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콤마게네 왕 안티오쿠스가 당한 재난과 알라니인들과 알라니인들이 메대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에게 행한 만행들에 대하여
1. 콤마게네(Commagene)의 왕 안티오쿠스가 중상모략을 당해 겪는 불행에 관하여[주후 72-73년]
한편 베스파시안이 로마제국을 통치한지 4년이 되던 해에 콤마게네(Commagene)의[㈜ 북수리아에.] 왕 안티오쿠스(Antiochus)와 그의전 가족들이 심각한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는데 그 사건은 다음과 같다.
수리아의 총독인 카이세니우스 파이투스(CaesenniusPaetus)는 안티오쿠스에 대한 증오심에서 였는지 아니면 진실이었는지는 확실히 단언할 수는 없지만, 가이사에게 서한을 보내 안티오쿠스와 그의 아들 에피파네스(Epiphanes)가 로마에 대해 반역을 일으키려고 파르티아(Parthia)의 왕과 동맹을 맺었다고 비난을 하였다.[㈜ 전쟁. 5권. 2:2(59)주.]
카이세니우스 파이투스는 서한을 통해 안티오쿠스가 반역을 일으켜 이번 전쟁으로 전 로마 제국이 소란스럽게 되기 전에 미리 손을 쓰는 것이 마땅하다고 가이사에게 알렸던 것이다. 이러한 서한을 받은 가이사는 안티오쿠스와 파르티아아의 왕이 평소 서로 가까이 지내고 있어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안될 큰 사건을 꾸미고 있음을 직감하고 그냥 간과할 수 없다고생각했다. 콤마게네의 수도인 사모사타(Sam-osata)는 유브라데 강변에 위치하고 있어, 콤마게네와 파르티아 가 동맹을 하는 음모라도 꾸미게 된다면, 파르티아 사람들이 쉽게 사모사타로 넘어올 수 있어 콤마게네의 군사력이 강화되기 때문에, 이것을 그냥 넘기지 않고 신중히 대처하기로 하였다.
[파이투스가 공격을 개시하다]
이리하여 가이사는 파이투스를 신임한 데다가 파이투스는 그가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전권을 위임받자,파이투스는 망설이지 않고 급히 콤마게네를 공격하였다. 반면이것은 안티오쿠스 측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파이투스는 제6군단을 앞세우고 약간의 보병대와 기병대를 보충하여 몸마게네 공격을 감행하였다. 또한 파이투스는 두명의 왕이 보낸 원군도 함께 공격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그 두명의 왕은바로 칼키디케(Chalcidice)지역을[㈜ 수리아 북쪽에 있는 또 다른 칼키스일 것이다. 헤롯은 대헤롯의 손자로 레바논에 있는 칼키스의 왕이었다. 그는 아리스토불루스(Aristobalus)라는 아들이 있었고 이 아들이 여기서 언급하는 통치자인 것 같다. Schurer, \’G.J.V.\’ i.724를 보라.] 통치하는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와 에메사(Emesa)의[㈜ 홈스(Homs).] 왕 소에무스(Soemus)였다. 파이투스의 콤마게네 공격은 온 지역을 통해 단 한 사람의항거도 없이 진행되었다. 안티오쿠스는 이같은 뜻밖의 소식을접하고 로마군과 싸울 의도가 전혀없이, 모든 것을 그대로 남겨둔 채 콤마게네를 떠날 결심을 하고, 마차로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치려고 하였다. 그는 이렇게 하여 현재 당하고 있는 어려움에서 빠져나와 로마군 앞에서 입장을 밝히려고 하였다. 그래서 안티오쿠스는 수도 사모사타에서 120퍼얼롱 떨어진 평야로 도망쳐서 그곳에서 진을 쳤다.
2. 안티오쿠스는 파이투스를 피해 소수의 인원을 데리고 유브라데강을 건너다
한편 파이투스는 일부 병력을 보내어 사모사타 시내를 함락시키도록 하였으며, 자신은 나머지 병력을 거느리고 급히 안티오쿠스를 추격하였다. 그러나 안티오쿠스는 추격을 당해 곤경에처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군에게 대항하는 적대적인 행동을 취할 생각은 않고, 자신의 처지를 안타깝게 애통해하면서 자신에게 닥쳐온 고통을 감내하는 것에 만족해 하였다. 그와는 반대로그의 아들들의 젊은 패기와 전투 경험과 건장한 체력들은 싸워보지도 않은 채 이러한 고통을 견디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따라서 에피파네스와[㈜ 그는 무모한 용기로 예루살렘 성벽 아래에 나타났다. 전쟁. 5권. 11:3(460)이하.] 카리니쿠스(Callinicus)는 이에 무력으로 맞섰다. 곧 치열한 접전이 벌어져 종일 계속되었는데 에피파네스와 칼리니쿠스는 대단한 용맹성을 발휘하였다. 이들은 체력의소모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지칠 줄 모르고 전투하여 밤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그러나 안티오쿠스는 이러한 치열한 접전 후에도 그곳에 그냥 머물러 있을 수 없었으며, 아내와 딸들을 데리고길리기아(Cilicia)로 도망하였다. 따라서 이같은 안티오쿠스의행동은 그의 병사들이 사기를 꺾어 놓았다. 왜냐하면 안티오쿠스의 병사들은 안티오쿠스가 통치권을 포기한 것으로 여기고 안티오쿠스를 버리고 로마군에게 투항했으며, 모두의 얼굴에는 절망감이 역력하였다. 에피파네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동맹국에서완전히 축출되기 전에 빨리 로마군에게서 빠져나와 안전을 도모해야만 했다. 사실 에피파네스는 단지 10명의 기병과 두명의 형제들과 함께 유브라데 강을 건넜다. 그는 파르티아의 왕 볼로게세스(Bologeses)에게 쉽게 갈 수 있었으며,[㈜ 전쟁. 5권. 3:1(105).] 볼로게네스 왕은도망쳐온 탈주자로 간주하여 멸시하지 않고 아주 극진하게 대접했으며, 여전히 고대의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예우를 갖추어 대접했다.
3. 안티오쿠스와 베스파시안과의 화해
한편 안티오쿠스는 길리기아의 다소(Tarsus)에 이르렀으나백부장에게 체포되어 파이투스에게 보내졌다. 파이투스는 안티오쿠스를 결박하여 로마로 압송하였다. 그러나 베스파시안은 한나라의 왕이 이렇게 결박되어 로마로 압송되고 있다는 사실을그대로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으며, 반역을 일으켜 전쟁을 했다는 명목으로 냉혹한 분노를 발하는 것보다 옛 우정을 고려하여처리하는 것이 더 합당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따라서 베스파시안은 명령을 내려 아직도 로마로 향해 압송중인 안티오쿠스의결박을 풀고 라케다이몬(Lacedaemon)에 그냥 남아있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게다가 베스파시안은 안티오쿠스에게 풍족하고국왕다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충분히 많은 재산을 할당해 주었다. 한편 에피파네스와 칼리니쿠스는 이때까지 아버지 안티오쿠스의 신변에 대해 아주 불안해 있는 터라 이렇게 베스파시안이아버지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의 무겁고괴로운 불안감은 사라졌다. 게다가 에피파네스와 칼리니쿠스는자신들도 가이사 베스파시안의 은혜를 입을 수 있다고 기대하였으며, 볼로게네스왕이 그들을 위해 가이사에게 진정서를 보낸다면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현재 운 좋게 편안한생활을 누리고 있지만 로마 제국 밖에서 산다는 생각은 견딜 수가 없었다. 이때 베스파시안은 에피파네스와 칼리니쿠스에게 안전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그들은 로마로 왔으며라케다이몬에서 로마로 온 아버지 안티오쿠스와 만나게 되었다.그들은 로마에서 거주하며 온갖 명예로운 대우를 받게 되었다.
4. 스구디아 족속인 알라니인들이 메대(Media)지역을 공격하는 것에 관하여
한편 이미 이전에 언급한 적이 있는[㈜ 이것은 전쟁.에서 그들에 대한 첫언급이다. 이전의 진술에 대한 암시는 아마도 요세푸스가 유대 역사와는 무관한 이 단락이 있던 자료로부터 부주의하게 발췌했을 것이다.] 스구디아(Scythias) 종족인 알라니인들(the Alani)이 타나이스(Tanais) 강변과[㈜ 돈(Don).] 마이오티스(Maeotis) 호수가에[㈜ 아주 바다(Sea of Azou).] 살고 있었다. 이들은 메대(Me-dia)지역과 그 너머 지역까지 공격하여 약탈하려고 생각하였으며, 힐카니아[㈜ 카스피(Caspia)의 남쪽.] 족속(the Hyrcanias)의 왕과 교섭을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힐카니아의 왕은 그전에 알렉산더 왕이 철문으로[㈜ \”카스피의 문들\”은 카스피 바다 남쪽 타우루스(Taurus)에 있는 산길 또는 일련의 힘든길에 주어진 이름이었다.(Grote, Hist. of Greece, ed. 4, x.127이하), 아리안(Arrian ; iii.20)은 다리우스를 추격했던 알렉산더 대제가 어떻게 그가 이 지점에 도착하기 전에 그를 따라잡지 못했는가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요세푸스가 언급한 \”철문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봉쇄했었던 그 통로를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힐카니아 왕이 통로를 통과해도 된다는 허락을 해주자, 알라니 사람들은 떼를 지어 메대(Medes)를 불시에 기습하여 인구가 조밀한 지역을약탈하였다. 그곳은 온갖 종류의 가축들이 많았고 아무도 약탈하는 그들을 감히 대항하려는 자가 없었다. 이곳 메대의 왕인 파코루스(Pacorus)가[㈜ 파르티아(Parthia)의 왕 볼로게세스 1세(Vologeses I)의 형은 위에서 언급하였다.전쟁. 5권. 5:7(237).] 무서워 떨며 그의 모든 소유물을 버렸으며 단지 그의 소유물 가운데 아내와 첩들만을 100달란트의 몸값을 지불하고 포로로 잡혔던 그들을 어렵게 구해내서는 자신의요새로 도망을 쳐버렸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알라니인들은 너무쉽게 아무 저항없이 약탈 공격을 할 수 있었으며, 전 지역을 초토화 시키면서 아르메니아(Armenia)까지 진격하였다. 이에 아르메니아 지방의 티리다테스(Tiridates)왕은[㈜ 볼로게세스 1세의 또 다른 형.] 이들과 맞서 싸우다 생포될 뻔 했었는데 가까스로 겨우 피하였다. 왜냐하면 멀리있던 적군이 티리다테스왕 주위에 올가미를 던져 그를 덮어씌워 질질 끌고 갔기 때문에, 만일 그가 칼로 올가미를 즉시 잘라내지 못했더라면 탈출에 성공할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알라니인들은 이러한 티리다테스의 대항에 더욱 격분하여아르메니아를 황폐화시켰으며, 많은 주민들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알라니인들은 메대와 아르메니아에서 약탈한 모든 종류의노획물들을 가지고 다시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