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티투스가 수리아를 떠나 여행하면서 사바틱 강을 본 것과 안디옥 사람들이 유대인을 비난하는 청원을 티투스에게 내자 그가 거절한 것과 티투스와 베스파시안의 승리에 대하여
1. 티투스가 사바티칼(Sabbatical)강을 찾아감
가이사 티투스는 앞서 이미 언급했듯이[㈜ 전쟁. 7권. 3:1(39).] 베리투스(Berytus)에[㈜ 베이루트(Beirut).] 얼마동안 머물러 있었다. 베리투스를 떠나면서 티투스는그가 지나가는 수리아의 모든 도시에서 마다 화려하고 성대한 전시회를 여는 가운데 많은 유대인 포로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죽여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티투스는 진군을 계속하는 중에 특이한 강을 보았다. 이 강에 대해서는 좀더 설명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강은 아그립바왕의 영토인[㈜ 첨가된 지역은 베스파시안이 전쟁하는 동안 그의 충성에 대한 대가로 아그립바2세(Agrippa II)에게 준 것이다. 이는 전쟁. 3권. 3:5(56)이하에서는 그의 영토로 나오지 않는다. 추측컨데 이는 요세푸스가 유대인 거주 지역으로 스스로 한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Schurer, \’G.J.V.\'(3,4판)i.594이하.] 아르케아(Arcea)라는[㈜ 아르카(Arka), 레바논(Lebanon)지역의 북단에 있고, 트리폴리스(Tripolis)의 북동쪽에 있다. 고대. 1권. 6:2 9138));\’알가족속\'(Arkite)은 창10:17에 이미 나온다.] 도시와 라파네아(Raphanea)[㈜ 전쟁.7권. 1:3(18).] 사이를 흐르는 강으로 아주 특이한 강이었다. 왜냐하면 이 강은 물결이 흐를 때에는 물살이세고 물의 양도 많았다. 그런 후에 곧 물의 근원이 끊어져 6일동안 내내 바싹 메말라 있었다. 이렇게 전혀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가 7일째 되는 날이면 또 다시 그전처럼 물이 거침없이 세게 흐르는 것이었다. 이 강은 항상 이러한 주기를 정확하게 반복했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이 강을 유대인들의 제7일 안식일의 이름을 따서 사바티칼 강(the Sabbaticalriver)이라 불렀었다.[㈜ 유대 역사가가 7일중 하루만 일하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그 강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이상하다;반면 이방인 플리니(Pliny)는 엄격히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표현한다. : \”in Iudea rivus sabbatis omnibus siccatur\”, \’박물학.\’ 31.11. 톰슨박사(Dr. W.M.Thomson)는 1840년에 그강을 \’네바 엘 푸알(Neba el Fuarr)이라고 규정했다. 그 강은 \”현재 이틀은 멈추고 사흘째 되는 하루는 흐른다\”. 이 간헐적인 흐름에 관해서 수관(水管)의 원리로 인해 지하 저수지의 물이 흘러 나오는 것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이에 관해 Thomson의 \’The Land and the Book\’, 264이하를 보라.]
2. 안디옥에 도착한 티투스가 유대인들을 추방해 달라는 안디옥 주민들의 청원을 거절함
한편 안디옥 주민들은 티투스가 가까이에 오고 있다는 소식을듣자, 기쁨에 겨워 성 안에 그대로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어서티투스를 맞이하기 위해 급히 서둘러 30퍼얼롱도 더 되는 곳까지뛰어나갔다. 남자들 뿐만 아니라 부녀자들과 아이들도 모두 도시 밖으로 몰려나갔다. 안디옥 주민들은 티투스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길 양편에 쭉 늘어서서 손을 높이 들어 그를 환영하였으며, 그에게 온갖 축복을 기원하면서 그를 뒤따라 도시로 돌아왔다. 그런데 안디옥 주민들은 환호성을 지르면서 유대인들을 안디옥에서 추방시켜 달라는 간청을 함께 하였다. 그러나 티투스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냉정한 태도로 조용히 안디옥 주민들이 소리치는 간청만을 경청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에 유대인들은 티투스의 생각이나 의도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매우 불안하고 두려웠다. 그런데 티투스는 안디옥에 머무르지 않고, 즉시 유브라데강가에 있는 쥬그마(Zeugma)로[㈜ 사모사타(Samosata)지역에 있는 유브라데강 상류의 언덕에;그것의 이름을 주교(舟橋)로부터 가져옴.] 떠났다. 쥬그마에서는파르티아(Parthia)의 왕 볼로게세스(Bologeses)가[㈜ 볼로게세스 1세(Vologeses IArsaces 23세);참). 전쟁. 7권. 7:2,3(237,242).] 파견한 사신들이 티투스를 기다리고 있다가 티투스에 유대를 정복한 승리를 축하하여 금으로 된 왕관을 가져왔다. 티투스는 그 금관을받고서 볼로게세스 왕의 사신들을 위해 연회를 베푼 후에 다시안디옥으로 돌아왔다. 안디옥 주민들과 안디옥 의회는 티투스에게 그들의 경기장을 방문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으며, 이에티투스는 그들의 부탁에 응하였다. 경기장에는 티투스를 맞이하기 위해 전 주민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주민들은 티투스에게 다시 한번 유대인들을 안디옥에서 추방해 달라고 계속 끈질기게탄원하였다. 그러자 티투스는 이같이 적절하게 답변을 해 주었다. \”유대인들이 이곳에서 추방당하면 유대로 돌아가야 하는데가야 될 고향 유대가 파괴되어 버렸고, 다른 곳에서도 그들을 받아주지 않는데 도대체 어디로 추방하라는 말입니까?\” 이에 안디옥 주민들은 첫 번째 요구는 포기하고 두 번째 요구로 유대인들의특권이 명시되어져 있는 동판들을 제거해 달라고 간청하였다.그러나 티투스는 이것도 거절하면서 안디옥에 있는 유대인들의지위를 종전과 똑같이 그대로 누릴 수 있게 한 후 애굽을 향해출발하였다. 애굽으로 가는 도중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들러, 지금 그의 눈앞에 펼쳐진 예루살렘의 황폐한 모습과 그전의 웅장했던 예루살렘을 비교하면서 이제는 폐허가 되어버린 건물들의옛날의 장엄한 규모와 그 아름다움을 회상하면서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안타까운 심정을 잔잔히 달래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예루살렘을 정복한 것에 대해 으레 자랑하며 으시댔을 터인데,티투스는 그렇게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도시를 무력으로 장악한것에 대해 전혀 뽐내지 않았으며, 다만 예루살렘에 이와같은 파멸을 가져오게 한 사악한 반역의 장본인들인 강도들에 대한 저주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그래서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함락하였다고 해서 결코 자신의 공로를 높이려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예루살렘의 방대한 재물 중에는 이러한 폐허속에서도 적지 않은 재물이 여전히 발견되었다. 로마 병사들이그 속에서 많은 것을 파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많은 대부분은 유대인 포로들의 정보를 통해 병사들이 소유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전쟁으로 인한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금과 은, 그리고 그밖의 많은 귀중품들을 땅속에 파묻어 놓았던 것이다.
3. 티투스가 애굽을 향해 진군함
티투스는 애굽으로 향해 진군을 계속하면서 가능한 한 가장 빠른 속도로 신속하게 사막을 가로 질러 알렉산드리아에 다다랐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티투스는 이달리야로 항해하기로 결정한후 지금까지 그와 행동을 같이하여 따라온 2개의 군단을 각각그전 원래 주둔지로 돌려 보내 제5군단은 모에시아(Moesia)로, 제15군단은 판노니아(Pannonia)로 원대 복귀시켰다. 티투스는 체격이나 용모가 뛰어나서 뽑았던 700명의 유대인 포로와 포로들의 지도자격인 시몬과 요한을 즉시 이달리야로 보내라고 지시하였다. 그는 이들을 개선을 위한 승리 기념물로 쓰려고 하였다.
[티투스가 로마에 도착함]
티투스는 그가 바라고 기대한 만큼 순조로운 항해를 한 후 로마에 도착하였다. 로마는 티투스의 아버지에게 베풀었던 것처럼 티투스에게도 열렬한 환영을 표했다.[㈜ 전쟁. 7권. 4:1(63).] 그러나 이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은 티투스가 아버지의 영접을 받으면서 부자간에 상봉할 수 있었던 점이다. 떼를 지어 몰려든 로마 시민들은 베스파시안과 그의 두 아들인 티투스와 도미티안이 함께 만나는 장면을 보고 환희의 무아지경에 빠지는 듯 감격스러웠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로마시민들은 원로원이 삼부자(三父子)의 승리를 각각 축하했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으로 그들의 승리를 축하하기로 결정하였다. 승리를 축하하는 성대한 예식이 있을 날짜가 미리 공고되었기 때문에 로마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집에 남아있지 않고 모두가 밖으로 나와서 서있을 수 있는 곳마다 온통 자리를 차지하였다. 로마 시민들은 그들이 눈여겨 볼베스파시안과 그의 두 아들이 지나갈 통로만 남겨두고 구석구석까지 온통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4. 개선의 아침
로마 군대는 밤동안 각각 지휘관들의 지휘아래 연대와 분대별로 진군을 계속하여 상부 궁전(the upper palace)의[㈜ 팔라티네(Palatine)언덕 위에.] 문들 주위뿐 아니라 이시드 신전(the temple of Isid)[㈜ 현재의 콜레기오 로마노(Colegio Romano)부근, 캄푸스 마르티우스(Campus Martius)에 있는 이시스(Isis)와 세라피스(Serapis)의 신전.] 가까이에도 길게 정렬하였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로마의 황제 베스파시안과[㈜ 혹은 승리한 장군들을 의미하는 사령관들(imperatores)임.] 두 아들이 밤을 지냈기 때문이었다. 동이 트자 베스파시안과 티투스는 월계관을 쓰고 전통적인 황제의 자주빛 의복을 입고 나와서 옥타비안 거리(Octavian walks)까지[㈜ 포르티쿠스(Poricus)(혹은 Oper Porticus). 옥타비아이(Octaviae)는 원래 주전 146년 메텔루스(Metellus)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아구스도에 의해 재건되어 그의 누이의 이름을 따라 명명됨 ; 주랑(柱廊)현관이 두 개의 성전과 일군의 다른 건물들로 둘러싸여져 있으며 티투스의 방화로 파괴되었다. 데아트룸 마르켈리(Theratrum Marcelli)부근 쥬피터의 신전 서쪽에 있다.] 행진하였다. 옥타비안 거리에는 원로원과 최고 행정관들과 기수(騎手)들이 미리도열하여 그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랑 앞에는 단상이 세워져 있었고, 그 위에 상아로 된 의자들이 놓여져 있었다. 베스파시안과 두 아들은 그곳에 올라가 자리에 앉았다. 그들이 도착하여 자리에 앉자 병사들은 환호성을 질렀으며 이구동성으로 그들의 용맹스러움을 극구 찬양하였다. 베스파시안과 그의 아들들은 무장을 하지 않고, 비단옷에 월계관을 쓰고 있었다. 베스파시안이 병사들의 환호성에 감사를 표한 후에도 병사들이 계속 함성을 지르려고 하자 조용히 그는 일어서서 이제 그만하라는 손짓을 하였다. 그러자 모든 병사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장내가 숙연해 지자 베스파시안이 일어나서 망토로 머리를 거의 다 감싸 덮으면서 관례적인 기도문을 낭송하였다. 티투스 역시 같은 방법으로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나서 베스파시안은 모인 군중들에게 간략하게 연설을 한 후에, 황제로서 병사들을 위해 마련된 의례적인 아침 식사를 위해 병사들을 해산시키고 베스파시안 자신은 개선문으로 들어갔다. 이 문은 승리의 개선행진이 항상 이 문을 통해 지나가기 때문에 거기에서 이름이 유래된 것이다.[㈜ 쥬피터의 신전과 티베르(Tibrer) 사이에 있는 포르타 트리움팔리스(Porta Triumphalis).] 베스파시안과 두 아들들은 우선 여기서 함께 간단한 다과를 먹었으며, 승전복을 입고서 개선문 옆에 서있는 신들의 동상앞에 제사를 드린 후에 군중들이 더 쉽게 그들을 바라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경기장을 가로질러 행진하면서 예식을 진행하였다.[㈜ 개선식은 대체로 포르타 트리움팔리스(Potra Triumphalis)로부터 서쪽으로 통행했다. \”포룸 보아리움(Forum Boarium)을 지나서 키르쿠스(Circus)로, 그리고 그곳에서 비쿠스 투스쿠스(Vicus Tuscus)를 지나서 포룸으로, 그리고 비아 사크라(Via Sacra)를 따라 쥬피테르 카피톨리누스(Jupliter Capitolinus)신전에 이른다.\”(Burn, Rome, 46).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 개선식은 캄푸스 마르티우스에 있는 세 개의 원형경기장 즉 마르켈루스(Marcellus), 발부스(Balbus), 그리고 폼페이(Pompey)를 지나 북쪽으로 우회함으로 시작하였다.]
5. 개선행진
이러한 개선 축제의 수많은 장관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온갖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에 대해서 정확하게 표현하기란 불가능하다.이 날 그곳에는 값비싼 물건들과 다양한 보석들과 희귀한 진기품들이 전부 모여 로마 제국의 위엄을 보여 주었다. 이 날 전시된 귀중품들은 재물의 축복을 받은 갑부들 조차도 하나씩 밖에 수집할 수 없는 구하기 힘든 진기한 물건들로 수많은 나라의 값비싸고 훌륭한 물건들이었다. 금과 은과 상아로 된 수많은 갖가지형태의 물건들이 개선 행렬과 함께 움직였는데, 이것은 마치 말하자면 강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사방에 온통 귀중하고 값비싼 보석의 홍수를 이루었다. 이 보석들은 융단 위에 놓여져 전시되었는데,일부는 특이한 자주빛 융단에 전시되었고, 나머지는 바벨론식으로 수놓아 짠 완벽한 초상화같은 완전히 실물크기의 융단들 위에전시되었다. 또한 투명한 보석들도 금관이나 다른 물건들에 수도없이 박혀 있었다. 그밖에 그들의[㈜ 로마의 ; 요세푸스는 일반적으로 헬라어 언어권을 위하여 기록하였다.] 신상(神像)들도 개선 행렬에뒤이어 갔는데 크기가 상당했으며, 고도의 숙련된 솜씨로 만들어진 값비싼 재료로 된 것들이었다. 또한 많은 종류의 동물들 도적절한 장식을 달고 치장해서 뒤따라 갔다. 각 동물 그룹을 지휘하는 수 많은 수행원들은 금실을 섞어 짠 자주색 장식물로 치장하고 있었다. 개선 행렬에 참석하기 위해 뽑힌 자들은 화려한 값비싼 치장을 할 선택권이 있었다. 더욱이 포로들이나 하층민 조차도 모두 몸치장을 하지 않은 자가 없었으며, 각종 장식과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어 겉보기에는 신체상의 손상된 상처 같은 것을 감출 수가 있었다.[㈜ 부상 혹은 그와 유사한 것으로부터;그들은 준수한 인물 때문에 선택되었다.]
[이동무대]
그러나 개선 행진에 있어 무엇보다도 가장 놀랄만한 것은 움직이는 이동무대의[㈜ 헬라어 ph\’gma는 라틴어 pegma로 번역되었다. Juv. \’Sat\’. iv. 122;저급 라틴어에서는 pagina로 번역되었다. 영어로는 원래 \”이동식 노천 극장 무대\”를 의미하는 pageant이다. 그러한 종류의 것은 고대 신비극의 연출에 사용되었다(Skeat).] 구조였다. 이동 무대들의 크기는 대부분 3층이나 4층높이로 되어 있었고, 그 규모가 너무 커서 안전성이 우려가 될 정도로 놀라웠으며, 그 구조의 웅장함은 모든 사람들의 기쁨과 환호성을 동시에 자아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 이동무대는 금실을 섞어서 짠 융단으로 쌓여져 있었으며, 전부가금으로 뼈대를 세우고 온통 상아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러한 수많은 이동 무대 위에는 전쟁 장면들이 각 장면 장면으로 이어져있어서 전쟁의 생생한 장면들을 재현시켜 주고 있었다. 그 장면들 가운데에는 번창한 지역이 황폐화 되어버린 장면도 있었고,적군의 대부대가 완전히 몰살당하는 장면도 있었다. 또한 적군이 도망가는 장면과 포로로 끌려가는 장면이 있는가 하면 우뚝솟은 성벽들이 공성 장비에 의해 무너져 내리고 요새들이 부수어 지고 철통같은 수비를 하고 있던 도시들이 점령 당해 로마군이 성벽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도 있었다. 온통 피바다가 되어 저항할 수도 없는 적군들이 애원하는 모습과 성전이 불타고 집들이 무너져 그 밑에 사람들이 깔리는 장면도 있었다. 또한 황폐되고 파괴된 가운데 강물도 농경지를 흐르거나 인간의 동물들이먹을 수 있는 식수가 아니라 온통 사방이 화염에 휩싸인 지역으로 흐르는 모습도 있었다. 유대인들이 전쟁 중에 당한 모습이었다. 이러한 모습들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지 않은 자에게 마치 눈앞에 벌어지는 장면처럼 장면 장면들이 정교하고 훌륭하게 당시의 사건들을 재생하고 있었다. 각 이동 무대 위에는 로마군에 의해 점령당한 도시의 지휘관이 결박당한 채 매달려 있었다. 그 뒤를 따라 많은 배의 모형들이 행렬에 끼어 있었다.[㈜ 디베랴 호수에서의 해상 전투를 기념함(전쟁.3권. 10:9(522)이하와, 10:9(531)의 주).]
[성전에서 가져온 전리품]
전리품들도 무질서하게 겹쳐 쌓여 뒤따랐다. 그 많은 전리품중에서 무엇보다도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노획한 전리품들이었다.[㈜ 로마의 공회 광장 위에 있는 티투스 아아치의 내부에 있는 행진삽화.] 여러 달란트의 금으로 입혀 만든 묵직한 상(床)과[㈜ 제단 빵 탁자.] 보통 일상 생활에서 쓰는 것과는 다른 형태로된 금촛대가[㈜ 혹은 일반적으로 \”촛대\”이지만 잘못 명하여졌다.] 가장 독특한 물품이었다. 그 촛대의 형태는 아래받침대 중앙에 촛대가 부착되어져 있는데 그 촛대 기둥에서 긴가지들이 뻗어져 나와 삼치장(trident)형태로 되어 각 가지들끝에는 등잔이 달려있었다. 이 등잔은 일곱 개였는데 원래 일곱이란 숫자는 유대인들에게는 영예스러움을 나타내는 숫자였다.이러한 전리품 뒤에 유대 율법책의 사본이 모든 전리품 중에 맨끝을 장식하면서 개선 행렬에 끼였다. 그 뒤에는 금과 상아로 만들어진 수많은 승리의 상들(images of victory)이 뒤따랐으며,그 뒤에 베스파시안이 개선행진을 했으며, 티투스가 베스파시안을 뒤따랐으며, 도미티안도 말을 타고 그들 옆에서 함께 행진했으며, 이들이 늠름한 모습으로 말을 타고 개선 행진하는 모습은글자 그대로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6. 시몬이 처형됨
개선 행진은 쥬피터 카피톨리누스의 신전(the temple of Ju-piter Capitolinus)에서 끝났으며, 그곳에 이르자 모두 멈추었다. 왜냐하면 적군의 지휘관의 처형이 발표될 때까지 멈추어 서서 기다리는 것이 예로부터 내려오던 관례이기 때문이었다. 포로들 가운데 이번 개선 행진에서 처형된 자는 바로 기오라의 아들 시몬이었다. 그는 목에 밧줄로 결박된채 한동안 고문을 당하다 광장에 끌려나왔다. 로마법에 따르면 사형을 언도받은 죄수는 광장에서 처형하도록 규례화 되었기 때문이다.[㈜ 공회 광장의 북동쪽 끝에 있는 Mamertine 감옥.] 시몬이 처형되었다는 발표가 있자 사방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으며,온 시민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베스파시안과 그의 아들들은 관례적인 기도문을 드리고 제사를 시작하였다. 그런 뒤 그들은 왕궁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일부 시민들을 왕궁에 초대해 연회를베풀면서 즐겼다. 나머지 모든 연회는 개인의 집에서 베풀어졌다.[㈜ 혹은(다른 읽기와 함께) \”상당한 양식이 준비되었다.\”] 왜냐하면 로마 도시 전체가 그 날을 로마의 적들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것을 기념하는 축제로 지켰으며 내란의 종식과행복의 시작을 기원하는 기념으로 즐긴 것이기 때문이었다.
7. 평화의 신전(Templum Pacis)을 건축함. 주후 75년
이렇게 하여 승리의 축제도 끝이 나고, 로마 제국도 단단한 반석 위에 세워지게 되자, 베스파시안은 평화의 신전(temple ofPeace)을 건축하기로 결심하였다.[㈜ 베스파시안 통치 6년째 되는 해(주후 75년)의 헌당식 날짜는 디온 카시우스(Dion Cassius), 1xvi.15에 나타나 있다. 공회 광장에 둘러싸인 신전은 비아사크라(Via Sacra)와 카리나이(Carinae)사이에 있는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의 남동쪽에 있다. 플리니(Pliny)와 헤로디안(Herodian)은 그 신전의 웅장함을 증거하고 있다(Burn, Rome, 140).] 이 신전은 아주 빠르게 완공되었는데,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화려한 것이었다. 왜냐하면사람의 눈을 끄는 귀중하고 화려한 재물들이 엄청나게 많은 것 외에도 베스파시안이 오래된 걸작품들인 그림이나 조각들로 신전을장식하였기 때문이다. 그 신전 안에는 정말 갖가지 진귀한 물건들이 수집, 보관되어 있었다. 이것들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수십년에 걸쳐 각 나라들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하나 하나씩 밖에구경할 수 없는 그러한 진귀품들로 이 신전에 모두 전시되어져 있었다. 베스파시안은 또한 이 신전 안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금그릇들을 보관하였다. 그는 이것을 큰 자랑거리로 여겼다. 그러나 베스파시안은 유대인들의 율법책과 성전에 드리워져 있던 자주빛 휘장들은 왕궁에 보관하도록 지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