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그 이후- 해방 후의 증산교

(3) 8․15 해방 이후


8․15해방을 맞아 지하로 숨어들었던 신흥종교들도 비교적 자유로운 종교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교단의 재확립은 해방 이후 나타난 사회적 혼란과 민중의 정신적 지주의 상실로 인해 보다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6․25動亂 이후 포교활동에 있어 어느 정도 성과를 올리던 교단들은 일제시대에 각 교파를 창설하였던 교주들이 노쇠(老衰)에 의해 사망하게 되자, 대부분의 교단에서는 교단의 주도권확보를 위한 갈등이 점차로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새롭게 교단분열을 맞게 됨으로써 그 움직임은 별로 두드러지지 않았다. 


증산교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學界에서 크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증산교의 교리와 사상 속에 한국의 전통문화와 종교적 유산이 크게 내포되어 있음을 주목한 학자들은 이 종교의 교리와 사상을 강연회 · 세미나 · 학술논문 등의 형식으로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학계의 동향에 따라 증산교 교단의 활동도 보다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기존의 교단들은 경전을 출판하고 교리의 체계화를 시도하는 한편, 새로운 교단들도 끊임없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교단들로는 증산진법회(甑山眞法會) ·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 · 증산도(甑山道) 등이 있다. 또한 최근에는 대학생들의 관심과 참여가 크게 늘어남에 따라 증산교 각 교단의 활동은 보다 다양해지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한국의 민족종교로 성장하기 위하여 교리의 체계화 작업과 분열된 교단의 통합운동 및 타종교 그 중에서 한국고유의 신흥종교들과의 대화와 연합을 위한 활동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수운계, 단군계 등의 한국고유계통의 신흥종교들과 민족종교로서의 인정을 받고 또 그에 따른 활동방안을 모색하기 위하여 많은 대화를 갖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1)


현재 증산교의 정확한 교단 수는 밝혀지기 않고 있으며, 그 까닭은 한 교파내에서도 경전의 해석에 따라 여러 갈래의 분파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로는 50여개 이상의 교단이 전국에 산재해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또한 신자의 수효는 20-30만명 정도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2)




(4) 교단 분열의 이유


교단분열의 근본적인 원인은 증산의 교단 조직구조상의 특징에 근거한다. 즉 증산은 동학이 그 교단의 조직이 계급질서가 명백한 지위서열에 기초하였기 때문에 내실의 완비보다는 외적인 것에만 관심을 갖게 됨으로써 실패하였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그는 처음부터 동학에서와 같은 위계질서의 확립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추종자들간의 관계는 비록 증산이 추종자들에 대해 만국대장, 통제사 등의 호칭을 사용하였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평등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교단의 조직체계는 증산과 각 추종자들간의 師弟 關係에 의해 유지되었을 뿐 추종자들간의 유기적 관계가 되기는 어려웠다. 


증산은 천지공사를 하면서 각기 다른 사람을 다른 장소에 데리고 가서 다른 말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그것은 그의 추종자들의 성격과 능력에 따라 각기 다른 역할을 부여하고자 하였으며, 스승에 대한 존경과 복종을 강조함으로써 추종자들 각자의 역할이 자신을 중심으로 연결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조직구조상의 특성이 증산의 사후 교단의 분열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또한 특정 기성종교를 주 계통으로 하지 않고 모든 종교를 통합하고자 시도하였기에 각 종교계통을 표방하여 분파하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기도 하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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