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承들 내에서의 傳承의 발견
전승(Tradition)
크리스챤 공동체는 공동체험을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하며, 기억하고, 기록하면서 계속 전달하여 주고 있다. 모든 전승들(tradita)은 교회의 삶 속에서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현존을 왜곡하거나 잘못 전하는 단순한 “사람의 전통”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언어의 변천과 문화적 변화가 특정한 전승들을 무기력하게 또는 이해 불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므로 모든 개개의 전승들은 그리스도교의 각 세대 안에서 수집되고, 검토되고, 해석되고, 새로워져야만 한다.
Karl Barth의 경고 : 신약성서에서 유다스가 예수님을 배반하면서 넘겨준 사실이나 크리스챤들이 그들의 전승을 넘겨 전해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하여 똑같이 παραδιδοναι(= hand down : παραδοσις = tradition)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크리스챤들은 그들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를 전달하면서 유다스처럼 그들의 스승을 배반할 수도 있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또 교회에 의해 전달되는 복음은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상태로는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말씀의 선포를 통하여, 성사의 거행과 전례 안에서, 크리스챤 신학과 가르침 안에서 그리고 교회 지체들의 삶을 통한 그리스도께 대한 증거와 사명 안에서” 해석되고 현실화되면서 만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전승들 내에서 전승을 식별하고, 이에 충실히 따르기 위한 유효한 기준은 무엇인가? 우리들의 식별과 해석, 우리들의 쇄신을 인도하여 주는 유효한 원칙은 무엇인가?
1. 교도권(Magisterium)
가톨릭 신자들은 이전 세대의 사람들이 전해준 것을 물려받을 때, 가시적인 명백한 기준을 교회의 교도권에서부터 향유하게 된다. 특정한 문제들에 대하여, 흔히 교도권은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거나 혹은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야 언급하기도 한다(신중하다. 문제를 신학자들에게 맡기고, 이미 모든 결정이 난 후에야 교도권을 사용한다). 더우기 교도권은 자신을 초월하는 것을 나타내는 근사치의 기준이다(하느님 말씀에 종속되어 있다). 계시헌장 10항 :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나 전해지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유권적 해석임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리를 행사하는 교회의 살아있는 교도권에만 맡겨져 있다. 그러나 이 교도권은 하느님의 말씀보다 높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봉사하는 것이다.
2. 보편성(universality), 古代性(Antiquity), 일치성(Consent)
Vincent of Lenins(빈첸시오 법전)의 Canon(信仰規範)은 전승들을 식별하기 위한 또 다른 기준을 제공하여 주고 있다. “모든 곳에서, 그리고 항상 모든 이들로부터 믿어져 왔던 것(Quod ubique, quod semper, quod ad omnibus creditum est.) – 이것이야 말로 참된, 고유한 가톨릭 신앙이다”. St.Augustinus는 “전체 세계는 확실하게 판단한다”고 말한다. 아득한 옛날부터 모든 이들로부터 어디에서든지 믿어져 왔던 것은 진리임에 틀림없다(그러나 한계는 있다). 오류는 나중에 발생하였던 것이다.
① “어디에서든지 항상, 모든 이들로부터 바로 그리스도의 구원적 복음의 일부라고 믿어진 것 – 이것이야 말로 참된, 고유한 가톨릭 신앙이다.” 그러나 크리스챤들은 우주의 본질, 인류의 생성, 마녀들의 활동에 대한 그릇된 믿음을 다른 이들과 함께 공유하기도 했으며, 또한 그들 同時代 사람들과 함께 노예제도와 같은 비도덕적인 실천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부터 드러나고 있다. ⇒ Vincentian Canon의 수정, 보완 필요
② 문자그대로 분명하게 항상, 어디에서든지, 모든 이들로부터 믿어져 왔다고 확증할 수는 없다. “적어도 함축적으로 항상, 어디에서든지, 모든 이들로부터 믿어져 왔던 것 – 적어도 이것은 참된, 고유한 가톨릭 신앙이다”. 다시 말하면, “항상, 어디에서든지, 모든 이들로부터” 함축적으로 보존되어온 일부 특정한 정통적 믿음도 배제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러한 식으로 전해져 왔다는 사실을 우리가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없을 뿐이기 때문이다.
③ “모든 이들”이란 누구인가? 우리가 정통적 신자라고 간주하는 사람들만 의미하는가, 아니면 믿음을 실천하는 모든 크리스챤을 의미하는가? 전승들에 대한 문제는 모든 이들의 일치가 없었거나 또는 없을 때에 반드시 야기된다. Vincentian Canon이 자의적으로 적용됨으로써 그러한 결과가 초래되었다.
Newman은 “똑같은 하나의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그 사상의 객관적 특성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그렇치 않다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은 틀릴 수 없다는 것이 되고 만다.” 때때로 “많은 사람들”, 믿음, 경신례, 그리고 행위의 형태라는 차원에서 볼 때, 오류를 범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교회 교부들의 일치를 나타내기 위한 어느 정도 제한된 의미로 자주 이해되었다. 그리하여, 일부 특정한 전통적 믿음과 실천들은, ‘교부들의 가르침’, 그들이 지니고 있는 ‘고대 전승’ 그리고 그들의 ‘완전한 일치’에 호소함으로써 정당화되었다. 교회의 모든 교부들이 분명하게, 직접적으로 그것을 가르쳐 왔음을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지적하였다.
④ Vincentian Canon에 있어서, 일치성(모든 이들)이 문제시 된 바와 같이, 고대성(항상)과 보편성(어디에서든지) 역시 문제가 되고 있다. ‘항상’, 그리고 ‘어디에서든지’라고 할 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우리는 생각하여야만 하는가? ‘항상’이라고 할 때, 상대적 고대성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문제시된 전승이 그리스도교의 기원까지 필연적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것인가? ‘어디에서든지’라는 말에 함축되어 있는 정통신앙의 지리적 의미는 무엇에 의하여 설정되는가?
⑤ 우리는 일부분만을 검증하는 것으로 그칠 수 있다. 우리는 고대성은 확증할 수 있으나, 보편성과 일치성은 확증할 수 없을 수도 있다. 어떤 것은 항상 믿어져 왔으나, 어디에서든지, 모든 이들로부터 믿어진 것은 아니었다. 또는 고대성과 일치성은 증명할 수 없으나, 보편성은 증명할 수도 있다. 어떤 것은 어디에서든지 믿어져 왔으나, 항상 모든 이들로부터 믿어졌던 것은 아니다. 혹은 우리는 일반적인 일치성(현재 또는 최근에)을 증명할 수 있으나, 고대성과 보편성에 대하여서도 똑같은 일치가 있었다고 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것이 지금은 모든 이들로부터 믿어지고 있지만, 이와 같은 경우가 항상, 어디에서든지 있었던 것은 아니다.
⑥ “항상, 어디에서든지 그리고 모든 이들로부터”라는 분리 가능한 세 요소들은 함께 모두 합쳐진 상태로 보다는 각각 개별적(독립적)으로 또는 두 요소만이 합쳐서 그 기능이 발휘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세부 사항과 再調整이 요구된다면, 그것이 실제적으로 무슨 도움이 되는 것인가?
Newman은 이 규범이 “아무런 만족할 만한 결과”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어떤 특정한 움직임과 궤도들은, 그리스도 성령의 항구한 현존이 다양한 크리스챤 전승들을 어떻게 형성시켜 주었는지, 크리스챤들의 과거 세대 속에 지속적으로 있었던 성령의 인도를 나타내는 표시를 찾아야만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과거에 대한 이러한 분석에 있어서 “어느 누구에게도, 어느 곳에서도,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믿어지거나 실천되지 않았다면, 이것은 우리가 현재의 그 전승을 더 이상 보증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Newman은 “네가 너의 것으로 하고자 원하지 않는 다른 가르침에 대하여, 고대 교부들 자신들이 증거를 제시하여 주고 있지 않은가? 네가 원할 때는 교부들의 목소리를 듣고, 원하지 않을 때는 듣지 않는다면, 너는 僞善者가 아니겠는가? … 너는 덜 분명한 것은 받아들이면서 더 중요한 것은 거절하고 있다”. 크리스챤 전승들은 그리스도 성령의 틀림없는 영향을 나타내는 것이다. 과거 크리스챤들의 체험에 대한 기억은 우리가 현재를 올바로 판단하고 해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상의 설명을 통해서 Vincentian Canon을 결정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문화할 수 있겠다.
“적어도 가끔, 일부 지역에서, 그리고 일부 크리스챤들로부터 기쁜 소식의 한 부분으로 믿어지고 실천된 것으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또 다시 생활화될 수 있다고 보증되는 것 – 이것은 현재의 전승들과 체험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올바로 인도하여 줄 수 있다.”
3. 믿는 이들의 공통된 이해(Sensus Fidelium)
Vincentian Canon이 과거에 촛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오늘날 성령은 신앙 문제에 대한 직관적 인식과 판단을 인도하여 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크리스챤들은 ‘그들이 체험하고 있는 영신적 현실’에 대하여 – 그것을 표현할 수 있든지, 없든지 간에 – ‘아주 심오한 내적인 이해’를 향유하고 있다. Sensus Fidelium이 성령을 동반하고 있음으로 인하여,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두려운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비가시적인 어떤 것에 호소함으로써 제공하고 있는 것인가? – 비크리스챤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우리에게는 있다. 즉, 가시적 성령의 표징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성령의 가시적인 다른 열매들(갈라 5,22)을 맺고 있다. 이 열매들로부터 우리는 참된 Sensus Fidelium의 현존을 알 수 있다. 둘째, 전체 교회의 공동체 정신 위에 끼친 성령의 영향에 대하여 주의깊게 살펴 본다. 물론 여기에는 막대한 어려움이 있다. 하여간 Sensus Fidelium은 신앙과 실천을 검토할 수 있도록 우리를 올바로 인도하여 주고 있다.
4. 지속성(Continuity)
그리스도교의 초세기 시작부터 지속성은 계속적인 관심사였다. 모든 변화를 이단과 동일시하는 사람들로부터 변화될 수 없는 확고부동한 것으로 잘못 이해되기도 했다. 지속성이란 사실상 부동성, ‘전승의 영구 소유’, 성령을 중시하지 않고 문자를 보존하는데 치중하는 엄격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적 충실성(Gabnel Marcel의 fidélité créatrice) : 우리는 본래 참된 지속성을, 전혀 성질을 달리하고 있는 성실치 못한 혁신을 유도하는 이질적 발전에 상반되는 창조적 충실성을 전제하면서 동질적 발전으로서 묘사하고자 한다. 성령에 의하여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언제나 인도된 교회의 본질적인 정체를 -특정한 전승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변화를 통하여- 보존하는 지속성이다. 바로 성령을 통하여 계시적이며 구원적인 하느님의 자기 통교에 대한 당신 백성의 본질적 충실성을 보존하는 지속성이다.
5. 신경(Creed)
전승들을 검증하고, 체험을 평가하고, 제시된 혁신을 판단하는데 유용한 방법들이다. 신앙의 기본조항에 대한 고백은 교회 신앙생활의 본질적인 지속성을 확고히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일련의 교의적 전승들을 절대화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유혹과 투쟁하는 데에는 일부 전통적인 신경들과 그것들을 나란히 놓고 고찰하여 보는 것 보다 더 효과적인 다른 방법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6. 사도성(Apostolicity)
사도성의 기준은 교도권이 갖고 있는 권위의 기초를 지적하여 주고 있으므로 첫번째 기준(교도권의 기준)과 관련된다. 사도성은 네번째 기준(지속성의 기준)과도 일치된다. 사도성은 교회의 기원과 더불어 그 가시적인 지속성을 표현하여 주고 있다. 사도성이 제공하여 주는 정보에 대하여 살펴볼 때, 사도성의 기준은 다음의 기준인 성서와 일치된다.
첫째, 사도 공동체는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체험을 해석하였고, 또 예수님이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어서 그 체험과 신앙을 기록하였는데, 이것이 후에 함께 모아져 신약성서의 형태를 이루게되는 글들의 시작이다. 이와 같이, ‘사도들로부터 우리에게 이어 내려오는 신앙’은 성서적인 기록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여 지고 있다. 성서 – 특히 신양성서를 통하여 사도시대 교회의 체험, 신앙 그리고 가르침을 증명하고 우리에게 현실화시켜 준다.
Y.Congar는 사도들로부터 비밀리에 전하여지는 구두 전승의 존재를 당연시 하려는 모든 노력에서부터 자신을 멀리하고 있다. 그는 사도적 성서의 공적인 역할에 대하여 명백히 주장하고 있다. “사도들의 글은 사실상 사도적 유산의 순수성을 비판적인 형태로 검증하기 위한 필수적인 참고 자료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역사를 통하여, 현재에도 미래에도 사도적 성서는 교회가 사도적 가르침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을 “완고하고 배타적인 행위”라고 지적하고 있다. 하나의 과정으로서의 전승은 다른 어떠한 것들 보다도 특히 사도적 가르침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써 존속하고 있다. 전승된 내용들(tradita) 중에는 어느 관점에서 볼 때 성서에 의하여 입증되지 않은 사도적 가르침의 일부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Y.Congar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는 사도적 가르침의 일부가 성서에서부터 분리되어 전달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명백한 어려움을 주지시킨다. “여기에서 야기되는 유일한 심각한 문제는 중개자의 증가와 더불어 충실한 전달의 어려움이 또한 증가된다는 것이다.”
“중개자의 증가와 더불어” 오랜 시간의 경과로 인하여 ⒜ 신약성서 안에 기록되지 않은 채 우리에게 전하여진 순수한 사도적 가르침과, ⒝ 교회가 성서를 – 특히 전통적인 전례 실천의 맥락 안에서 – 숙고하고 해석하고 적용함으로써 오랜 세기를 거쳐 나타났고, 또(혹은) 보존된 참된 가르침, 유효한 실천을 구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으면, 적어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교회는 성령의 인도 하에 성서적 암시와 지시를 따랐던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Sola Scriptura(오직 성서만으로)의 원칙이 아니다. 성서를 해석하고 적용함에 있어서 전승의 고유한 역할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점은 영감을 받아 쓰여진 성서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길을 통하여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사도시대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가시적인 지속성을 표현하여 주고 있으나 모든 이들에게 적용되는 영감을 받은 기록을 초월하는, 사도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특별한 정보(extra information)를 향유하지는 않고 있다.
7. 성서(Scriptures)
확립된 전승들을 검증하고, 체험을 해석하고, 제시된 혁신이나 다른 크리스챤적 행위를 판단함에 있어서 성서는 항상 생명력이 있다. 구체적인 전승들은 계속하여 변하지만, 변함없는 텍스트인 성서는 고정된 참고 자료로서 존속한다. 크리스챤들이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판단하는 기준과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챤 삶과 실천은 성서 위에 기초를 두어야만 한다. 성서는 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해석하지 못한다. 성령을 무시한 채 문자만을 중시하는 자세를 배격하여야 한다. 교회 신앙의 살아있는 전달이 성서에 대한 필수불가결한 주석을 제공하고 있다. 성서에 대한 해석은 전승의 맥락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8. 부활하신 주님(Risen Lord)
모든 다른 기준들도 최종적으로는 당신의 진리와 은총을 통교하기 위하여 살아 현존하여 계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이끌어 주어야만 한다. 교도권은 반대되는 어떠한 의견이 있을지라도, 그리스도께 봉사하고 그리스도를 선포할 과제를 갖고 있다(첫번째 기준). 과거와 현재의 모든 크리스챤들의 신앙과 삶은 그리스도께 집중되어 있으며, 실제로 크리스챤들은 그분이 다시 오실 때까지 그분의 죽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I고린 12, 36). 그들을 인도하였고, 또 지금도 계속하여 그들을 인도하고 있는 성령은 영광 중에 계신 하느님의 아들을 찬양하도록 하는 것(그리스도께로 인도함) 외에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I고린 12, 3 – 두번째, 세번째 기준). 그리스도교의 지속성은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히브 13, 8)”,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기인한다(네번째 기준). 교회의 모든 신경은 구원 역사의 중심인 그리스도의 신비에 요약되어 있다(다섯번째 기준). 사도들의 유일한 체험과 역할은, 그리스도의 체험과 계시에 기인하고 있다(여섯번째 기준). 성서는 육화된 말씀 안에서 자신의 결정적인 본연의 촛점을 찾게 된다(일곱번째 기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성 바오로의 두번째 편지는 전승들을 식별하고 해석하는 열쇠는 명백하게 그리스도론적 기준이어야 한다고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를 격려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크리스챤으로서 결단을 내릴 때, 그리스도를 그늘에 방치하여 두거나, 그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당면하는 위험이다.
* 結 論
‘복음의 순수함’이 효력있게 완전한 모양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기초적 계시에 대한 체험이 표현되는 다양한 전승들이 해석되고, 번역되며, 수정되거나 쇄신되어야만 한다. 전승들과 새로운 발전 앞에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한 순종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이에 대한 모든 충실한 대답은 여기에서 우리에게 삶을 가져다 주시고 그 삶을 풍요롭게 해 주시는 예수님, 바로 그분 안에 승화된 삶을 동반하게 하여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