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시대적 배경
증산의 성장과 활동을 고찰하기에 앞서 먼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그의 개인적인 환경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종교 창시자로서의 증산의 성장과 활동은 그 시대 상황과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증산이 출생한 1871년부터 그가 종교적 경험을 體系化하여 포교활동을 시작한 1902년까지 약 30년간의 시대적 상황을 그가 출생하고 성장한 전라도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여기서는 개략적인 언급에 그치고, 증산의 종교적 경험에 영향을 끼친 부분에 대한 구조적인 분석은 이후에 언급한다.
1. 정치적 상황
조선의 19세기 전반기에 속하는 1801년 (순조 원년)부터 1863년(고종 원년)까지는 소위 세도정치에 의한 변태적 정치가 시행된 때였다. 이 시기의 정치는 주로 내정의 발전과 개혁보다는 외척이 주축이 된 정치 엘리트들에 의한 권력투쟁에 일관되어 있었다.
고종이 즉위함으로써 정권을 잡게 된 흥선대원군은 세도 정치를 타파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과단성있는 개혁을 단행하였지만, 그 후에 발생한 국내외적 여러 사건들은 그전보다도 정치적 상황을 더욱 더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특히 증산이 출생한 1871년부터는 신미양요(1871년), 윤요호 사건(1875년), 병자수호조약(1876년), 미국·러시아·이태리 등 서양 제국에 의한 수교요구(1880년)등이 발생하여 일본과 채결한 병자수호조약 이외에도 미국, 영국, 독일(1882년), 이태리 러시아(1884), 프랑스(1886년), 청(淸-1899) 등과 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되었으며, 그후 한일합방(1910년)까지는 약 32개의 조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조선이 국제무대에 등장하게 되자 일본을 비롯한 열강 제국의 세력과 문물이 국내에 밀어 닥치게 되고, 특히 권력 엘리트들은 보수 세력과 혁신세력으로 구분되기 시작하였으며, 이 두 세력간의 권력투쟁은 점차 그 농도를 더해 임오군란(1882년)과 갑신정변(1884년)이라는 부수사건들을 발생시켰다. 또한 1892년부터 양성적(陽性的)으로 나타난 동학교도들의 교조신원운동은 그 후 그들의 이념이 국내 정치 문제에 파급되어 동학혁명(1894년)으로 발전되었다. 증산이 태어난 해가 1871년이므로 증산의 나이 23세때 동학혁명을 맞았다는 것이 된다. 동학혁명은 갑오경장이라는 국내적 개혁과 청일전쟁이라는 국제전쟁을 초래한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권력투쟁전(權力鬪爭戰)은 여전하여 대원군과 민비의 권력투쟁은 그 농도가 더해 갔으며, 특히 외국세력에 의지하여 형성된 親淸, 親日, 親露의 신흥정치세력은 저마다의 권력신장에 열중하여 결국 을미사변(1895년)과 아관파천(1896년)이라는 국치적(國恥的) 사건을 발생시켰다. 결국 정치부재(政治不在)의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1871년부터 약 30년간의 정치적 상황은 국제적 영향과 국내적 권력계급의 갈등으로 인해 급격한 변동을 가져온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이와 같은 정치적 불안정은 정책 결정자의 급격한 지위변동을 수반하였으며, 이로 인해 국내 정책은 일관성을 상실하였고 국가의 정체위기는 극도에 달하였다. 따라서 서구문화의 이입(移入)을 통해 점차 개화되기 시작한 조선사회는 국내외적인 제 조건으로 인해 심각한 피해의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일반 민중의 정치적 소외현상은 가속화되었다.
2. 사회·경제적 상황
조선말 사회구조상의 현저한 특징의 하나는 양반계급의 비대화(肥大化)였다. 이로 인해 과거제도의 문란이 일어났으며, 일반 민중은 과중한 과세를 부담하며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위에 정치구조상의 혼란에 기인한 관리들의 민중수탈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일반 민중의 생활은 그야말로 도탄(塗炭) 그 자체였다. 그 결과 각 지방에서 민란이 일어났으며, 고종이 즉위한 이듬해인 1864년부터 동학혁명이 발생하던 1894년 1월까지 30년동안에 전국에 걸쳐 41건의 민란이 발생하였다.
특히 관리들의 수탈이 심한 전라도에서 많이 발생하였는데, 동학혁명 직전인 1893년 11월에는 고부, 전주, 익산 등 3군(郡)에서 한꺼번에 발생하였다. 정부의 탄압도 이와 함께 거세어졌는데, 民亂의 주모자들이 대부분 동학교도였던 관계로 동학교도들은 관리들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탄압이 심한 만큼 민중들의 저항도 거세어졌고, 결국 동학혁명의 기치(旗幟)를 높이 날리게 되었다. 이는 종교운동의 차원을 넘어 차라리 피지배계급의 저항운동인 대중운동으로도 볼 수 있다. 동학혁명은 민중의 열망과 욕구가 뭉친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학혁명은 결국 외국군대의 개입과 동학조직 내의 분열, 무기의 원시성, 중간계급(소재산 소유자, 적당한 교육을 받은 자)의 반대 등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동학교도들은 재산을 압류당하고 극심한 탄압에 받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볼때 동학혁명은 초기에는 잠재되어 있던 일반 민중의 욕구를 극대화시켜 이에 참여할 경우 신정부의 수립과 복지사회의 건설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지만, 이것이 실패함으로써 혁명에 가담한 일부 민중은 극대화된 욕구의 충족수단을 상실함하고 심한 좌절을 겪게 되었다. 더욱이 혁명의 부산물로 나타난 사회적 혼란 및 관군과 日兵, 민포군(民包軍) 등으로부터 받게 된 보복은 그들의 생존권마저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현상은 동학혁명이 처음으로 발생하였던 전라도 지방이 더욱 심했고, 특히 전봉준이 봉기했던 고부(古阜-증산의 출생지)지방과 그가 군관과 최후의 결전을 했던 태인, 금구(金溝) 등지에서 더욱 심했다.
또한 1895년에는 유교적 전통사상의 단절을 뜻하는 단발령이 선포되었다. 이에 항거하여 각 지방에서 의병운동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이 의병들은 한때 위력을 떨쳤으나 1896년 국왕의 포고문과 선무작업(宣撫作業)에 의해 해산되었다. 그 후 잔존(殘存)해 있던 의병들이 화적으로 전환되기도 하여 민중들에게 더욱 피해를 끼쳤다.
3. 종교적 상황
동학혁명의 실패에 따른 사회 경제적 혼란은 신흥종교로서의 기대를 모았던 동학 자체에 대해서도 회의와 허탈감을 갖게 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문호개방과 함께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서구문화는 국내의 전통문화와의 갈등을 초래했다. 이러한 현상은 1866년 대박해(大迫害) 이후 1878년부터 다소 탄압이 풀린 西學(天主敎)뿐만 아니라, 그 후에 들어온 신교(改新敎)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는데, 일반 민중들에게는 기독교 사상이 아직 제대로 수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재래(在來)의 종교인 儒敎와 佛敎 및 道敎는 사회적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인 지주(支柱)가 되지 못했다. 유교는 조선시대를 통하여 반상차별(班常差別)의 계급사상으로 변질되어 일반 민중과는 거리감을 갖고 있었고, 불교는 조선의 개국과 함께 숭유억불정책에 의해 승려의 사회적 지위가 하락되고 산으로 은거처를 찾는 등 일반민중에게 정신적인 지주역할을 하기는 어려웠다. 도교는 風水圖識化하여 민간에 유행하는 토속신앙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렇게 볼 때 조선말기에는 일반 민중의 정신적 기반이 될 수 있는 조직화된 종교체계가 마련되어 있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일반 민중 사이에 크게 성행한 것은 오히려 조선 초기부터 전해오던 정감록(鄭鑑錄) 사상이었다. 정감록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1868년과 1870년에는 반란을 도모하는 사건들이 발생할 정도였다. 정감록에는 진인사상(眞人思想), 신도사상(新都思想), 승지신앙(勝地信仰), 남조선 신앙(南朝鮮 信仰)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진인사상이란 메시아적 왕의 출현에 대한 대망(待望)이고, 신도사상은 時運에 의해 낡은 왕조는 물러가고 새 왕조가 들어서서 새 서울을 세운다는 믿음이며, 승지신앙은 亂時에 피하기만 하면 절대 안전하다는 피난지에 대한 신앙이고, 남조선 신앙이란 낙원이 남쪽에서부터 이루어진다는 신앙이다.
이처럼 정감록은 조선말기의 쇠약한 국가정체와 사회적 혼란을 계기로 성행될 수 있는 요인이 충분히 갖추어진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상이 민간에 대두하게 됨으로서 민중의 조선왕조에 대한 불신은 더욱 강하게 나타났고, 그것은 동학혁명의 발생과 그 추진력에 크게 이용되었다. 그러나 동학혁명의 실패와 계속되는 외세열강의 침략 및 기성종교의 허약 내지는 미조직화에 의해 1894년 이후부터는 정감록이 더욱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조선말기의 종교적 문화적 상황은 사회구조의 타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혼란이 극심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일반 민중은 生의 혼란에서 인간에로의 방향을 제시하여 불안을 면(免)하고 살 수 있도록 하는 표상체계(表象體系)와 확신체계(確信體系)를 갖지 못하고 있었으며, 급격한 사회변동과 외국의 영향에 의한 문화갈등현상은 기존 규범체계의 와해(互解)를 가져와 사회적 및 문화적으로 도덕적인 규제력을 상실한 이른바 아노미 상태(Anomi)를 불러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동학혁명이 전개되었고, 증산이 출생하고 성장하였던 호남지방에서 더욱 현저하게 나타났다. 증산의 本家나 外家가 위치한 古阜 지방은 민란과 동학혁명이 발생한 지역으로서 지방관리의 착취와 수탈이 가장 심했던 지역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