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年時代와 得道 이전까지
1) 결혼
증산은 21세(辛卯年)에 정씨 부인과 결혼하였는데 그 정씨 부인은 절름발이에다 눈은 아래로 보려면 위로 치켜 뜨게 되는 천바래기였다. 강일순은 첫날 밤이 아닌 그 다음날에야 이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게다가 성격도 사나워 시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으며, 따라서 가정생활을 본다면 그다지 원만치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1) 그는 위천하자(爲天下者)는 불고가사(不顧家事)라 하며 가정생활에는 등한시하고 집에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부인이 “남과 같이 재미있게 살림이나 하자.”고 하자, “그렇게 작은 말이 어디있느냐?”하며 더욱 집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2)
자신보다 경제적으로는 부유하면서도 신체적으로는 불구인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은 그의 현실에 대한 불만과 相對的 실조의식(失調意識)을 고조시키는 동시에 증산이 가정을 떠나 外地로 장기간 주유하게 만든 중요한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원만하지 못한 가정생활은 그의 성격을 보다 급진적인 것으로 유인할 수 있었으며, 기존 사회구조에 대한 전면부정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요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2) 서당 훈장 시절
그는 결혼 후 처가(妻家)에서 서당을 열었다. 그러던 도중 1894년 고부에서 동학혁명이 발생하자 그는 이 혁명의 실패를 예견(豫見)하고, 동학혁명군을 따라 남원, 인심, 전주, 청주, 공주 등지로 종군(從軍)하면서 싸움구경만 하고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겨울이 되면 혁명군은 패하게 된다고 하며 혁명에 가담하지 말 것을 적극 권유하였다.
동학혁명을 따라 다니며 동학혁명의 발전상황과 동학혁명에 가담한 민중의 욕구 등을 관찰한 증산은 동학혁명의 실패로 인해 나타난 사회적 아노미 현상을 목격하고는 스스로 동학에 대신할 만한 大道를 창도하여 보겠다는 뜻을 이 시기에 품게 되었다. 이 시기의 사회적 상황과 증산의 활동에 대해 大巡典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記述하고 있다.
“동학혁명 이후로 국정은 더욱 부패하여 세속은 날로 악화되고 관헌은 오직 태악(泰惡)과 토색(討索)을 일삼고 선비는 허란(虛亂)만 숭배하며 불교는 혹세무민(惑世誣民)에만 힘쓰고 동학은 혁명 실패 후에 기세를 펴지 못하여 거의 자취를 거두게 되고 西敎는 세력을 신장하기에 진력하니, 민중은 고궁(苦窮)에 빠져 안도할 길을 얻지 못하고 사위(四圍)의 현혹(眩惑)에 싸여 의지할 바를 알지 못하여 불안이 온 사회를 덮거늘 天師 개연(慨然)히 광구(廣求)할 뜻을 품어 유․불․선․음양식위(儒․佛․仙․陰陽識緯)의 모든 글을 읽으시고 다시 세태(世態)와 인정(人情)을 체험하기 위하여 유력(遊歷)의 길을 떠나시니라.”3)
즉 경제적 및 사회적 실조의식이 강했던 그로서는 失調解消의 방법으로 기존 사회구조의 개혁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동학혁명과 같은 세속적 대중운동의 실패를 목격함으로써 세속적 방법보다는 비세속적 방법에 의한 개혁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증산은 체계화된 민중종교가 不在할뿐만 아니라 기성종교 또한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기에 새로운 종교의 창립을 지향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의 혼란한 세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神明에 의한 道術로써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동학의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이라는 주문이 天主를 모시고 온갖 도술조화를 부리는 것처럼 주창(主唱)되고 있으나, 사실상 儒敎의 人道的인 것에 그쳐 神道的인 조화가 없는 까닭에 제세구민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따라서 증산은 유불선의 교의와 음양(陰陽), 풍수(風水), 송무(誦莁), 의술(醫術) 등을 연구하는 한편, 神明을 부리며 호풍환우(呼風喚雨)하고 둔갑장신(遁甲藏身)을 임의로 하는 道術과 과거나 미래를 가릴 것 없이 온갖 지상만사(地上萬事)에 達通할 수 있는 道通工夫를 하기에 골몰하였다. 그리하여 그 당시 이미 도인(道人)이라는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이 시기에 있어서 증산의 종교적 특성은 사회구조의 개혁방법에 대한 추구, 그러한 추구의 방법으로 제시된 종교적 방향에의 모색, 기성종교에 관한 모든 지식의 흡수, 기성종교가 갖고 있는 한계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당위론적 소명의식의 발생 등으로 집약될 수 있다.4)
3) 유력(遊歷)을 통한 宗敎的 知識의 增大5)
여러 가지 서적을 탐독한 증산은 27세 되던 해에 더욱 더 견문을 넓히기 위하여 유력(遊歷)의 길을 떠났다. 그리하여 庚子년까지 3년동안 평안도와 함경도를 비롯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주로 도통했다는 술객들을 찾아다니던 끝에 1900년 30세 되던 해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다.6)
유력활동을 통하여 그는 일반 민중의 생활실태와 그들의 욕구를 보다 광범위하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북한 지방으로의 유력은 서울을 통과해야 하는 관계로, 서울에서의 경험과 지식은 그의 종교적 경험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의 서울은 외국과의 修交 이후 청, 일, 러시아, 미국, 이태리, 독일, 영국, 불란서, 네델란드 등 각국의 외국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정치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철로의 건설, 광산의 채굴, 어업권의 확보, 각종 상업에의 종사 등을 통하여 경제적으로도 그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또한 군사적으로도 일본과 러시아 등을 포함하여 각국의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문화적으로는 천주교의 명동성당이 준공되고 改新敎의 교회와 병원 및 학교가 설립되는 등 서구문화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또한 국내 정치적으로도 아관파천 이후의 정치적 혼란과 함께 친일파와 친러파가 대립되던 시대였다.
따라서 증산은 서울에서 서구열강의 침략에 대한 많은 식견과 비판의식을 갖게 되었고, 그에 따라 혼란한 사회에서 민중을 구제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은 더욱 고조될 수 있었다. 후에 그가 러일전쟁의 발생과 일본의 승리 예언, 한일 합방 및 그 후의 독립 예언, 마테오 리치의 언급 등 서교의 부분적 인용, 문명이기(文明利器)를 긍정한 것 등에 비추어볼 때,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유력생활을 통해 얻은 지식이 그의 종교적 성향의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결국 3년간의 유력생활은 증산의 사회적 경험과 종교적 지식을 보다 많이 증대시켰다. 그는 이 시기에 기성종교의 허약성과 서구종교의 이질성, 열강제국의 침략에 의한 국가정체의 위기, 도탄에 빠진 일반 민중의 실태와 욕구 등을 파악하였으며, 기존 민간신앙에 대한 지식도 풍부해졌다. 여기에서 그는 새로운 종교의 창교(創敎)에 대한 소명의식을 증대시킬 수 있었으며 자신의 종교사상을 어느 정도 체계화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구질서, 구체제 등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가 귀향하는 즉시 선령의 공명첩(空名帖)을 불살라 버린 것으로도 추정해 볼 수 있다.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