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적 계시에 대한 영감적 표현


기초적 계시에 대한 영감적 표현




J.X.의 도래 안에 절정을 이룬 무상적인 하느님의 자기통교를 체험한 사람들은 언어적이고 전통적인 존재(homo et traditionalis)일뿐만 아니라, 그들 역사의 어느 단계에서 기록자(homo scribens)가 되기도 한다. 하느님의 현존과 행위에 대한 자신들의 체험에서부터 자신들이 식별하고 해석하며, 표현하고 기억할 수 있는 것을 기록했다. 이러한 표현은 그것이 말로 또는 행위로 되어 있든 특이한 어떤 선택이 아니라, 체험 자체에 완전히 속하여 있고 실제로 그 체험을 부분적으로 규정하여 주고 있다. 계시와 구원의 특별 역사 안에의 신적 자기통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체험을 표현하고 상징화하였으며 실행하였다. 그들은 당신 백성을 위한 야훼의 행위를 요약된 형식으로 말하기 위하여 신경 사용, 성전 건설, 예식 수행, 영감받은 기록들(예언서 등)을 수집하였다. 또 예루살렘 순례여행이나 성체성사의 특별한 거행을 통한 X의 체험을 상기시키기도 하였다. 예루살렘 성전 또는 토리노의 J.X.의 수의 등 재생될 수 없는 물질적인 현존을 계속 향유하고 있다. 체험에 대한 문학적 표현은 마음대로 재현시킬 수 있고, 문학적 대상은 물질적 대상이 지닌 중요성을 소유하지 않았고, 또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챤의 기초적 체험에 대한 이러한 기록들을 쓰고 또 읽는 것이 무엇을 내포하고 있는가? 이러한 문서들이 크리스챤 종교의 구성적 시기에 근원적인 체험을 글로써 정리하고 표현한 것이라면, 이 문서들을 듣고 읽는 백성 안에 하느님께 대한 종속적 체험들이 태어나도록 한다. 성서는 신적 자기계시의 결과이며, 또 원인이기도 하다. 기초적 계시 시기 때 체험의 기록은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신적 자기통교에 대한 체험을 해석하는데 도움을 준다.




1. 영감(Inspiration)은 계시와 동일시될 수 없으며, 계시에 대한 체험과 영감에 대한 체험이 동일시되어서도 안된다. 신적 자기통교는 신적으로 부과된 기록하도록 하는 모든 충동을 초월하고 있다. 성서적 영감의 은사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구원적 사랑을 드러내고 통교할 목적을 가지고 있는 한가지 중요한 실례일 뿐이다. 영감은 보다 광범위하고 보다 기본적인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스라엘 역사의 기원에서 많은 사람들은 영감된 성서가 쓰여지기 이전에 벌써 계시와 구원의 특별 역사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자기통교에 대해 체험하였다. 성서들은 예수님과 예언자들의 설교, 계시적 체험에 대한 인간의 직접적인 일부 대답뿐만 아니라, 레위법과 지혜문학에 대한 숙고도 내포하고 있다. 이는 하느님의 구원적 현존에 대한 체험을 표현하고 있다. 계시체험의 직접성과는 약간 다르게, 계시체험을 통교할 목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계시와 구원이 영감받은 성서로 축소화될 수 없고, 동일시 될 수도 없다.


계시/구원과 성서의 영감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모든 역사를 통해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체험하고 있는 신적 자기통교와 ⒝ 신적 자기통교에 대한 일부 기초적 체험들을 글로 표현하고 제시하기 위한, 특정한 시간과 장소의 소수 사람들만이 느끼는 신적 충동 사이의 차이에 대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루가복음의 즈가리야의 노래는 미래를 예언하게 한 충동이다. 신적 충동들은 사람들을 말하거나 행동하고 생각하도록 자극할 수도 있다.


말하도록 하는 예언적 영감이 기록하도록 하는 성서적 영감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말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예언적 신탁을 수집하고, 기록으로 남기고, 전파하고 해석하고 공포하는 것은 후대의 다른 이들에게 맡겨졌다. 이 기록자들은 예언서들의 직접적인 저자들로서, 성서적 영감의 은사를 향유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은사는 예언자들이 말하기 위한 예언적 영감을 향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베드로 후서(II베드 1, 20-21)에서는 예언적 말씀과 기록된 말씀 사이에 아무런 구분도 하지 않는다. 초기 교회는 성서 저자들이 예언자들의 역할을 지니고 있고 이해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서적 영감을 예언적 영감으로 해석하였다. 성서적 영감은 예언적 영감이다. 영감의 전제는 다음과 같다. ⒜ 특정한 책들이 성령의 특별한 충동과 인도 하에 쓰여졌으며, ⒝ 따라서 하느님은 이 책들의 “저자”이고,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영감의 효력은 인간적인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변형시키며, 우리가 성서를 “거룩한 책”이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여 준다. 이와 같은 진술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성서적 영감의 경우, 특별한 인도는 어떠한 형태를 취했는가? 어떤 근거로 하느님을 “저자”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진실성”고 “무류성” – 성서의 진리 또는 무류성은 영감과 동의어가 아니라 영감의 결과이며 효과이다. 성령이 특별한 방법으로 인도하였기에, 성서는 진실되고 오류에서 해방되어 있다. 어떤 종류의 진리인가?


2. 받아들일 수 없는 영감의 모델




⑴ 교부들은 저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쓰는 것으로 영감을 이해하였다. 영감받은 저자들은 그들이 기록해야만 하는 말씀을 말해 준 천상의 소리를 체험하였다. 예를 들면, 독수리가 요한이 복사할 텍스트를 제시하기 위해 하늘에서부터 내려왔다. 그리고 사자는 이와 똑같은 봉사를 마르코에게 수행하고 있다. 대 그레고리오는 인간저자들은 하느님의 펜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었다. 이러한 견해들은 인간적 역할을 철저하게 축소시키는 기계적인 방법으로 영감을 해석하는 것이다. 신적 원인만을 고려하고 인간적인 원인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차별성과 창조성을 상실). 이러한 해석은 인간성을 희생시키며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극대화시키는 육화에 대한 설명과 유사하다. 신성과 인성이 그리스도의 위격과 성서 안에서 양자의 결합이 존재해야 한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의 참된 역할 역시 존중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특별한 인도가 순수한 인간적 활동과 특정한 저자들의 개인적 특성을 배제하고 있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하느님이시며 참된 인간이시다”라는 것을 기록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과 한계 안에서 복음서 저자들은 기록하였다. 영감을 받아쓰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확인하는 것이 인간적 말임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잘못 믿고 있다. 하느님과 인간 저자들을 협력관계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이러한 첫번째 부정적인 이론을 더 이상 추구할 가치가 없다.


⑵ 영감받은 저자들은 문학의 다양한 유형을 가지고 집필하였다. 이들은 시편, 잠언, 편지, 복음, 묵시록 등을 썼다. 그러나 성서는 옛 세계에 현존하던 모든 문학 형태의 표본도 아니며, 현대 과학의 역사처럼 미래의 유형들을 기적적으로 선행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⑶  일부 성서 저자들은 기록자로서의 특이한 재질을 발휘하였고, 아름답고 위대한 문학 작품을 만들어 내었으며, 문학의 기원이 되었다는 생각도 있다. 그러나 영감의 은사는 문학자들의 것보다 필연적으로 더 높은 단계의 것이어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감은 예술적 재능과 한계를 존중하면서 성서를 쓴 것이다. 영감은 실제로 무미건조함과 함께 공존할 수 있다. 영감이 작품의 문학적 기준에 대한 어떤 것을 지적하여 주는 것은 아니었다.


⑷  영감이 필연적으로 위대한 <종교적 특성과 효력>을 내포하고 있으며 종교심을 심어준다라고만 볼 수는 없다. 어떤 측면에서 성인 성녀들의 글들이 성경의 일부 내용(부분)보다 더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아우구스띠노의 <고백록>, <준주성범>, 그리고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작품들). 영감받은 저서들의 이러한 한계는 신적 충동에 의하여 이루어진 활동이지만 인간적 활동의 결과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저자들의 시대적 배경과 개인적 능력의 한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⑸  같은 영감을 받았지만 중요성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모든 영감받은 저자들은 신적 인도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 위에 성령의 현존과 그 활동의 여러 높은 또는 낮은 단계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복음의 경우에 예수의 삶과 수난 그리고 부활. 하느님의 계시적이고 구원적인 자기통교는 그리스도의 도래와 함께 절정에 이르게 된다. 영감의 최상의 단계는 이러한 절정에 대한 인간적 체험과 관계된다. 영감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저자들의 인간적 특성에 비례한다.


⑹ 영감받은 저자들의 <의식>에 관계된다. 바울로와 묵시록의 저자와 같은 일부 사람들은 자신들이 성령에 의하여 특별히 인도되고 있다는, 또는 적어도 특별한 신적 권위로써 기록하고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루가와 마카베오 하권의 저자와 같은 일부 다른 성서 저자들은 그들이 특별한 신적 인도하에 기록했다는 분명한 의식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록하도록 하는 특별한 충동이 반드시 모든 영감받은 저자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주어지는 신적 인도와 권위에 대한 충만한 의식을 가지게 한다고 결론지어서는 안된다. 성령은 은사를 받는 사람들이 그 영향을 필연적으로 느끼지 못할 수 있는 여러 방법으로 그들의 업적에 현존할 수 있었고, 또 현존할 수 있다.


⑺  성서의 많은 책들이 구전 전승과 기록된 전승의 <기나긴 과정을 거쳐 태어났으므로>, “기록하도록 하는 특별한 충동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한 저자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영감의 은사에 함께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매우 많이 있었다. 성령의 특별한 충동은 마지막 텍스트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그들 모두에 작용한 것이다. 영감의 은사는 마지막 최종 편집자에게만 제한되어 있지 않았다. 복음 안에 종합된 역사와 이야기를 수집하여 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관계되었다. 따라서 최종 편집자 뿐 아니라, 전승을 이루어준 사람들, 同時代의 증인들이 모두 포함된다.




⑻  <우리는 성서를 현대의 위대한 저자들의 저서들과 너무 가까이 놓고 비교해서는 안된다>. 성서 저자들은 위대한 창조성의 빛으로 그들의 책을 구성한 것이 아니었다. 즉, 자신들의 문학적 힘의 성취를 위해서가 아니라, 믿는 이들의 일반적 체험에 대하여 묘사하고, 공동체에 봉사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업적을 만들어 내었다.


⑼ 성서저자들은 유용 가능한 모든 문체로 기록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들이 필연적으로 영감받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고 전달하기 위해 이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계시전달이라는 과정에 깊숙히 개입되어 있음이 중요한 것이다.


칼 라너의 영감에 대한 해석


ⓐ 영감의 은사는 교회의 전체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과 함께 교회의 <창설>을 인도한 계시/구원의 특별역사 안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신적 활동에 속하여 있다. 교회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시기, 구성적 시기는 성서가 쓰여진 시기이다. 은사는 사도시대 교회 공동체에 내려진 것이다.


ⓑ 따라서 하느님을 성서의 <저자>라고 할 수 있으니, 계시와 계시에 대한 체험으로 성서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 영감의 은사는 공동체에 통교되었고, 공동체 안의 각 개인들에게 통교되었다. 교회의 정체성을 밝히는 신적 통교가 영감이다.


ⓓ 성서저자들, 특히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사도 또는 사도 다음시대 공동체의 지체들은 유일회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영감의 은사는 사도적 은사와 함께, 사도적 시대와 더불어 끝이 났다. 영감의 은사가 사라짐은 기초적 계시의 시기와 종속적 계시의 시기 사이의 질적 차이를 말해 주고 있다.


ⓔ 사도시대 교회의 구성원들은 기초적이고 구성적인 그들의 체험과 설교, 활동에 대한 영감받은 기록을 통하여 그 이후의 모든 그리스도교 세대를 위하여 유일하게 권위를 지니고 있는 이들로 남아 있다.이와 같이 사도시대의 교회의 수위성(首位性)은 단순한 일시적 우월성보다 더 높은 차원의 것이었고, 또 그렇게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




3. 구원의 진리


영감받은 기록이 필연적으로 진리를 통교하며 오류를 배제하고 있는 것인가? 성서는 필연적으로 진실되고 무류적인 것인가?


성서 안에는 오류와 모순이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일주간에 걸친 창조의 이야기는 천문학의 탐구와 진화론과 일치하지 않는다. 우주의 기원이 문제가 된다면, 그 구조는 더 많은 문제가 될 것이다. 특정한 일부 텍스트들은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요나가 어떻게 큰 고기 안에 들어가고 나올 수 있었는가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어떻게 그가 고래 배 속에서 삼일동안 지낼 수 있었는가? 그뿐 아니라 성서는 똑같은 이야기 안에서도 모순된 이야기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홍해를 건너 탈출하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출애굽 14-15장은 3가지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출애 14, 16. 21a. 22. 27a. 28.과 두번째 설명 ; 출애 14, 21b. 25-26. 그리고 마지막 설명 ; 출애 14., 19-20). 이외에도 신약성서에서 마태오(1, 1-17)와 루가(3, 23-38)는 분명히 예수에 대한 서로 다른 두가지 족보를 제시하고 있다. 간략히 말하면, 성서 안에는 실제적인 모순과 역사적, 지리적, 과학적 오류들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 이보다 더욱 심한 것은 다양한 윤리적,종교적 오류가 실망스럽게도 자주 나타난다는 것이다. “모조리 죽여야 한다(I사무엘 15, 3)”.


이러한 실제적인 종교적, 윤리적 오류 앞에서, 성서적 진리의 근거를 추구하며 제시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다음의 세 가지 점을 자주 기억했다 : 거룩한 저자들의 <의도>와 그들의 <전제들> 그리고 그들의 <표현방법>.


① 따라서 창세기의 저자들은 옹호될 수 있었다. 그들은 창조주의 선하심과 능력 그리고 사람들의 죄악들 등에 대한 여러가지 종교적 진리들을 가르치고자 한 것이지, 고대의 일부 우주 개벽설과 우주론을 가르치고자한 것이 아니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상기하면서 바울로는 그분의 재림 시간을 통교하고자 한 것이었다. 간략히 말하면, 그들이 정말로 통교하고 확인하고자 원한 점들과 그들의 의도 밖에 있는 것들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면서 성서 저자들 또는 다른 저자들이 여러가지 오류를 범했다고 고발하는 것은 옳지 않다.


② 일부 성서저자들은 우주와 전체에 관한 잘못된 개념들을 가지고 있었다. 성서는 저자들의 전제 조건들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우주적, 천체적 그리고 지리적 오류에서부터 인위적으로 보호될 수 없다.


③ 교황 비오 12세는 “그것은 사회적 삶의 상호 관계 속에서 흔히 사용된 고대인들의 특이한 표현과 이야기의 관습적인 양식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음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히브리 역사기록의 정직함은 다윗 왕의 수치스러운 간음 죄와 살인도 기록하였다. 구원 역사를 위한 사건들의 종교적 의미는 히브리 역사가들에게 자료적 확실성보다 더 중요하였다. 요나서의 경우, 과장된 비유로 되어 있다. 이 책의 진리 또는 오류에 대한 모든 질문은 종교적 메시지를 받아들이느냐 또는 받아들이지 않느냐 하는 행위에 의해서만 결정될 것이다. 창세기의 처음 장들은 하느님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숙고하고자 한 것이지, 선사시대 인류 기원의 내용을 불완전하게나마 제시하려고 시도한 것이 아니다. 창세기는 인류의 기원에 관한 책이 아니다.


거룩한 저자들의 의도들, 전제들, 그리고 이들이 사용한 표현방법에 대한 존중은 성서적 진리에 대한, 신중한 것들이든 표면적인 것들이든, 많은 어려움들과 의심들을 완화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우구스띠노는 말한다. “우리는 복음에서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을 읽을 수 없다 : ‘해와 달의 움직임에 대하여 너희에게 가르쳐줄 성령을 나는 너희에게 보낸다’. 주님은 천문학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신다”.


성서의 진리란 일반적으로 무엇인가?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빌라도의 질문에 스콜라 철학의 대답을 기게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진리는 판단의 기능이다. “사실들”과 명제들의 일치에 의하여 그 명제들의 진리를 평가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성서 텍스트들을 정보를 제공하여 주는 일련의 단순한 명제들로 축소키시고자 한다면, 통탄스럽게도 우리는 성서 텍스트들을 잘못 대하고 있는 것이다. 성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1 고린 15.3)“와 같은 참된 진술을 내포하고 있지만, 또한 많은 윤리적 권고, 법, 찬미의 기도, 시적 표현, 기쁨의 환호, 그리고 질문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다른 많은 사항들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자체로 이들이 어떤 정보를 제공하거나 묘사하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믿는 이들이 성서를 일련의 (무류적인) 참된 명제들로 단순하게 환원시키려 할 때마다 그들은 성서에 해를 끼치게 된다.


성서적 진리(ἀληθεια; 감추어져 있는 것이 드러나는 것)는 지성적 이해보다는 점진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적인 이해로 있고자 한다. 구약성서에서나 신약성서에서나 모두 진리에 대한 언어는 하느님께 대한 사람들의 체험을 간직하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서 하느님은 계약에 충실함으로써, 진실된 말씀과 행위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신뢰할 수 있고 충심으로 의탁할 수 있는 분으로 제시되고 있다(신명 7, 9). 따라서 백성은 “진리”의 사람들임을 증거해야만 한다. 신약성서에서 충실하고 신뢰성을 가지고 계시는 하느님(에페 4, 21 : 요한 1, 17)은 당신 아들의 위격을 통하여 충만히 계시되었다. 그리스도 안에 현존하는 신비스러운 구원의 진리가 계시된 것이다. 그리스도와 당신 성령의 힘있는 현존은 믿는 이들이 “진리를 행하도록” 그리고 “진리에 속하여 있도록” 기운을 북돋아 준다. 인간 전체를 변형시켜 주는 것이다.


성서적 진리에 대한 어떠한 이론들도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다음의 5가지 숙고의 내용을 고려해야 한다.


⒜ 성서적 진리는 점진적이다. 성서는 충만한 진리를 향하여 성장될 필요성을 충실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 성서적 진리는 성서 전체의 맥락 안에서 찾아야 한다. 성서 전체는 영감을 받았고 또 참된 것이다.


⒞ 성서적 진리는 무엇보다 먼저 한 위격,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진다. 그분은 구약성서에서 예언자들로부터, 신약에서 사도들로부터 증거된 진리이시다. 성서는 유일한 진리,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의 위격적 계시만을 내포하고 있다.


⒟ 성서의 글들은 그리스도 자신이신 진리에 참여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절정에 이르게 되는 신적 자기통교에 대한 증거를 통하여, 그리고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 하느님께 대한 다양한 인간의 응답들을 통하여, 이 기록들은 구원적이며 계시적인 사건을 참되고 통교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 성서는 우리가 진리를 보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 조건을 만들어 준다. 성서적 진리는 그것이 어떤 판단으로 보여지건 확인되는 것만큼, 행동으로 체험되고 표현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윌리암 라이저가 “진리와 삶”에 대하여 기록한 것은 성서와 많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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