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十 牛 圖 74>
禪에는 흔히 十牛圖라고 부르는 조그만 텍스트가 있다. 소를 잃어버린 牧者가 野性으로 돌아가 있던 그 소를 다시찾아내 길들임으로써 소와 하나됨을 실현해 나간다는 열 개의 연속된 그림이다. 이 그림은 인간 본래의 참모습, 즉 “참된자아”를 자각해 나가는 모습을 열 단계로 나누어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각 단계의 경지를 나타내는 열 개의 그림과 그림 사이의 다이내믹한 관련성은 자기실현의 과정과 모습들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그림 하나하나마다 붙어있는 간결한 서문과 偈頌은 각 단계에서 자기 경지의 위상을 설명하고 있다. 12세기 후반 북송 시대 말엽 廓庵禪師가 지은 이 十牛圖75>는 원래 禪門의 수행자를 위한 기초적 입문서이며 지금도 그와 같은 용도로 쓰이고 있는데, 이 십우도에는 “自己”라는 본질적인 문제, 즉 자기가 겪어가는 “자기의 온갖 모습”과 그 사이의 關聯性이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十牛圖를 단순히 禪에 관한 것으로만 한정치 않고, 현대인의 입장에서 새롭게 ‘자기의 現象學’이라고 이해해 나갈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十牛圖는 각각의 단계에서 자기가 자기에게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나타남(現象)’을,‘참된 자기’를 꿰뚫는 자각의 빛으로 조명함으로써 단계적인 자기를 초월해 참된 자기로 통하는 길을 열어 보여준다.
제 1 도 : 尋牛 (소 찾아 나서다)
잃어버린 심우를 찾아 가는 初發心의 단계를 나타낸다. 참된 자기를 찾는 바로 그 태도가 참된 자기의 시작인 것이다. ‘자기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참된 자기’를 향한 첫걸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물음에 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힘 빠지고 정신 피로하여 소 찾을길 없는”상태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 “들리는 것은 늦가을 나뭇가지 매미 울음 뿐”이다.76>
제 2 도 : 見蹟 (자취를 발견하다)
여기서 牧者는 소의 발자국을 발견하다. 불교의 표현을 빌면 “경전에 의거해 뜻을 이해하고 가르침을 배워서 자취를 아는”경지인 것이다. 경전을 배우고 가르침을 들어서 理致上으로는 참된 자기의 실상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막다른 곳에 봉착한 그가 절망 상태 속에서 “참된 자기”의 발자취로서 어떤 가르침과 마주치는지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77> “스스로”라는 것이 전혀 불가능해졌을 때 機緣에 따라 제시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제 1 도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맞부닥친 이 막다른 곳은 가르침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앞선 자의 모범을 제대로 수용하기 위한 전제였다. 이제 그는 가르침을 통해 몇가지 理致를 알고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아직 理致를 理致로서 지해 ( 知解:지식으로 이해 ) 한데 불과하고 이치를 나타낸 언어가 나오게 된 근원은 여전히 은페돼 있다. 오히려 그 이치를 전개한 “經典”이나 “가르침”의 말에 묶여 자유롭지 못하다.
제 3 도 : 見牛 (소를 보다)
“성품을 보고”(見性) 매사에 한치의 허술함도 없이 단련함으로써 몸 위에 자기의 “참된 성품”(眞性)을 확실해 해 나간다. 이렇게 나날이 공부하는 과정 속에서 자기가 조금씩 자기로 되어간다.
제 4 도 : 得牛 (소를 얻다)
이 그림에서 소는 全身을 드러내고 저쪽을 향해 여전히 달려가려고 한다. 목자는 소의 고삐를 온몸으로 힘껏 당기고 있다. 그 고삐에 의해 참된 자기와 참된 자기를 찾는 자기와의 統一이 具體化 되어있다. 이 단계에서 고된 수행을 통해 분열을 통일하는 것은 재분열을 미연에 방지하는 加重的 統一의 지속적인 긴장 속에서 분열의 힘이 차차 통일 속으로 녹아들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제 5 도 : 牧牛 (소를 기르다)
이 그림에서 牧者와 소는 그 통일 속으로 차차 녹아들면서 行이 “안락의 법문”이라는 본래의 특질을 나타내게 된다. 앞장서서 걸어가는 목자를 소는 스스로 따라서 간다.78> 여기서 비로서 소의 얼굴이 드러난다. “本來面目”의 진정한 의미는 겨우 여기서 부터 시작하는 것이다.79> 또한 여기서는 牧者와 소 사이의 고삐가 이미 느슨해져 있다. 즉 이 경지에선 제 4 도처럼 자기의 統一이 緊張的 統一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統一의 과정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제 6 도 : 騎牛歸家 (소를 타고 집에 돌아가다)
제 5 도의 단계에서 牧者와 소는 肯定的 統一을 이루고 있지만 여전히 二重的이다. 그러나 이 단계에 오면 牧者와 소는 이미 한 몸이 되어 자기에 대한 분열과 갈등들이 그쳐 있기 대문에 자기 존재는 저절로 詩的 趣向을 띠게 된다. 목자와 소의 통일이 완전히 자연스러워지고, 그 한 몸이 된 자연스러움은 저절로 天地 自然과 交響하면서 피리 소리가 된다. 목자가 피리를 불고 있다기보다는 목자와 소의 一體性이 “天地와의 一體性”이라는 곡을 불고 있는 것이다. 그 소리는 “한량없는 뜻”을 간직하고 있다.
제 7도 : 忘牛存人 . 到家忘牛 (소는 잊고 사람만 존재한다)80>
여기서 주제를 “소를 잊음”이라고 한 까닭은 소와 완전히 合一 ( 지금 현재 철저히 자기화 됨) 한 탓으로 더이상 별개의 소로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현재 소이기 때문에 소의 일은 모두 잊혀지게 된 것이다. 이 단계에서 나와 소는 一如속에 있으며 하나의 완성이기도 하다. “본래의 자기를 찾는 자기”가 “본래의 자기”를 찾았고 결국은 이 둘이 하나가 된 상태(一如)에 도달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과연 완성일까?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자신이 “있다”(有)는 데 있다. 제 1 부터 제 6 까지는 각각의 그림이 보여주듯이 제각기 자기 방식대로 활동해 나갔다. 이 단계들은 모두 自己自身을 향한 自己의 實存運動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결국은 소와 내가 하나가 되는 一如의 단계까지 도달한다. 그러나 도달한 후 스스로 그 경지에 만족하는 바로 그 순간에 활동은 정지되고 거기에 커다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활동이 정지된 것 자체가 逆轉의 始作이기 때문이다.
제 8 도 : 人牛逑忘(사람도 소도 모두 잊다)
소뿐만 아니라 제 7 의 사람 자체도 잊어버린 경지이다. 그림에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텅 빈(空) 것 만이 있다. 제 7 도에서는 소가 사라지고 自己自身에 安住한 사람이 그려져 있었지만, 이제는 그 사람도 집도 풍경도 모두 단숨에 자취도 없이 떨쳐버린 絶對無의 경지가 제 8 의 단계이다. 일체의 수단(十牛圖에서는 여기가지 오는 과정)을 쓸어버린 제 8 도의 이 텅 빈 圓相은 제 7 도에서 현성한 자기자신을 전면적으로 버려야 한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81> 제 7 도에서 제 8 도로 가는 과정은 지금까지처럼 “成就”하는 것이 아니라 “還滅”하는 것이다.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크나큰 죽음”(大死)이며 여기서 결정적인 非連續的 飛躍이 있다. 즉 여기서는 決定的인 向上의 飛躍的 轉換이 發生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잊지말아야 할 것이 있다. 여기서 아무것도 없음은 有의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無가 아니다. 여기서의 無는 有와 無의 구별도 없는 有無가 있기도 전의 완전한 絶對無이다. 絶對無는 有와 對立하는 無 역시 부정한다. 佛敎의 경우 본디 實體的 思惟를 해체하는 智慧의 作用이 “空觀”이며, 그 空觀에서 實相이 나타난다. 절대무는 비실체적으로 “없음도 없는 (無의 無)”것으로 바뀐다. 대승불교의 일반적 표현방식에서 空은 “空 또한 空”이며, 따라서 色卽是空 空卽是色인 것이다. 그리고 이“空 또한 空”,“없음도 없다 (無의 無)‘로 바뀌는 데에서 ”“생명의 뿌리를 끊고 , 끊은 뒤에 다시 되살아나면서”“자기 아닌 자기”로 부활한다.
그러나 禪의 과정이 여기서 끝나는 것 역시 아니다. 여기서 끝나버린 다면 “禪은 虛無主義다”라는 비난이 타당성을 얻을 것이다. 十牛圖에서 제 8 의 단계는 제 9 도에서 부활한다.
제 9 도 : 返本還原 (근원으로 돌아가다)
이 그림에는 단지 흐르는 냇물과 물가에 꽃 핀 나무가 전부이다. 그 광경은 참된 自己의 自然이다. “참된 자기”의 現象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인간의 내적 상태가 외적 자연을 통해 비유적으로 표현되고 있거나, 혹은 내면적인 이미지 (心象風景)가 可視的인 풍경으로 투영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인간과 자연 둘이 하나가 됐다는 의미도 아니다.
절대 무에서 부활할 때 동시에 그 절대무에서 現前한 山水는 즉각 “자기 아닌 자기”중 “자기 아닌”인 것이다. “끊어진 뒤에 부활한” “자기 아닌 자기”를 그 “자기 아닌”의 無我性에서 비대상적인 방식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이 “물은 절로 아득하고 꽃은 절로 붉구나”이다. 물 흐르고 꽃 피는 그 일이 이 경지에선 자기가 “자기 아닌 일” 바로 그것이다. 혹은 ”자기 아닌 자기“는 그 무아성에서 “물은 절로 아득하고 꽃은 절로 붉구나”를 부활의 신체로 삼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리고 이 무아의 신체에서 “자기 아닌 자기”가 “자기 아닌 자기”를 투명하게 얘기하고 있는 그것이 “물은 절로 아득하고 꽃은 절로 붉구나”라는 말인 것이다.
또 제 8 의 단계에서 제 9의 단계로 가는 것은 단계적인 상승이 아니라 상호 透入하고 相卽互轉하는 작용의 양면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는 객관적 검증이나 논리 자체가 이미 타당성을 잃어버린 영역이다. 오히려 이 경지만 본다면 詩的 世界라고 할 수 있다. “부정이 곧(卽) 긍정” = “긍정이 곧(卽) 부정”인 이 즉(卽)에서 有와 無가 상호 침투하기 때문에 이 당처에서 자연은 가장 현실적임과 동시에 가장 환상적인 것이다.
제 10 도 : 入廛垂手 (저자에 들어가 손을 드리우다)
괴롭고 복잡한 인간세계에 들어가 利他行을 한다는 뜻이다. “물은 절로 아득하고 꽃은 절로 붉다”로서 무아성을 구체화한 “자기아닌 자기”가 인간세계에 자기로서 나타나 자기 전개를 하면, 그것은 저절로 타자로 하여금 참된 자기를 깨우치게 하는 道가 된다.1) 일반적으로 대승불교는 “스스로를 깨우치고 남도 깨우친다”(自覺覺他)고 말한다. 자기의 깨우침(自覺)은 남을 깨우치는 데서(覺他) 그 깨달음이 증명된다. 참된 자기는 “열반에 머물지 않고”거리로 나가 타자와 교류한다. 그러나 절대무로 부터 나왔다고 해서 절대무를 벗어난 것은 아니다. 제 10 도도 제 9 도와 마찬가지로 제 8 과 相卽相入한다.
제 10 의 경지는 自己와 他者가 만나서 교류하는 것을 주제로 삼고 있다. 제 10 도에서 마주보는 두 사람이 나타난 까닭은 참된 자기가 “마주 본 두사람”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현상은 매우 중요하다. 끊어지고 난 뒤에 부활 한 자기는 절대무로서 타개되고 있으며, 자타 두 겹으로 되어 있다. 자기는 자타 “사이”에서 진실로 타개되고 있으며, 그 “사이”가 자기의 고유한 내면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人“間”(사람사이)가 참된 자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