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의 창도와 인본주의적 인간관

 


Ⅱ. 東學의 唱導와 人本主義的 人間觀


1. 水雲의 生涯


최제우(崔濟愚1824-1864)는 지금의 경상북도 월성군 견곡면 가정리에서 태어났다.  本名은 濟宣이고 호는 水雲이다.  관변기록에는 兒名이 福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1) 濟愚라는 이름은 어리석은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겠다는 결심을 굳게 다지기 위해 고친 이름이다.  


아버지 근암 최옥은 경상도 일대에서는 문장과 도덕으로 손꼽히는 학자였으나, 뜻을 펴지 못한 채 향반으로 빈 하게 살았다.  그는 두 번씩이나 아내를 여의고 동생 최규의 아들 제환을 양자로 맞아 대를 잇게 하였다.  그 뒤 60세가 넘어 이웃 마을에 살고 있는 과부 한씨를 맞아 아들을 얻게 되었다.  이 아들이 곧 수운이다.  그는 서자(庶子)로서 태어났다.


그의 7대조인 최진립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종군하여 공을 세웠고, 1594년 무과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병자호란 때는 공주영장(公州營將)으로서 출전하여 많은 적군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러한 그의 충성 때문에 나라에서는 병조판서의 벼슬과 정무공(貞武公)이라는 시호를 그에게 내려 주고, 1699년에는 경주에 사당이 세워졌다.  


최제우는 여덟 살 때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유학의 경전에 소양이 깊었다.  그는 “몽중노소문답가”에서 학동 시절의 자기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얼굴은 관옥이고      풍채는 두목이라


 그러그러 지내나니    오륙세 되었드라


 팔세에 입학해서      허다한 만권시서


 무불통지 하여내니    생이지지 방불하다”


그러나 그가 서출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런 총명과 재기가 있으나 세상이 인정을 해주지 않음을 한탄한다.2) 


최제우는 여섯 살 되던 해에 어머니를 잃었고, 열 일곱 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이때부터 살림은 점점 어려워만 지게 되었다.  서출이라 벼슬길을 바라볼 수도 없고, 물려받은 가산도 없었다.  농사에는 뜻이 없었기에 가업과 처자를 돌보지 않고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그 동안 장사도 하고, 의술, 복술(卜術)등 잡술에도 손을 댔으나, 그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는 10년간 팔도 이곳 저곳을 방랑하고 다시 고향인 경주로 돌아왔다.


이렇게 떠돌아다니면서 세상 인심도 살폈다.  그는 “몽중노소문답가”에서 그 심경을 이렇게 밝혔다.  


“팔도강산  다밝아서


 인심풍속  살펴보니


 無可奈라  할길없네


 우습다    세상사람


 不顧天命  아닐는가” <몽중노소문답가>


이 시에서 세상 인심과 풍속이 각박해진 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늘의 뜻(天命)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천명을 알기 위하여 온 정성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는 나이 36세가 되도록 그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1859년 10월 가족을 데리고 용담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7개월 정도 지난 1860년 4월 5일에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했다.  


종교체험에 대한 수운의 표현을 보면, 감각적으로는 ①천지가 진동하는 듯 했고 ②마음이 섬찟해지며 몸이 떨렸으며 ③질병에 걸린 듯한 상태도 나타났으며 ④밖으로부터 말씀이 들려 오는가 하면 안으로부터 가르침이 내렸다.  ⑤그리고 생전 못 본 물형의 부도(符圖)도 뚜렷이 보였으며 ⑥영기(靈氣)같은 것이 몸을 감싸는 느낌도 받았다.  


심적인 현상으로는 ①무섭고도 두려웠으며 ②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상태에 빠졌으며 ③‘한울님’의 실체감이 너무나 생생했고 ④지금까지 문제로 삼았던 과제들이 일시에 해결되어 미래가 열리는 무한함을 느꼈다.  ⑤그리고, 세계의 의미가 전도되어 충만함과 환희감이 고조되었으며 ⑥무엇인가 피할 수 없는 사명감이 강압적으로 내리는가 하면 ⑦새 역사 창조 의욕이 넘쳐흘렀다.


또한, 신비적 체험의 궁극적인 경지는 ①언어로 표현할 수 없으나 ②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한울님 마음이 곧 대신사의 마음이 되었다)의 신인합일(神人合一)에 도달했다.3)


최제우의 포교는 道를 얻고 바로 시작하지 않고 이듬해인 1861년 6월부터 포교를 시작했다.  뜻밖에도 그의 가르침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관헌에서도 알게 되었다.  관에서는 포교를 중단하라는 엄한 경고가 내려졌다.  이 경고 때문에 그는 11월에 제자 최중희만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남원으로 갔다.  여기서 서공서라는 사람을 만나 입적 시킨 후 이 사람의 후원으로 교룡산성 내 은적암에 들어갔다.  그는 은적암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敎訓歌, 論學文, 道修歌, 勸學歌”를 저술했다.


수운은 1862년 3월에 경주로 돌아왔다.  다시 사람들이 모였고, 이것을 안 관은 논의 끝에 수운을 체포했다.  이것은 1861년 10월과 같은 위협적 경고와는 달랐다.  왜냐하면 수천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는 것이 위험스러웠기 때문에 東學을 못하게 하려는 탄압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의 석방 압력으로 관은 폭동의 위협을 느끼고 무죄로 석방시켰다.4)


신도가 늘어나자 신도들의 조직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는 명지에 접소를 두고 접소에 접주를 두어 그 지방 신도를 다스리게 했다.  이것이 바로 “接主制”라고 하는 것인데, 東學으로서는 가장 처음의 교회 제도다.  


최제우는 포교와 더불어 신도의 교화와 결속에 힘을 썼다.  많은 신도들 가운데는 빠른 시일에 세상이 변하고, 자신이 잘사는 세상을 기대하다가 이루어지지 않자 이탈하려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참된 믿음의 태도와 목적을 역설하였다.  


한편 최시형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8월에는 그에게 모든 일을 맡겼다.  그리고 12월 10일 선전관 정운구에 의해 체포되어 과천까지 압송되었다가 대구로 내려가 이듬해 1864년 3월 10일 40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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