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운의 신 개념- 반대일치 논리와 汎在神論

 

반대일치 논리와 汎在神論


최수운의 신관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서구 논리학이 벽에 부딪혀 矛盾律과 排中律을 극복한 「반대일치」의 논리 위에 선 신관이다.1)


수운은 천주에 관하여 여러 경우에 언급하고 있지만 한 번도 한울님에 관하여 개념적으로 규정을 내린 적이 없다. 동학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21자의 주문을 <논학문>에서 스스로 해설하는 가운데서도 수운은 20자 모두를 해설했지만 가장 중요한 「천」이 무엇인가를 규정하지 않았다. 이것은 우연적인 누락이 아니라 의도적인 제외이다. 왜냐하면 천주 곧 한울님은 개념화되거나 정의될 수 없는 생존 자체이어서 인간의 인식 행위 이전의 그 인식 행위 자체를 가능케 하는 능력이며 전체이기 때문이다.


수운이 전통적인 유신론적 초월신을 극복하려고 했던 점은 그가 당시의 서학 및 더 구체적으로 천주교 신앙 형태에 대한 비판에서 나타나 있다. <논학문>에서 묻기를 「서도와 다른 것이 없읍니까?」 대답하기를 「서학은 우리 도와 같은 듯하나 다른 것이 있고, 비는 것 같으나 실지가 없나니라. 그러나 운인즉 하나요, 도인즉 같으나 이치가 다르니라」 묻기를 「무엇이 다르오니까?」 대답하기를 「우리 도는 무위이화라. 내 마음을 지키고 내 기운을 바르게 하면 한울님 성품을 거느리고 한을님의 가르침을 받아 자연한 가운데서 되는 것이요, 서양 사람은 말에 차례가 없고 글에 순서가 없으며 도무지 한울님을 위하는 끝이 없고 다만 제 몸만을 위하여 빌기 때문에 몸에는 기화의 신이 없고 학에는 한울님의 가르침이 없으니 형식은 있으나 자취가 없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주문이 없느지라. 도는 허무한데 가깝고 학은 한울님 위하는 것이 아니니 어찌 다름이 없다고 하겠는가」2) 


위 인용문을 주의해서 보면 수운의 신관에서는 소위 신성과 인성의 본질적 동일, 통일, 연합, 교류, 연속적 발전 등을 인정하거나 전제하고 있다.


기독교의 유신론은 자유하신 주로서의 신과 세계와의 혼동시켜 버리는 것을 막기 위하여 범신론을 철저히 경계해 왔으며, 동양 여러 종교의 범신론은 신의 객체화를 강행할 때 초래되는 신학적 형이상학의 우상화를 두려워하여 신의 자유와 주성, 그리고 또 인격성, 자존성 등을 경시해 왔다. 범재신론은 바로 이 모순적인 신의 초월과 내재를 「反對一致」의 辨證法的 논리로써 동시에 포용하려 하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수운 신관의 탁월성이 있는 것이다.3)


수운은 조화(생성)와 한울님(천주)을 동일시함으로써 자연의 합리적 질서와 생명의 출현, 진화 발전의 기계적인, 맹목적 우연이라고 보는 무신론적 세계관과, 세계를 신의 의지에 의한 과거 일정 시점의 창조 결과라고 보는 유신론적 세계관과, 신의 세계 내재성만을 보고, 경외해야 할 주로서의 천생을 보지 못하는 범신론을 동시에 극복하려는 것이다. <논학문>에 나타나는 수운의 신비 체험 중에서 天師 답하기를,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다. 사람이 어찌 이를 알았으랴. 천지는 안다해도 귀신은 알지 못하였으니 귀신이란 것도 나니라.」4)


고 하는 답을 얻었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전통적인 자연/정신, 신/사람, 물질/생명, 주체/객체, 전체/개체 등의 2분법적 실재관을 부정하고 그 모든 것을 범재신론적인 실재관에 서서 유기체적인 연관 실체로서 파악하려는 것이다.5)


실재의 세계는 물질적 차원, 생명의 차원, 의식의 차원, 영적 차원 등으로 크게 연속적인 층을 이루고 있지만, 실재계의 이 층들은 그 발전 과정에서 전혀 새로운 질적 변화, 창조적 생성을 이루어 가는 것이지만, 보다 고차적인 실재계는 그보다 덜 발전한 실재계에 근거하고 있으며 지나간 과거의 전생성 과정과 결과는 지금・현재의 실재 속에서 공존하면서 미래를 향해서는 潛勢的인 가능성이 된다. 비록 서구의 범재신론자들처럼 좀더 생성과 조화 과정을 분석하여 물질-유기화, 의식-복잡화의 법칙을 논술하지는 않았으나 수운의 무위이화론은 그것을 말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므로 수운의 신관 이해에 있어서, 만약 그의 유신론을 비판한 점에만 사로잡혀 수운 신관의 내재적 특성만 강조하고 「내재의 초월」을 간과한다면 이는 수운 신관의 합리화라는 과오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며 천도교가 종교로서의 중요한 본질을 상실한 셈이 되어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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