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리스도의 再 臨

4. 그리스도의 再 臨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 (묵시 22,20)
“마라나 타!(오소서 주 예수여)” (1Co 16,23)
1고린은 성찬은 단순히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어떤 것을 선언하고 있다. 이미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부활 이후의 공동체에서 하느님 나라의 성취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희망으로 나타난다.

1) 빠루지아
「출석」.「참석」.「도착」의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 문화권에서는 왕의 지방 방문을 표현하고, 이 이미지를 그리스도의 재림에 사용한다. 그 내용은 구약성서를 배경으로 한다. 구약은 희망으로 「야훼의 날」을 사용한다. 그날이 오면 하느님이 역사안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세상을 심판 하시는 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하느님과 인간이 친교를 이루는 때이다. 그러나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그리스도의 날」로 바꾸어 사용한다. 그리스도의 빠루지아는 다양하게 번역되어 사용한다. 「재림」이란 표현은 이미 첫번째 오셨고 또 다시 오실 것이라는 이해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재림은 반복에 불과하고, 그 사이에 있는 지금은 예수의 不在라는 단점을 지닌다. 그러나 빠루지아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의 반복만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현존이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영광 중에 오신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역사에 있어 연속성과 차이성을 보여준다. 재림은 세상 전체를 자신의 권능과 능력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분명한 사건으로 나타난다.

2) 문제점
재림에 대한 희망이 그리스도 신앙안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이는 교회 역사에서 재림 신앙이 완성과 분리되어, 그리고 심판과 관련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마라나타」는 「주님, 더디 오소서」라고 은연중에 바뀐다. 이는 재림이 곧 재앙이라는 잘못된 이해에 기인한다.
한편 이는 초창기 그리스도인의 기다림과 역사와의 불일치에 기인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다시 오실 것을 기대했는데 그 재림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면 재림의 희망은 포기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미 신약성서 안에서 재림에 대한 희망이 현저히 변화해 감을 볼 수 있다.

3) 신약성서 안에서 재림에 대한 희망의 변화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긴박한 종말의 기대속에서 살았다 (예수의 말씀 ‘이 세대가 가기전에’에 기인한다). 예수가 어떤 의미에서 이런 확신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공동체는 이를 확실히 믿었다.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가 「이미, 그러나 아직」의 긴장관계 속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제 재림의 희망은 더 확장된다. 데살로니카 공동체에서 많은 이들이 사망한 일이 발생했다. 여기서 인간들은 당황하였고 이런 의문에 바오로는 1데살 4,13-18에서 답변을 시도한다. “교우 여러분, ….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 가실 것을 믿습니다….. 명령이 떨어지고, 대천사의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하느님의 나팔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이 먼저 살아날 것이고, 다음으로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말로 위로하십시오”
단지 살아있는 자 만이 아니라 죽은 이들도 재림을 맞이할 것을 얘기한다. 이 편지의 수취인을 주시하면서 바오로는 지상에 있는 자 역시 재림의 희망을 포기하지 말 것을 이야기 한다. 이제 재림의 희망은 죽음 저편에로 확장된다. 여기서 죽은 이의 부활이 큰 의미를 지닌다. 또한 한 세대가 지났는데도 역사는 계속 흘러간다. 이제 재림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여기서 루가의 기록은 재림을 확신시켜 준다. Acts 1,11; 너희 곁을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게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시던 그 모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이런 동기로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승천 후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는 교인들 상호관계 안에.성체 안에.그리스도적 설교 안에서 우리에게 오시고 그 분의 재림은 역사 안에서 먼 미래로 연장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또 한가지는 요한복음에 나타난다. 루돌프, 불트만에 의하면 현재적 종말론이 중심을 이룬다. 즉 심판은 마지막 날이 아니라 바로 지금의 행위안에서 발동한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 말을 믿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때가 오면 죽은 이들이 하느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것이며….. 이들은 살아날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 때이다”(5,24). “정말 잘 들어 두어라….지금이 그 때이다.”(5,25). 주님의 재림은 먼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의 순간에도 재림은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 때(항상 현재적인 해석) 문제점은 역사적.공간적 체험을 배제하고, 내적인 체험으로 국한시킬 수가 있다. 따라서 현재적인 것과 미래적인 것을 동시에 볼 필요가 있다. 재림은 분명 미래에 이루어 질 것이다 (Jn 5,28-29; 6,39-; 6,44-). Jn 5,28; 죽은 이들이 모두 그의 음성을 듣고 무덤에서 나올 때가 올 것이다.

신약성서의 이런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지속성이 어디에 기인하는지 밝히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이는 단순히 체험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체험과 경험을 통합하는 가운데 서로의 관련성이 있다. 재림에 대한 희망은 역사적 체험 마저도 변화시킨다. 역시 내적인 체험, 인격적 만남, 결단은 주님과의 만남으로 체험될 수 있는데, 재림에 대한 희망을 계속 전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터득함의 연속이다. 이런 진행과정은 「이미, 아직 아니」의 긴장관계를 깨닫는 것을 필요로 한다. 재림에 대한 희망은 곧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이다. 따라서 재림 신앙은 두가지 측면을 지닌다.
① 미래적인 것 ; 그리스도의 다스림이 미래에 올 것이고, 우리는 거기서 살 것이고, 세상에서 그 삶은 시작되었다. 이 현실 세계는 그 분의 현재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 분의 작용을 통해서 변화된다. 결국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의 만남.완성을 향해서 꾸준히 걸어나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으로 하느님 나라가 완전히 실현되는 것은 아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하게 충만히 실현되고 그것은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다.
② 현재적인 측면 ; 역사가 계속 흐를 지라도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가능함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성체.사랑 등등)은 마지막 날을 전제로 한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그 분을 거스리는 상태에서는 이미 단죄이고, 친교를 강하게 하는 만남은 영생을 의미한다. 그 만남이 이미 이 세상의 일부가 되어 있고, 하느님 나라로 변화해 가게 한다.
이 두 측면은 서로 분리될 수 없고, 따라서 재림은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이다. 왜냐하면 그 완성의 시작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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