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말 론 (다)

3. 교의사적인 전개
3.1. 고대교회의 종말대망의 변천
이미 신약성서에서 미구에 세상이 완성되리라는 종말론적 희망은 세상의 역사가 계속 진행되는 체험, 종말이 지연되는 듯이 보이는 체험에 직면해서 변화되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 문제는 또한 호교론적 교부들의 숙고의 대상이 되었다.
클레멘스 서간(96년 경)은 곧 세상이 끝날 것을 의심하는 자들에 대해서 언급하며 경고를 한다. “이는 우리가 이미 우리 조상들의 시대에 들었다. 그런데 보아라, 우리는 이미 늙었고 들은 것 중에서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1클레 23,3). 이런 의심에 대해서 (2세기 전반에 쓰여진) 이른바 제2 클레멘스 서간은 단순히 “희망을 간직하고 인내롭게 견디라”(2클레 11,5)는 호소로써 반응한다. 그러나 이와 함께 종말대망를 재해석하기도 한다. 즉 초점은 시간적 가까움이 아니라 주님께서 갑자기, 순식간에 오신다는 것에로 옮겨지고, 그래서 가까운 종말의 기대가 종말을 항상 기다리라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항상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립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타나시는 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2클레 12,1).
주님의 재림의 지연이 긍정적으로 해석되기도 하였다. 즉 의도적으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회개의 기회라는 것이다. 2세기 경의 저술 “목자 헤르마스”는 탑 건설의 환시에서 바로 이렇게 설명한다: 건설 작업은 단지 죄인들이 아직 회개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 그들 이전의 성인들처럼 건물에 사용되기에 적합한 돌이 되도록 지연된다(Hermas III 5,5; IX 14,2. 이와 비슷하게 논거를 2베드 3,9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교회 내부를 향한 설교에서는 종말이 지연되는 것을 죄인들을 위한 회개의 기회로 선포하지만, 주위의 이방인들과의 호교론적 논쟁에서는 다른 논거가 사용되었다. 즉 다가올 파멸을 앞두고 잠정적으로 세상에 부여된 기회라는 것이다. “나는 오직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세상이 아직 지속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아리스티데스(Aristides, 2세기 전반)는 하드리안 황제에게 쓰고 있다(Apol. 16,5). 종말에 대한 두려움이 전면에로 옮겨진 것같이 보인다. 즉 이교도들에게는 세상의 멸망에 대한 두려움, 신자들에게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말해진다. 이렇게 해서 종말이 곧 오기를 청하는 기도(묵시 22,20)에서 종말의 연기를 바라는 청원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희망하는 데에서 그것이 지체되기를 희망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런 변화에 대한 다른 요인은 몬타누스파(Montanist)의 투쟁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은 2세기 후반에 가까이 다가온 그리스도의 재림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엄격하고 예언자적 요구는 반대의 움직임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들은 세상의 종말을 먼 미래로 옮겨놓았다. 예를 들어서 히뽈리뚜스(+235)는 서기 500년에 세말이 올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 주장은 많은 호응을 얻었다.
종말론적 관심은 세상 역사의 완성에서 죽은 이들의 부활에로 옮겨졌다. 이는 (후대에 아주 강하게) 종말의 희망이 피안(彼岸)으로 집중되고 개인화되는 데에 기반을 이루었다. 그에 반해서 미래의 구원이 역사적 성격을 지니고 세상과 관련된다는 점은 신학적으로 도외시된 “천년왕국설”(chiliasm)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었다.

3.2. 천년왕국설
천년왕국설(chiliasm은 희랍어 χιλιοι에서, millennium은 라틴어 mille에서 유래하는데 둘 다 천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은 협의로는 악의 세력과의 마지막 투쟁과 그 이후에 따른 궁극적인 구원의 상태에 앞서서 천년간 지속될 그리스도와 의인들의 통치에 대한 기대를 말한다. 광의로는 세상의 완성 전에 현세의 역사가 하느님에 의해서 이 세상에 이룩된 구원의 시대로 이어진다는 기대를 가르킨다. 이렇게 볼 때 마지막 때에, 그러나 아직 역사 내에서 있을 구원의 시간에 대한 생각이 천년왕국설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이런 상상에 대한 성서적 근거는 요한 묵시록 20장에서 전개된 장면이다: 사탄이 묶이고 순교자들은 다시 살아나서(“이것이 첫째 부활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다스린다. 천년이 지나면 사탄은 다시 풀려 나와 세상의 민족들(“곡과 마곡”)을 미혹케 하여 그들을 모아서 마지막 전쟁을 하러 나와서 “사랑받는 도성”을 포위할 것이다. 그러나 공격자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불로 멸망당하고 유혹자는 불타는 유황못에 던져질 것이다.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의 부활과 모든 이들에 대한 심판이 이어진다. 요한 묵시록은 박해받는 역사의 종말, 악한 세력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기대하면서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고자 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 당하고 앞으로도 당하게 될 두려운 사건에 대한 준비도 시키려고 한다. 묵시록의 저자는 20장에서 자주 그렇게 하듯이 구약성서, 여기서는 특히 에제 37-48에 나타난 여러 주제들을 다시 받아들이고, 그외에도 (요한 묵시록 밖에서도 알려진) 메시아가 천년간 다스릴 것이라는 상상을 사용한다. 요한 묵시록의 저자가 관심을 갖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순교자들을 바라보면서 용기와 희망을 얻는 것이다: 그 순교자들은 다가올 구원의 시간에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육된 이들의 탄식, 부르짖음, 기도가 청허(聽許)되고, 그들에게 지배권이 주어지게 될 것이다.

일부 유다인 출신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예루살렘의 멸망 이후에 가시적인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 세상에 도래할 것이라는 희망을 요한 묵시록 20장의 환시와 연결지었다. 이렇게 천년왕국설에 대한 고대교회의 증언은 무엇보다도 소아시아 영역에서 발견된다. 거기에는 수많은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이 살았고, 또한 거기에 요한 묵시록의 수신인들이 있었다.
교회로부터 이단자라고 단죄된 1세기 말경의 유다 그리스도교인 케린트(Kerinth)는 다가올 현세적 그리스도의 왕국을 아주 향락적-감각적으로 묘사하였는데, 그로 인해서 천년왕국설뿐만 아니라 요한 묵시록 전체가 악평을 받게 되었다(참조: Eusebius, Hist. Eccl. VII 25,1-3).
역시 소아시아 출신인 리용의 이레네오(+ 202년경)에게서 종말론적 역사관은 반 영지주의적으로 강조되었다: 약속들은 비유적으로 해석되어 사라져서는 안되다. 이레네오는 완성의 시간에 해당하는 삶의 조건들(“썩지 않음”)이 미리 앞당겨서 허락될 현세적 구원의 시기가 실제로 도래할 것이라고 보았는데, 이 시기는 궁극적인 영광을 위한 연습, 발전, 성장의 시간이라고 간주하였다. 이레네오에게는 이에 대한 신앙은 죽은 이들의 실제적인(“비유적”이 아니게 이해한) 부활에 대한 희망과 같은 중요성을 지닌다.
“아무것도 비유적으로 해석될 수 없고 모든 것은 참으로, 실제로 의인들의 즐거움을 위해 하느님께로부터 만들어졌다… 인간은 비유적으로가 아니라 진정으로 죽음에서 부활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참으로 부활하는 것처럼 왕국의 시간에는 썩지 않음을 진정 미리 받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자라나고 강하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새로워지면, 그는 진정으로 하느님의 도시에서 머물게 될 것이다”(Adv. Haer. V35,2).
이레네오에게는 기대하고 있는 현세적 그리스도의 나라는 현재의 세상과 미래의 영광을 중재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창조, 구원사 그리고 완성 사이의 일관성이 강하게 강조된다.
지성인으로서 당시의 철학과의 대화에 관심이 많았던 개종자인 라크탄시우스(+317년 이후)는 천년왕국을 묘사하였는데, 여기에서는 구약의 예언에 나타난 표상, 요한 묵시록의 표상들이 그리스-로마의 황금시기에 대한 상상과 연결되고, 동시에 수백년간의 박해시대의 고통의 압박이 표시되어 나타난다.
“…그리스도께서 큰 능력과 함께 내려 오신다…, 하느님을 없신 여기던 수 많은 사람들이 섬멸되고 피가 강물처럼 흐른다. … 그리고 악의 원조이며 주모자인 악마의 두목도 쇠사슬에 채워져 옥에 갇히게 되어서 세상은 평화을 얻고 몇백년간 괴롭힘을 당하던 땅은 평안하게 된다… 이는 의인들의 나라로서 천년간 지속된다. 이 기간동안 별은 더욱 빛나고 태양은 찬란함을 더 하고 달은 줄어들지 않는다. 아침 저녁으로 하느님께서부터 축복의 비가 내린다: 땅은 인간의 수고없이 모든 열매를 생산한다. 꿀이 바위에서 충분하게 방울져 떨어지고 우유와 포도주의 샘이 솟아난다. 들판의 짐승에게는 사나움이 사라지고 온순해진다. 늑대는 양들을 해치지 않고 그들 사이를 거닐고, 송아지가 사자와 함께 자라며, 비둘기는 매와 함께 무리를 이룬다. 뱀에는 더 이상 독이 없다. 어떤 생물도 더 이상 피를 먹고 살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모두에게 풍성하고 무죄한 양식을 마련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년이 지나간 후에 악마의 두목이 다시 풀려나게 되서…”(Epi. 67).
콘스탄티누스의 전환과 함께 천년왕국설은 매력을 잃어버린다. 천년왕국설은 안정된 시대가 아니라 억압 받는 시대에, 역사가 급변하기를 희망하는 박해 시대에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아우구스티노(+430)는 처음에는 천년왕국설에 동조하였으나, “De civitate Dei”(XX7)에서 분명하게 그 입장과 결별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요한 묵시록 20장을 천년왕국설로 해석하는 것에 반대해서 자신의 고유한 해석을 내세웠다: 마지막 세상의 시간은 미래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되었다. 즉 사탄이 힘을 잃은 것은 첫째로 순전히 미래의 일이 아니고 이미 시작되었고 현재에도 계속 일러나고 있으며, 둘째로 이를 어느 한 시각의 일로가 아니라 계속 반복되는 일로 이해해야 하며, 셋째 정치적인 사건이 아니라 개개인의 인격적인 회개와 연관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천년간의 다스림은 현재 진행 중이다. 그러나 “천”이라는 숫자는 글자 그대로가 아니라 완전성에 대한 암호로 알아들어야 한다. 일정한 의미에서는 교회를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영역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섞여서 자라나는 현재의 형태로의 교회는 아직 기다려야 하는 하느님의 나라, “장래의 모습의 교회”(Civ. Dei XX 9)와는 구분된다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그에게 “첫 번째 부활”(묵시 20,5)이란 종말에 있을 두 번째 부활, 즉 죽은 이들의 육신의 부활과는 달리 현세에서 죄에서 회개하는 데에서 이루어지는 “영혼의 부활”(Civ. Dei XX 10)을 의미한다. 이렇게 아우구스티노는 묵시록 20장에 언급된 현세적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유비적, 현재적, 내면적으로 해석하였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리스도의 다스림이 순수한 모습으로는 아니더라도 교회 안에서 역사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그 형태를 드러낸다고 보았다. 이런 의미에서 아우구스티노의 견해를 교회론적 재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물론 여기에는 종말론적 유보(留保)가 곁들여져 있다. 이렇게 해서 천년왕국설은 서방의 신학에서는 잠정적으로 극복되었다.
동방교회에서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신학이 주도하는 한에서 천년왕국설은 두각을 나타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하였다. 천년왕국설은 성서를 자구적으로, 물직적-감성적으로 이해함으로써 가능하게 되는데, 이런 성서 이해는 동방에서 주도적인 오리게네스의 유비적-영성적 성서해석과는 어울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요한묵시록과 친밀한 관계에 있으면서 초기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저술가 파피아스(Papias, +120년 이후)에 대한 에우세비우스의 서술(312년 경)은 마치 천년왕국설과의 최후의 결별처럼 들린다: 파피아스는 “몇가지 특별한 정보들”을 제공하는데, 여기에는 “죽은 이들이 부활한 다음에 천년 동안 그리스도의 나라가 가시적으로 이 세상에 실현된다는 그의 주장도 속해 있다. 내 견해로는 파피아스가 사도들이 들려준 옛 이야기들을 받아였는데, 사도들이 은밀하고 암시적으로 말한 것을 잘못 이해하였다. 그의 말에서 알아볼 수 있듯이 파피아스는 정신적으로 상당히 편협해있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수많은 교회사가들은 그가 단지 오래되었다는 이유에서 이레네오나 같은 사상을 내세운 사람들과 비슷하게 간주하였다”(Hist. Eccl. III 39, 12f).
천년왕국설은 몇 백년이 지난 후 피오레의 요아킴(Joachim von Fiore, +1202)에 의해서 다시 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인 상황은 아주 달라졌다. 고대교회의 천년왕국설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로마 제국의 박해와 영지주의와의 대결이라는 배경에서 주목을 받았지만, 중세에는 교회의 개혁, 청빈을 통한 혁신, 거룩한 교황을 기대하는 가운데에 다시 대두되었다. 요아킴은 구원사와 삼위일체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즉 세계 역사는 연이어서 계속되는 세 단계, 세 나라로 형성된다고 보았다. 첫 번째는 아버지의 나라로서 구약의 시대였고, 두 번째는 구약에서 이미 전사(前史)가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출현한 아들의 나라로서 “베드로”(성직자) 교회의 시대이다. 세 번째는 성령의 나라로서 “요한” 교회의 시대이다. 요아킴은 베네딕또 이래로 수도생활에 전사를 두고 있는 세 번째의 나라가 1269년에 공개적으로 시작될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그러면 “영적” 인간으로 구성된 “영적인” 교회가 다스리게 될 것인데, 그 교회는 온전히 산상수훈에 의해서 움직이고 가난 속에서 살 것이다. 전쟁은 종식을 고하고, 그리스도 신자들 사이의 분열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신자들과 유다인들과의 분열도 극복될 것이다. 이 생각에서 특별히 관심을 끄는 것은 성령신학과 종말론과의 관련이다. 즉 (내적으로) 성령이 강력하게 활동하심으로써 교회가 이루어지고, 이런 방식으로 세상도 변화될 것이다.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요아킴의 삼위일체론이 삼신론적 경향을 띤다는 이유에서 단죄되었다. 그 이후에 요아킴이 내세운 주장에 담긴 성직계에 대한 비판적 요소는 다양한 프란치스코적 운동에서 경쟁적으로 수용되어서 가난에 관한 논쟁과 교회 형태에 대한 격렬한 다툼에서 폭발물처럼 작용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1274)는 아우구스티노를 따르면서 천년왕국설을 이단으로 간주하면서 이를 거부하였다. 이렇게 해서 천년왕국설은 사실상 공식적인 가톨릭 신학 분야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종교개혁 시대에 이르러서 천년왕국설은 “재세례파”에서 다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들은 뮨스터(Münster)에서의 얀 보켈손(Jan Bockelson)의 통치(1534/1535)를 천년왕국의 서막(序幕)이라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무력으로 새로운 시대를 도입하려던 시도는 파국으로 끝나고, 이는 재세례파 내에서의 종말론이 비정치적으로 내면화되는 데에 기여한다.
1530년에 작성된 (루터파의) “아욱스부르크 고백”(Confessio Augustana)은 “죽은 이들이 부활하기 전에 경건한 이들이 현세의 나라를 소유하고 하느님을 적대하는 자들이 도처에서 억압받게 될 것이라는 유다적 견해를 현재 전파하는”(CA 17) 이들을 단죄하였다.
천년왕국설에 관련해서 수백년에 걸친 논쟁은 그리스도교 종말론이 항상 염두해 두어야 할 미해결의 문제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한 편으로 구원사적으로 정향된 신학은 구원의 역사성, 즉 구원사를 통한 세계사의 변화에 대해서 거듭 염려해야만 한다. 고대 교회에서는 주로 유다 그리스도교 전통이 이런 관심사를 대표하였다. 다른 한 편으로는 성서적 해석학은 종말론적 표상들을 자구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경고한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유비적 성서 해석은 바로 이런 의도를 살리고자 하였다.
마지막으로는 특정한 세계 내적인 계획들을 종말론적 희망의 내용과 동일시하던 경향들에 대해서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3.3. 하느님 나라(Civitas Dei)와 땅의 나라(Civitas terrena)
천년왕국설은 무엇보다도 지배자들의 반대편에 서 있는 이들 사이에서 번성한다. 천년왕국설은 박해시대에는 재배관계가 급격히 변화되리라는 희망을 일깨워 지속시켰고, 중세에는 그 당시 형태의 교회에 괴로워하면서 깊이있는 개혁을 갈망하던 이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두 상황에서 공통적인 점은 사회적 구조가 아주 명시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상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실의 잘못된 상황에 거슬러서 세상을 변혁시키는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희망이 형성되었다. 구체적인 고통의 억눌림은 종말론적 희망을 구체적이고 구상적(具象的)으로 만든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자들이 정치적 구조를 스스로 형성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으면 사정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정치, 교회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상관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이 질문은 콘스탄티누스 전환 이래로 제기되었고, 중세 전반에 걸쳐서 중심적인 문제로 머물렀다.
세가지 대답의 시도가 모델로 제시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의 박해의 공포를 스스로 체험하였고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승리를 새로운 구원의 시대의 시작으로 간주하는 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 세 세대 이후에 하느님 나라와 현세적-정치적 지배의 관계를 이와는 달리 숙고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근본적으로 땅의 나라와 구별하였던 아우구스티노, 중세적 교회와 제국의 일치에서 세계사와 구원사가 정점을 이루었다고 보았지만, 또한 이 일치의 붕괴도 소화해 내야했던 프라이싱의 옷토(Otto von Freising)이다.
3.3.1. 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
로마 제국에서 내란과 그리스도교 박해를 실제로 체험하였던 에우세비우스(+340)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승리로써 평화와 세상의 일치 시대, 무엇보다도 교회에 대한 자유의 시대가 시작된다고 보았다. 그는 새로운 교회의 건축과 큰 기쁨 속에서 공개적으로 거행된 그리스도교인들의 축제를 교회가 새롭게 꽃피는 것, 그뿐 아니라 하느님의 영이 새롭게 역사에 스며든다는 상징으로 간주하였다. “멀고도 낯선 땅에서 사람들이 모이고, 민족이 친밀하게 다른 민족에게 인사하며, 그리스도 신비체의 지체들이 서로 결합하여서 완성된 일치를 이룬다… 하느님 영의 능력이 모든 지체들에 스며들었고, 모두는 한마음과 신앙의 기쁨 안에 있었다”(His. Eccl. X 3,1-3). 에우세비우스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과거 예언자들의 약속이 성취된다고 보았다: “늘어진 두 팔에 힘을 주어라. 휘청거리는 두 무릎을 꼿꼿이 세워라. 겁에 질린 자들을 격려하여라.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 말아라. 너희의 하느님께서 원수 갚으로 오신다. 하느님께서 오시어 보복하시고 너희를 구원하신다”(이사 35, 3-4). 에우세비우스는 이러한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자신의 시대에 일어난 사건들과 연관짓는다. “과거에 말씀으로 예고되고 거룩한 책에 기록된 것들을 이제 우리는 ―예언이 성취되었기에― 귀로 듣는 데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체험한다(His. Eccl. X 4,52-33).
그에게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원자이며 평화의 사도, 메시아적 인물로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Vit. Cont. I,3)이라고 불러 마땅하였다. 하느님 친히 콘스탄티누스를 모든 이의 “주인이며 지도자”(I 24)로 뽑으셨다는 것이다. 에우세비우스는 콘스탄티누스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지도자이며 해방자로 임명하신 모세와 비교하였고, 현재의 사건들이 과거 성서에 나타난 구원 역사를 능가한다고 보았다. 콘스탄티누스의 통치 하에서 세계사와 구원사는 정점에 이르렀고, 하느님 나라가 모상적(模像的)으로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에우세비우스는 역사의 전체적인 진행을 하느님께서 인류를 점차적으로 교육시키는 과정으로 보는 낙관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이런 맥락에서 이방인의 로마 제국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로마 제국의 법률과 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가르침과 그분의 교회를 받아들이도록 세상을 준비시켰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서 노선들이 서로 합치된다. 즉 로마의 세계 제국이 그리스도화됨으로써 역사는 완성된다는 것이다.
에우세비우스에게서 세상, 국가, 교회 그리고 하느님의 다스림은 서로 섞여서 구별 할 수 없게 된다. 종말론적 희망은 현재의 콘스탄티누스의 제국과 긴밀하게 결합되었고 그래서 에우세비우스의 입장을 “제국적 종말론”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이런 시각을 박해로부터 해방된 이후의 첫 감격의 표현으로서, 에우세비우스라는 인물을 황제에게 충성하는 국가의 주교, 궁정신학자로 상대화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 교회, 정치적인 지배가 이상적인 경우에 하나로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사실상 크나큰 매력을 지녔고, 그래서 후대의 신학과 정치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3.3.2.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430)의 하느님 나라(Civitas Dei)에 대한 가르침은 에우세비우스의 “제국적 종말론”에 직접적으로 대립되는듯한 인상을 준다. 콘스탄티누스 전환 이후 백년이 흐른 뒤의 시대 상황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콘스탄티누스의 후계자 콘스탄씨우스의 아라아니즘적 정책과 특히 과거의 이교 종교를 다시 허용하려는 율리아노 황제의 시도는 황제와 제국에게 걸었던 기대를 흔들리게 하는데에 기여하였다. 또한 교회 스스로도 변화된 모습을 보였다. 콘스탄티누스 이후 군중들이 교회로 몰려들었다. 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체 치하에서는 그리스도교가 국교(國敎)로 승격되었고, 이로써 순교자의 교회가 특권을 누리는 교회로 바뀌었다. 이런 역할의 변화는 교회의 모습을 상당히 변화시켜서 교회의 융성을 하느님의 다스림과 동일시하던 확신이 더 이상 당연시되지 않았다. 도나뚜스파와 같은 엄격주의자들은 성인들의 참된 교회로 되돌아갈 것을 요구하면서, 박해시대에 신앙에 충실하지 못하였던 이들과 돌아가는 형세를 보고서 교회를 찾아온 기회주의적 신자들을 제거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들 엄격주의자들에 대항해서 아우구스티노는 밀밭의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4-30)를 제시하였다. 즉 교회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넓은 밀밭으로서, 둘의 구별은 마지막 날에야 비로소 이루어질 것이다.
아우구스티노가 “De civitate Dei”를 저술하게된 직접적인 동기는 로마 제국 전체와 수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자의식에 뼈에 사무치게 충격을 준 세계사적인 사건이었다. 즉 410년에 로마가 서(西)고트족에 의해서 점령되고 약탈을 당하였다. 에우세비우스가 그렇게 큰 종말론적 희망과 결부시킨 로마 제국아 야만인들을 저지할 수도, 세계 평화를 보장할 수도 없었다. 로마 제국은 더 이상 하느님의 능력과 충실, 역사 내에서의 하느님의 활동에 대한 상징이 될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거꾸로 되었다. 즉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로마의 멸망은 새로운 종교인 그리스도교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교는 로마와 로마제국으로부터 과거의 제신(諸神)들의 보호를 강탈하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우구스티노는 (413년과 426년) “civitas terrena”에 반대되는 “civitas Dei”에 관한 광범위한 작품을 저술하였다. 중심 개념은 “civitas Dei”는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 하느님의 “도시”, “나라”, “시민”, “시민권” 혹은 하느님의 “지배”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아우구스티노는 광범위한 자신의 저서에서 이 단어를 다양한 의미로 사용한다. 그래서 후대에는 “civitas Dei”라는 말이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해석의 역사가 형성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다음과 같은 것을 확실하게 얘기할 수 있다: Civitas Dei와 Civitas terrena를 결정적으로 구분하는 선(線)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결정적인 것은 사람이 무엇에 의해서 움직이는가 하는 점이다: 하느님 이외의 모든 것, 자기 자신까지도 두 번째 자리에 놓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서 움직이는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여서 하느님을 멸시할 정도에까지 이르는 자기사랑에 의해서 움직이는지 하는 점이다. 첫 번째의 것이 Civitas Dei를, 두 번째의 것이 Civitas terrena를 특징짓는다. 땅의 나라는 지배욕에 의해서, 하느님 나라는 순종과 상호간의 사랑에 의해서 규정된다. 땅의 나라는 세속의 권력자의 강함에 매혹되지만,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을 그의 강함으로서 사랑한다. 땅의 나라는 덧없는 사물들을 신격화하고 거기에 넋을 빼앗기지만, 하느님 나라는 다가올 것을 바라고 희망하면서 산다.
두가지 특징적인 요소들이 중요성을 지닌다. 첫째 요소: “하느님 나라”는 명백히 종말론적 개념이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지금 영원한 구원에로 향하는 도정에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존재하지만, 그러나 이들은 단지 희망하는 이들, 하느님을 없신 여기는 이들 사이에서 순례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비로소 역사의 종말에 있을 심판이 이들에게 궁극적인 승리와 완전한 평화를 선사할 것이다. 완성은 역사 저편에 놓여있는 것이다. 둘째 요소: 하느님 나라의 순례하는 공동체는 어떤 사회적인 집단과도 명백하게 동일시될 수 없다. 물론 두 나라가 특정한 역사적 현상을 통해서 표현된다. 즉 땅의 나라는 카인, 바빌론, 로마를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는 아벨, 이스라엘, 교회를 통해서 대표된다. 그러나 교회와 하느님 나라는 그렇게 간단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누가 악마의 편에 속하고 누가 속하지 않는지… 이것은 이 세상에서는 완전히 숨겨져있다”(Civ. Dei XX 7). 왜냐하면 아무도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넘어지지 않을지, 넘어져 있는 듯이 보이는 사람이 일어서지는 않을지”(XX 7)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De civitate Dei”에서 경우에 따라 두 개념의 의미가 변화된다. “땅의 나라”는 “현세적 국가”와 가까운 뜻으로 되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에 이 단어의 명백히 부정적인 의미는 사라지고 가치 중립적으로 된다. 이런 맥락 속에서 “하느님 나라”는 국가와 대조되는 교회를 표현하는 말이 된다.
아우구스티노는 구원역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현재의 역사는 두 가지 지배 영역의 병립(竝立), 혹은 대립을 통해서 규정된다. 이미 인류가 시작되면서 천사들의 일부가 부정적인 결단을 내림으로써 이런 병립이 시작되었다. 아담의 죄를 통해서 인류가 나뉘어지게 되었다. 이런 분열은 서로 대립되는 형제인 카인과 아벨에게서 드러난다. 구약에서 하느님 백성이 설립됨으로써 “하느님 나라”가 분명하게 등장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땅의 나라”는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그러나 두 나라가 결정적으로 분리되는 것은 최후의 심판 때에야 가능하다. 그러면 “하느님 나라”의 시민은 하느님을 바라보고 사랑하면서 온전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고, “땅의 나라” 시민은 최종적인 불행 속에 잠겨버릴 것이다. 그때까지는 결정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아우구스티노는 에우세비우스에게서 나타나는 낙관적인 역사관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점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역사 내적인 사건과 가치에 집착하지 말고 역사를 종결짓는 심판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이 세상 사물을 잠정적인 것으로 인식해서, 그 사물들을 “사용”하지만 최종적인 가치로서 “향유”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아우구스티노에게서는 현재와 갈망하는 미래 사이의 긴장이 에우세비우스에게서보다 아주 더 분명하게 강조된다. 그러나 이와 함께 아우구스티노가 ―성서의 내용을 기준으로 할 때― 그리스도교의 종말희망이 상당히 내면화, 탈(脫)세계화되도록 촉진하지 않았는가, 비판적으로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점은 중세에 하느님의 다스림을 순전히 정치적으로 해석해서 교회와 그리스도교적 제국(帝國)의 지배와 동일시하였을 때 (아마도 앞에서 언급한 개념의 불확실성 때문에) 바로 아우구스티노를 근거로 끌어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전형적인 예는 프라이싱의 옷토가 저술한 세계 연대기(年代記)에서 발견된다.
3.3.3. 프라이싱의 옷토
프라이싱의 옷토(+1158)는 세상 전체가 거의 다 그리스도화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유다인과 이교도들”이 “하느님 앞에서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해서도 별 의미가 없는” 미미한 존재로서 살아간다고 보았다(Chronica V, 서문). 그의 세계관은 수백년동안 때로는 긴장 속에서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긍정적으로 지속되어온 교회와 세상 권력과의 협력적 관계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이 협력 관계는 황제와 교황과의 관계에서 실현되고, 또한 옷토 자신에게서도 구현되었다. 그는 하인리히 4세 황제의 손자이며 프리드리히 3세 왕의 이복 형제로서 시토회 수사이며 프라이싱의 주교였다. 그러나 그가 최근에 겪은 사건은 그의 세계관을 철저히 의문에 처하게 하였다. 즉 하인리히 4세 황제와 교황 그레고리오 7세 사이에 있었던 임직권(任職權) 논쟁으로서, 그 과정에서 1076년 황제가 교황에게 파문을 당했다. 옷토에게는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사건이었다.
1143-1146년 사이에 저술된 옷토의 세계 연대기는 “Historia de duabus civitatibus”(두 나라의 역사)라는 부제(副題)가 붙여졌는데, 이는 아우구스티노의 “De civitate Dei”를 연상시킨다. 저자 역시 아우구스티노를 모범으로 삼았다고 분명하게 밝혔고, 아우구스티노의 용어를 도처에서 나타난다. “두 나라가 존재하는데, 일시적인 나라와 영원한 나라, 지상의 나라와 천상의 나라, 악마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 가톨릭 저술가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바빌론과 예루살렘이 그것이다”(서문). 그러나 내용상으로 옷토는 세계사와 구원사를 아주 밀접하게 연결지었고, 그래서 그의 구상은 아우구스티노보다는 에우세비우스에 더 가깝다고 하겠다.
에우세비우스와 마찬가지로 옷토도 콘스탄티누스의 전환을 경축한다: “하느님을 없신 여기는 자들과 박해자들은 땅에서 근절되고, 의로운 이들은 억압에서 풀려났으며, 구름은 몰려나고 찬란한 햇살이 세상 도처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비추기 시작하였다”(Chronica IV 3). 또한 에우세비우스처럼 콘스탄티누스 시대를 성서에 나타난 옛 약속의 성취로 보았다. 하느님의 인도(여기에는 교육적인 훈육 수단으로서 당신 백성에게 일시적으로 굴욕을 주는 것도 포함된다)에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혹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자라난다. 한 노선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다른 노선은 이교도의 로마를 통해서 지나간다. “내가 믿기로는, 로마라는 나라가 비천하고 미약한데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높아져서 홀로 다스리게 된 것은 어떤 우연의 소산이거나 여러 잡신들을 섬긴 덕택이 아니라 첨된 하느님에게서 기인한 것이다”(III, 서문). 하느님 스스로 당신의 나라를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이방인들 사이에로 옮겨 놓으셨고, 마침내 로마 황제의 개종을 통해서 교회를 권세의 정상에로 인도하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나라에 대한 최상의 현세적 지배권을 교회에 위임하셨다”(IV 4). 옷토에게 이러한 교회의 상승은 “그리스도의 나라”의 상승과 동일하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나라는 점진적으로 자라났고 마침내 최고의 정상에 이르러서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IV 4). 하느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늘의 신으로서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주님으로서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해서”(IV 4) 이를 행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보다시피 그에게 약속된 모든 것, 불멸성 이외의 모든 것을 이미 현세에서 받았다”(IV 4).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 이후 “모든 백성만이 아니라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든 제후들이 가톨릭 신자였을 때”를 되돌이켜 보면서 옷토는 “더 이상 두 나라가 아니라 거의 유일한 나라의 역사”를 서술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이 나라를 “교회”라고 일컬었는데, 그 안에는 “밀과 가라지”가 뒤섞여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V, 서문).
그러나 옷토는 “하느님 나라”와 “땅의 나라”의 구분에 의존해서 역사의 진행을 세분할 수 있었다: 세상의 역사는 정치적 지배의 역사로서 지속적인 변화, 여러 나라들의 거듭되는 부침(浮沈)의 역사로 표현된다. 여기서 “모든 세속적인 것들의 무상(無常)함과 세상의 흐름이 불안정하게 흔들린다는 것”(Chronica IV 31)이 드러난다. 그러나 세계사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향상(向上), 발전한다. 이는 구체적으로 교회의 영향력이 증가하는 데에서, 그리고 세속적 권력의 의미가 감소하는 데에서 드러난다. (옷토가 생각하기에 가까이 다가온) 최후의 심판은 이런 발전을 완성할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나라는 “최고의 행복에로 상승될 것”이고, “버림받은 나라”는 “극도의 비참함 속에 잠겨버릴 것”이다(VIII, 서문).
옷토는 수도 생활을 종말론적 완성 전의 마지막 단계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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