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서의 교회-신약성서(예수와교회)

 

  2.3.2. 신약성서


  2.3.2.1. 예수와 교회


  ◎교회와 하느님 나라


메시아 사상이 이스라엘의 희망의 중심이 되면서,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를 통해 등장하게 된다. 하느님 나라(루가 17,21)에 대한 시각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이성적 입장 : 하느님 나라는 인간 내면에 도래한다.


  ② 종말론적 입장 : 하느님 나라는 갑자기 도래한다.


  ③ 그리스도론․성령론적 입장 : 예수의 인격 안에서 하느님 나라가 존재한다.


                → 우리는 ③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종합적으로 결론지어 말하면,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지 교회를 선포한 것이 아니며, 예수의 복음이 역사 안에서 교회를 형성시켰고, 교회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토대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죄와 고통에 물든 세상으로부터의 정신적․육체적 해방”으로 정의내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죄로 물든 인간성’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전제이다. 여기에서 고통이 나오며, 인간은 이것을 서로 주고받는다. 창조 설화에서는 이러한 원인을 ‘인간의 이기심’으로 고찰하고 있다. 즉, “선악과는 굴레가 아니라, 창조가 유지되기 위한 기본질서였으며, ‘핑계’와 ‘변명’은 인간이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 되었고, 이러한 결과로 인해 ‘노동’과 ‘출산’의 고통이 부여되고, 가장 큰 고통인 ‘죽음’이 선고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신학자들은 ‘고통’에 대한 언급만이 창조설화의 기술목적이 아니라고 말한다. 후기 유다이즘은 ‘아담의 죄가 모든 이에게 생물학적으로 유전된다’고 말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사도 바오로도 마찬가지이다.


  Augustinus와 Thomas Aquinas는 “①고통은 죄인에게는 벌이요, 의인에게는 약이다. ②아담의 범죄는 모든 인간에게 유전된다.  ③모든 인간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529년의 Orange 공의회에서 교의화되었다.


  창조설화에 대한 이러한 전통적 시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비판을 해 볼 수 있다.


첫째, 여자를 비하시켰다. 이러한 시각은 교회 안에서의 공공연한 여성 차별의 근거가 되었다. 둘째, 무죄한 어린이의 고통과 천재지변에 대해서 설명할 수가 없다. 셋째, 이러한 시각은 고통과의 싸움을 무의미하게 한다. 이 해석대로라면, 고통은 무조건 참아야 하는 것이 되어 버리며, 이러한 것은 예수의 태도와도 상치되는 것이다. 넷째, ‘고통’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잘못된 영성으로 흐를 수 있다.


  결국, 인간의 고통과 죽음이 벌이라면, 고통의 원인이 하느님이시라고 오해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또한 아담의 죄는 유전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창조설화는 “불행한 현실이 인간 스스로의 잘못 때문에 있으며, 창조질서가 인간의 잘못으로 인해 흐트러지고, 인간 스스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 오늘날의 견해이다. 악의 세력은 드러나지 않지만, 잠재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모든 善의 근원이시며, 인간이 모든 죄의 원인인 것이다.


  현대 신학은 ‘고통’에 대한 시각은 “악의 세력은 분명히 존재하며 인간이 고통과 죽음의 첫째 원인이다. 그리고 아담의 죄는 유전되는 것이 아니며, 다만 ‘죄로 물든 인간성’은 타고나는데 이것이 ‘고통’의 또하나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는 ‘고통’의 문제를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복음의 핵심은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실현시키기 위해 고통에 맞서 싸우고자 하였다. 실제로 잘못된 현실을 고쳐주시지 않았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고통에 대한 예수의 태도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고통의 죄의 벌이 아니다’는 것이다. 예수는 태생소경이 누구의 죄 탓이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자신의 죄 탓도 아니요, 부모의 죄 탓도 아니라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리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예수는 모든 사람이 고통당하는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하신다. 결국, 이웃사랑이 심판의 척도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도 ‘고통’과 싸우다가 ‘죽음’이라는 고통을 맞으신다. ‘하느님 나라’라는 원복음이 ‘고통에서의 해방’을 의미한다면, 개인적 혹은 사회적 악습이나 구조 등에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 이렇듯이, 하느님 나라를 인간사회에서 실현하기 위한 도정에서 생겨난 것이 바로 교회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와 교회는 동떨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 예수의 자의식과 교회


‘하느님 나라’도 구약의 계약의 완성을 포함하고 있었다. 또한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교회’라는 공동체의 설립을 의도하셨다. 그 이유를 마르 3,14-15에서 찾아보자.


  ① 12사도1)를 뽑아 “당신 곁에 있게 하셨다”


  ② “그들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이 대목에서 우리는 교회의 본질을 살펴볼 수 있는데, 다음의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교회는 “예수와 함께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를 드러내어야 하며, 예수가 교회의 중심이다. 둘째, 교회는 “예수로부터 파견된 자”이며, 따라서 파견하신 분이신 예수를 말해야 한다.


  예수는 ‘부르심’과 ‘최후의 만찬’을 통해 교회를 설립하셨다. 최후의 만찬은 예수의 인격 위에 교회를 세우는 행위의 표징, 교회는 식탁 공동체임을 엿보게 한다. 최후의 만찬은 ‘성찬’ 예표이며, 동시에 교회설립의 핵심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와 교회 사이에 연속성이 있으며, 그 사이에 예수의 인격이 자리잡고 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예수는 이미 새로운 공동체를 생각하고 있었다. 말씀을 나누고 식사를 함께 나누는 초대공동체의 모습에서, 우리는 초대교회를 이루는 “말씀”과 “성찬”이라는 두 가지 구성요소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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