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하느님-구약 성서(야훼-하느님과 악의 문제)

 

1.1.2.6. 하느님과 악의 문제




성서는 창조주의 선하심과 인간을 해치는 악 사이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인 분석을 회피한다. 펼쳐지는 드라마에 대한 신앙의 입장만을 천명할 따름이다. 그러나 악의 문제에 대한 질문이 신학적으로는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시대의 질문을 외면할 수는 없다(A. CAMUS). 이스라엘 백성은 개인으로든 공동체로든 당하는 악의 기원을 어디에다 혹은 누구에게 두었을까? 영지주의자 Marcion(+160년경)은 구약성서를 성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구약성서의 하느님은 선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복수심이 많은 신이라고 생각하면서 신약성서에 계시된 은총의 하느님과 반대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Ernst Bloch는 성서의 가장 오랜 전통이 악신을 인간의 적으로 생각하는 믿음의 흔적들을 소개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악신이 인간에 의해 척결되는 것으로 본 것이다. Paul Volz와 Herbert Haag와 같은 성서 주석가들은 Bloch의 입장을 받아들이면서 Marcion의 이론을 논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들은 야훼 하느님에 대한 원초적 서술 안에서 ‘악마적 요소들’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검증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받아들인다. 제2 이사야서는 하느님의 창조행위에 적용시킬 때 ‘bara'(창조하다)동사를 사용하면서 야훼 하느님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빛을 만든 것도 나요, 어둠을 만든 것도 나다. 행복을 주는 것도 나요, 불행을 조장하는 것도 나다. 이 모든 일을 나 야훼가 하였다.”(45,7) 적어도 야훼 하느님이 악을 허용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 다음 악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만연될 때 하느님이 몸소 벌하시면서(창세 5,7 ; 6,17), 곧 바로 구원을 약속하시며 개입하신다. 그러나 구약성서는 악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뚜렷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의인 욥의 시련은 하느님을 원망하기에까지 이른다 :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 한 마디 ‘그는 의인을 악인과 함께 묻어 버리신다네.’ 그의 채찍에 맞아 어이없이 숨져 가는데 죄 없이 절망에 빠진 자를 그가 비웃으시네. 땅을 악인의 손에 넘기셨으니 재판관의 눈을 가리우신 이가 그분 아니고 누구시겠는가!”(욥 9,22-24) 욥은 그의 하느님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야훼 하느님의 선하심, 정의, 전능과 의인인 자신이 당하는 고통 사이에 어떤 합리성이 있는가를 전혀 보지 못한다. 그는 하느님의 부재하심에 반항한다. 구약의 전통에 의하면 죄가 있어야 벌을 받고 그 벌은 그 죄과에서 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욥기의 상황은 다르다. 의인이 벌을 받는 상황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 사실을 정리할 수 있다 : ‘고통의 척도는 필연적으로 죄의 척도와 같지 않다.’ 욥은 하느님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분을 떠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는 하느님이 그의 고통에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을 뿐이다 : “나는 믿는다. 나의 변호인이 살아 있음을! 나의 후견인이 마침내 땅위에 나타나리라. 나의 살갗이 뭉그러져 이 살이 질크러진 후에라도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 나는 기어이 이 두 눈으로 뵙고야 말리라. 내 쪽으로 돌아서신 그를 뵙고야 말리라.”(19,25-27)


물리적, 윤리적 악은 어디서 오는가? 야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여기에 대한 많은 해답을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이 믿음은 ‘서로 경쟁을 야기하는 신적 근원’에서 기인되지 말아야 한다. 이를 조장하는 마니케이즘(마니교)이 성서에 들어설 자리는 없다. 성서에는 악마가 하느님의 대적자로 나타나지 않는다. 현대 성서 주석가들이 제시한 바와 같이,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뱀’은 악마를 뜻하지 않는다. ‘사탄’은 위격적인 존재로서의 이름보다는 오히려 기능으로서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죄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선택에 의한 것이다. 하느님의 원초적인 선택을 거역하는 선택이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악의 문제에 대해 단편적으로밖에 해답을 주지 않으면서, 역사 안에서 악에 관한 질문에 대해 문을 열어 놓았다. 야훼 하느님의 탓이 전적으로 아니라는 사실이 절대 진리처럼 확인되지 않았다. 그분의 정의에 어긋나는 듯한 의혹이 허용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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