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관의 여러 모델-봉사자로서의 교회(Servant)

4. 봉사자로서의 교회(Servant)

우리가 살펴본 이상의 세 가지 교회관(공의회의 교회관도)은 교회 내적인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다. 제도적 교회관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권위로서 가르치고 성화하고 통치한다. 공동체적 교회관에서 교회는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는 하느님의 백성이나 그리스도의 몸으로 간주된다. 성사적 교회관에서 교회는 인간공동체 안에서 볼 수 있는 그리스도 은총의 표명으로 본다. 복음선포적 교회관에서 교회는 세계가 겸손 되이 들어야 하는 메시지, 복음을 선포하는 권위적 역할을 맡고 있다. 여기서 교회는 능동적 주체로 나타나고 세계는 교회가 영향을 미쳐야 할 대상으로 등장한다. 하느님에 의해서 설립된 교회는 하느님과 세계의 중재자로 드러난다. 하느님은 교회를 통해서 세계로, 세계는 교회를 믿고 그 가르침에 순종함으로서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께 간다.
그러나 계몽주의이래 인간은 스스로의 운명에 스스로 책임지는 자유를 만끽하는 인간화와 세속화의 길을 걷고 있다. 이 세속화된 세계 속에서 인간은 오랫동안 세계관이었던 그리스도교회의 행동 이상과 사고범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며 현실세계에 내재하는 독자적인 법칙성에 따라서 행동한다. 주관과 객관의 완전한 분리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를 향유하게 하고 교회로부터 어떠한 도움도 필요치 않게 만들었다. 19 세기 중엽부터 교회는 세계가 교회의 지도를 무시하고 발전을 추구함으로써 여러 가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도 시대에 순응하여 교회를 이끌고 나가려 노력했던 현대주의(Modernism)운동을 완강히 배격하였다.
요한 23 세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교회는 종래의 태도를 극적으로 바꾸었다. 인간의 문화, 특히 과학의 정당한 자주성을 인정하고, 제도와 교리를 포함해서 교회 자체의 쇄신을 요청하며, 현대 세속생활에서 이룩된 최신의 업적을 이용토록 촉구했다. ‘현대세계의 사목현장’은 교회와 오늘의 세계와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게 되었다. 교회는 세계와 대화해야 하고 배워야 하며 형제애를 촉진함으로써 세계에 봉사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기 위해서 오셨고 그 나라의 구현을 위해 헌신하기 위해 오셨다. 그분은 봉사하고 치유하며 화해하기 위해 오셨다. 인간의 비참과 걱정을 나누기 위해 오셨다. 그리스도가 철저히 위타적 존재라면 교회도 위타적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자들도 위타적 존재가 되야 한다.
봉사적 교회관이 1966 년이래 여러 교회 공식문헌에(Uppsala Report, WCC, 1967; Medellin, 1968; Justice in the world, Synod of Bishop, 1971) 등장하는데 이는 신학자들에 의해 발전된 관점들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방법론적으로 세속화와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세계는 교회의 신학이 이루어지는 장(場)이요, 교회는 세상의 시대의 징표(the signs of the times)를 식별하는 것이기에 세속화요, 교회가 세계를 재는 척도가 아닌 동시대와 교회전통과의 중간매개가 되니 대화적이라 할 수 있다.
Teilhard de Chardin은 과학에 대한 충성심과 교회에 대한 충성심 사이의 화해를 성취하려고 일생을 걸었다. 인류학자요 사제였던 그는 이중소명을 갖고 있었고, 신학과 과학, 종교와 기계기술, 교회와 세계사이에 궁극적 일치가 있음을 믿었다. 그는 우주내의 모든 에너지가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께, 그리고 그 때문에 세계에서 의식화된 그리스도화한 부분으로서의 교회에 수렴된다. 교회는 세계의 사랑 에너지의 중심 축으로서 오메가 점인 그리스도와 우주 사이의 교합점이다. 교회는 세계 에너지가 불필요하게 낭비되는 것을 막아야 하며, 세계는 교회가 화초처럼 시들어 버리지 않기 위해 필요한 존재이다. 교회는 하느님으로부터 진보사회가 되고 진화과정의 선봉이 되도록 불림을 받았으며, 이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 과학 및 기계기술의 약동성에서 드러나는 좋은 것들에 개방적이어야 한다.
D. Bonhoeffer는 세상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가 위타적 존재였던 것과 같이 교회도 세상을 위해서 존재할 때만이 비로소 교회라 할 수 있다. 교회는 자신의 소유물을 필요한 사람과 나누어야 하며 정상적 인간 생활의 세속문제에 간섭하기보다는 돕고 봉사하는데 에서 존재의의를 찾아야 한다. H. Cox 에 의하면 교회는 세계와 구분되는 구원의 제도라기보다 세계구조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로운 역사를 인지해야 하는 역사적 책임을 지닌 공동체이다. 교회는 세속사회에서 하느님의 전위대로서 봉사자이며 세속화도시의 전체성과 건강을 위해 투쟁해 한다. 교회는 단순히 신앙고백이나 전례거행뿐 아니라 우선적으로 우리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현존과 약속에 대한 식별적 성찰을 해야 한다. 하느님의 집은 교회가 아니라 세계이며 교회는 자신의 집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서 봉사해야 하며 힘으로가 아니라 사랑으로 봉사해야 하고 인류를 괴롭히는 각가지 문제에 접근하여 화해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다.
봉사자적 교회관에서 교회의 일치를 이루는 실마리는 교리나 성사와 같은 전통적인 것이 아니라 봉사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형제애나 연대감이다. 교회로부터 혜택을 받는 사람은 구성원 자체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다. 선교는 신자들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을 돕는 것이며, 하느님의 나라와 그 가치(Kingdom value)를 신장시키며 희망 안에서 상호화해를 촉진시키는 것이다. 이 교회관은 교회의 자기 폐쇄적인 태도로서는 현대세계와 발맞출 수 없다는 시대상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왔지만, 현대사회는 교회만이 줄 수 있는 신앙, 희망, 정의 그리고 형제애 등에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대인들은 오로지 권력과 성공과 쾌락추구에만 탐닉하고 있기 때문이다. Post-modernism의 인간은 자기의 목적을 잃고 방황하고 있으며 교회만이 희망을 제시할 수 있다. 이 교회관은 자만과 이기주의 그리고 인간의 비참에 대한 무감각성을 극복하려는 교회자체에 영신적 쇄신을 촉진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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