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야휘스트계 문헌 2.1.2.1 야휘스트계 문헌의 특성과 배경 창세기 2,4b-25에 나타나는 야휘스트계 창조설화는 보다 오래된 전승에 속한 문헌이다. 기원전 1000-900년의 것으로 살로몬 시대까지 소급된다. 야휘스트계 작가는 기원에 관한 3가지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인간 존재, 죄 그리고 축복과 은총안에 구체화되고 있는 하느님의 의지다. 이러한 세가지 관점을 아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제관계 작가가 찬가 형태의 교리교수법적 성격을 지녔다고 한다면, 야휘스트계 문헌은 어떤 틀에 매여 있지 않고 자유롭게 생동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세계의 의의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숙명적인 죄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서 인간의 처참한 인간실존을 이야기 하는 것이라기보다 이러한 사건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자비를 선명하게 보여주려는 의도가 강하다. 사실 생명과 죽음, 남자와 여자, 사랑과 미움, 선과 악, 노동과 출산, 죄와 벌, 고통과 죽음 등의 삶의 문제는 수없이 논의 되었고, 다양한 예술의 양식을 통해 끊임없이 탐구되고 진술되지만 여전히 새롭게 느껴오는 의미들을 담고 있다. 야휘스트계가 전해주고, 진술하는 인간의 삶의 문제들이 사람과 동물을 진흙으로 빚어 만드시는 도공의 하느님, 최초의 인간으로서, 남여로서의 아담과 에와, 벌거벗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남여 관계, 뱀의 유혹과 신비스러운 금단의 열매, 금령을 깨트린 최초의 인간들, 죄에 따르는 필연적인 벌, 실낙원 등등을 아주 드라마틱하게 전개하고 있다. 이렇게 제관계 문헌과 서술 방식이나 강조점이 다른 이유는 이글 을 쓴 사람과 배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솔로몬 시대라고 한다면,이스라엘의 가장 전성시대인 셈이다.아버지 다윗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르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은 주변의 여러 나라들로부터 조공을 받을 정도였다(열왕기 상 5,1-8). 시바의 여왕까지도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찿아왔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열왕기 상 10,1-13). 강력한 정치세력을 배경으로 두고 활발한 무역을 벌여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이러한 정치, 경제를 바탕으로 성전을 신축하는 등 대형 건축사업을 일으켰다. 이러한 번영의 싯점에서 야휘스트계 작가는 무엇때문에 창조-범죄-처벌-이라는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가? 야휘스트계 작가는 이러한 번영이면에 있는 오만과 실적이면에 깔려있는 자기과시를 따라서 어떤 타락을 보았고, 노역에 시달리는 민중의 원성, 개방정책에 따른 이교문화의 유혹등등으로 야훼 신앙에 대한 위기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전과 번영은 야훼 하느님의 덕분이 아니라, 왕의 뛰어난 지혜와 영도력 때문이었다는 생각으로 점점 바뀌지 시작하게 되고, 인간은 점점 하느님 야훼를 소홀히 대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경향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야휘스트계는 죄가 어떻게 나타나며 그 결과가 어떠한지, 그리고 그러한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야훼 하느님의 자비로운 역사하심이 어떻게 흘러왔는지 사실적이면서도 간결하게 서술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런 이유로 야휘스트계 작가는 구원의 역사를 창조 때까지 끌어 올려 한 처음의 상태로부터 서술하고 있다. 창세기 2-3장의 이야기는 그가 서술한 구원의 역사 전체, 곧 원역사, 성조사, 이스라엘 백성들 이야기의 서곡에 해당된다. 야휘스트계 작가는 인간들의 실존적인 삶과 인간 공동체에 촛점을 맞추어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부딪히는 삶의 근본문제들을 2-3장에 걸쳐 묘사한다. 창세기 2-3장은 하나의 통일된 이야기로 구성하고 있는데, 그 전단계의 전승에서는 본래 독립적인 두가지 이야기였던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가지 이야기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그를 동산에 있게하고, 죽음의 벌을 내걸어 동산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인간은 뱀의 꼬임에 빠져 이 금령을 어긴다. 하느님은 금령을 어긴 인간을 동산으로부터 쫓아냄으로써 벌을 내린다. 다른 설화는 인간창조를 주제로 한 많은 이야기들 중에 하나다. 하느님이 맨 처음에 흙으로 인간을 지은 뒤에 생명을 불어 넣어 주셨으나, 당신의 창조물이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동물들을 창조하여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으나 아직 충분하지가 못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다시 남자의 갈비뼈에서 여자를 창조하셨고, 남자는 기쁨에 차서 여자를 맞아하며, 이렇게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게 되면서 비로서 인류창조는 완성된다는 것이다. 야휘스트계는 이러한 두가지 설화를 하나로 짜 맞추면서 인간 창조와 인간이 금령을 어긴 것을 이어놓았다. 이처럼 인간 창조와 범죄 사건이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창조와 인간창조가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기도 하다. 최근에 와서 인간창조와 세계창조 이야기가 원래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는 사실을 찿아냈다. 이 이야기들은 별도로 독립된 전승단계를 거쳤다. 그리고 인간창조 이야기가 세계창조 이야기보다 훨씬 오래된 전승의 것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우리가 이미 다른 나라의 신화들에서 보았지만 인간창조 이야기는 모든 지역에 있어서 바로 원시문화에까지 소급되어 있다는 것을 보았다. 한편 세계창조 이야기는 고도로 발달한 문화들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와같은 현상을 증명해 줄수 있는 자료를 에집트신화나 적도 이남의 아프리카 지역에서 형성된 신화와 비교할 때 얻게된다.예컨대 에집트에서의 경우 우주발생, 즉 세계창조가 창조이야기의 주도적인 주제로 나타나는 반면에, 적도 이남의 아프리카 지역에선 인간 창조 이야기가 발달되어 있고, 세계 창조 이야기들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간혹 세게 창조 이야기가 전해 진다 하드래도 단지 덧붙여진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우리도 시대의 차이를 두고 있는 제관계문헌과 야휘스트계 문헌을 비교할 때, 나중에 쓰여진 제관계가 세계창조에 대해 자세한 기술을 하고 있는 반면, 먼저 쓰여진 야휘스트계문헌이 인간을 중심으로 창조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 세계창조 이야기가 부록으로 덧붙여진 인상을 주는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창조이야기는 결국 인간창조의 맥락안에서 발생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말해 위협받고 있는 구체적인 인간실존으로부터 인간의 신원을 묻고, 점차적으로 귀납적인 방식으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상황을 묻게된 것이 자연적인 순서였다는 말이다. 아뭏든 인간창조 이야기는, 흙으로 빚어졌다는 이야기는 세계 여러 나라에 널리 전해져 있는 점에서도 상당히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는 전승의 것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야휘스트계 문헌 2-3장의 이야기는 인간창조(2,7-9)–하느님의 금지 명령(2,16-17)–범죄(3,6-7)–범죄의 결과(3,14-19)–에덴추방(3,20-24)이라는 극적인 흐름을 지니고 있다. 이미 말한 바이지만 여기서 인간의 죄보다도 인간의죄에도 불구하고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깊이 자리잡고 있다. 이 설화는 아주 짜임새가 있지 못한 점이 드러난다. 하느님이 인간을 에덴 동산에 두게 된 것에 대해 두번이나 되풀이 하고 있다(2,8과 15). 인간이 옷을 입게 되는 사실에 대해서 두번이나 반복한다(3,7과 21). 어떤 학자는 인류의 의복의 변천사를 반영한다고 말한다. 풀이나 나뭇잎으로 시작해서 가죽옷으로 발전하는 발전사를 반영한다고 말한다. 또 두가지 나무에 대해서 여려번 언급하고 있다.(2,9과 3,22). 이러한 반복과 투박함은 여러가지 전승을 한데 묶었다는 것을 이야기 해준다고 말할 수 있다. 2.1.2.2 기원적인 인간의 모델(원초적인 인간의 모형) 야휘스트계는 직접적으로 ‘인간의 창조’라는 주제를 다룬다. 여기서 세계는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으로서만 묘사된다. 땅이 야휘스트계 이야기의 배경이 되고 있다. 첫머리에에 ‘야훼 하느님은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때“라는 표현 속에서 땅을 먼저 언급하고 있는 점에서도, 또 땅에 대해 자세한 기술들, 황무지였던 땅(2,5), 경작할 사람이 없었던 땅(2,5-6),물에 적셔진 땅(2,6)에서도 그렇다. 야휘스트가 인간 창조 이전의 상태를 황무지로 묘사한 것은 아마도 가나안에 막 정착하면서 당시의 팔레스티나의 농경문화를 배경으로 한듯 여겨진다. 땅(adamah)은 인간(adam)을 위해 경작될 수있는 땅이다. <흙을 소재로 한 인간 창조> 황무지에서 첫 창조물로 인간이 생겨난다.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 짐으로써 인간과 흙이 밀접한 관계를 지닌 것으로 드러난다. 제관계 작가 (1,26-31)역시 하느님이 인간을 말씀으로 창조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제관계는 하느님이 인간을 어떻게 창조했는가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 야휘스트게가 전하는 인간창조는 흙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이러한 고대 사고방식은 아주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나라의 신화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욥기에서도 같은 내용을 볼 수있다. 우리는 이러한 인간창조 이야기는 그 기원을 상당히 옛날로 소급하여야 하는 ‘고전적’인 전승의 소재였다고 본다. 아담이 하나의 인격적이고 개별적인 특징을 지니고 다루어졌지만 본질적으로 집합명사의 의미를 지닌다. 다시말하면 아담은 구체적인 개인을 나타내기 보다 종으로서 인간자체를 의미한다고 본다. 땅은 인간의 한계, 환경을 말한다. 그리고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물질적인 것으로 조형되었다(창세기 2,7. 19). 땅은 야생식물과 경작식물을 돋아나게 한다. 땅이 경작되면 인간과 동물들이 생존할 수 있는 양식을 산출한다(창세기 2,5이하,; 8-15). 여기에는 신화에서 땅을 어머니라고 하는 고대 사상이 엿보인다. 하지만 창세기는 땅이 바로 인간의 노동을 위한 장소로서 이해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2,5. 15). 마지막으로 땅은 인간이 돌아갈 곳이며, 그럼으로써 인간의 한계를 상기시켜 주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준다(2,7; 3,19). 여기서 가르치고자 하는 바는 인간은 물질과 연결된 존재요, 본질적으로 땅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 존재라는 점이다. 야휘스트계에서는 두가지 행위로 인간 창조가 이루어 진다. 흙 또는 먼지로 사람의 형상을 빚어 만드는 것과, 생명의 숨을 불어 넣는 것이다. 생명의 숨을 불어 넣었다는 창조행위는 또 다른 부가적인 의미를 지니게 한다. 다시말하면 물질적인 존재 인 우리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 넣어 주셨다는 것이다.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생명을 지니고 활동하는 존재라는 것이다(esseri viventi= nefesh hajja).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영 또는 혼을 가진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nefesh hajja 라고 하는 히브리어는 살아 있는 혼, 살아 있는 존재, 생명체로 번역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육체에 끼어 들여진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 것보다는 오히려 인간이 살아 있는 한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인간을 육체나 혼으로 구성된, 혹은 육체와 정신과 혼으로 구성된 존재로 보는 것을 배제하고, 처음부터 완전한 통합과 조화를 이룬 한 존재로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서는 육체를 낮게 평가하거나 영을 높이 평가하지도 않으며, 아예 영과 육을 구별하진도 않는다. 이러한 영과 육의 구별과 육체에 대한 멸시는 플라톤 철학의 영향으로 후대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인간의 코에다 생명을 불어 넣어 주시는 하느님의 신화적인 모습은 인간학적 관점에서 극도의 유창한 표현이다. 이것이 가르키고자 하는 바는 우리의 인간 존재로서의 생명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에 기인하고, 따라서 인간이 살고자 하는 욕망과 하느님께로 향한 인간의 경향이 밀접한 연결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려고 한다는 것이다. 3,19에 “너는 먼지이고, 그리고 너는 먼지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표현이 나타나는데 이말은 인간의 덧없음,인간의 한계, 자신의 조건을 지니고 사는 존재임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인간의 자신의 실존의 생명성으로 해서만 비로서 인간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낙원과 일을 하도록 부과된 사명> 야휘스트계는 시적인 표현으로 낙원과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를 상당히 풍요롭게 묘사하고 있다.낙원을 뜻하는 paradise는 본래 페르시아 말로서, 그리이스어로 παραδεισοσ 라는 말로 음역하여 사용한 말이다. 이말의 근본적인 의미는 담으로 둘러쌓인 과수원이라는 뜻인데, 후대로 내려 오면서 다른 말로 되어버렸다. 파라다이스란 일체의 좋은 것들로 넘치는 풍요와 평화가 깃들고, 축복받은 어떤 곳으로 유포되었다. 본래 에덴 동산은 이런 것들과 무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역시 즐거움의 땅이요, 하느님과 인간이 아직 갈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비옥하고 아름다운 땅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느님은 이처럼 인간을 도우시어 인간에게 아무것도 아쉬움이 없도록 하고자 하신다. 2,8에는 손수 하느님이 동산에 온갖 나무를 자라나게 하신다고 표현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해 주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맛보게 하신다(2,9). 그러므로 인간의 삶은 고통스러운 것만이 아닌 즐거운 것이라는 결론이다. 보다 더 근본적인 즐거움은 이 동산에서 하느님이 인간과 가까운 존재일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한편 동시에 인간은 창조주의 호의와 은혜를 받은 존재로서 하느님의 정원을 경작하고 돌보아야 할 의무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도움은 어렵고 귀찮은 활동의 의무를 면제시키지 않고 있다. 여기서 보여지는 삶의 철학은 인간 존재에 노동은 본질적인 것이라는 사상이다. 사실 오늘날 실업과 생산적 작업으로부터의 소외는 인간의 존엄성과 대조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사실 성서는 인간의 신분을 규정하는 본질적인 영역으로서 일, 노동을 언급한다. 일 없는 삶은 완전한 삶이 될 수가 없다. 그런 삶은 인간에게 있어 전혀 무가치한 실존이 되고 만다. 에덴 동산을 천국 또는 행복을 누리는 파라다이스로 생각했던 사고방식에서 육체 노동은 매우 저급한 가치를 부여하게 되었고,관상이라든가 어떤 정신 노동을 우위의 것으로 취급하는 경향을 가져왔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야휘스트계가 말하는 일, 노동은, 가나안에 정착해서 농부가 밭을 경작하는 것을 반영하고 있긴 하지만, 반드시 농사일이나 노동만을 한정해서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인간의 삶의 전 영역헤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으로서의 일, 인간의 창조적인 일과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유지 하고 보존 시켜 나가는 모든 일을 의미한다. (우리는 창세기를 근거로 인간이 땀을 흘려 노동하게 된 것이 바로 원조인 아담과 에와의 죄의 결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실상 죄와 상관없이 노동은 인간에게 본질적인 것이다. 이것은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 동산에 데려다 놓게된 이유로 나타난다. 하느님의 동산을 경작할 사람이 없어서 사람을 거기에 데려다 놓은 것이다. 죽음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왜 죽어야 하는가? 창세기의 설화를 놓고 인간의 원조인 아담과 에와가 죄를 지어서 그 결과로 죽음이 초래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상은 바오로에게도 뚜렷이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는 죄의 걸과로서의 죽음과 인간이 본질적으로 한계성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적인 죽음과 구별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한계로서의 자연적인 죽음은 죄의 결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가는 문이요, 과정이라고 말한다.말하자면 죄의 결과로 노동 그리고 죽음이 온 것이 아니다. 죄의 결과로 초래한 것은 노동에서 느끼는 고통의 체험, 죽음에서 느끼는 고통의 체험 양식이다. 이것은 꼭 아담과 에와의 원죄가 아니래도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이 죽음이나 엄청난 고통을 체험하면 즉시 떠올리는 것이 지난 날의 자신에 대한 과오나 죄다. ‘이것이 나의 죄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인간이면 누구나 다 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우리가 고통스럽게 겪는 어떤 질병이나 불행은 거의가 자신의 잘못으로부터 기인한다. 아니면 적어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예수님 시대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사고방식을 지녔는데 아주 일반적이었다. 예컨대 어느 태생 소경을 만났을 때, 제자들과 주변의 사람들은 예수께 물었다. ‘저 사람은 자신의 잘못으로 저렇게 고통을 받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의 부모의 잘못으로 저런 고통을 받는 것입니까?’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그 자신의 잘못도, 그의 부모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엔 우리가 아직 알 수 없는 신비가 있다. 우린 솔직히 그 답을 모른다. 카알 라너에 앞서서 우리 교회의 유명한 신학자 로마노 과르디니(Romano Guardini)라는 예수회 신부가 있었다. 그는 죽음에 직면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지금 하느님 대전에 나가 그분이 나에게 질문할 심판에 모든 준비가 다 되어있다. 그런데 나도 심판관이신 하느님께 질문할 것이 한가지가 있다. 왜 무죄한 어린이가 고통을 받아야 했는지 그것을 묻고 싶다’. 분명히 우리들의 많은 고통은 우리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다.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나의 잘못이나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만 해석 될 수 없는 고통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고통에 대해서 이스라엘 사람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교 신학마저도 하느님이 우리를 더욱 성장하도록 교육하시기 위해서라는 해석을 내렸다. 그런 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해석될 수 없는 고통의 신비도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두 그루의 나무; 금령> 또한 동산 중심에 심어져 있는 두 그루의 나무는 기원적인 원형의 성격을 드러내준다. 전승의 이야기에서 생명의 나무는 보다 더 오래된 모형이라는 상당한 가능성을 드러낸다 (2,9; 3,3. 24). 이 생명의 나무는 영원한 생명을 갈구하는 인간의 아주 오랜 옛날부터의 꿈을 표현 한 것이다. 예컨데 길가메쉬라는 고대 바빌론의 서사시에는 길가메쉬라는 영웅이 죽어야 할 인간의 운명에 도전하여 영원한 삶을 얻기 위해 모험을 감행하는 여행을 떠난다. 그는 여러 괴물과 싸운 후에 인간은 결코 죽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대신 젊어지는 어떤 불노초를 바다 깊숙이서 찿아 내지만, 그것도 뱀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신화들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원초적인 영원한 삶에 대한 갈구를 하나의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생명에 관한 나무 이야기가 선과 악을 알게하는, 또 한그루의 나무와 연결되고 있다. 생명, 생존, 지속적인 삶은 지혜나 인식과 연결되고 있다. 이러한 지식의 나무는 창세기에만 나타날 뿐 다른 문헌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 나무가 금령의 나무가 되고 있다. 여기서 인식하는 일이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적어도 지상에 사는 인간을 시험하기 위한 것으로 간주 되고 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요구되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이 나무의 열매를 취하면, 인간에게 매우 비참한 죽음을 결과로 맞이 한다는 필연적인 법의 형식으로 설명되고 있다. 따라서 이방 신화에 나오는 독선적인 신의 질투나 심술, 위협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다. 예컨대 뱀은 하느님을 이방인들의 신화에서 나타나는 신들처럼 인간을 질투하는 것으로 거짓말을 한다. 하느님은 뱀이 사기친 것처럼 인간을 질투해서 금령을 내린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십계명과 마찬가지로 위험물에서 자녀를 보호하려는 아버지의 사랑으로서 인간에게 죽음에서 지키려는 간곡한 경고로서의 금령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금령은 인간의 한계성, 자유의 제한을 뜻한다고 본다.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사랑의 질서를 제시한 것이다. 창조주 하느님은 인간의 조건을 잘 아시기에 인간이 행복하기위해서 지켜야 할 삶의 지표를 주셨다. 인간이 참되게 사는 길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그 뜻을 따르는 데 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은 인간에게 금령을 내림으로써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지켜나가도록 배려 하신 것이다. 흔히 그렇지만 명령은 그렇게 합리적이지 않다. 부모가 어린 아이에게 성냥이나 라이타를 만지지 못하게 한다.날카로운 물건을 나지지못하게 한다. 부모의 생각으로는 아이에게 위험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무조건 하지 말라고 한다. 아이에게는 그것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 절대로 합리적이지 않다. 종교적인 금령에는 대다수가 이러한 종류의 것이다. 이런 금령들이 어떤 권위를 가지고 무조건적으로 부여되는 것들이 많다. 유대인의 돼지고기에 대한 금식, 산모와 신생아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어떤 미신적 이유를 붙인 것들. 부고장 등등.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자유는 방종과 독선으로서 인간 공동체에서도 그렇지만 하느님과도 올바른 관계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 결과는 죽음이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이미 앞서 말한 것처럼, 자연적인 인간의 한계성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그레사케(Gisbelt Gresake)가 말하듯이 이미 삶속에도 질병, 고독, 실패, ,이별, 소외등의 형태로 죽음의 조각이 체험되는 그런 죽음이라는 것이다. 영원한 파멸으로서의 죽음을 의미한다. 이제 동산 한가운데, 곧 우리들의 삶의 중심에서 우리는 생명과 죽음의 팽팽한 긴장관계를 느낀다. 인간은 자신이 받은 자유와 이성을 가지고 선택을,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인간은 자기 실존의 한계선을 분명히 받아들이고 하느님께 전적인 신뢰를 할 것인가? 아니면 뱀의 형상을 한 사탄이 유혹하는 대로 하느님은 질투의 하느님으로서 자신과같이 될까봐 거짓말을 한 사기꾼으로 몰아부치고 자신이 생명의 중심이며 모든 세계의 중심, 세게의 지배자로 자처 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처음 인류인 아담과 에와에게만 부여된 선택이 아니라,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주어진 선택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이런점에서 창세기 설화가 말해 주는 인간 아담은 모든 인간들의 전형이요, 하나의 모델이다. 그런 점에서 그가 인류의 조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공동체> 또 하나의 인간의 원초적인 모형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서로가 하나의 파트너로서 공동체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인간에 관하여 보아야 할 세번째 관점이다. 제관계 자료는 단순히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것만을 이야기한다. 1,28 이하의 축복과 관련해서 여자는 “자식을 낳고 번성하는”일에만 남자와 협조하는 동반자로 보인다. 그러나 야휘스트계는 여성의 존재에 대해 더욱 상세한 것을 전해준다. 아담에게는 동물로도 충분하지가 못했다.동물들 가운데서는 자신의 일을 거들 짝을 찿을 수가 없었다(2,20). 하느님이 보시기에도 인간이 홀로 있다는 것이 좋지 않은 것으로 비쳤다(2,18). 여기서 여자가 창조된다. 그런데 이 여자는 동물들과 남자가 진흙으로 만들어 진것과 달리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 진다. 왜 하필이면 갈비뼈일까? 여기에 대한 해석은 여러가지다. 아랍인들에게는 갈빗대는 절친한 친구를 의미하고, 수메르어에는 갈빗대란 단어에 생명이란 뜻이 들어 있다고 한다. 여기서 남자가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것 역시 글자 그대로 이해될 수 있는 내용이 아닌 것처럼, 갈빗대가 여자를 만든 재료를 가르키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다만 남자와 여자가 서로 어떻게 속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해 주고자 한 목적 때문이었다고 본다. 이것은 뒤 이어 나오는 아담의 환호(2,23)에서 더욱 분명해 진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지아비에게서 나왔으니/ 지어미라 부르리라!”(2,23). 이 骨肉之親이란 표현은 영구적인 관계를 나타낼 때 사용된다. 예컨대 야곱이 형 에사우의 노여움을 피해 외삼촌 라반에게로 도망쳐, 라반이 야곱을 만나 이야기를 하자 자신의 누이 리브가의 아들임을 확인하고는 ‘너야 말로 나의 골육이다’(창세기 29,14)라고 외친다. 판관시대에 왕정제를 꿈구었던 여룹바알(기드온)의 아들 에비멜렉이 외가댁들 찿아가 자신이 그들과 한 ”골육“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도움을 받아 자신의 형제들을 죽이고 왕으로 군림한다(판관 9장). Ish 지아비 (남자)에서 나왔기 때문에 ishah 지어미(여자)라는 것은 어원은 다르지만 발음상 유사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가 서로 유사한 존재라는 것을 뜻한다. 무론 유사성이란 그 이면에 다르다는 차이를 내포하기 마련이다. 비슷하다는 말은 같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리이스 작가 아리스토 파네스(기원전 450-380)의 설명에 의하면 본래 인간은 남녀 한몸으로 4개의 팔, 4개의 다리, 2개의 머리와 4개의 눈과 귀, 두개의 성기를 가졌었는데 제우스 신의 명령으로 둘로 나누어 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나누어진 짝 찿기로해서 남자는 여자에게 이끌리고, 여자는 남자에게 이끌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야휘스트계는 이런 신화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동등하면서도 또 구별되는 것을 이야기하며 서로 보완 되어야만 완전한 인간상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했다.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이 갈빗대를 남녀 동등성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과거 바오로 사도는 남성은 하느님의 모상이요, 여성은 남성의 모상(코린토 11,7-12)으로 변형시켰지만- 이것은 바오로가 노예제도를 인정했던 것처럼, 당시의 사회제도를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인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여성에게는 하느님의 모습이 전혀 없다든가 또는 남성보다는 하느님의 모상에 있어서 부족하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 남성이 하느님의 모상인 만큼, 여성도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된 하느님의 모상인 것이다. 동반자의 의미는 단순히 1차 목적인 생식의 차원만은 분명히 아니다. 여성의 협조는 후손을 낳는 일을 넘어서, 모든 삶의 영역에서의 상호협력적인 도움을 뜻한다. 이러한 상호협력적인 도움에는 대화, 침묵과 활동에 있어서의 모든 상호이해를 포함한다. 여성이 생식의 차원에서만 도움을 준다면 결혼제도라는 것이 의미가 없을 것으로 본다. 창세기 2,23의 아담의 환호성은 인간이 자기 동료를 반겨 맞는 기쁨의 절정의 표현이다. 여기서 하느님이 창조한 인간이 비로소 참으로 인가, 공동체 속에서의 인간이 됨을 말해준다. 또 24절은 후에 덧붙여진 것으로 보이는 바, 두 이성간에 이끌리는 성향,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 보여주는 근본적인 위력을 드러내 준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끌림으로해서 집과 부모를 떠날 만큼, 이 사랑의 위력은 기존의 제도를 압도하기까지 한다는 강력한 결속력을 보여준다. 이 것은 두사람을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여 친밀하게 일치. 결합하게 하는 근본적 위력을 남녀가의 상호간의 사랑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상호간의 사랑은 생활 공동체라고 하는 더 넓은 맥락에 놓여 있다. 서로가 상대방을 위해 상호 도움을 베풀면서 살 수 있을만큼 상대방과 어울리고, 또 상대방에게 응답하는 것이다. 이것이 상호간의 사랑의 본질이다. 어떤 신학자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남녀가 창조 되었다는 귀절을 두고 인류가 서로 사랑을 통하여 보충하면서 살아야만 하느님의 모상일 수 있다고 해석한다. 여기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이란 인간은 서로를 향하도록 창조되어 있고, 남자와 여자가 서로 남편과 아내처럼 보충해줄 때에만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창조의 위탁을 하느님의 모습으로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남여간의 공동체는 인간이 공동체로서 피조물을 통치하고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통치권을 전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