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구성원 요건과 교회일치-교회일치 문제(가톨릭교회의 정당성-하)

 

이상의 관점에서 우리는 종교개혁의 중심을 이루는 세 개의 논쟁점을 잠시 고찰한다. 곧 은총지상주의(Sola Gratia), 신앙지상주의(Sola Fide), 성서지상주의(Sola Scriptura), 가 그것이다. 이 세가지 이유 때문에 개신교 그리스도인은 설령 가톨릭 교회가 더 자명한 역사적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해도, 역시 자기 양심에 따라서 이 가톨리교회에 소속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①오직 은총만(Sola Gratia) : 이 말의 근본 의미는 인간은 하느님의 자유로운 은총에 의하지 않고는 자신이 구원에 대해서 아무런 공헌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의는 가톨릭교의와 배치되지 않을 뿐아니라 오히려 가톨릭교의가 가르치는 바이다. 사실 인간의 자유, 인간의 능력, 인간의 가능성은 그 자체로 독자적인 자율성을 가지고 구원을 위해 어떤 독자적인 공헌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이 인간에게 무상의 사랑에 의해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이다. 구원이 순수하게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생각은 어쩌면 통속적 가톨릭 사상속에서 여기저기 존재하는지 모르지만 공적인 가톨릭 교의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구원에 공헌하는 것은 하느님의 완전히 자유로운 은총 이외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인간이 구원의 역사에서 자기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 인간의 자유를 강조할때도 그것은 하느님의 능력과 행위에서 가능하게 된 자유이고, 구원을 위해 하느님이 해방하신 자유이다. 또한 인간이 자유에서 구원을 위해 효과있는 행위(공덕)을 할 때, 인간은 자유의 능력과 행위를 하느님의 은총행위로서 받아들이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은총지상주의라는 사상은 가톨릭 교의와 아무런 모순이 없다.  종교개혁시대의 개신교 교위에 반감을 주었던 자유에 관한 교의, 공덕에 관한 교의등은 상호 오해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이것을 깨닫기만 했다면 당시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은총에 관한 교의는 인간이 하느님의 자유로운 은총에 의해 정말로 변화되고 죄인이 의인이 된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인간은 의화된 후에도 항상 죄의 위협을 받고 있기에 하느님께 대해 결코 자율적인 입장을 취할 존재가 못된다.




② 오직 신앙만(sola fide) : 인간이 다만 신앙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는 교의는 ‘은총지상주의’의 주관적 측면이 된다. 구원이란 하느님 은총의 자유로운 선물이기 때문에, 이 구원이 받아들여지는 행위는 그 자체도 하느님이 이 자유에 대해 내려주신 행위여야 한다. 이 행위는 인간이 독자적 능력으로 하느님에대해서 행하는 자율적인 공덕이 아니다. 말하자면 하느님 구원의 선물을 억지로 얻을 수 있는 그런 공덕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은총만이 인간을 성화하는 것이고, 이 은총에 대답하는 행위는 순수한 인간의 행위가 아니다 이것이 신앙이며 이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내적인 빛을 받아 완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톨릭의 가르침이며 개신교 그리스도인도 근본적으로 이에대해 아무런 이론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신앙, 희망, 사랑이라는 중세 스콜라 신학의 상당히 도식적인 구별은 오지 하나의 의화행위, 즉 하느님의 은총이 인간에 자유롭게 내려주시는 근본행위의 전체성을, 사정에 따라서는 오히려 불분명하게 할 수 있다. 이 도식은 주의깊은 해석을 필요로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신앙지상주의에 관한 가톨릭의 가르침에 저촉되는 것은 아니다.




③ 오직 성서만(sola scriptura) : 개신교 신앙을 근본적응로 특징짓고 신앙과 교회에 근본 원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 ‘성서지상주의’라는 원리이다. 여기에서 개신교 신앙과 가톨릭 신앙고의 교의의 차이가 다만 용어상의 차이 뿐 아니라 내용적이고 정말로 사효에 입각한 차이로 인식된다. 왜냐하면 가톨릭 교의는 전승과 가톨릭 교도적의 필연성과 타당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개신교 그리스도인은 성서학의 결론으로서 다음의 사실을 인정한다. 즉, 성서는 본질적으로 교회가 낳은 것이고, 매우 종류가 다른 잡다한 것으로 형성되어 하나의 내적인 정전으로 통합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는 것이다. 성서는 역사적으로보아 원시 그리스도교 교휘 신앙의 역사를 지록한 것이다. 따라서 성서가 교회의 생활한 구체적 설교에 의해서 성립되었다는 것도 자명하다. 그리소 그만큼 성서는 전통,전승의 결과이다. 전승이란 정당한 증언의 계승이다. 이 증언의 계승은 자기자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당한 증언자들에게서 유래하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소급해 올라감으로써 정당성을 가지는 것이다. 이 증언자들의 정통이 계승되어 생활한 전통을 형성하고 여기에서 성서라는 귀결을 가져온 것이다. 성서는 그렇기 때문에 증언과의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성서는 따라서 후에 교회에 규범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기는 해도, 역시 교회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이다. 성서는 교회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성서는 교회 구축한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정통과 ㅅ어서의 내적 관련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성서의 정전이라는 정당성을 가질 수가 없다.


성서란 교회의 생활한 증언이 문자로 구체화된 것이다. 교회와 선교가 성서가 씌여지기 전에 존재하고 있었고, 교회안에서 생활한 반성으로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성서는 교회안에서 형성되었지만, 사도시대 이후 교회에 있어서 신앙이해의 구체적 규범, 즉 다른것에 규범을 받지않는 규범이 되었다. 교회는 이 성서를 능가하는 어떠한 새로운 계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가톨릭 교회는 다음의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즉, 사도로부터의 신앙유산은 그 본질은 변화되지 않으면서 실제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성서는 교회의 불변성을 문자로 고정화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서는 그 자체가 역사성을 가지고 있고, 시대적으로 변천하는 신존 앞에 그리스도를 현조하게 하는 것이다. 성서주석학과 성서 신학안에서는 아직도 많은 것이 해결되지 않은채로 있고 결국은 인간의 신학적 사유에 맡겨져 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가톨릭 교회는 다음의 견해를 견지한다. 즉, ‘신앙인의 공동체’는 개개인의 그리스도인을 구속하는 성서의 해석을 정말로 줄 수 있는 것이다. 가토릭 교회는 이것을 공동체의 신앙 고백을 통해서 또 공동의 의식을 형성하는 여러기구의 도움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부정하면 주관서, 개개인의 인간이 자기 구미에 맞는 대로의 성서 해석만이 남을 수밖에   없다. 이에대해 개신교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이 반박할 수 있다. 즉 하느님이 성서해석에 있어서의 주관성을 막아줄 것이다. 이에대해 가톨릭 교회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영이 그러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과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해지고, 이 하느님의 영이 교회와 성사 안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해될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성서의 권위가 실추되는 것은 아니다. 성서 자체가 성서르 ㄹ증언한 교회내의 존재라는 것을 전제한다며,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즉 성서에 쓰여진 것은 모두 사도들의 선교이며 그 밖에는 다른 어떠한 결정적 전통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서지상주의’라는 원리를 조심스럽게 개진할 수 있다. 가톨릭 교회에서도 전통과 교도직의 이해는 오직 성서안에서만 그 내용을 이해할 원천과 규범을 가진다.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시대에는 성서에서 이야기 되지 않아도 사도시대부터 전해지는 특정한 신앙 내용을 중개한 그러한 전통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신학자도 많이 있었다. 이것은 가톨릭 교도권이 구속력을 가지고 가르치는 바가 아니며 이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러한 생각을 한다고 해도 여전히 그러한 전통이 성서를 규범으로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가톨릭 신학 내에서는 오랫동안 신적 계시로부터 유래되는 전승과 나란히 인간의 사유로 이루어진 신학, 시대적 제약을 받는 신학적 상상이 존재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과연 무엇이 신적 계시의 구체적인 전승이고 무엇이 인간의 이론, 또는 실정적이고 가변적인 교회의 법률인지 묻는다면 이에대해 가톨릭 교회의 교도직은 궁극적으로 대답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이 교도직은 결코 새로운 계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 규범은 근본적으로 말해서 오직 성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상의 세가지 원칙에서 고찰해본 바와 같이 개신교 신앙의 근본원리가 가톨릭 교회안에 조금도 있을 수 없고 전혀 다르다고 주장할 수 없다. 이 세원칙은 그리스도교의 근본적인 원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 가톨릭 교회의 그 밖의 교의들에 대해 개신교 신학기 간단히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예컨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삼위일체교의 등등. 하지만 16c 종교개혁자들은 하느님에 관해서 그리스도에 있어서의 신적 위격 등에 관해 전승된 교의를 부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것을 당연한 것을  전제했다. 루터나 칼빈이 그 해석과 강조점이 달랐고 어느정도의 수정을 가했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전승된 교의를 부정하지 않았다.


  우리가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해 물을 때, 가톨릭 교히는 다른 여러 교회에 대해 동등한 가치를 인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개신교 교회가 가지는 긍정적인 의의를 결코 부정할 수 없다. 즉 개신교 교회에서도 성서가 근본 규범으로존재하고, 세례가 존재하고 그밖에 아주 많은 유익한 요서가 존재한다. 또한 개신교 신앙에 은총과 의화 그리고 성령이 현존함을 부인하지 않는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양쪽에 많은 문제점과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고 해도 개신교 교회는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 즉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의 의지에 기초해서 그리스도교적인 것의 전체를 잘 보존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교회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다만 궁극적인 근본인식으로환원해서 그것만을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기초로 전개하고 역사적인 것, 사회적인 것, 반성된 것 모두를 포함하는 넓이를 지닌 교회이다.


그리고 교회의 발전과 변화가 원초적인 것에서의 타락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죽음의 힘도 ……) 이사실을 인정한다면 개신교 교회는 가톨릭 교회에 있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천으로 돌아가야하는 것을 깨우쳐주는 적극적인 기능을 하고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설령 개신교교회가 없었다고 해도 이사실은 가톨릭 교회예서 항상 가능해야하는 것이다. 이점에서 가톨릭교회는 개신교교회에 많은 빚을 지고있다고 할 수있다.


교회에 분열이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실현되지 않았고 신학적 논의의 문제로 방해받고 있는 일치가 분명히 교회의 분열위에 있다. 일치는 분열보다 훨씬 근본적이고 결정적이고 의미를 가진다. 그렇다면 과연 왜 하느님이 구원의 섭리에서 이런 그리스도교의 분열을 허용하였느냐의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오늘날에 있어서 우리는 교회 분열의 역사적 책임이 양쪽에 있음을 고백한다. 어느 족이 더 죄과가 있는지 정확히 헤아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판단은 오직 하느님의 심판에 밑겨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양쪽이 모두 서로 상대쪽에 대해서 선의를 가져야 한다. 사실 개신교든 가톨릭이든 그리스도인의 대부분은 다른 교회에 대해서 ‘정말로는 죄책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전제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교회 분열이 있었는가의 물음은 근복적으로 신의론(神義論,Theodizee)의 물음 즉, 하느님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물음이 된다. 특정한 역사적 사실이 인간의 죄가에 의해 일어나고 있을 때, 하느님은 그런한 죄과를 왜 허용하시는가의 물음은 오직 하느님께 물어야 할 물음인 것이다.


우리는 교회 분열 상황 안에서 하느님 구원 섭리를 새롭게 묻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교의 원천들을 모두가 하나의 같은 교회에 당연히 속해 있을때에 비해서 더 명확히 체험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과연 그리스도교 신앙이 무엇인가라는 물음, 그리고 자기의 신앙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적 태도는 교회 분열속에서 미래로 열려진 채로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열의 상황에 있는한 우리는 이 상황에서 구원에의 적극적인 의의를 묻고 최선의 것을 만들어 내야 한다. 우리는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가능한 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고 복음의 진정한 근원성을 더 잘 이해하도록 서로 촉구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를 진정한 신앙에 결합시키는 것이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보다 훨씬 근본적이고, 결정적이고 구원에 있어 의미를 지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카테고리: 신학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