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발생의 요인 – 대외적 요인

 

동학이 창도된 1860년은 국내외에 걸친 강한 외세의 도전 속에서 민족적 위기가 고조되어 있었던 시기였다. 그런 뜻에서 동학은 제반 국내의 봉건적인 위기 상황뿐 아니라, 구미 등 외세 침략에 대한 불만의 산물이었고, 그것을 슬기롭게 극복, 대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그 발생의 요인을 몇 가지로 요약해 보면 대외적인 요인으로서는 첫째, 19세기 이후 서세동점의 민족적 위협 속에서 국가보위 의식의 팽배와 국난 극복의 민족 구원 사상, 둘째는 서학의 도전을 민족적 주체, 자립의식으로 응전하려는 자세의 확실성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대내적 요인으로서는, 첫째는 18세기 이후 변질된 조선 왕조 양반 사회의 제반 봉건적 정치 상황의 모순, 둘째는 국가에의 납세 제도인 삼정의 문란, 세째는 전통적인 유교・불교・도교 등의 종교와 외래 사상의 여러 가지 폐단에 따른 지도 이념의 난맥, 그리고 사상적 퇴색과 민중 향방의 혼돈, 네째는 실학사상에서의 현실 비판과 개혁 사상 및 변혁 사상에 영향받은 피지배 민중의 수준 높은 의식의 향상과 자각도 등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 같다.1)


그러면 먼저 동학 발생의 대외적 요인부터 살펴보자.


당시 서양의 힘이 동쪽을 억합하려는 움직임이 여실하다는 사실을 수운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경신년(1860)에 전해 온 세상의 얘기는 요망 무쌍한 서양의 적이 중국을 범하여 왔다……」2)


이렇듯 서양 세력(영・불・미・독 등)의 동점적 위협은 결국 1860년 영・불 연합군의 북경 침입을 단행시켰다. 일본 역시 1854년에 미국・영국 등에 의하여 침략적인 개항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 사실은 우리에게도 위기 의식으로 받아들여져 조야를 불안케 하였다.


이런 상황은 당시 조선에 거주한 외국인의 기록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서울에서 시작하여 전국으로 번진 엄청난 공포와 심각한 경악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모든 일이 중단되었고 부자나 넉넉한 집안들은 산골로 도망하였는데 제일 먼저 피신한 사람 중의 하나는 위에 말한 의견서를 만든 사람이었으니, 그는 자기 목숨을 안전하게 하려고 관직을 사임하였다. 대신들은 그들의 부서를 감히 떠나지 못하고 아내와 자녀와 보물들을 서둘러 떠나 보냈다. 높은 관직에 있는 관리들이 信者들에게 겸손되이 보호를 부탁하고 위험의 날에 대비하여 종교서적이나 苦像이나 聖牌을 장만하여는 교섭을 벌였다. 어떤 관리들은 공공연하게 천주교의 이 표지들을 허리에 차고 다니기까지 하였다. 포졸들은 그들이 모인 자리에서 제각기 천주교인들에게 대한 수색에 조금이라도 협력한 것과 그들에게 가한 고문을 변명하였다.」3)


거의 매년 異樣船의 출몰이나 무시로 도전받는 통상 교섭의 강요, 이런 제반 위해적 요소가 국내의 內修外攘의 보국안민적 관심을 높였다.4) 그러므로 그 당시 구미의 압도적인 괴력에 대항하여 조선의 보국안민책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위기의식을 극복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민족적 유토피아를 위하여 동학이 성립 제시된 것이다. 수운의 동학은 기독교에서 서양 기술이나 무기 등이 나온다고 보고 구미의 서세동점적인 침략을 저지, 단절시키기 위해서는 기독교보다 우세한 종교로 대항, 능가해야 우리 민족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동학이 기독교보다 우세한 요소는 고종실록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천주교가 陰이고 동학은 陽이다. 그러므로 양이 음을 제압한다」고 믿었다.5) 따라서 당시 민간에 유포되어 있던 동학의 전통적인 음양의 용법이 결국 서학을 능가할 수 있다는 일반론으로 굳어졌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왜 천주교와 동학이 음과 양으로 규정되었는가 하는 실증적 논리는 상세치 않으나, 金平黙도 「조선은 양에서 義를 중요시 여기고 서양은 음에서 利를 중요시한다」6)고 하였으니 그런 논리 구성으로 생각해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李敦化도 천주교는 유・불・선 등과 함께 天道의 일부임에 대한 설명을 전개하면서 동학을 본원적・총체적인 인식체계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7) 구미를 격퇴하는 방법은 화력 공격이나 무장한 군사로 대결하는 것이 아닌 산중에 제단을 설치하고 주문・검기를 연창하면서 나무・칼로 검무를 추는 것이라고 강조한 뒤 보국안민의 방법과 묵도・주문・검무 등에 의한 동학 특유의 종교적이며 정신적인 기백에서 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대외적 위기상황 속에서 경계심과 우려가 민심을 흉흉하게 하고 방황과 혼미를 거듭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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