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 제2부-(마)

4.6.2.3. 상호관계성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일방적이 아니라 큰 맥락에서 상호 관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죽은 이들을 사랑 안에서 기억하는 것은 성인들의 통공(Communio Sanctorum)이라고 부르는 공동체적 삶의 한 단면일 뿐이다. 성인들의 통공에 대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께서 오실 때까지는 “주의 제자들 중 어떤 이는 세상 여정에 남아 있고 어떤 이는 죽어 단련을 받고 어떤 이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슴을 실제로 뵈오며’ 영광을 누리고 잇으나 우리는 모두 다 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안에서 서로 다른 정도와 방법으로 교류(交流)하고 있으며 우리 하느님께 같은 영광의 찬미가를 노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속하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고 한 교뢰를 이루며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에페 4,16).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평화 속에 고이 잠들어 있는 형제들과 지상 여정의 형제들 사이의 결합이 죽음으로써 서로 중단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영신적 보화의 교류로 말미암아 더욱 강해진다는 것이 교회의 변함없는 신앙이다”(교회헌장 49).
이렇게 볼 때 죽은 이들을 위한 살아 있는 이들의 기도만이 아니라 죽은 이들의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한 죽은 이들의 기도, 그리고 살아 있는 이들이 죽은 이들에게 말하는 것과 죽은 이들이 산이들에게 말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겠다.
산 이와 죽은 이들의 통교를 믿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죽은 혼을 불러내어 이야기한다는 일종의 영교술(靈交術)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둘 사이의 차이는 죽은 이들이 살아 있는 이들의 삶에 참여하고, 산이와 죽은 이들 사이에 생동적이고 실제적인 관계가 있다는 확신에 있지 않다. 그리스도교 신앙도 영교술도 모두 이를 받아들인다. 차이는 이 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현하느냐에 있다. (1) 그리스도교의 이해에 따르면 죽은 이들과의 접촉은 어떤 기술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느님을 대상으로 한 마술적 실천은 물론 죽은 이들을 대상으로 한 마술적 실천도 금지되어 있다. 죽은 이들과의 접촉을 위한 그리스도교적 “매개물”은 신앙 안에서의 기도, 다시 말해서 알수 없는 신비에로 인도되는 신뢰의 행동이다. (2)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죽은 이들이 산 이들에게 갖는 관심이 물리적 현상으로(예를 들어 음성 녹음) 객관화시킬 수 없다고 본다. 죽은 이들의 현존과 근접은 하느님의 숨어계심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신앙만이 죽은 이들의 근접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4.6.3. 부설 2: 환생?
환생설이 그리스도교의 종말론과 부합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정화라는 주제와 연결될 가능성이 있기에 여기에서 논하게 된 것이다.
에집트, 고대 그리스, 영지주의의 일부, 인도의 종교들을 거쳐서 최근에까지 지속되는 환생설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영혼, 혹은 자아가 죽은 다음에 다른 육체로 태어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환생설의 기반이 되는 것은 업(業)이라는 개념이다. 즉 오늘날 내 삶의 운명은 내 전생의 좋은 혹은 잘못된 행동의 결과이고, 현재의 행동은 다음 생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힌두교와 불교에서는 환생을 무거운 짐으로 보면서 환생의 종결로서의 구원을 희망한다. 환생을 종결하고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잘못된 행동으로 인한 업을 착한 행실로 상쇄(相殺)해야 하는데,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교가 주장하는 구원에 이르는 정화의 필요성과 비교될 수 있다. 그렇다면 가톨릭의 종말론이 가르치는 죽은 후의 정화를 환생이라는 상상의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칼 라너는 이에 대해서 약간의 개방성을 보인다. “고풍스럽게 여겨지는 가톨릭 교회에서의 ‘중간상태’라는 상상이 어쩌면 동양의 여러 문화권에 유포되어 당연하게 간주되는 가르침인 ‘영혼의 이주(移住)’, ‘환생’과 좀더 낫게, 긍정적으로 관계할 수있는 실마리가 주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단, 적어도 그러한 환생이 결코 중단되지 않고 시간적으로 항상 계속되는 인간의 운명이라고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K.Rahner, Grundkurs des Glaubens, Freiburg, 1976, 425.

라너가 전제로 내걸은 조건은 그리스도교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다. 즉 인간 삶은 영원한 반복이 아니라 목표를 향해서 정향된 일회적인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대략 4가지 이유를 내세워서 환생설을 거부한다. (1) 환생설은 인간 삶의 유일회적인 의미와 진지함을 감소한다. (2) 환생설은 그리스도교의 희망이 지닌 방향적 구조, 즉 같은 것의 반복이 아니라 목표를 향한 역사에 희망을 두는 것과 대치된다. (3) 환생설은 육체와 영혼의 일체성을 해체시킨다. (4) 자신의 업을 반드시 남김 없이 소멸해야한다는 데에서 출발하는 환생설은 종말의 완성이 지닌 선물의 성격에 대한 여지가 없다. 인간의 완성과 이를 위한 정화에서 비록 인간이 행동의 주체로 등장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은총이다. 그리스도교 이해에 따르면 인간의 완성을 희망할 수 있는 근거는 정체 불명의 우주적 법칙이 아니라 인격적인 하느님이시다.
교황청의 국제신학위원회는 최근 종말론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와 비슷한 반대 논거를 제시한다. 우선 환생이론을 “성서와 그리스도교 전승을 직접적으로 거스리는 이방인 사상의 유아(幼兒)” Commission Theologica Internationalis, “De quibusdam quaestionibus actualibus circa eschatologiam”, in: Gregorianum Vol. 73/3, 1992, 426.
라고 규정짓고., 이 이론을 거부하는 이유로 다음 네 가지를 들고 있다. (1) 이 이론은 반복할 수 없는 유일회적인 삶을 거부하고 있다. (2) 무한히 반복되는 윤회로써 영원한 벌과 영원한 행복을 거부하고 있다. (3) 자신의 공과 벌을 철저하게 자신의 처지에서 정화해야 하는 입장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속과 하느님의 은통의 여지를 박탈하고 있다. (4) 영혼을 본질적으로 물질적인 육체로부터 멀리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참조: 위의 글, 427-428.


4.7. 결정적 실패의 가능성
영원한 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종말론에 큰 부담을 안겨준다. 영원한 벌이란 말은 과거에 많이 남용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적 미래의 전망이 두려움과 공포로 물들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 실패의 가능성은 그리스도교 종말론에 속한다. 하지만 신앙의 직접적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희망을 표현하는 어두운 배경으로서 말이다.
4.7.1. “지옥”이란?
예수는 자신을 영원히 상실(裳失)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경고한다. 공관복음서(특히 마태오)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는 이와 관련해서 그 당시의 묵시문학의 표상들을 사용한다. “불”(마태 5,22; 13,42; 18,8; 25,41; 마르 9,43.48). “어두움”(마태 8,12; 22.13; 25,30). “울부짓고 이를 갈음”(마태 8,12; 13,42.50; 22.13; 24,51; 25,30; 루가 13,28).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묵시문학이 “지옥”에 대해서 공상적이고 무시무시하게 묘사하는 것과는 달리 신약성서는 꾸밈이 없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러면 신약성서에 나타난 표상들만이라도 글자그대로의 정확한 정보라고 받아들일 것인가? 표상들이 서로가 모순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서 불과 극도의 어두움이 그런 경우다. 또한 예수는 그가 경고하는 위험을 표현하기 위해서 전혀 다른 표상들, 예컨대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고통이라는 표상이 아니라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것, 잔치에서 쫓겨나 바깥에 머무른다(마태 25,1-13; 루가 14,16-24)는 표상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 지적들은 여기서 말해지는 위험을 가볍게 보려는 것이 아니라, 표상은 표상으로 인식하면서 표상이 의도하는 본래의 내용을 알아내자는 것이다.
전통 신학에서는 지옥벌의 본질을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직관하는 것(혹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관계)에서 제외되는 것으로 보았다. 지옥은 모든 공동체로부터 배척되는 것이다. 이런 배척은 -이미 앞에서 죄에 대한 벌과 관련해서 살펴보았듯이- 외부에서 가해지는 벌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죄스러운 행동으로 스스로 만들어낸 불행한 상황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모든 사랑을 지속적으로 철저히 거부함으로써 결국에는 전혀 사랑할 수 없도록 뒤틀려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사람은 하느님과 자신의 이웃은 물론 자기 자신 마저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 인간은 속속들이 사랑하도록 규정된 존재이기에 이런 상황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이다. 그러므로 “사랑에서의 제외”라는 말보다는 “사랑의 불능(不能)”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고 하겠다. 물론 이런 불능은 당사자 자신이 자유롭게 결단한 삶의 역사에서 형성된 것이다.
짱 뽈 사르뜨르(Jean-Paul Sartres)의 드라마 “닫혀진 문(Huis clos)”에는 서로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서로 떨어지지도 못하고, 적어도 서로 성가시지 않게 하지도 못하면서 함께 살아야만 하는 인간들이 등장한다. 드라마의 거의 끝부분에서 가리용(Garion)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바로 지옥이다. 난 결코 생각하재 못했던 바이다… 여러분들 기억해 두십시오. 유황, 불, 장작 더미, 불에 굽는 석쇠… 농담도! 어떤 석쇠도 필요없어, 지옥,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들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상응하는 의미로 말하자면, 지옥 그것은 내 자신이다. 사랑에 굶주리지만 동시에 사랑할 능력이 없는 나 자신이 바로 지옥인 것이다.
여기서 인간이 현재 함께 살면서 발견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해서 말한 것은 어떤 의도가 있기 때문다. 즉 지옥에 대한 언급은 일차적으로 저 세상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의 전망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어떤 태도를 통해서 “세상에서의 지옥”을 만들 수 있는가를 발견하고 이런 태도로서 삶이 굳어지지 않기를 경고하기 위해서 지옥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심판하시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라는 표상으로 돌아가서 “영원한 벌”을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다고 하겠다. ‘내가 그리스도 앞에 서 있지만, 그분의 사랑하는 시선을 내 안에 받아들일 능력이 전혀 없게 되었다. 변화될 수 없을 정도로 내 자신 너무 굳고 차가워졌고, 이것이 원래의 내 자신을 파멸시킨다는 것을 명백히 보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머무른다.’ 혹은 천상 예루살렘이라는 표상으로 바꾸어서 표현하자면: 복된 사람들의 도시 한 가운데에 나도 살고 있으면서 행복한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을 개방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지, 하느님의 사랑으로 지탱되어 가는지를 본다. 동시에 내 자신은 영원히 자신 안에 갖혀서 이기주의적으로 다른 이들을 거부하면서 머무르는 것을 본다. 비록 이런 것이 무한하게 나를 괴롭게 만들지만.
4.7.2. “지옥”이 실제로 있을까?
이렇게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지옥으로 만들어서 영원히 지속할 수가 있을까?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가 인간의 저항에 부딪쳐서 결정적으로 실패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그렇게 쉽지 않은데, 그 이유는 성서의 증언 자체가 일치를 이루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성서는 다가올 심판의 심각성을 경고하고(I. 2.5.; II.4.5. 참조) 영원히 자신을 상실할 위험에 대해서 경고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 의지(1디모 2,4)에 대한 말씀, 하느님의 아들이 파견된 목적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말씀(요한 3,17), 하느님께서 마침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1고린 15,28)이 되실 것이라는 말씀이 발견된다. 이 두 진술 간의 긴장은 후대의 신학 역사에서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현대 신학에서도 이 긴장을 해소시키지는 못하였다. 성서에 나타난 엄중한 경고들, 세상 종말은 심판이 아니라 창조계의 복원이 이루어져서 모든 것이 화해한다는 만물회복설에 대한 교회의 단죄(3.1.2. 참조) 그리고 인간이 자신을 파멸시킬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궁극적으로는 모든 이들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또한 심리적으로도 무죄하게 핍박과 고문, 학살 당한 이들의 편에 선다면 그렇게 쉽고 간단하게 모든 이들이 구원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잔혹했던 나치 정권의 창시자인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의 희생자들이 하늘에 함께 있다는 것이 과연 강제수용소에서 고통 당했던 이들에게 희망적 내용이 될 수 있을까? 광주 사태에서 너무도 어이없고 억울하게 학살 당한 이들과 그 사건의 주모자들이 함께 복락을 누린다면? 무고한 희생자들의 입장에서는 결국에는 정의를 이룩하는 심판이 만물의 화해보다는 더 희망을 주지 않을까? 성서는 바로 이런 무고한 희생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라고 촉구하지 않는가? 예를 들어서 창세기에서 하느님은 무고하게 죽은 아벨의 편에 서서 카인을 심판하지 않는가?
그러나 다른 한편 원수를 위해 사랑하고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며(마태 6,44), 실제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던 예수(루가 23,34: 스테파노도 이와 비슷하게 행동하였다: 사도 7,60)가 심판자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가 복음에서 예수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에서 출발한다면 인간이 결정적으로 사랑에서 제외된다는 것이 그에게는 실패를 뜻하지 않을까? 또한 성인들의 행복은 성공적인 사랑에 있다고 할 때 단죄 받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을까? 살인자의 어머니가 그의 아들이 결정적이며 그리고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 속에 머무는데도 하늘에서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지옥에서 끝없이 괴로움을 당하는 이들이 있는데 천국에서 과연 홀로 기뻐할 수 있을까?
전통 신학에서는 이런 질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마지막에는 정의가 자비 위에 서고, 바로 이런 정의의 승리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며, 하늘에 있는 복된 이들은 하느님의 뜻에 가득 차서 이런 것을 보고 행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의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가치질서가 성서적 하느님 신앙과 일치하는가? 이미 구약성서에 나타난 예언자들의 심판 설교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은 정의를 무조건 관철하는 데에 목표를 두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의 정화와 구원에 목표를 두었다. “용서”는 약속으로 점철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점점 더 중요한 내용이 되었다. 또한 신약성서는 상당 부분이 하느님의 용서를 믿으라는 촉구, 하느님은 아무런 조건을 내세우지 않고 탕자의 귀환을 기뻐하는 자비로운 분이라는 것을 믿으라는 촉구, 그리고 이에 상응해서 제자들도 무한히 용서하고 화해할 자세를 갖추라는 권유(루가 15,11-32, 특히 25-32; 마태 5,23-24; 6,12-15; 18.21-22)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하느님 이해와 천상복락은 죄인이 자신이 받아 마땅한 벌을 받으면서 고통당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서로 어울릴 수 있을까?
이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원한 멸망을 당하는 사람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고 또 주장해야만 하는가? 앞에 말한 관점들이 이에 반대되는 논거를 제시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영벌을 받는 이들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고 또 주장해야만 하는가? 하지만 이는 성서에 나타난 멸망할 수 있다는 경고의 심각성을 은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한마디로 대답하기가 어렵고 다음과 같은 복합적인 대답만이 가능하다. 한편으로 그리스도인은 모든 인간의 구원과 영복을 희망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시에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영원한 멸망의 실제적 가능성을 예기(豫期)해야 한다. 첫 번째의 것을 거부하면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을 의문에 처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두 번째의 것을 부정하면 어리석게도 자신의 구원이 안전하다고 믿게 되는데, 이는 성서와 전통이 경고하는 바이다. 실천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 둘은 인간의 자유로운 결단과 하느님의 은총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을 촉구한다. 그래서 자신의 자유로운 결단이 한없이 중대하다는 것을 경시할 위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구원이 처음부터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경고한다. 또한 자신의 자유로운 결단이 한없이 중대하다는 것 때문에 좌절할 위험에 있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자비가 한계가 없다는 격려를 의미한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에 대한 진술은 같은 차원에 놓여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천국을 믿는다. 하지만 이와 동등한 차원에서 지옥을 믿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신약성서 여러 곳에서 상징적 언어로 긍정된 ‘지옥벌(불)의 영원성’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에 종속” H.Küng, Ewiges Leben?, München, 1982, 182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천국에 관한 진술과 지옥에 관한 진술을 그리스도교적 종말론에서 동일한 선상에 위치하는 진술이라고 간주할 필요가 없다”. K.Rahner, Grundkurs des Glaubens, Freiburg, 1976, 418.
이런 점은 교회의 시성(諡聖) 실천을 통해서도 표현된다. 교회는 수많은 이들이 성인으로서 하느님과 함께 있다고 공적으로 선포한다. 그러나 교회는 단 한 사람이라도 어느 누가 영원한 멸망의 대상이라고는 선포하지 않았다.

4.8. 완성
4.8.1. 모든 약속들의 성취
모든 그리스교적 희망의 목표는 하느님 안에서 완성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희망의 내용을 다시 열거해야 한다. (1) 예언자들의 옛 약속들: 죽음을 넘어선 미래(처음에는 후손이 지속되는 데에서 이 약속이 성취된다고 보았다); 땅, 고향, 안전함, 평화; 보호, 용서, 생명을 주는 하느님과의 가까움, (2) 묵시문학에서 기대하던 전환: 고통, 아픔, 불의에서의 해방, 죽은 이들의 부활, (3)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뜻이 두루 다스리는 세상으로서 인간은 평화 안에서 서로 친교를 이루고 내적, 외적으로 행복하게 되는 곳, (2) 예수 그리스도의 강력하고 영구한 현존 등이 하느님 안에서 이룩되는 완성을 표현한다.
4.8.2. 궁극적 완성에 대한 표상들
추상적인 개념보다는 성서가 제시하는 표상(그림)들을 통해서 종말의 완성을 설명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1) “하늘”은 성서적으로 단지 물리적인 천공(天空)이 아니라 하느님이 거하시는 곳의 상징으로서, 하늘로 간다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과 함께 한다, 하느님과 일치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2) “혼인잔치”는 하느님께서 사랑 안에서 다가오시는 것과 이를 통해 체험하는 한없는 기쁨을 말한다. (3) “큰 잔치”는 선사받음, 배부름, 세상이 주는 좋은 것을 즐길 수 있음을 표현하는 것외에도 식사하는 사람들간의 화해, 관심, 우정, 서로에게 느끼는 기쁨을 말한다. (4) “낙원”은 풍요로움과 평화 속의 공존을 의미한다. (5) “새 예루살렘”은 안정된 거주, 백성들 서로의 만남, 두려움 없이 이루어지는 친교를 상징한다. (6) 예수의 병자의 치유는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이기에 이 또한 종말 완성을 묘사한다. 즉 사랑에 가득찬 하느님의 배려 안에서 모든 인간이 건강하고 온전하게 되어서, 똑바로 걷고, 제대로 보며 듣고 말할 수 있게 된다. 하느님은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다 씻어 주실 것이다. 더 이상 죽음도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묵시 21,4).

4.8.3. 영원한 삶
사도신경은 종말의 완성을 “영원한 삶”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신앙생활에서 자주 사용되는 이 용어는 설명이 필요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영원을 흔히 시간이 끝없이 지속되는 것으로 상상하고, 그래서 영원한 삶이란 시간적으로 제약된 지상 생애가 끝나면 비로소 시작되는 -천국에서든 지옥에서든- 시간적으로 무한히 연장되는 삶이라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하고, 어떤 이들에게는 지루하다는 인상까지 준다. 무엇보다도 이런 상상은 성서와 전통에서 “삶”과 “영원”이 뜻하는 바와 부합하지 않는다.
성서에서 “삶”이란 “단지 목숨만 부지하는 것 그 이상을 의미한다… 성서적 삶의 개념은…질적인 면에서의 충만함을 뜻한다. 삶이란 단지 오랜 시간만을 말하지 않고 건강, 부(富), 행복이 그에 속한다. 병은 죽음을, 병으로부터의 회복은 삶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삶은 빛, 평화, 행복, 자기 땅에 안주(安住)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삶은 이 귀중한 모든 것들을 합친 것이다”. E.Schmitt, Leben, in: BThW, 742.
신약성서, 특히 요한계 문헌에서 “삶”과 “영원한 삶”이란 단어는 사실상 “하느님 나라”와 같은 내용이다. 하느님 나라와 마찬가지로 영원한 삶도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인 것이다. 단지 관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즉 “하느님 나라”라는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자라나는 새로운 세계에 초점을 두고, “삶” 그리고 “영원한 삶”이라는 개념은 이 새로운 세상에 참여한 개개인의 실존을 가리킨다. “영원”이라는 속성은 본래적 의미로는 오지 하느님께만 해당한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에 부딪치지만, 하느님은 어떤 제한도 받지 않는다(예를 들어서 이사 40,28-31; 41,4; 43,10). 그러므로 인간에게 영원한 삶이란 하느님께 속한 충만한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영원함”은 일차적으로 시간의 지속이 아니라 삶의 질과 관련된다. 서방신학에서 영원성에 대한 고전적 정의를 내린 보에시우스(Boethius)도 바로 이런 의미로 얘기하고 있다. “영원성은 제약 없는 삶을 전적이며 완전하게 소유하는 것이다”(Aeternitas est interminabilis vitae tota et perfecta possessio).
“영원한 삶”은 일차적으로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질(質)적인 개념이다. 이 개념은 충만한 삶, 무한한 행복을 뜻하는데, 이 행복은 단편적이고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이미 현재를 살아가면서 얻는 좋은 체험 안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영원한 삶은 지상의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안에서 시작된다. 영원한 삶은 현재의 삶을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완성이다. 그러므로 “완성”은 삶의 끝, 종결, 정지가 아니라 삶의 강화(强化), 최고도화(最高度化), 충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조직신학은 여러 관점에서 완성이 뜻하는 내용을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인간학적 관점에서는 “영원한 삶”이란 개념의 해석과 관련 지어서 생각한다: 완성에 대한 희망은 충만하고 성공적인 삶에 대한 희망을 뜻하는데, 그 성공적인 삶이란 바로 성공적인 사랑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의 이해에 따르면 최고로 강화된 삶은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를 암시하는 것이 성서적 희망의 표상 안에 자주 나타나는 통교적(通交的) 요소, 즉 혼인잔치, 식사, 낙원, 도시 등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완성은 오직 인류 전체의 완성과 연관지어서만 생각할 수 있다.
그리스도론적 관점은 그리스도 재림의 주제에서 출발한다. 숨겨진 그리스도의 현존이 밝게 드러나서 세상을 변화시킨다: 나자렛 예수가 알려주고 시작한 하느님 나라는 모든 것을 채워주는 실제가 된다. 그래서 치유하고, 모으며, 화해시키는 지상 예수의 행동은 종말론적 희망의 표상이 된다.
성령론적 관점에서는 우선 성령을 통한 부활(로마 8,11; 2.8.3. 참조)이라는 성서적 주제를 상기시킨다: 부활은 비록 전적으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인간 안에서 작용하셔서 인간을 내적으로부터 살리심으로써 일어난다. 이런 관점은 영원한 삶이 단순히 외부로부터 인간에게 부여된 낯설고 모호한 행복이 아니라 이미 인간 안에 있는 삶의 완성을 의미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혀준다.
또한 성령론적 관점은 종말의 완성의 공동체적 성격에 눈을 돌리게 한다. 하느님의 영은 인간을 모으고, 서로 마음을 열도록 하며, 공동체를 이루는 능력(사도 2,1-11; 로마 5,5)으로서 작용한다. 끝으로 이 관점은 우주론적 전망에로 이끈다: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서” 다스리실 것이다(1고린 15,28). 미래의 세상은 전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두루 다르림을 받을 것이고 그의 영에 의해서 변화될 것이다.
신론적 관점은 하느님 스스로 완성을 이루실 뿐만아니라 그분 자신이 완성의 “내용”이라는 점을 밝혀준다. 전통 신학에서는 종말의 완성에 이르렀을 때 다른 모든 행복의 근거가 되는 본질적인 행복은 하느님을 뵙는 것(visio Dei)라고 주장하였다. 전통 신학의 이런 주장은 성서의 표상에 의존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실제 모습 그대로 뵈올 것”(1요한 3,2)이고, “얼굴과 얼굴을 바주 대할 것”(1고린 13,12; 참조: 출애 33,20)이다. “본다”는 것은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을 의미하고, 이 체험은 최상을 기쁨을 준다.

4.8.4. 세상의 완성 안에서의 개인의 완성
하느님을 뵙고 기뻐한다고 해서 세상과 관계되는 모든 것을 잊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와는 달리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피조물이 지니던 희망이 성취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1) 다른 사람들과의 친교: 헤어진 이들을 다시 만나고, 지금까지 멀리 지내던 이들과 가깝게 되어서 성공적인 친교가 이루어진다. (2) 개인의 정체성과 온전성의 성취: 자기 소외에서 해방되어서 본래의 자신이 되며, 온갖 방해와 훼손에서 벗어나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고, 채워지지 않은 희망과 너무 일찍 중단된 삶이 마침내 성취에 이르게 된다. (3)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고 완성된 세상에 대한 기쁨.
이런 모든 희망의 내용을 요약할 수 있는 개념은 성서에 나타난 포괄적 의미로서의 “평화”(히브리 말로 “shalom”)이다. 샬롬은 인간과 하느님 간의 온전한 관계, 모든 생물들 간의 온전한 관계, 인간과 다른 인간, 여러 민족들, 인간과 자연, 자연 내부, 한 인간과 자기 자신 간의 온전한 관계를 말한다. 여기서 이미 여러 가지 성서적 표상들과 조직신학적 관점들에게서 드러난 것이 다시 한 번 분명해진다. 즉 개개인을 위한 희망은 인류 역사 전체를 위한 희망과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이고 사랑을 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개인의 완성은 다른 사람들의 완성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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