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 문 Ⅳ 이 논문은 헤롯의 성전에 보관되어 있다가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에 의해 인용되었던 구약성경 사본이 아하수에로(Xerxes)의 아들 아닥사스다(Artaxerxes)시대 때 느헤미야(Nehemiah)가 만든 최고의 총서(叢書)였음을 증명해 준다. 또한 이 논문은 현존하는 다른 ?

 


논  문  Ⅳ 




이 논문은 헤롯의 성전에 보관되어 있다가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에 의해 인용되었던 구약성경 사본이 아하수에로(Xerxes)의 아들 아닥사스다(Artaxerxes)시대 때 느헤미야(Nehemiah)가 만든 최고의 총서(叢書)였음을 증명해 준다. 또한 이 논문은 현존하는 다른 여러 사본들에게 발견되는 첨가된 내용이나 변경된 내용이 없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다음의 논증들에서 나타나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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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다 마카비(Judas Maccabeus)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의 박해 이후에 유대의 성경 총서를 들었다는 사실이 주전 144년에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애굽에 있는 형제들에게 보낸 공한(公翰)에 잘 나타나 있으며 마카l 2서에 보존되어 있다. 느헤미야는 마카비의 전집 훨씬 이전에 이와 같은 총서를 만들었는데 이 시기는 바벨론 포로기가 끝나고 스룹바벨(Zorobabel)이 유대 성전을 재건한 지 얼마되지않은 때이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다.[㈜  \’진정한 기록\'(Authentic Records) p. 220-232.] : \”위에 말한 기록 문서와느헤미야의 회고록에는 이런 이야기 외에 느헤미야가 책을 수집하여 도서관을 세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왕들에 관한 책과 예언자들과 다윗이 쓴 글과 제물을 드리는 일에 관해서 여러 왕들이 쓴 일기가 들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유다도 전쟁 때문에 흩어졌던 책들을 모아서 전해 주었기 때문에 우리가지금 그 책들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 책들이 필요하셔서 사삼들을 보내신다면 보내 드리겠습니다(마카비 2서 13-15).\” 또한이와 같은 진본 성경이 유대 민족의 총독이었던 느헤미야에 의해 만들어졌다가 유대 성전에 비치가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에대해서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이 점에 대해서 그로티우스(Gro-tius)는 느헤미야의 서재가 바로 이 성전 내에 설치되었다고 단정짓고 있다).[㈜ 전게서.] 또한 이 성전에 이 성경 전집이 보관되어지다가헤롯 성전이 건축되자 그곳으로 이송되어졌던 것이다. 내가 요세푸스의 말을 빌어 다른 곳에서도 입증하였듯이[㈜ \’구약에 관한 소고\'(Essay on the Old Testamert) p.190~195.] 요세푸스가그의 저서 \’유대고대사\’에서 주요 자료로 사용하였던 사본은 바로 이 성전에서 나온 것이었다. 바로 이 점이 필자가 진술코자 하는 논지의 근본적인 기초가 되기 때문에 좀 더 상세히 살펴 보기로 하겠다. \”요세푸스는 \’유대고대사\’를 기록할 무렵 적어도 한개 이상의 히브리 사본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아마 유대 전국에서 가장 진품의 사본을 사용했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여기서 말하는 사본이란 성전에 보관되어 있던 사본을 말한다. 성전이 훼파된 이후그가 \’유대고대사\’를 쓰게 되자 누군가 그에게 이 사본을 주었던가 아니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요세푸스 자신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세푸스는 말하기를 \’예루살렘 성이 무력으로 침공당하게 되자 디도 가이사(Titus Caesar)는 나에게 폐허가 되어버린 나의 조국에서 내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가져가도 좋다고 권면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나에게 그렇게 하도록허락하겠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곳에는 내가 쓸만한것이 없는데다가 이미 나의 조국은 패망해 버린 불행한 상황에서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안식은 단지 나와 나의 가족의 자유밖에 없었으므로 나는 그에게 단지 자유를 요구하였을 뿐이었다.나는 또한 디도 가이사의 허락을 얻어 성경을 가질 수 있었다.\’이런 모든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요세푸스는 디도 가이사가 준 진본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로마의 왕궁에서 \’유대고대사\’를 쓸 때 이 진본을 최소한 마음대로 빌려 볼 수 있었다는사실이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들을 그의 주장과 비교해 보면 요세푸스는 두 가지의 사실을 말하고 있다(즉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기적과 태양이 멈추는 기적[㈜ 고대. 3권. 1:7, 5권. 1:17.]). 그리고 태양이 멈춘 사건은모세 오경에는 나와 있지 않고 성전에 보관되어 있던 성경 원본에는 기록되어 있다. 유리는 요세푸스가 일반적으로 히브리 사본들을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 보관되어있던 가장 신빙성있는 사본을 사용하였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마카비서의 본문을 보면 느헤미야의 전집에 모세 오경이 사용되었는지의 여부를 직접적으로 나타내 보여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느헤미야의 서재에 모세 오경이 없었다고도 속단할수는 없을 것이다. 추측컨대 아마 느헤미야는 모세 오경의 라틴어역(Vulgate Copies)이 완벽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가 다른책이나 논문들에 유용하다고 느꼈던 어려운 전집을 굳이 만들어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주의> 그러나 마카비서 1 : 18에 보면 느헤미야의 시대에 있었던 성전 봉헌의 절기(애굽에 있는 유대인들은 그 곳에서 이절기를 준수하도록 권장되었다)는 느헤미야가 성전과 제단을 지은 후에 행해진 사실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보낸 서신의 신빙성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그런데 느헤미야서에는 이러한 사실이 아주 간략하게 언급이 되어 있다(느 2 : 8). 그러나 이러한 의문은 요세푸스 사본을 보면없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요세푸스의 사본에 의하면 느헤미야는왕에게 예루살렘 성벽을 짓고 성전 건축을 마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게 해달라고 간청한 기록이 있으며, 또한 느헤미야가 성전 한 가운데에서 유대인에게 행한 연설에서도 자신이 예루살렘 성벽을 짓고 성전 건축을 끝마치기 위해 왕의 허락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이러한 증언들은 이 서신의 진실성을 강력히 뒷받침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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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세푸스의 사본은 당시에 남아 있던 사마리아 사본이나70인역과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바르코카브(Barchocab)의 시대 이래로 전해져 오던 맛소라 사본(Masore?e Copy)과는 더욱 더 큰 차이점 보이고 있음이 명백한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요세푸스의 사본이 다른 여타의 사본들보다 훨씬완벽하며 신빙성이 있는 사본이라는 사실을 여러 사본들을 비교비평함으로써 입증하고자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구약 성경의원본 회복을 위해 쓴 필자의 저서 \’구약에 관한 소고\’와 \’예언서의 문자적 완성\’의 부록에서 자주 검토 입증되고 있다. 그리고 요세푸스의 사본이 단지 평범한 사본이 아니라 성전에 보관되어 있던 사본이라는 사실을 그의 주장을 통해서 알 수 있다.그렇다면 이 사본은 과연 어떤 성경이겠는가? 그것은 바로 다름아닌 요세푸스가 헤롯 성전에서 이 사본을 취하기 520년 전, 그리고 그가 \’유대고대사\’를 저술하기 540년 전에 느헤미야가 정리했던 성경임을 알아야 한다. 요세푸스는 이 저서를 예루살렘에서 기록하였을 것이며 그 후 십중팔구는 성전에다 이 성경을 다시 비치시켜 두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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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세푸스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쓰여진 역사서들, 즉 에스드라, 느헤미야, 에스더의 사본을 맛소라 사본이나 70인역보다 더 많이 사용했다는 시실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분명히 알수 있다. 앞서 말한 유대인의 편지 속에 있는 역사서들의 특징이나 자료들이 그같은 사실들을 보여주는데 이 역사서들은 바사(Persia)의 왕들이 유대 백성들에게 하사한 성물(聖物)에 관한편지의 내용들이 내포되어 있다. 반면 맛소라 성경에는 이러한 설명이나 사본이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 70인역에는 맛소라 성경보다는 더 자세히 언급되어 있으며, 요세푸스의\’유대고대사\’ 에는 모든 사본 중에서 가장 많이 그 내용을 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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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세푸스가 맛소라 사본이나 70인역 사본과는 달리 아닥사스다 시대 때가 아닌 아하수에로 왕정 시대 때 예루살렘의 성벽을 축조한 사실에 관해 느헤미야의 특수한 사본이나 사료를 사용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이 톨레미의 정경(Pto0lemy\’s canon)이나 다니엘의 70주(Daniel\’s 70 weeks)의 연대기의 내용과도 상당히 일치된다는 점은 매우 특이한 일이다(이70주에 관한 내용은 이 사본이 사용되고서야 명백해진 것이다). 이에 관하여서는 필자의 저서 \’예언자의 문자적 완성\’의부록 p.56-93을 참조하라. 이것은 요세푸스가 곧 매우 정통한 느헤미야 사본을 지녔거나, 혹은 최소한 후에 만들어진 여러자료들의 일부라도 지니고 있었음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반면에 맛소라나 70인역의 해석자들은 이와 같은 자료를 지니지 못했던 것 같다. 이 모든 자료는 다름 아닌 느헤미야의 전집, 혹은서재와 정확히 일치되는 것들이다.

 포로가 이후의 역사에 관해서는 필자가 조심스럽게 말해야 할것 같다. 따라서 나는 포로기 이후의 이야기들이 에스드라서, 느헤미야서, 혹은 에스더서와 같은 책에 이미 언급되어 있었는지에 대해서, 아니면 이 이야기들이 단지 여러 자료들을 정리해 놓은 것에 불과했는데 나중에 이 자료들을 토대로 그런 책들이 만들어졌던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서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3권의 역사서에 나타난 말투가 모두 느헤미야와 동시대것이고, 게다가 느헤미야서와 에스더서는 완전히 느헤미야가 살던 때와 동시대의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여러 자료들이 그처럼순식간에 \’느헤미야 서재 전집\’과 같은 책으로 소화되어 나올 수있었을지에 대해서 강한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집의 마지막 부분의 내용은 위에서 말한 세 권의 책이 아니라 거룩한 선물에 대한 왕들의 서한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전의 책들과는 논리를 전개하는 방식도 다른 것을 볼 때 이 느헤미야 전집이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기 보다는 신빙성 있는 자료들을 가지고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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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헤미야서에는 맛소라, 70인역, 그리고 라틴어 성경의 사본등이 한데 어우러져 인용된 큰 문단이 있는데 이 곳은 느 7 :70-12 : 26까지이다. 그러나 이 문단은 에스드라서의 부록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느헤미야서의 나머지 부분보다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또한 이 문단은 느헤미야서의 다른 부분과는 달리 저자의 이름을 1인칭으로 사용하지도 않고 있을 뿐만아니라[각주: \’예언서의 문자적 성취\’의 부록 p. 57-59를 보라.] 라틴어역 성경에는 이 부분이 아예 빠져 있다. 그러나도입부에 보면 이 문단의 내용이 분명한 역사임을 보여 주고 있으며, 에스라와 느헤미야보다 훨씬 후대인 알렉산더 대왕 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야두아(Jaddua)때까지의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다). 한편 이 문단 전체의 내용이 느헤미야의 사본이나 그의 서재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고, 다른 모든 사본에는 전 문단이실려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요세푸스가 다른 사본들을 사용했는지 아니면 단지 느헤미야 자신의 사본을 사용했는지를 판가름할 수 있는 강력한 기준과 특징을끌어낼 수 있다. 만일 요세푸스가 이 문단의 내용을 그의 저서에서 언급하고 있다면 그것은 다소 후대의 사본을 사용했음이 분명하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가 느헤미야의 사본을 틀림없이 사용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요세푸스가 느헤미야서에 나오는 이 문단 이전 부분이나 이후 부분의 내용을 축약했으면서도 이 문단의 내용에서는단 한 마디도 그의 글에 인용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수년전에 필자가 주장 한대로 명백한 사실이다. 이에 관하여는 필자의 저서 \’구약 성경에 관한 소고\'(Essay on the Old Testa-ment) p.55를 참조하라. 여기에 보면 요세푸스가 어떤 다른 사본보다 느헤미야 자신의 사본을 사용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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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푸스는 그의 저서 \’아피온반박문 \’ 제1권 8장에서 유대인들이 아하수에로의 아들 아닥사스다의 통치 이전과 통치 이후에 성경에 대하여 그들이 가졌던 관심도에 아주 커다란 차이가 생겼던 사실에 대하여 독특하게 묘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느헤미야의 통치 전과 통치 후에 나타난 성경에 대한 관심도에 큰 차이가 있었다는 말이다. 요세푸스는 이 시기까지는 선지자들의 승계가 끊임없이 이어져 왔지만 그 이후로 단절되었던 것으로 여기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관심도에 있어서의 차이점은 다른 어떤 원저자들에게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70인역에서도 이러한 차이점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너무나도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추측할 여지를 갖게 한다. 즉 요세푸스가 느헤미야의 시대 때 완공되었던 유대의 성전에서 취한 성경이란 다름이 아니라 십중팔구는 느헤미야 자신의 전집이나 서재였을 것이다. 이에 관한 의구심은 우리가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심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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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라기 선지서는 온 유대 백성들이 성경으로 인정하는 책으로서 필자가 다른 곳에서도 증명한 바대로 아닥사스다와 느헤미야의 시대 때 기록되었다.[각주: \’예연서의 문자적 성취\’부록 p.79-81을 보라.] 따라서 이 책 또한 우리로 하여금요세푸스 사본의 또 다른 기준 내지는 특징을 제공해 줄 것이다.만일 요세푸스가 그의 사본에 말라기의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면그가 보다 후대의 사본이나 혹은 맛소라나 70인역과 같은 사본을 인용했다는 것을 뜻하며, 또한 만일 그의 사본에 말라기의 내용을 수록하고 있지 않다면 그가 보다 이전의 사본인 느헤미야의 사본을 사용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요세푸스의사본을 읽어보면 이사야, 예레미야, 바룩, 에스겔, 다니엘, 요나, 나훔, 학개, 스가랴 등의 이름은 나열하면서도 말라기서나말라기 선지자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음이 명백한 사실이다. 더욱이 이 말라기서가 유대인들의 후손들에게서도 가장 권위있는 성경으로 인식되었던 것처럼 요세푸스 사본에 있어서도역시 가장 권위 있는 성경으로 인식하였다면 그가 이 말라기서를 쉽게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특히 그는 바벨론 포로기 도중이나 혹은 그 이후에 나온 어떤 히브리 역사서나 선지서를 막론하고 하나도 빠뜨림이 없이 수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만일 느헤미야의 사본에 있는 말라기서를 읽었었더라면 그는 선지자들의 계보와 유대 성서의 목록도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또한 아하수에로의 아들인 아닥사스다와 다리오 노투스(DariusNotus), 아닥사스다 므네몬(Artaxerxes Mnemon)의 이름도언급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말라기 선지나는 이 왕들 중 적어도한 왕의 통치 시기에 그의 예언을 기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말라기서의 특성을 살펴볼 때 요세푸스가 사용했던 사본은 다름 아닌 느헤미야의 사본이었을 가능성이 십중팔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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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현상은 요세푸스가 아가서 전체를 아예 빼버리고 있는 사실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나는데 필자의 생각으로 현존하는 느헤미야 이전의 모든 구약성경 중에서 오직 이 아가서만이 생략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필자가 다른 곳에서도 입증한 것처럼 이 아가서에는 성경이란 칭호를 붙일 엄두조차 내지못한데도 불구하고 맛소라나 70인역, 그리고 다른 사본들에는 이 아가서를 수록하고 있다.[각주: \’구약에 관한 소고\'(Essy on the O. T) 부록 p.25-29와 부록을 전체 참조하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실은 요세푸스가 느헤미야 이전의 사본을 사용했다는 유력한 기준과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 중의 일부가 70인역 성경이 완성된 약 200년 후에야 비로소 아가서를 정경으로 인정되었다는 흔적은 전혀 찾아 볼수 없기 때문이다. 설사 이 후대의 사본들이 느헤미야 이전의 사본처럼 아가서를 동일하게 생략하고있다 할지라도 요세푸스가 느헤미야의 사본을 사용했던 것만큼은 분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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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요세푸스가 히브리 정경인 에스라(Ezar)서를 사용하지않고 대신 소위 히브리 원본인 외경 에스드라 1서를 지속적으로 사용했던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그가 어떤 성경을 사용했는지를 알게 해주는 또 다른 기준 내지는 특징을 제공해 준다.정경 에스라서는 70인역 정도의 연조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일종의 요약문 형태를 띠고 있으며 좀더 정확히 말해서 미완성 사본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외경 에스드라 1서는요세푸스가 상당한 부피로 특이한 내용의 역사 서술을 하면서도단 한번도 인용해 본 적이 없는 히브리 정경의 에스라서보다도더 오래된 문헌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 정경 에스라서가 70인역의 연조 정도 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은 다만 필자의 추측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 에스라서가 현재는 모든 70인역의 사본에 나타나 있을지라도 이 에스라서로부터 인용된 문구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각주: \’구약에 관한 소고p.50-53을 보라.] 이 에스라서가 그 이상으로 오래된 성경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추측컨대 이 에스라서는 미완성의 히브리 성경인 느헤미야나 에더서와 거의 같은 시대의 것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 성경들은 모두 느헤미야의 서고에 보관되어 있던 신빙성 있는 자료들로부터 직접 쓰여진 원본들이었을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진 이 성경들은 여전히 미흡하고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것들이었을 것이다. 또한 에스더서에는 히브리 졍경인 다니엘서에서처럼 갈대아(Chaldee)지방에 관한 내용이 어느 정도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필자가 생각하기로는 이 에스라서와 다니엘서의 갈대아 지방에 대한 기록이바르코카브의 시대보다 더 오래된 것임을 입증할 만한 아무런 증거도 없다. 따라서 필자는 다니엘서와 에스라서가 바르코카브시대보다 뒤늦게 기록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이 모든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요세푸스가 인용한 성경은 오늘날의 맛소라나 70인역과는 다르며 보다 더 오래 전에 기록된 성경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하자면 요세푸스가 인용한 성경이란 다름 아닌 느헤미야서였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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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요세푸스가 인용한 성경이 느헤미야서라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가장 강력한 기준, 혹은 특징은 요세푸스의 느헤미야에 관한 기록 내용을 현존하는 모든 후대의 사본들에 나와 있는 느헤미야서의 일반적인 내용과 비교해 봄으로써 발견할 수 있다. 만일 요세푸스가 특히 느헤미야서에서 가장 두드러진 부분인 12년간의 유대 통치 기간 동안(현존하는 사본, 느 5 :14, 13 : 6에 나온 대로 아닥사스다의 재위 20년에서 32년까지의기간)의 느헤미야의 모든 행적들을 담고 있는 느헤미야의 사본을 사용했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그가 느헤미야의 12년간의유대 통치기 무렵이나 그 이후의 사본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요세푸스가 느헤미야 자신의 서고에서 수집한 자료들만을 사용했다고 가정한다면, 그는 단지느헤미야가 이러한 자료들을 수집하기 이전의 행적에 관해서만 기록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이 느헤미야에 관한 요세푸스의 기록에 있어서의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요세푸스가 느헤미야의 만년의 빛나는 행적,특히 성전의 완성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고는 할지라도 그가 명백히 설명하고 있는 시간적 범위란 단지 아하수에로 왕의 시대에 국한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아하수에로 집권 말년의 마지막 3년에 관한 내용과 예루살렘 성벽의 건축 정도의 이야기외에는 별 다른 내용이 없으며, 특히 아닥사스다왕 치하에서 느헤미야가 12년간 통치했던 사실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에스드라 3서의 완전한 헬라어와 라틴어판의 내용이 434절로 되어 있으며, 에스더서가 약 270여절, 느헤미야서가 모든 판에 406절로 되어 있는 데에 반하여, 퀼른(Kol-n)판에 나타난 요세푸스의 에스드라서 내용은 주석을 빼고도 무려 14페이지나 된다. 또한 그의 에스더서 내용은 크기의 비율로 따질 때 거의 10페이지나 된다. 그런데 이에 반하여 그의 느헤미야서 내용은 같은 비율로 따질 때 13페이지가 넘는 양이어야 할텐데 실제로는 겨우 2페이지밖에 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요세푸스의 느헤미야서에는 현존하는 사본에 기록되어 있는 역사에 관하여는 한군데도 언급이 되어 있지 않으며, 단지 1장의 일부, 2장의 일부, 4장의 일부, 그리고 13장의 일부분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반대로 그는 1장의 일부, 2장의 일부, 3장 전체, 4장의 일부, 5장 전체, 6장, 7장, 8장, 9장. 10장,11장, 12장 일부, 13장 일부를 빠뜨리고 있다. 그의 느헤미야서의 내용 중에 현재 우리가 지니고 있는 사본의 내용과 일치된 부분들을 살펴보면 매우 특이하고도 보다 우수한 기법으로 되어있으며, 또한 보다 양질의 연대기를 지니고 있음을 보게 된다.또한 이를 통하여 그는 현재 우리가 지닌 사본에서는 어느 한 부분도 자료를 취하지 않고 다만 다른 원본들을 대폭 변형시키고심지어 그 원본들보다도 더욱 신빙성이 있도록 만들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학자들이 심사숙고해 볼만한 높은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주의> 필자는 요세푸스가 기록한 느헤미야서의 내용이 구약정경에 있는 다른 역사서들의 내용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커다란 불균형이 있다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창세기부터 에스더서까지의 요세푸스의기록은 대략 382페이지의 분량이며, 현재 우리가 지니고 있는사본은 436장으로 되어 있어서 거의 1페이지당 1장 꼴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에 반하여 느헤미야서에서 만큼은 13장의 현존사본에 해당하는 부피가 단 2장으로밖에 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느헤미야서의 전 역사를 수록하고 있는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11권 전체를 통틀어 보더라도 비율상 전혀 이례적인 것 이상의 별다른 해답이 나올 여지가 없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주의> 포로기 이후에 나온 요세푸스의 역사서들에 관한 자료들에는 에스라 3장 7절까지, 즉 아하수에로의 아들인 아닥사스다왕 재위 12년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재위 20년에서32년까지의 느헤미야 통치에 관하여는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따라서 느헤미야가 그의 총서를 수집한 시기는 아다사스다의 재위 12년 이후임이 분명하지만 재위 20년을 훨씬 넘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모든 사실들을 고려해 볼 때 이 시기는 느헤미야가 귀환하여 통치를 하기 시작하던 바로 그때 즉 아닥사스다왕의 재위 20년째 되던 해였을것이라고 결론을 짓고자 한다. 바로 이 시기에 느헤미야와 그의백성은 신빙성이 있는 성경의 사본들을 즉시 지니게 되었을 것이며, 바로 이 성경에 따라서 느헤미야의 권위와 백성들의 그에대한 복종의 관계가 수립될 수 있었을 것이고 그 이후로도 계속 이러한 관계가 이어질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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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세 오경의 몇몇 부분과 구약성경 중 그밖의 다른 역사서에 관계된 역사적 사건들을 기술함에 있어서 요세푸스는 맛소라 사본이나 70인역, 혹은 사마리아 오경과는 그 연대순(年代順)을 달리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보다 더 정확히 기술해놓은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그가 위에 열거한 자료들보다 시간적으로 앞서고 원형이 덜 훼손된 사본을 따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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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세푸스가 서술한 내용 가운데 구약성서와 중복되는 부분은 연대순 뿐만 아니라 사실적인 측면에서도 그 당시의 다른 사본들보다 훨씬 더 일반 역사 연대기와 일치되고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각주: \’예언서의 문자적 성취\'(Literal Accomplishment of Prophesy) p. 75-77을 보라.] 이는 그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본보다 더 오래되고 또 원형이 더 잘 보존된 사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새로운 사실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맛소라 사본과 또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경을 요세푸스의 초기 \’유대고대사\’11권과 세밀하게 대조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많은 기독교 식자층이 그와 같은 세밀한 대조작업을 시도한다면 그들도 이같은 사실을 회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감히 단언한다. 다른 사본들과 요세푸스의\’유대고대사\’ 및 그를 통해개선된 수정본들을 전체적으로 비교하는 작업은 수 많은 성스러운 책들, 참으로 완전한 구약성경사에서와, 또한 수 많은 예언서들 위에 지대하고도 유익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나는 식자층들이 내가 그 진실을 밝혀내고자 시도한 관찰 과정들과 결론으로 나의 확증에 의존하기 보다는 자신들 스스로의 시도에 의해그 진실을 밝혀내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13




 모세나 여호수아, 혹은 다른 성스러운 책들의 원 저자(역사가?)의 시대만큼 오래된 단락들이 맛소라 히브리어 사본이나 70인역 및 사마리아 오경에 여러 차례 나와있다 하더라도, 요세푸스의\’유대고대사\’에는 그 시대들 만큼이나 오래된 단락들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단락들은 그들이 아벤 에즈라 사람들보다 후대에 기록되었다고 추측할 가능성을 제공해 왔다.이것은 내가 생각한 대로 완전히 새롭고 매우 중요한 관찰이다.따라서 이 일은 신중히 숙고해야 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이다. 나는우리 성경이 배열된 순서에 따라 모든 표현들과 부가된 내용을 추적할 것이며 요세푸스와 함께 모든 위치(place)들을 비교할 것이다.




 (1)




 히브리어 본문과 사마리아 오경 본문 및 70인역의 창 12 :6에는 아브라함이 메소보다미아로부터 새로이 이주해 왔을 때,\”그 당시에 가나안 사람들이 그 땅에 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2)




 다시 창세기 13장 7절에는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Perizzite)들이 그때 그 땅에 살고 있었다\”라고 나와 있다.이것으로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사람들을 그들의 땅에서 축출한이후에까지 가나안 땅에 그들이 살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감지할 수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모세의 죽음 직후까지는 이 일이 행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역사를 요세푸스의 책 속에서 만나 볼 수 있지만, 이 단락들 중 한 음절도찾아볼 수 없다. 또한 내가 알기에 70인역 이전의 책으로서, 그후대의 어떤 책에서도 그 단락들이 인용되거나 암시된 적은 없다. 상기(上記) 본문은 다른 특별한 반복없이 다른 예들을 통해 추측되어져 여기에 주어진 것이다.




 (3)




 다른 사본들뿐 아니라, 요세푸스의 사본 안에서도, 창 18장에는 아브라함이 단(Dan)으로 사로잡혀간 롯(Lot)을 뒤쫓아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지역이 모세가 죽은한참 후인 단지파가 정착하였을 때 식민지로 삼았던 것에서 유래하여 후에 \’단\’이라고 불렸던 고성(古城) 라이스(Laish)가 아닌가 추측한다. 그러나 논문에서 단(Dan) 부근이 후에 단이라고불리운 라이스(Laish)시인지 아니면 어떤 도시인지를 확인할방법이 없다. 요세푸스는 아브람이 추적한 그 지역이 어떤 도시라기 보다는 단이라고 불리운 요르단 우물 가운데 하나였다고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논증한다. 그리고 라이스시에 대하여는단지파의 반란이 있었을 때 단이라고 불리워졌고 그 도시의 개축과 새로운 명칭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 곳이 아브람이 적을추적한 바로 그 장소인지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만일 요세푸스의 사본에서 아브람이 적들을 물리친 것이다. 다섯째 날이라는 사실을 알고자 한다면 고대. 5권. 1 : 18을 보라그리고 적들이 참패하여 다메섹(Damascus)의 좌편에 있는 호바(Hobah)로 도망친 것은 이틀이 지나서였다. 적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도망할 때 그들이 다른 어떤 때보다도 더욱 신속하게 행군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라. 요르단의 우물들이나 라이스 시를 찾기 보다는 그들로부터 멀지 않는 갈릴리바다 가까이에 있는 단이라는 지역을 찾아야 할 것이다. 만일 실제로 맛소라 히브리 사본과 70인역 로마 사본에 의존한다면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느보(Nebo)산에서 단까지 길르앗 온 땅을 보이셨으며(신34:71) 이는 요세푸스의 견해에 따르면 단이 요르단의 우물이 있는 장소였음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러나 요세푸스 뿐만 아니라 70인역본, 사마리아 사본과 알렉산드리아 사본에서는 그러한 본문이 없고 아브람이 적을 추적한 것은 어떤다른 장소가 아닌 디베랴(Tiberias)바다 가까이에 있는 단이었다고 추정하고 싶다. 이것이 모세 당시에 그 도시에 명칭이었음에 틀림없다. \”단(Dan)에서 브엘세바(Beersheba)까지\”라는 일반의 경구에 관해서는 라이스시가 단이라 불리워질 때까지는 그러한 경구를 들어 보지 못했고(삿 20:1), 구약성경 전체에서는다른 장소를 의미하지 않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이 장소의 문제는 현 연구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4)




 창세기 19장 37절에서 모세는 롯(Lot)의 아들 모압(Moa-b)이 롯의 장녀로 인해 현재까지 암몬 족속의 조상이며, 그리고




 (5)




 38절에는 롯의 다른 아들인 암몬(Ammi 혹은 Ammon)이둘째 딸에 의해 현재까지 암몬 족속의 조상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러한 표현이 모든 사본과 요세푸스의 저작에 나타나 있다. 광야에서 40년간 주변국가에서 체류하던 동안에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이 큰 관계를 가졌던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이 상당한 국가로 통치하던 때에는 이러한 표현이 아주 적절했을 것이다.




 (6)




 창세기 26장, 32, 33절에서 현재 사본은 이삭(Isaac)이직접 판 우물 곁에서 그랄왕 아비멜렉(Abimelech), 아훗삿(A-huzza), 그리고 그의 군대장관 비골(Phicol)에 맹세했기 때문에 브엘세바(Beer-sheba)시 혹은 \’맹세의 우물\’이라고 불리워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 사본에서는 우물이 아브람 당시에 파여졌으며 아브람이 그 곳에서 90세 되기 전에 같은 그랄왕 아비멜렉, 아훗삿 그리고 그의 군대장관 비골에게 맹세했다.(창세기 21장 30-32절). 그러나 요세푸스는 이것에 대해는 최소한의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7)




 모세 오경에서 불려지는 것처럼 모세가 죽은 후 갈렙(Caleb)의 증손 헤브론에게 여호수아(Joshua)가 그러한 명칭을 주기까지는 헤브론(Hebron)시라는 명칭이 없었다(창 23 :2, 민 13:22). 그러나 이것은 큰 실수이다. 헤브론은 갈렙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지 다른 누구에게 준 것이 아니다(수 14:14,21:11, 2). 아마도 갈렙의 증손이 헤브론으로 불리워졌을 것이다. 요세푸스는 헤브론이라는 이름이 기원에 있어서 여호수아의시대만큼 오래되었다는 어떤 암시도 주지 않는다. 나는 기럇 아르바9Kiriat Arba)가 타니스(Tanis)혹은 소안(Zoan)의 두 번째 왕 헤브론에 의해 건축되었거나 개축되었다는 것을 다른 곳에서 언급했다.[각주: \’Authentic Records\’. p.971을 보라.] 그후에 자신의 이름에 따라 불리워졌다. 반면아브라함이 처음으로 이곳에 왔을 때 기럇 아르바 이외의 다른이름이 없었다. 비록 모세가 오경을 기록하기 오래 전 그곳의 명칭이 헤브론으로 바뀌었다 할지라도 애굽에 있는 소안의 7년 전에 건축 혹은 개축된 것이다(창 23:2, 수 14:15, 사 1:10과연대표를 참고하라).




 (8)




 창세기 32장 32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지금까지 짐승의환도뼈 힘줄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사본에 언급되어 있으며 심지어 요세푸스의 사본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모세나 요세푸스가 기록하던 때에 공히 확실했으며 이는 오늘까지도 변함이 없다.




 (9)




 나는 야곱(Jacob)이 드라빔(teraphim) 혹은 우상들을 파괴했다는 것을 기록한 70인역과 창세기 35장 4절은 건너뛰겠다. 이 우상들은 야곱의 가족들 중 누군가가 메소보다미아(Mes-opotamia)로부터 가지고 나온 것으로 다른 사본이나 번역본에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10)




 창세기 35장 20절 본문은 야곱이 라헬(Rachel)의 무덤에 설치한 기념비가 지금까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부분에 대해서 요세푸스는 기념비 그 자체의 설치를 생략함으로써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라헬의 무덤이나 기념비가 약600년 후인 사무엘의 시대까지 알려져 있다(삼상 10:2)




 (11)




 그러나 필자는 이 모든 것이 불분명하다고 생각한다. 하느님께서는 왕들이 야곱의 허리에서 출생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창 35:11). 모세는 히브리인과 사마리아인에게 여수룬 왕이있었음을 말하고 있다(신 33:5). 여호수아서와 사사기 사이의시차는 여호수아서와 사사기 사이의 기간에 관하여 히브리 사본과 70인역 공히 무정부 상태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삿 17:6, 18:1). 그런데 이와 같은 사실은 그 당시의 백성들에게는 매우 이례적인 사실이었다.그리고 아비멜렉(Abimelech)이란 말은 \’나의 아버지 왕\’이란뜻을 지니고 있는데 사사기 9장 6절에서 세겜의 모든 사람들이 가서 이비멜렉을 왕으로 삼았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이 본문으로는 에돔의 왕들이 사울의 시대까지 통치했는지의 여부를 전혀 알 길이 없다. 여덟명의 왕들은 아마 한 세기 이상 통치하지 못하였을 것이며 마지막의 통치가 출애굽 이전에 이미 끝났을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 처음 들어갔을 때 에돔은실제로 이러한 여덟명 왕의 뒤를 이었던 방백들에 의해 통치되었다(출 15:15). 그러나 에돔의 왕들을 포함하고 있는 창세기36장 20절로부터 마지막 절까지의 후반부는 요세푸스의 저작에서 생략된 것이 분명하다. 요세푸스가 이 책에 있는 현재의 언어나 현재 에돔 왕들의 목록을 그의 신전 사본에 기록했다는 것을 보여 줄 어떤 증거 자료도 없다.




 (12)




 창세기 47장 26절에서 요셉이 애굽인들을 위해 제정한 법률, 즉 왕이 애굽 전토지의 1/5을 가지고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제사장의 소유가 되는 법률이 오늘까지 계속된다는 것을알 수 있다. 이것은 애굽에 야곱이 온 이래로 약 아홉 명의 애굽왕이 그 곳에 있었던 모세의 시대에도 일치된다. 연대표를 참고하라.




 (14)




 출애굽기 16장 32-34절에서 모세는 아론에게 야훼 앞에 만나 항아리를 두어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해 간직해야 할 증거로 삼을 것을 명한다. 그리고 아론은 이에 순종하여 항아리를그 곳에 두었고, 증거의 돌판과 증거의 법궤와 함께 증거판 앞에두었다. 이것은 분명 위치가 잘못된 것이다. 만일 요세푸스의 저작을 살펴 본다면 이 계명과 계명에 대한 처벌이 연결되어 있는이 장의 마지막 다섯 절이 완전히 생략되어 있음을 볼 수 있을것이다. 따라서 요세푸스는 이 곳에 있는 그의 성전 사본에 그것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15)




 출애굽기 16장 35절에서\’이스라엘 민족은 정착할 땅에도착할 때까지 40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땅에 도달할 때까지 만나를 먹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본문은 모든 사본에있고 심지어 요세푸스의 사본에도 있다. 또한 모세의 생애 마지막에 대하여서도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요세푸스가 본래 의도한 대로 직접 기록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여호수아서가 조금 뒤에 모세의 죽음을 추가했던 것처럼 여호수아서에 의해 덧붙여졌을 것이다.




 (16)




 민수기 12장 3절 즉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勝)하더라\’는 맛소라 히브리 사본, 사마리아 오경, 70인역본에 괄호에 넣어서 삽입되었다. 전례가없는 온유함으로 모세를 칭찬한 이 구절이 결코 모세 자신에 의해 직접 기록된 것 같지는 않다. 잠언 17장 2절 즉 \”타인으로 너를 칭찬케 하고 네 입으로는 말며 의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네 입술로는 말지니라\”는 말씀은 분명 솔로몬의 지혜의 교훈인데, 가장 온유한 사람이었던 모세가 이 구절의 말씀을 어긴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요세푸스는 삽입구로 된 이 구절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그의 사본에 이 구절이 있었다고 가정할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덧붙여 말하고자 하는 한 가지 사실은 요세푸스가 모세에 대해 수시로 극찬할 때에도 특별히 모세의 이러한 뛰어난 온유함을 칭찬한 것을 보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은 모세에 대한 찬사가 수록되어 있는 후기 히브리 사본이나 70인 역본을 사용했던 사람들, 즉 시락(Sir-ach)의 저자, 사도헌장에서의 사도들이나 클레멘트, 에베소나마그네시아 사람들에게 보낸 서한에 나오는 이그나티우스와 같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각주: 집회서 45:4, 사도헌장 6:3, 7:7, 이그나티우스와 에베소 서한 10장, 마그네시아 서한 12장.] 대부분 요세푸스의 사본은 이러한역사가 기록되어 있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 절이 삽입되어있지도 않다. 또한 이와 같은 내용들은 모두 느헤미야 시대 이후에 첨가되어진 것들이다.




(17)




 민수기 21장 1-3절에서 우리는 \’요르단 서방 팔레스틴남쪽에 거주하는 가나안 사람 아랏(Arad)의 왕이 이스라엘과싸워서 그들 중의 몇 명을 사로 잡았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대로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도시를 완전히 파괴할 것을 서원할 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기도를 들으시고 도시와 함께 백성을 완전히 멸하셨다. 그리고그러한 완전한 파괴로 호르마(Horma)라는 이름이 주어졌다.후에 그 지역은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러한 역사는명백히 여호수아가 죽은 후대의 시기에 속한다(삿 1:16, 17).그러나 민수기의 히브리 사본, 사마리아 사본, 70인역본에 어떻게 이러한 내용이 기록될 수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이스라엘이 모세의 생애 동안 요르단 건너 편에서 전쟁을 하지않았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계속해서 민수기 33장40절을 보면 \’아론이 호르 산에선 죽었을 때 아랏왕이 이스라엘의 옴을 들었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시기는 모두 모세의생전에 일어난 일이었음이 사실이다. 그런데도 요세푸스는 비록사사기에서 부분적으로 적당히 언급은 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서는 모조리 생략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요세푸스의 사본이 현존하는 다른 어떤 사본보다도 더욱 순수하고 덜 오염되어 있는 것 같다.




(18)




 민수기 32장 41절과 신명기 3장 14절에 보면 므낫세의아들인 야일(Jail)이 바산(Bashan) – 하봇(Havoth) – 야일(Ja-il)이라는 촌락의 명칭을 자기 이름을 따서 명명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요세푸스의 견해대로 사사 시대에 있었던 일이며 그 사사 중의 한 명이 무낫세 지파의 야일이다. 그러나 요세푸스의 글에는 \’사사 시대까지\’라는 구절이전혀 없으며 바산-하봇-야일이라는 촌락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는 구절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19)




 신명기 1장 1절에 \’이는 모세가 요단 저편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고, 3장 8절에는 \’그 때에 요단 저편의 땅을 아모리 족속의 두령에게서 취하였으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요단 저편이라는 곳은 70인역 뿐만 아니라 히브리 맛소라 사본이나 사마리아 역본에서도 다른 지역으로 기록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고 모세가 죽기까지 그 곳에머물러 있어야만 했던 상황이었으므로 \’요단 저편\’이라고밖에표현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어나 다른 번역본에 보면\’요단쪽에서\’라는 표현의 고유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본래의 뜻과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하기도 했다. 한편 요세푸스는 우리 사본들에서 발견한 이상한 표현들을 전혀 인식하지못하고 있다. 즉 요세푸스는 하느님께서 모세가 요단 저편으로건너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고 그 곳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실 좋은 것들을 모세가 누릴 수 없음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정으로 토로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이와 같은 내용은 현대 우리가 가진 사본이나 후대의 사본들과는 모순이되고 있다.




 (20, 21)




 신명기 21장 21절의 70인역을 보면 르바임(R데-haim)족이 아닌 암몬족(Ammonite)이 르바임을 정복하고 오늘날까지 살아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히브리 맛소라 사본과 사마리아 역본의 신명기 2장 22절에는 호리족(Horites)이 아닌 에서(Esau)의 후손이 세일 땅을 정복하고 오늘날까지 살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2장 12절에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그들의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살았던 것처럼 호리족이 아닌 에서의 후손이 세일 땅을 정복하고 살았다는내용이 추가로 나온다. 이러한 설명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에 정착한 후 혹은 모세가 죽은 다음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이와 같은 내용은 요세푸스의 글에서 전혀 찾아 볼 수가없다.




 (22)




 신명기 34장 6절에 보면 오늘날까지 모세가 장사된 자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단언하고 있으나 요세푸스의 글에는 그러한 단정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주의> 필자는 모세에 관하여 서술된 신명기 34장의 마지막세절, 즉 10-12절을 여기에서는 따로 설명하지 않겠다. 34장 10절에 \’그 이후로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현존하는 모든 사본과 요세푸스의 사본에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중 어느 한 군데도 모세나 여호수아가 직접 기록한 부분은 업슨 것이 분명하며 다만 오경에 대한매우 적절한 부록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저자는 아마 바벨론포로기 무렵이나 그 이후의 유대 선지자나 유대교 지도자 중의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에스라 혹은 느헤미야일 수도 있고 아니면 동시대의 선지자인 학개나 스가랴 등으로도 추정할 수 있다.그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 백성으로부터 분리되는 벌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선지자들은 백성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말씀을 들려 줄 모세와 같은 위대한 선지자나 왕인 메시야를 맞이할 준비를 시키기 위하여 이 중요한 구절을 첨가했을 것으로 본다(신 19:15-19). 그러나 필자는 일반 독자들이 이 글을 신명기서의 원본의 일부로 착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왜냐하면 이 부분은 후대에 첨가된 부록에 지나지 않음이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23)




 여호수아 4장 9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 둘을 세웠더니 오늘날까지 거기 있더라\’라고 되어 있으나 요세푸스의글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찾아볼 수가 없다.




 (24)




 여호수아 5장 9절에는 여호수아의 야영지를 오늘날까지길갈로 불러 왔다고 되어 있으나 요세푸스의 글에는 그러한 표시가 없다.70 인역 여호수아 6장 26절에 언급된 여리고 성의 건축자에게 내려질 저주가 성이 완성된 후 실제로 일어난 사실(대상 16:34)은 히브리 맛소라 사본이나 다른 사본에는 기록되어있지 않다.




(25)




 여호수아 6장 25절에 보면 \’여리고를 탐지하려고 보낸정탐꾼을 숨겨 준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 땅에 오늘날까지 기거하였더라\’라고 되어 있는데 요세푸스는 그러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26, 27)




 여호수아 7장 26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아골(Achar 혹은 Achor)에 돌무더기를 쌓았는데 오늘까지 이르더라\’고 나와 있는데 이는 그 장소가 오늘날까지 아골 골짜기로 불리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세푸스의 글에는 그러한 어구가 나와 있지 않다.




(28)




 여호수아 8장 28절에는\’이에 여호수아가 아이(AI)를 불살라 그것으로 영원한 무더기를 만들었더니 오늘까지 황폐하였으며\’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또한 요세푸스의 글에는 없는 구절이다.




 (29)




 여호수아 8장 29절에 \’아이 왕의 시체를 성문 어귀에 던지고 그 위에 돌로 큰 무더기를 쌓았더니 그것이 오늘까지 있더라\’라고 나와 있으나 요세푸스의 글에는 그러한 내용이 없다.




 (30)




 히브리 맛소라본 여호수아 9장 23절에 \’기브온 거민들은여호수아의 저주를 받아 하느님의 집 혹은 성전을 위해 나무 패고 물긷는 자가 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성전은 여호수아시대보다 훨씬 후에야 지어졌다. 아무튼 여기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집이 성전을 의미하는 것인지, 여호수아 시대 때 이미 세워져 있던 성막을 의미하는 것인지, 요세푸스의 글에는 아무런 언급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필자는 이에 관해 더 이상 언급하지않을 것이다. 다만 요세푸스의 글에는 히브리 맛소라 사본이나70인역의 21, 27절에서 나와 있는대로 \’그들이 온 회중을 위하여오늘날까지 나무 패는 자와 물 긷는 자가 되었더라\’라고 하는 기록을 볼 수 있다. 그런데 70인역에는\’하느님의 집\’이란 말은 나와 있지 않으며 요세푸스의 사본도\’오늘날까지\’라는 부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31)




 여호수아 10장 10절에는 \’가나안 족속이 벧호론에 올라가는 비탈에서 추격하여\’라고 기록되어 있다. 벧호론이란 명칭은 요세푸스 뿐만 아니라 히브리 맛소라 사본이나 70인역에도나와 있다. 그런데 역대상 7장 24절에 보면 이 벧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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