다는 규례도 잊어버린 채 그들은 자신들의 수가 많은 것에 용기를 얻어서 갑작스럽고 무질서하게 큰 소리를 지르면서 싸움터로 갔다. 안식일이 가장 중요한 날이었음에도 서둘렀다.[㈜ 초막절(the Feast of Tabernacles)주간에 함락됨.] 그들의 종교적 지식조차 잊게 했던 분노는 전투에서 그들의 적들을 매우 곤란하게 했다. 유대인들은 그런 기세로 로마군들을 공격했는데 그들의 봉쇄를 돌파하고 중심부로 진격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살상이 있었다. 피곤에 지치지 않은 기병과 보병이 돌아가며, 아직 전열이 깨지지 않은 부대를 구조해 주지 않았다면 케스티우스와 그의 전군은 위험에 처했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군 515명이 전사했는데 그중 400명이 보병이고 나머지는 기병이었다. 반면 유대인들은 22명 만을 잃었을 뿐이었다. 그중 가장 용감한 사람은 아디아베네(Adiabene) 왕 모노바주스(Monobazus)의[㈜ 모노바주스(Monobazus) 왕은 뒤이어 왕위를 계승한 형제 이자테스(Izates)와 그의 모친 헬레나(Helena)와 같이 유대교로 개종하였다 : 참). 전쟁. 2권. 16:4(388)각주.] 친척이었다. 모노바주스(Monobazus)와 케네다이우스(Ceneda-eus) 그리고 그들 위에 페라이아(Perea)의 니게르(Niger)와 왕의 군대에서 근무했지만, 아그립바 왕을 버리고 유대인에게 온 바벨론(Babylon)의[㈜ 아마도 바벨론 유대인 이민단의 하나는 Batanaea에 정착했을 것임(자서. 11(54)각주).] 실라(Silas)였다. 유대군은 전면 공격이 차단되자 예루살렘으로 퇴각했다. 그러나 기오라(Giora)의 아들 시몬(Simon)은 그곳에 남아서 벧호론으로 올라가는 로마인들의 후방을 공격하여서 그 군대의 최후방을 혼란케 했고 전쟁 무기를 싣고 가는 많은 짐승들을 나꿔채 예루살렘으로 그것들을 끌고 왔다. 케스티우스는 거기서 3일 동안 체류했는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고지를 장악하고 그 도시로 들어오는 입구에 파수를 하게 하고 로마군이 진군하기 시작하면 방관하고 있지만은 않겠다고 확연한 결의를 다짐하였다.



3. 아그립바가 헛되이 유대인들과 협상을 시도하다



 한편 아그립바는 엄청난 유대인들이 산의 주변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전력이 우세한 로마군일지라도 위험에 빠지기 쉽다는 것을 알고 대화로써 유대인들을 설득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유대인 가운데 전쟁을 원치 않는 자들의 숫자가 우세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그들 중 온건한 자들을 주전론자들로부터 분리시키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그의 부하인 보르키우스(Borcius)와 포에부스(Phoebus)에게 유대인들이 무기를 버리고 나오면 그들이 행한 실수에 대해서 전로마인들이 용서해주고 화해를 청하게 하겠다는 화친서를 주어보냈다. 그러나 주전론자들은 많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안전을바래서 아그립바에게 가지 않을까 걱정하였기 때문에 사신이 당도하는 즉시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포에부스는 말 한마디도 해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나 보르키우스는 다행히 상처만 입고 도망쳐서 그의 목숨을 보존했다. 백성들은이에 매우 분개하여 반역자들을 돌과 몽둥이로 쳐서 먼저 그들을 도시로 쫓아보냈다.



 4. 케스티우스가 벳세다의 외곽을 점령하다



 한편 케스티우스는 유대인들 중에 혼란이 시작된 것을 공격의 적기로 보았으므로 전군을 이끌고 유대인을 공격하였다. 그는 예루살렘까지 그들을 추격했다. 그는 스코푸스라고[㈜ 북서쪽에 있는 언덕으로 예루살렘과 경치를 조망할 수 있었음(고대.11권. 8:5(329)에서는 그곳을 Saphein(사페인)이라 불렀음).] 불리는고지 위에 진을 쳤는데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7퍼얼롱 되는 거리에 있었다. 그는 유대인들이 조금이라도 항복하지 않을까 하는기대로 거기서 3일 동안 머무르며 그들을 습격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그는 양식을 얻기 위해 인근 마을로 그의 많은 병사들을 보냈다. 나흘 되는 날 휘페르베레투스(Hyperberetus) 달의13일이었는데 [주후 66년 11월][㈜ 니이제(Niese)의 계산에 따르면 11월 17일임.] 그는 군대를 정렬하여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 사람들은 반역자들에 의해 억압받고 있었는데, 반역자 자신들은 로마군들의 질서 정연함에 크게 겁먹고 도시 외곽에서 물러나 시내와 성전으로 도망했다.[㈜ 그들은 감당할 수 없어서 미완성의 세번째 벽의 공사를 포기했다(그 벽은 아그립바Ⅰ세의 것으로, 전쟁.2권. 11:6(218)을 보라):케스티우스(Cestius)는 예루살렘 북부를 둘러싸고 있는 두번째 성벽으로 접근해 왔다: 두 벽 사이에 있는 북쪽 근교 벳세다(Bezetha)에 관해서는 전쟁. 2권. 15:5(328)을 참고하라.] 케스티우스는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새 도시라고 불리기도 하고 벳세다(Bezetha)라고 불리기도 하는 곳에 불을 질렀다. 그는 또한 목재 시장에도 불을 지른 후 상부 도시로 와서 왕궁 맞은 편에 진을 쳤다. 그런데 그가 바로 이때 무력으로 성벽 안으로의 진입을 시도하기만 했으면, 곧 그 도시를 장악하여 전쟁이 끝났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둔군 사령관인[㈜ 병참 최고 책임자.] 티란니우스 프리스쿠스(Tyr-annius Priscus)와 기병대의 많은 장교들이 플로루스에게 뇌물을 받고 케스티우스의 시도를 말렸다. 이것이 전쟁이 그토록 장기화되고 그리하여 유대인들이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당하게된 이유이다.



5. 내성(內城)과 성전에 대한 공격



 그러는 동안 예루살렘의 많은 주요 인사들이 요나단(Jonathan)의[㈜ 요나단(Jonathan)은 아마도 대제사장이었을 것이며 시카리파(Sicarii)의 첫 희생자이었을 것이다. 전쟁.2권. 13:3 (256).] 아들 아나누스(Ananus)에게 설득당해 케스티우스에게 사람을 보내 문을 열어줄 것이니 도시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케스티우스는 부분적으로는 유대인들에 대한 분노와 멸시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그들을 완전히 믿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제의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폭도들은 성문을 열어주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아나누스와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에게돌 세례를 퍼부어 성벽에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리고 반역자들은 망루에 자기 편을 배치하고 성벽을 넘어오려는로마군에게 창을 던졌으므로 로마군들은 5일 동안 성벽을 공격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그러나 다음날 케스티우스는 많은 정예병사와 궁수들을 데리고 북쪽 성벽을 쳐부수고 성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회랑에서 그들의 공격을 피했다. 로마군은 유대인들이 성벽 가까이에 있을 때 몇번 공격을 하였으며, 결국 빗발치는 화살은 유대인들의 사기를 꺾었다. 최전방의 로마군은 그들의 방패를 성벽 위에다 갖다 대고, 바로 그 다음 열(列)에 있는 병사들의 방패는 전열(前列) 병사들의 방패에갖다 대고, 나머지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정열하여 \”거북이등(the tortoise)\”이라고 불리는 밀집 대형을 형성하여[㈜ testudo(귀갑<龜甲>모양의 큰 방패로 성벽을 공격할 때 병사를 보호하기 위하여 썼음-역자주).] 자신을보호하고 전혀 부상도 입지 않고 벽을 파고 성문에 불을 붙일 모든 준비를 했다.



 6. [전쟁의 지연]



 이에 반역자들은 무서운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많은 반역자들은 예루살렘이 로마군의 수중으로 넘어가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하고 도시를 빠져 도망갔다. 이들이 퇴각하자 백성들은[㈜ 즉 온건한 사람들] 용기를 얻어서 성문쪽으로 몰려가서 성문을 열고 케스티우스를 그들의 은인으로 맞아들이려고 했다. 이때 케스티우스가 좀더 오래 공격을 계속했더라면 확실히 도시를 장악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그날로 바로 끝나지 못했던 것은 하느님께서 그 이단자들을 미워하신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7. 케스티우스가 이유없이 퇴각하다 당한 재난



 그때 케스티우스는 포위당한 반역자들이 절망했던 상황과 백성들의 본심을 알지 못한 채 아무런 패배도 당하지 않고도 그의군대를 소집하고 어떤 분명한 이유없이 그 도시에서 철수했다.강도들은 기대치 못했던 그의 퇴각을 알고서 용기를 되찾아서그 군대의 후미를 추격했다. 그리하여 상당수의 기병과 보병을 살해했다. 그때 케스티우스는 스코푸스에 진을 치고 하룻밤을 지냈다. 그는 다음날 더 나아가고자 하였는데 그를 따르는 적들이 있는 것을 알았다. 그 강도들은 후미를 치고 그들을 강타했으며 또한 군대의 양측을 공격하여 창을 던졌다. 후미에 있는 병사들은 그들을 추격하는 수가 많은 것으로 생각하여 후미를 공격하는 사람들을 대항하여 싸울 생각을 감히 못할 뿐 아니라 병사들이 중무장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전열이 흩어질까 두려워서 양측에서 공격해 오는 강도들을 공격하지도 못했다. 또한 병사들은 유대인들이 경무장을 해서 병사들을 습격할 모든 태세가 갖춘 것으로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로마군이 강도들을 보복해 보지도 못하고 큰 손실을 입은 이유이다. 로마군은 내내 고통받으면서 퇴각했고 대열이 무질서해지고 대열에서 빠져나온자들은 살해당했다. 그중에는 제6군단의 지휘관(the com-mander) 프리스쿠스(Priscus), 군단사령관(the tribune) 롱기누스(Longinus), 기병대 지휘관 에밀리우스 세쿤두스(EmiliusSecundus)도[㈜ 아마도 가이사랴에 주둔한 기병 사령관인 유쿤두스(Jucundus)와 동일인일 것이다. 전쟁.2권. 14:5(291).] 있었다. 로마군은 많은 물자의 손실을 입고서야 겨우 어렵게 이전의 진영인 가바오(Gabao)에 도착할 수 있었다. 케스티우스는 이틀 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이런 상황 하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몰라 많은 고민에 휩싸였다. 3일째되는 날 케스티우스는 수많은 적, 즉 유대인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알고서 더 오래 거기 머무르게 되면 더 많은 적으로 둘러싸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8. 벧호론(Bethhoron) 통과 장면



 그래서 케스티우스는 더 빨리 도망하기 위해 그들의 욕심을 억제하고 행군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들은 모두 던져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무기와 기구를 나를 짐승들만 제외하고 노새와 다른 짐승들을 모두 죽였다. 이것은 주로 유대인들이 그들을 습격하지 않을까 걱정해서였다. 케스티우스는 그의군대를 이끌고 벧호론(Bethoron)까지 퇴각했다. 평지에서는 로마군이 유대인들에게 쫓기는게 덜하였다. 그러나 좁은 골짜기의 내리막길[㈜ 북부 벧호론(1,730피트)으로부터 남부 벧호론(1,240피트)까지 ; 이 유명한 통로는 수많은 패배의 현장이었다(G.A. Smith, 성지(聖地) 역사 지리학, 210 이하). 고원지대(2,300피트)에 있는 두 개 지역의 벧호론을 지나서 여호수아(Joshua)가 가나안 다섯 족속의 왕을 추적한 연해(沿海) 평원에 이르는 이 동일한 길로 내려갔다(수 10:10 이하).]을 만나게 되자 이를 예상하고 미리 그곳에 선발대를 보냈던 유대인들에게 출구가 봉쇄되고 후미에서도 공격을 받아 골짜기로 몰리자 유대인 본대가 가장 좁은 곳의 고지를 점령하고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이런 상황에서 보병들은 어떻게 수비해야 할지 몰랐다. 기병들에게 위험이 더욱 가중되었다. 기병들은 맹공격을 당하면 그들의 대열을 따라 진군하지 못하고, 너무 높은 경사가 나타나면 적을 향해 나아갈 수도 없었다. 또한 절벽이나 골짜기로 자주 구르고 떨어졌다. 절벽이나 골짜기는 모두 그들이 도망하거나 숨을 만한 곳이 못되었다. 극도의 절망에 빠진 사람들처럼 그들은 비통하게 고함을 치며 애통해했다. 반면 유대인들 쪽에서는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분노하는 소리가 뒤섞인 함성이 메아리쳤다. 케스티우스와 그의 전부대가 포로가 될 뻔했다. 그러나 밤이 되어 로마군은 벧호론으로[㈜ 그 통로의 하단에 있는 남쪽 벧호론.] 간신히 도망했다. 유대인들은 벧호론을 에웠싸고 그들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9. 케스티우스의 도주



 한편 케스티우스는 드러내놓고 행군할 처지가 못되자 도망칠 방법만을 강구했다. 그는 용사 중 가장 용감한 자들 400명을 뽑아 벧호론 요새중 가장 견고한 곳에 배치시키고 병사들이 아침에 보초서며 올라갈 때 군기를 세워 유대인들로 하여금 모든 군사가 거기 여전히 있는 것처럼 믿도록 만들었다. 반면 케스티우스는 나머지 병사를 데리고 조용히 30퍼얼롱을 도망하였다. 유대인들은 아침에 막사들이 비어 있는 것을 알고 추격하여 창을던져 400명을 죽였다. 그리고 계속 케스티우스를 추격했다. 케스티우스는 이미 밤에 많은 거리를 도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낮이 되자 더빨리 행군했다. 이에 로마 병사들은 두려워서 공성장비와 투석기 등 많은 전쟁 무기들을 내버리고 달아났다. 유대인들은 로마군을 안티파트리스(Antipatris)까지 추격해 갔으나 그들을 잡을 수 없음을 알고 되돌아와서 장비들을 취하고 시신들에서 물건을 약탈하였다. 유대인들은 로마군들이 두고 간 것들을 노획하고 승리의 개가를 부르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이 전투로 유대인들은 약간의 손실만을 입은데 비해 로마군은 5,300명의보병과 380명의 기병이 전사했다. 이 패배는 네로 통치 제12년[㈜ 네로(Nero)의 왕위 계승 연대가 주후 54년 10월 13일이었기 때문에 요세푸스가 약간의 실수를 하였으며, 벧호론 전투가 그의 즉위 13년 초기에 일어난 것으로 보여진다.] 디우스(Dius)달 8일에 있었던 일이다[주후 66년 11월][㈜ 11월 25일(Ni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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