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신약의 하느님-(라)

4.5. 신약성서의 하느님에 관한 종합적 결론
1. 신약세서 증언되느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절정으로 계시된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느님에 대해서 알려 줄 수 있는 최고 적임자다. 예수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한 분(히브 1,3; 고로 1,27; 2,2)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느님께로 이를 수가 없다(에페 2,18; 2,12; 요한 14,6). 다시말해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되신 하느님, 하느님의 육화이기 때문이다.
2. 예수가 계시한 하느님은 구약성서에서 진술하고 있는 야훼 하느님과 동일한 하느님으로서, 세상과 인간의 창조주이시며(마태 19,4), 모든 창조물과 인간을, 풀 한포기, 머리카락 하나까지 돌보시는 분이요(마태 6,25이하; ㅂ0,26이하 참조),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는 조상들의 하느님(사도 13,13이하; 5,30; 22,14),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마태 22,32), 이스라엘의 하느님(마태 15,31)이시며, 유일하신 하느님이시다 (요한 17,3; 로마 3,30; 16,27; 코린 전 8,4-6).
3. 무엇보다도 예수에 의해 소개되느 하느님은 아버지로서의 하느님, 다시말해 인격적이신 분이요, 인간에 대해 지극한 관심과 애정을 지닌 분이시라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압바’라 부를 만큼 하느님과 예수의 친밀성은 ‘아버지와 예수가 하나이다’(요한 10,30), ‘아버지 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 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다’(마태 11,27)는 표현 속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예수의 아버지 하느님은 역시 우리에게도 아버지가 되신다(마태 6,7이하; 7,25이하; 5,43이하참조).물론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심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다. 다시말해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갈라 4,5).
또 성령으로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갈라 4,6). 예수에 의해 아버지로 소개되는 하느님은 바로 인격적인 분이시라는 것과 더불어 자비로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목적을 지닌다. 여기서 일체의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 체험을 뛰어 넘는다. 하느님을 남성 또는 여성으로 표현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로서 소개하는 이유는 본래 아버지로서 지니는 의미들, 생명의 시여자, 삶의 보증인, 보호자등의 의미를 포괄하는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버지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적절한 비유가 ‘탕자의 비유’다. 하느님이 아버지로 소개되면서 자비의 측면을 전하고자 했던 예수의 의도는 ‘하느님 나라’라는 그의 핵심 메시지와 잘 맞아 떨어진다.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에게 자비와 사랑으로 선사되는 선물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심은 역시 선물로서 체험되며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이 되도록 하는 하나의 관계다.
4.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한편으로 분노의 하느님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예복을 입지 않은 죄인과 용서받지 못할 종들을 바깥 어두운 곳에로 내쫓으며(마태 22,1), 심지어 영원한 불 속에 처 넣으기도 하신다(마태 25,41). 하느님의 절대적인 권한이 이런 표현 속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그렇긴 하지만 분노하시는 하느님, 벌을 선고하시는 하느님은 탕자의 아버지로 소개되는 모습과 걸맞지 않는다. 탕자의 아버지의 모습으로 하느님으 로 이해할 때, 이렇게 분노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은 납득하기가 어렵다. 사랑의하느님의 면모만이 아니라 정의 하느님이시기도 하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 의도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충분하지가 않다. 자녀의 배신과 잘못을 교정하고 선도하고자 하는 교육적 목적에 기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달리 말하면 자녀로서의 배신과 잘못의 심각성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5. 예수의 제자들에게서 부활 체험 이후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느님이심이 고백된다. 이것은 예수과 하느님의 친밀성이 드러나는 아빠와 아들의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부활 사건은 그 친밀성을 확인하고 보증해주고 있다. 예수의 뜻은 바로 아버지의 뜻이었으며(마르 14,36), 예수의 행동은 바로 하느님의 처신(요한 9,4)이었다. 예수는 바로 보이지 안흔 하느님의 가시화, 즉 인간이 되신 하느님이시다. 나자렛의 예수와의 관심과 용서라는 사랑의 친교 안에서 인간은 자신이 추구되고 탐색되고 있으며, 수락되고 보살핌을 받고 해방되어 있음을 체험하게 된다. 그래서 그에게 인간 위에 군림하는 인간들의 모든 권력의 무효화를 선언하고, 인간을 자유롭게 풀어주며, 만인을 위한 자유와 사랑의 하느님 나라를 이끌어 드리는 공동체를 설립하게 하는 전권이 주어져 있다. 이 전권의 부여가 하느님의 임재이며,하느님의 영역이어서 마침내 하느님이 인간들 가운데 생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함께 하느님의 육화, 인간화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6. 신약성서는 또 다른 위격으로서 성령을 하느님으로 체험하고 있다. 다시말해 삼위일체적 정식을 지향하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진술하고 있다. 하느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서 인간들과 더불어 계시면서 그분의 사랑과 용서와 배려가 끊임없디 계속되고 있음을 체험한 것이다.
7. 하느님에 관련된 인간적인 표현은 하느님의 신성을 그릇되게 드러내거나 욕되게 할 위험성에 언제나 직면해있다. 이런 위험성을 충분히 감안할 때, 인간의 언어로써 하느님을 완전히 묘사할 수도 없을 뿐더러, 혹시 그렇더라도 그 하느님은 인간의 추리나 논리로 규정된, 곧 인간이 조작해낸 신으로 하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삼위일체 신앙은 하느님의신비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인간으로서 다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를 여백으로 남기고 있다. 또 한편으로 인간의 표현이 부족하고 완전하지 않지만 최선을 다하는 인간의 정성을 드러낸다. 이처럼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로써 드러내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이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로써 무엇인가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면전에로 불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고 하겠다. 이와같은 사실을 감안하여 좀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을 찿게되어 있고, 동시에 하느님을 체험할 수도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이 매우 역동적이듯이 인간에게 계시되는 하느님의활동도 역시 역동적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가 처한 삶의 현장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체험된 하느님을 묘사할 수 밖에 없다. 하느님에 관한 성서적인 표현도 이런 차원을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성서가 말하는 역사의 하느님, 또는 계시의 하느님은 인간의 추리나 논리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현장에서 체험된 바로 그 하느님인 것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볼 때, 성서는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만나는 하나의 생동감이 넘치는 場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성서의 하느님은 한마디로 당신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이시며 언제나 인간을 향해 당신자신을 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이와같은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 놀라운 신비를 성령의 도움으로 터득하게 된다고 그리스도인들은 믿고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계시된 하느님, 곧 구원의 경륜 속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서 계시된 유일신을 믿고 고백하는 자들이다.


이 글은 카테고리: 신학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