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권 제 9장 어떻게 욥바가 함락되고 디베랴가 점령되었는지에 대하여

 


제 9 장



 어떻게 욥바가 함락되고 디베랴가 점령되었는지에 대하여



 1. 베스파시안이 가이사랴와 스구도볼리에 군대를 숙영시 키다



 베스파시안은 파네무스(Panemus)달 4일에[㈜ 주후 67년 7월23일 (니이제의 계산에 의하면).] 군대를 이끌고 톨레마이스로 갔고 거기서 바다쪽의 가이사랴로 들어갔다. 그곳은 주로 헬라인 주민들로 이루어진 유대 최대의 도시들 중 하나였다.[㈜ 헬라 주민들이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헤롯이 성전을 재건한 때부터 그 도시는 \’항상 유대와 계속해서 연합하였다.\'(Schurer).] 주민들은 군대를 환영했고 온갖 표현을 다하여 장군을 찬양하며 경축하였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로마인에 대한 호의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정복당한 자(유대인)들에 대한 증오심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큰 소리로 외치며 한 목소리로 요세푸스를 벌 주자고 요구했다. 그러나 베스파시안은 군중의 요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그는 가이사랴가 겨울 숙영지(宿營地, quarter)로 적당한 것을 알고 3개 군단 중에서 2개 군단을[㈜ 5번째와 10번째(전쟁. 3권. 4:3(65)).] 그곳에 자리잡도록 했다. 또한 그는 전 군대가함께 있으면 가이사랴에 부담이 클까봐 제15군단은 스구도볼리(Scythopolis)로 보냈다.[㈜ 가이사량의 정동(正東)쪽으로 35마일 떨어진 벧산(Bethshan).] 가이사랴의 기후는 스구로볼리 같이 평야이면서 해변에 위치해 있어서 여름에는 숨막히게 뜨겁지만 겨울에는 온화했다.[㈜ kajeivnh(그리고 그곳) : 그 대명사를 스구도볼리(Scythopolis)라고 한 라이나흐는 paravlio\”(해안가)를 parapotavuio\”(강가)로 수정한다.]



 2. 로마군이 욥바의 해적들을 추격하다



 그러는 동안 폭동으로 쫓겨난 유대인들과 집들이 파괴되어 도망해온 자들이 연합하여 상당한 힘을 모았다. 그들은 기지(基地)를 준비하려고 최근에 케스티우스(Cestius)가 초토화시킨 욥바를 재건하였다.[㈜ 전쟁. 12권. 18:10(507)이하.] 그때 그들은 유대가 적군의 손에 넘어가버렸기 때문에 고립된 것을 알고 바다를 장악하기로 결심했다.그들은 자식들이 해적선을 건조했고, 수리아(Syria)와 베니게(Phoneicia) 해변을 따라 애굽(Egypt)까지 가는 무역 항로를 습격하는 등 이 바다에서는 항해를 전혀 못하도록 했다. 베스파시안은 이 무리에 관해 듣고 일개 보병과 기병을 욥바로 파견했다. 이들은 밤에 그 도시에 도착했는데 무방비 상태였다. 주민들은 공격해 온다는 소식은 접했지만 놀라서 로마군에 대항할 시도도 하지 못하고 배에 숨어서 화살의 사정거리를 벗어난 곳에서 밤을 지냈다.



 3. 폭풍우에 의해 파괴됨



 욥바는 자연적으로 생긴 항구는 아니었다. 욥바는 울퉁불퉁한 해변에서 경계를 이루고 전체 길이는 거의 반듯한 선으로 계속되었지만, 두 끝이 거의 초생달 모양으로 약간 굽어 있었다. 또한 이 뿔은 심연(深淵)쪽으로 돌출된 가파른 절벽과 암초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은 아직도 고대 전설을 입증하듯이 안드로메다의 사슬 흔적이 나타나 있다.[㈜ 이 전설이 욥바(Joppa)의 전설이라는 것은 광범위하게 입증되었다. 라이나흐는 플리니, \’박물학\’. v.69, 스트라보, xvi. 2. 28, 파우사니아스 iv.35.9 (페르세우스-perseus-가 괴물을 죽인 후 목욕한 것처럼 물이 붉은 샘). 제롬, In Jon.을 인용하였다. 참) A. Smith, \’Hist. Geog. of Holy Land\’. 163이하.] 해변을 휩쓰는 북풍은 높은 파도를 일으키며 암초로 몰려왔고, 항해자가 배를 정박하기엔 물이 있는 황무지[㈜ 문자적으로는 \”사막보다\” (더 위험한) : 나는(Thackeray)후기 R. Traill박사의 적절한 의역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그 본문을 의심할 어떤 이유도 없다.]보다 더 위험했다. 욥바 주민들은 동틀무렵 몹시 심하게 불어오는 폭풍에 시달렸다. 항해자들은 그 바람을 \’험악한 북풍(Black Norther)\’ 이라고 불렀다. 몇몇 배들은 배들끼리 부딪혀 파선되고 다른 배들은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기도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암초에 부딪히는 것과 적들이 욥바를 장악한 것을 두려워하여 이 광풍 속에서 넓은 바다로 나가려고 애써 보았지만 높은 파도로 인해 배가 침수되었다.이제 그들은 도망할 수도 없고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다. 광풍은 바다에서 그들을 쫓아냈고, 로마군은 그 도시에서 그들을 쫓아낸 것이다. 배가 부딪혀 깨져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나자 고함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배에 탔다가 죽은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파도가 삼켰으며, 많은 사람들은 난파선을 의지했지만 파선된 조각들에 부딪혀 죽었다. 다른 이들은 바다에서 죽는 것보다 칼로 죽는 것이 덜 약하다고 생각하여 칼로 찌르면서 물에 빠졌다. 그러나 대부분은 파도로 해변까지 휩쓸려가다 몸뚱이가 암초에 거세게 부딪혀 죽었다. 그리하여 넓은 바다는 피로 물들었고 해변은 시체로 뒤덮였다. 로마군들이 해변을 따라 밀려온 사람들까지도 죽였기 때문이다. 해변가의 시체들은 4,200구에이르렀다. 그렇게 해서 로마군은 그 도시를 별 저항없이 장악하게 되었고, 욥바는 완전히 함락되었다.



4. [베스파시안의 기병과 보병들이 폐허가 될 때까지 약탈함]



 그러므로 욥바는 얼마되지 않은 기간 동안 두 번이나 로마인에게 장악되었다.[㈜ 2권. 18:10 (507).] 베스파시안은 그곳에 운집한 해적들을 섬멸하기 위해 성채(城砦, acropolis)에다 막사를 세우고 그곳에 소규모의 보병과 기병을 남겨두었는데, 보병은 그곳에서 막사를 수비하고 기병은 부근을 약탈하였으며 욥바 주변 마을과 도시들을 파괴시켰다. 명령을 받은 로마군들은 매일 도시들을 질주하고 다니면서 도시들이 모조리 폐허가 될 때까지 약탈하였다.



5. 예루살렘에 요타파타의 함락 소식이 알려짐



 요타파타의 운명에 대한 소식이 예루살렘에 알려졌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그 재난이 너무 엄청났고 그 소식을 확증할 만한 목격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 이야기를 말할 만한 목격자는 한 사람도 도망쳐 나오지 못한 것이다. 소문의 성격상[㈜ Virgilius \’Aen\’. iv. 173이하. 특히 190에서 \’소문(Fama)\’에 대한 서술인 \”fact atque infecta canebat\”와 요세푸스 저술에서의 \”허구에 의해 꾸며진 사실들\”을 참조하라.] 나쁜 소식은 항상그러하듯이 자연스럽게 도시의 함락 소식은 퍼져나갔다. 그러나 조금씩 진실이 드러나면서 의심할 여지없이 기정 사실로 믿게 되었으나 사실은 이야기 중에 과장되기도 했다. 한편 요세푸스 자신도 도시가 장악되었다는 도시 함락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에 예루살렘은 깊은 비통함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각가정에서는 잃은 친척들로 인해 슬퍼하는 반면 장군을 잃은 슬픔은 온 지경을 뒤덮을 정도였다. 어떤 이는 주인에 대해, 다른이들은 친척 또는 친구나 형제를 위해 슬퍼했으나[㈜ 혹은 \”손님 친구\”(guest-friend).] 요세푸스를 애도하는 마음은 한결같았다. 이렇게 끊임없이 30일 동안[㈜ 라이나흐가 언급한 것처럼 모세(신34:8)와 아론(민 20:29)과 같은 이들을 애도하는 기간. 보통은 7일이었다(집회서 22:12).] 애곡이 계속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장송곡에 맞출 피리 부는 자들을 불렀다.[㈜ 그러한 장례식의 피리 부는 연주자들은 마9:23에 언급되어 있다.]



6. 요세푸스에 대한 분노



 그러나 요타파타에서 실제로 있었던 모든 일과 사실이 밝혀졌다. 즉, 요세푸스가 죽었다는 것은 거짓이며, 살아서 로마인들과같이 있는데 일반 죄수들 이상으로 지휘관들에게 존경과 대우를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은 그가 죽었다고 믿었을 때 느꼈던 애정의 표현 만큼이나 큰 분노를 자아내게 했다. 어떤 이는 그를 겁쟁이라고 했으며 또 다른 이들은 변절자라고 욕을 퍼부었다. 온통 도시는 분노로 들끓었고 저주로 가득했다. 가뜩이나 패배와 재난으로 인해 온 성읍이 분노와 실망으로 가득 차 있는 터에 요세푸스의 이 투항 소식은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었다. 항상 그렇듯이 재난의 종말은 다음 재난의 발단이었다. 유대인들은 로마인에게 복수할 뿐만 아니라 요세푸스에게도 복수하겠다고 생각함으로써 로마인들에 대한 분노를 키워갔다. 이것이 예루살렘에 퍼진 혼란스런상태 그대로이다.



7. 아그립바의 초청으로 베스파시안이 가이사랴 빌립보에 오다



 한편 베스파시안은 아그립바 왕국을 방문하였다. 아그립바 왕은 장군과 그 군대를 대접함으로써,[㈜ 혹은 그들중의 일부(전쟁.3권. 9:7(446)).] 왕가(王家)의 부를 과시할 목적과, 왕국내에 일어난 소요를 베스파시안의 힘으로 진정시키기 위한 이중의 목적으로 초정한 것이다. 그래서 베스파시안은 해안도시 가이사랴를 떠나서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Philippi)라 불리는 가이사랴로 귀환했다.[㈜ 전쟁. 2권. 9:1(168).] 거기서 20일 동안그의 군대가 휴식을 취하도록 하는 동안 개선(凱旋)한 것을 자축하며 신께 감사제(感謝祭)를 드렸다. 그러나 아그립바왕국에 속한 도시인 디베랴(Tiberias)가 왕국에 불만을 품고 있으며, 타리카이아(Tarichaea)는 이미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베스파시안은 어디서 일어나는 유대인이든지 그들을 쳐부수고 아그립바 왕에게 충성하게 함으로써 왕의 호의에 보답하려고 생각했으며 이때가 폭동을 진압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아들 티투스를 가이사랴로 보내 거기 주둔해 있던 군사를 소집하여 스구도볼리(Scythopplis)로[㈜ 스구도볼리(Scythopolis)는 디베랴의 약 20마일 남쪽.] 진격하게 했는데, 그 도시는 디베랴(Tiberias) 인근에 위치한 데가볼리(Decapolis) 최대의 도시였다. 이에 따라 베스파시안은 제 3군단을 끌고 그 아들을 맞으러 나갔고, 폭동자들이 잘 보이면서 디베랴에서 30퍼얼롱 되는 센나브리스(sennabris)라[㈜ 게네사렛 호수의 남서쪽, 타리카이아(Tarichaeae)부근에 있으며 혀재 지명은 Sinn en-Nabrah.] 불리는 곳에다 진을 쳤다. 거기서 베스파시안은 주민들을 안정시키고 그들과 교섭할 목적으로 기병 50명과 함게 십부장(dec-urion)인 발레리아누스(Valerianus)를 보냈다. 그는 대부분의 주민들은 평화를 원하는데 약간의 선동적인 사람들로 인해 폭동이 일어난 것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발레리아누스는 성벽 가까이까지 말을 몰아 내렸으며 그의 군대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러나 협상이 이뤄지기도 전에 선동자들은 무장하고 돌진해왔다. 그 우두머리는 사밧(Saphat)의 아들인, 예수(Jesus)라고 하는 자로[㈜ 디베랴(Tiberias)의 주요 행정장관, 전쟁. 2권. 20:3(599).] 강도떼들의 두목이었다. 발레리아누스는 승리가 확실할지라도 장군의 명령을 무시하고 싸우는 것은무모한 짓이며, 더욱이 싸움을 준비한 큰 부대와 맞서서 작은 수의 군대로 준비없이 싸운다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유대인과 맞서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었으므로 깜짝 놀라서 말을 버리고 동료 5명과 함께 맨몸으로 도망했다. 예수의 군대는 이 말들을 갑작스럽게 공격하여서 손쉽게 얻은 것이아닌 것처럼, 치열한 전투 끝에 획득한 전리품을 가져오는 것처럼 기뻐하며 성으로 의기양양하게 끌고 왔다.



 8. [베스파시안이 그 발 앞에 엎드려 간청하는 원로들의 간청을 허락함]



 도시의 원로들(the elders)과 유지들은 이 일로 인해 일어날 결과들을 두려워하며 로마로 도망했다. 그들은 후에 아그립바왕이 주선하여 베스파시안 앞에 간청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을 모르는 척 하지 말아 주시고 몇몇 미친 사람들의 죄를 전도성에 돌리지 말아달라고 간청했다. 로마에 대해 항상 호의를보여왔던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며 폭동을 주도한 자에게만 벌을내려 주시고, 자기들은 강도떼들과 같이 있으면서도 로마와 잘지내기를 오늘날까지 간절히 바라왔다고 했다. 이에 장군은 말들을 빼앗긴 것 때문에 전 도성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이간청을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장군은 아그립바왕이 이 도성에 대단한 관심을 가졌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대표자들은 성읍 사람들을 위해 화해하게 되었다. 반면 예수와 그 부하들은 디베랴에서는 더 이상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타리카이아로 도망했다. 다음 날 베스파시안은 군중들이 평화를 원하는지 알아보려고 언덕 봉우리에 트라얀을 먼저 보냈다.[㈜ 그 의미는 \’산등성이를 따라서 진행하여\’ (Smith와 Bartholom- ew의 호수 서쪽 지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도시로 들어가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주민들이 대표들과 한 마음인 것을 확인하고서 그 도시로 군대를 이끌고 진군했다. 이에 주민들은 그를 구원자나 은인(ben-efactor)이라 부르면서 열렬히 환영하였다. 베스파시안은 입구가 좁아서 군대가 들어가기에 불편했으므로 남쪽 성벽 일부를 헐어 통로를 넓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아그립바왕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약탈이나 폭력은 엄금했으며 같은 이유로 성벽도 남겨두었다. 베스파시안은 주민들이 앞으로 충성할 것이라는 보장을 아그립바왕에게서 받아냈다. 이렇게 하여 그는 폭동으로 인해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을 당했던 도시에 새로운 소망을 가져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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