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교부들의 창조론-(나)

4.2.1.2 한분이시고 세위이신 하느님 편에서의 존재의 친교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영원하신 하느님은 근본적으로 ”존재(Esse)” “최고선(Summum Bonum)“이시다. 신플라토니즘적 이해를 개시로 아우구스티누스은 점진적인 ’존재‘와 ’최고선’에의 참여를 가정한다. 바로 이것을 통해 창조주는 피조물들을 창조하신다. 거기에 따라 우등한 것과 열등한 것과 그리고 무에 가까운 최저의 하등의 것으로. 물론 아우구스티누스은 신플라토니즘적 유출에 관한 이론에 대해 비판을 가하면서, 그러한 창조적 참여가 ‘존재’와 ‘최고선’의 신적충만의 필연적 ‘방출’의 형식을 이룬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런 경우 하느님은 창조없이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하느님은 창조를 그분의 뜻을 따라 자유로운 결정으로 이룩하신 것이다. 그가 ‘존재’와 ‘최고선’과 통교할 때, 목적들을 성찰하고 바라보면서 이룩한다. 여기서 피조물의 변화성, 비 신성이 분명하게들어난다. 창조주는 당신 손에 의해 이루어지는 작업의 다양성을 위해 드러내는 것과삼위일체적 친교 안에서 모형과 그 유비적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주의하게 한다. 여기서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구별이 그들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다양성이 존중된다. 이러한 방식에서 삼위 상호간의 관계가 사랑의 자유로운 관계를 이룰 수 있다. 사랑의 영원한 상이성과 영원한 일치성안에서 삼위는 함께 세상을 창조한다. 즉 ‘존재’와 ‘최고선’이신 하느님은 창조적으로 서로 친교를 나눈다. 바로 ‘존재’와 ‘선’에 참여하는 무엇을 출생케하기 때문이다. 인간세상은 그 존재가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공동적이고 사랑스러운 행위에의해 지탱되어야 한다. 교회는 바오로 사도와 함께 세상은 성자를 통하여, 성신안에 성부의 작업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확언하고 있다. 세상은 비록 부패되었을지만 그래도 항상 삼위일체의 친교의 자취를 보존하고 있다는 신비를 지니고 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런 입장을 다시 취하면서 가정과 교회, 사회가 창조주와 그의 사랑과 사회적 연대의 차원을 이끌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Lumen Gentium, 42, 41,….)

4.2.2 원죄
좀더 상세하게 말하자면, 악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개념도 알아 보아야 한다. 물론 희망에 찬 낙관적인 꿈을 꾸고, 갑자기 깨어나서 비관적인 현실을 대면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은 로마의 쇠퇴, 반달족의 침략을 생생하게 체험하면서 세상에 분명하게 현존하고 있는 악의 결과들을 확실성과 더불어, 때로는 과장하기도 하면서 때로는 조야하게 다루기도 했다. 그러나 균형을 잃지 않고 있다. 바오로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말한 것처럼, 은총이 죄보다 강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악의 세력의 광대함과 심오함을 이야기한다.

4.2.2.1 악
아우구스티누스은 악의 본성을 철학적 방법을 통하여 밝히고자 시도하였다. malum이라는 개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은 윤리적인 악에서 물리적인 악을 구별한다. 물리적인 악은 자연적인 유형의 사건들, 즉 고통, 병, 불의의 사고, 재앙, 횡사등과 관련되고, 윤리적인 악은 인간이나 또는 악마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자행된 것으로 악의 징표하에 있는 무질서와 조건을 의미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은 형이상학적으로 이 두가지의 악 모두가 “선이 결핍, 존재의 결핍”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privatio essendi et boni). 이렇게 정의할 때, 그러면 어떻게 존재하지 않은 것을 두고 부정적으로 규정지을 수 있느냐고 하면, 거기에 대한 만족스로운 답을 찿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심은 세상에 현존하고 있는 악의 본성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었다. 물리적인 악은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것일 수 있다. 즉 하느님이 시험하기 위해서, 혹은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라고 생각할 수 있다.이와는 상이하게 윤리적인 악은 결고 창조주의 의도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마니케이즘에서 말하는 것처럼, 부정적인 어떤 원천, 하느님의 적수로부터 유래하는 것도 아니다. 그 원인은 독점적으로,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의 선의 질서를 거스리는 창조적 결정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다시말해 하느님의 의지와 선을 역전시키는 데서 발생한다. 하급자의 위치에서 상급자의 선을 거절한다든가 경멸할 때 윤리적 악이 이루어진다. 창조 질서에 있어서 이러한 결과는 창조주로부터의 소외를 이끌어낸다. 그리고 창조된 실재인 ‘존재’와 ‘선’의 붕괴를 의미한다. 윤리적인 악, 진정한 의미의 악의 주인은 위험스럽게도 무에 가깝다. 자신을 파멸의 힘에 의해 강탈되도록 내맡기는 것이 된다.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이 아담이 그의 후손들에게까지 재앙으로 이끌게 죄의 행동을 이해한 방식이다.

4.2.2.2 원초적인 죄와 원죄
나중에 원죄를 다룰때 함께 고찰하기로 한다.

4.2.3 그리스도의 창조의 중보 역할
교부들은 이 진리를 언급할 때 신약성서가 정식화한 언어와 유사한 상징적 정식들을 사용한다.
디다케; 하느님의 창조에 대한 상념과 함께 그분의 지속적인 주관하심에 대한 상념도 아울러 진술하고 있다. 여기서 성부는 인간의 양육자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양육자로서의 성부는 육신의 영양만을 공급해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성체성사 안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정신적 생명을 지탱하시고 강화하신다고 서술하고 있다.“전능하신 주여, 당신은 만물을 당신의 이름을 위해 창조하셨으며, 인간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양식으로 베풀어 주셔서 이들로 하여금 당신께 감사하도록 배려하셨나이다. 그리고 당신은 우리에게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정신적인 음시과 음료,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셨나이다.”(10.3)
스미르나의 뽈리까르보: 성부께서 성자에게 “하늘과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예속케 하셨다. 그러므로 살아 숨쉬는 모든 생명체는 성자를 흠숭하면서 봉사한다.”
제 2 클레멘스:그리스도는 “우리가 존재하기 전에 우리를 불러 내어서, 우리가 비존재자로부터 존재가가 되기를 원하셨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주님을 ‘새로운 인간’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바오로가 그리스도를 새창조의 주역으로 새 아담으로 묘사하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바르나바의 편지: 마지막 시간에 제 2의 창조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표현이 나온다. 또 창 1,26에 나오는 복수형을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주고 받는 대화로 해석한다.
오리게네스:“ 앞으로 도래하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에 성부로부터 출생되었다. ‘만사가 그분을 통하여 창조 되었기’ 때문에, 성자는 만물이 창조되는 바로 그 가운데서 성부를 위해 봉사한다. 그래서 그분은 마지막 시간에 인간이 되셨다. 그분이 하느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외현화 하셔서 인간이 되셨다. 그러나 인간으로서도 그분은 본시 그분 자신이셨던 하느님으로 머무셨다”(De prinicipiis)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그분을 통해서 만물이 창조 되었다”.
이와같이 신경안에서 신앙고백의 진수로서 그리스도의 창조의 중보자로서의 역할이 고정되긴 했지만, 초기 교부들에게서는 미미하게 나타난다.
호교론자들은 논쟁의 상대자들로 하여금 신앙의 진리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교의 성부를 플라톤적 존재와 아주 흡사한 분으로 묘사하게 된다. 여기서 도무지 헤아릴 길 없고 절대적인 초월로서의 이 하느님을 어떻게 창조주로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이 등장하게 된다. 하느님은 순수한 불변적 존재로서 모든 존재자의 정상에 있게될 때, 하느님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처지에서 세상과 관련을 맺기 마련이다. 여기서 로고스 개념이 해결책으로 제시되었다. 이 철학적 로고스 개념이 요한 복음사가가 원용함으로써 성서적 개념이 되었다.
이 로고스 개념을 보다 이해하기 쉽고, 성서적 개념으로 원용할 수 있도록 역할을 한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였다.
유스티노는 「유대인 트리폰과의 대화」라는저서에서, 창조주와 게시자로서의 하느님과 비신적 존재자 사이의 중보성을 위해서 로고스가 필요했다고 보았다. 여기서 어려움은 필로의 로고스는 그의 본성으로서의 신성과 인성이 올바로 평가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플라톤적이고 성서적인 사상의 조화를 위해서 교부들은 로고스의 존재양식을 이중적인 것으로 구별하였다.
안티오키아의 테오필로;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태어나 성부 안에서 존재하던 로고스 (Logos endiathetos)와 창조시 활동하시는 로고스(Logos prophorikos)를 구별하였다. 로고스 엔디아테토스는 성부처럼 세계를 초월하고 성부와 본질이 같은 분이며, 로고스 프로포리코스는 구원경륜에서 창조주로 역사하시는 분이라고 이해 하였다.(여기서 형이상학적 삼위일체와 구원경륜적 삼위일체의 구별이 생겨났다).
이 구별이 그리스도의 창조기능을 정확하게 규정하는 데 공헌하였다.
리용의 이레네오; 그리스도 중심의 창조론을 위해 공헌한 교부다.
영지주의자들이 욱신과 정신을 이원론적으로 서로 분리시키고, 정신의 부활만을 주장한다. 또 그리스도를 우주적 기능을 지닌 성부의 외아들이며 구원자로서, 그리고 고통을 당하는 인간으로서 분리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을 거슬러 이레네오는 구약과 신약, 창조와 구원이 불가분의 하나의 종합된 구세사를 이룬다는 점을 주장하였다. 인간의 원초상태와 종말상태가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고,이미창세기에서 그리스도의 역사가 정초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의 주저 「이단을 거스려서」에서 시편 109,1을 해설하면서 그리스도가 모든 창조위에 군림하는 지배자로서 옥좌에 오르게 되었다고 풀이한다. “ 하느님의 크기를 인식할 수는 없다. 하느님의 척도를 취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하느님께롬 인도하는 그분의 사랑에 땨라 하느님께 순종하면, 우리는 그분이 만물을 당신 자신으로부터 창조하시고 간택하시며, 치장하시고 보전하시는 능하신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천사들이 우리를 창조하지 않았으며 우리 자신이 우리를 창조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천사들에게는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을 창조할 능력이 없었다. 그밖에 다른 어느 누구도, 성부 없이는 존재하는 어떤 힘도 이를 행할 수 없고 오로지 주님의 말씀만이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을 창조해 낼 수 있었다. 하느님은 당신의 결의에 따라 창조하시고자 한 바를 창조하시기 위해서 마치 손을 사용한 것과 같이 창조를 위해 천사들이나 다른 어떤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으셨다. 말씀과 지혜, 아드님과 성령은 늘 하느님과 함게 계셨다. 하느님은 이들을 통해서 그리고 이들 안에서 만물을 자유롭게, 즉 독자적인 결의를 통해서 창조하신 것이다. 만물은 하느님이 말씀하신 바를 따라 존재한다.. ’우리, 인간을 우리 모습대로 만들자‘ 하느님은 당신 자신으로부터 피조물의본질, 조물의 원형과 세계안에 있는 아름다운 사물의 모상을 취하신 것이다.
이처럼 이레네오에게서는 하느님의 자유, 삼위일체적 다원성 안에서의 단일성이 강조되고, 영지주의자들이 인정하려고 하는 다른 모든 창조세력들이 배격되고 있다. 더 나아가 말씀이 창조의 목표가 되고 있다.
”성부로부터 탄생한 말씀은 성부의 뜻을 따라 성부와 일치되고 조물들과 일치되어 있으며, 항시 인류 안에서 현존하고 육화되었으며, 이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 주께서는 우리 때문에 수난을 당하셨고 부활하셨으며, 모든 육신을 부활 시키시고 구원과 정의로운 심판의 척도를 당신이 창조하신 만물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성부의 영광주에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가 제시한 바와같이 한 하느님 성부이시며 또한 우리 주님이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체 창조물을 통해 오시고 만물을 자신 안에서 화합하신다. 그러나 우리 주께서는 인간이시며 동시에 하느님의 육화한 아드님이시기도 하다. 그리하여 주께서는 인간도 당신 안에 화합시키신다. 가시적이 되셨으면서도 비가시적인 그분, 포착될수 있게 되셨으면서도 헤아릴 길 없는 그분, 고난을 당하셨으면서도 고난을 모르는 그분, 인간이면서도 만물을 당신 안에 화합하시는 말씀. 이분이 비가시적인 존재들의 세계에서 주님이시자 하느님의 말씀인 것과 같이, 가지적인 것과 육신들의 세계 안에서도 첫쩨 서열을 점하고 우선권을 지녀야 하며, 따라서 교회의 머리이어야 하고, 때가 당도하게 되면 만물을 당신께로 이끌어 들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 때, (kairos)는 그리스도 중심적 세계관에서 결정적이다. 정돈되어 있고 질서지워진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앞당겨 일어나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주께서는 성부에 의하여 인식되었던 모든 것을 미리 보시고 바른 시간과 올바른 질서 안에서 이를 완성하셨다. 주께서는 성부와 같은 분이며 성부와 같이 부유하시고 성부와 같이 충만하신 분으로서 이를 행하셨다. 주께서는 구원되어야 할 모든 사람들의 구원자이시고, 당신의 주권하에 있는 만물의 주님이 되실 때, 바로 성부의 뜻에 봉사하시는 것이 된다. 주께서는 모든 피조물의 하느님이시며, 성부의 외아들이며,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어야 할 충만한 시간에 육신이 되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레네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땅의 흙으로 만드실 때 사용한 손으로서의 로고스이다. 이 로고스가 친히 인간이 될때 그리스도는 아담, 즉 인간을 당신 안에 재차 화합하신다는 것이다.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출생된 이 로고스는 ’재화합의 아담으로서‘ 창조의 구원자요 완성자로 이해되고 있다.
이레네오에 의하면,그리스도는 인류의 정신적 머리요, 우주의 머리이시다. 창조는 애시당초부터 이 정상을 위하여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세계 창조는 로고스 안에서 미리 형성 되었으며 강생을 지향해서 만물은 그분안에서 재화합시킬 수 있도록 이루어진 것이다. 강생은 이 구세사적 통합의 시작이고 원천이 된다.
이러한 이레네오의 관점이 다소 변화한다. 오리게네스 역시 그리스도의 창조 중보자의 역할을 인정하고 있다. 오리게네스에게도 말씀의 육화는 창조 역사의 절정이다. 그것은 까빠도치아의 교부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그리스도를 모든 조물의 이상형이자 원리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신학은 보다 합리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 특성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점점 죄악으로 말미암은 필연적인 귀결로 이해되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이레네오가 성자와 성령을 하느님의 손으로 이해하는데서 일종의 종속론을 옹호하게될 위험과 성부의 창조 활동성을 강조해야 할 문제에 직면하면서 보다 합리적인 신학을 전개해야 했다. 이것이 라틴교부들, 특히 테르뚤리아누스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드러난다.

4.3 중세기의 창조이해
3-4세기에 이미 교부들과 교도권은 창조의 이론을 특히 인간학적인 측면에서 다루어야 했다. 중세기에는 정당한 신앙을 옹호하기 위하여 두가지 이단과 맞서 싸워야 했다. 이미 아우구스티누스가 대면했던 펠라지아니즘이 그 하나요, 다른 한편으로 priscillianismus 라는 영지주의의 한 분파였다. 펠라지오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제 스스로의 노력으로 쟁취할 수 있다는 입장을 표명한다.
펠라지오는 400여년 경 에이레에서 출생. 주교로서 금욕생활과 영성생활의 스승으로 로마에 등장. 당시 방종주의, 기회주의적 성향의 입교에 대해 그리스도교적 생활을 요청하기 시작하였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고 지탱되는 것과 함께 인간 본성 자체의 능력이 은총의 기초형식이라는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인간은 항상 올바로 행동할 수 있고,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일 수 있으며 점점 더 밀도 깊게 그리스도인이 될 수있는 자유와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벨라지오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항상 주셨고 인간은 행동할 수 있다. 선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이제 오로지 인간의 책임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체험은 여기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는 정결하려는 능력을 얻고자 수십년 동안 겨루었다. 예측치 않는 순간에 하느님이 그에게 은총을 선사하여, 그가 정결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이처럼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은총은 인간이 의존하고 있고, 기다려야 하는, 하느님이 먼저 당신의 자유로써 선사해야 하는 특수한 힘이고, 인간은 이미 언제나 지니고 있는 소유물로써 출발할 수는 없는 선물이다. 펠라지오에게는 만사가 인간과 그의 자유에 좌우되고, 하느님의 역할은 인간에게 소위 필요한 보급 장비를 제공하는데 제약되어 있어서, 인간 스스로가 자기 구원을 수중에 넣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인간이 원하지 않으면, 하느님이 헛되이 자비를 베푸는 것이될 만큼 인간의 권한 속에 하느님의 자비의 작용이 놓여 있을 수 없다“. 즉 하느님의 은총의 절대성을 강조한다. 그러면 왜 하느님은 누구에게는 은총을 베푸시고, 누구는 죄악을 범하도록 방치하시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어떻든 이 논쟁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이 승리를 얻었다. 그러나 펠라지오의 이론은 단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어 17세기에는 소위 세미 펠라지아니즘이라고 하여 그 잔재로 남았다.
아우구스티누스와 교회 전통은 인간이 은총없이는 구원 받지 못하며, 무조건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의존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데 비해서 세미 뻬라지아니즘은 (1) 인간은 자기 자유의 힘으로 은총을 구할 수 있고 또 구할 수 있어야 한다. (2) 인간이 은총을 받아들였으면 이 은총을 충실하게 보전할 수 있다.
한편 프리실리아니즘은 영지주의의 이원론을 따라 물질계는 악마가 창조했고, 영적인 것은 하느님에게서 유출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1. 인간 능력의 초월성을 거스려서
2. 육체의 악마화를 거스려서
3. 육의 부활, 구원,
4. 천사와 악마에 대해 논하게 된다.

1. 현대 인간들은 산업사회의 영향으로 인간을 생산하는 능력으로 평가한다. 그 능력에 따라 긍정적이고 경우에 따라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게 된다. 그처럼 인간의 활동성이 현대 창조 이론안에 거론된다.
과거, 이미 4세기에부터 인간의 능력, 무능력이 관심이 되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이 지상에서의 복지 차원에서가 아니라, 영원한 구원에 관련되고 있었다. 인간 본성과 은총을 대립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이미 언급했듯이,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지오사이에서 논쟁을 벌였다. 우리 인간본성이 아담의 원죄로 부패하여 스스로은 구원될 수 없고 하느님의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주장과, 인간은 제 스스로 구원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중세기에 개최되었던 공의회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받아들이면서 은총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예컨대 416년의 카르타고의 공의회에서는 펠라지오의 입장을 따라 첼레스티누스가 신생아는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과 마찬가지로 무죄하고, 따라서 구원은 복음과 마찬가지로 법을 준수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을 단죄하였다. 따라서 카르타고 공의회는(481년) 구원을 위하여 신생아에게도 세례가 절대적이라고 선언하였다(DS 223).이러한 입장은 훗날 트리덴틴공의회에서 재천명된다.
요한 15,5 “나를 떠나서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오직 창조주 의 보편적 구원의지만이 구원을 가져다 줄수 있으며, 인간이 자력으로 구원될 수 있다는 인간의 초월적능력에 대해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2. 한편 영지주의 또는 마니케이즘 사상을 바탕으로 설교를 했던 Pricilliano를 거스려 단죄하였다. 그가 과연 이단을 주장했는지는 자료가 분명하지 않다. 447년 톨레도 공의회에서 창조이론에서 다루어 지고 있는 영혼, 천사, 악마라는 주제에 대해서 점성술의 경향으로 해석하는 것을 단죄하였다(DS 283-286). Braga 공의회(561)는 프리실리아노을 영지주의, 마니케이즘의 경향을 지닌 것으로 단죄하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참으로 육화하셨으며, 그리스도의 인성이 참된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하느님은 영원한 영적 존재로서 절대적으로 세상 실재와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 삼위일체의 하느님으로서 세상안에, 성자의 육화안에 비록 우리의 세계가 물질적인 것일지라도 그 안에 하느님이 들어 오셨다는 것이다. 또 인간의 영혼이라든가, 천사들이라든가 하는 영적 존재가 하느님의 영적 실존으로부터 유래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악마가 하느님로 부터 창조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 오히려 어떤 창조자도 지니지 않고 어둠으로부터 유출되었다고 주장하고, 그 자체가 모든 악의 원리, 주체가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단죄될 지어다.”(DS 457). 이처럼 공의회의 결정은 창조안에서 육체의 악마화의 형식을 거부한다. 여기서 육체의 부활을 언급하면서 육체의 귀중함을 천명한다(DS 462). 이처럼 창조이론은 인간학적 관점에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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