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공의회 주의와 그 영향
Luther로부터 시작되는 개신교 일단의 종교분열은 바로 그 이전 로마 가톨릭의 중대한 사건과 결정적인 연관이 있다.
교황권은 우선 황제들과 대결과 주교들간의 대결이라는 길다란 역사의 과정을 거치면서 확립되는데, 개신교 종교 분열과 관련되는 것이 교황과 주교들 간의 대결이었다. 이 대결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교황이 공의회 위에 있다는 교황주의(Papalismus)와 공의회가 교황 위에 있다는 공의회 주의(Konziliarismus)간의 대결, 또 하나는 교황이 모든 지역주교들 위에 재치권을 갖는다는 교황주의와 지역 주교들은 교황의 간섭 없이 그들 스스로의 지역에 대한 재치권을 갖는다는 주교주의(Episkopalismus)간의 대결이었는데 이 주교주의는 프랑스에서는 Gallikarismus, 독일에서는 Febronianismus, 오스트리아에서는 Josephismus로 드러나게 되었다.
Luther의 종교분열은 바로 교황주의와 공의회주의 간의 대결과 결정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다. 종교분열 직전까지 계속된 이 대결은 또 하나의 종교 분열이라는 슬픈 결과를 낳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
교황과 황제간의 치열한 대결의 한 결과로 교황들이 프랑스 남동부 아비뇽에 유폐되어 지냈던 기간이 1309-1377년간이었다. 이 기간은 프랑스가 압도하던 기간으로 추기경들도 프랑스 인이 절대다수였다. 드디어 아비뇽 유폐를 끝내고 로마로 돌아온 교황 그레고리오 Ⅺ세(1370-1378)사후 로마 가톨릭교회는 그 내부에서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심각한 분열과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새 교황 선거에서 16명 추기경 가운데 11명이 프랑스 인이었고, 이태리 인들은 이전의 교황들처럼 프랑스인이 새 교황으로 선출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태리 사람들은 무력으로 교황선거장을 점령, 결국 이태리 인 새 교황 우르바노 6세(1378-1389)를 선출케 하였다. 3달후 프랑스 추기경 11명과 스페인 추기경 1명이 프랑스에 모여 로마에서의 교황선거가 공포 분위기에서 강요되었던 것으로 무효임을 선언하고 새 교황 끌레멘스 7세(1378-1394)를 선출했다. 끌레멘스 7세는 아비뇽을 교황청으로 정했다. 곧바로 이태리 추기경 3명도 끌레멘스 7세 진영에 합류했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2명의 교황을 가지게 되었고, 이 분열은 40년간 지속되었다. 그 동안 각자의 후계자들이 교황임을 자처하며 이어졌다. 로마계는 후르바노 6세(1378-1389), 보니파시오 9세(1389-1404), 인노첸시오 7세(1404-1406), 그레고리오 12세(1406-1415), 아비뇽계는 끌레멘스 7세(1378-1394), 베네딕도 13세(1394-1417)였다. 분열의 결과는 무서웠다. 로마 가톨릭 전체가 두 편으로 갈라져 서로 투쟁하였고 두 교황은 서로 상대방과 상대방 진영을 파문하였으니, 사실상 서방교회 전체가 파문상태였다. 분열은 모든 국가, 교구, 본당에 두루 미쳐 모든 직책과 성직록이 이중으로 점령되어 불화속에 교회는 일찍이 체험하지 못한 가장 심각한 제도적 위기를 겪어야 했다.
1394년 파리대학은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3개의 중재방안을 제시. ①양측의 자발적 사임. ②중재재판에 대한 교황들의 복종. ③공의회를 통한 결정.
마침내 양편에서 13명의 추기경들이 교황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409년 Pisa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여 두 교황을 단죄, 폐위를 언명하고 새 교황 알렉산델 5세를 선출하였다. 알렉산델 5세는 이듬해 사망하고 그 후계자로 요한 23세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로마계, 아비뇽계 교황은 퇴위를 거부하였고 교회는 불행하게도 3명의 교황을 갖게되어 혼란이 더욱 가중되게 되었다. 어떻게 이 혼란을 수습할 수 있을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이 Dilemma를 해결한 사람이 독일왕 Siegmund였다. Siegmund(1410-1437)는 아무도 손을 쓸 수 없는 극심한 혼란에서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확신을 가지고 중재자로 나섰다. Siegmund는 분열된 교회를 새로운 공의회를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고, 요한 23세로 하여금 Konstanz에서 공의회를 소집하도록 하였다. 요한 23세는 자신만이 유일한 합법적 교황으로 공의회를 통해 확인되기를 바라는 희망으로 1414년 Konstanz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공의회는 3명의 교황을 모두 퇴위시켜야 교회일치가 회복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실망한 요한 23세는 공의회를 떠났고 공의회 해산을 명하고 위협하였다. 공의회 참석자들 전체가 어수선하게 되었다. 그러나 Siegmund는 교황 없이도 공의회가 계속 될 것임을 선언하고 교회일치 회복을 호소하여, 이에 힘을 얻고 교황 없는 공의회가 속개되었다.
요한 23세가 온갖 방법으로 공의회를 방해하고 해산시키려는데 대항하여 Konstanz공의회는 교령 ‘Haec Sancta’를 반포하였다.(1415.4.6) 교령은 공의회가 합법적으로 천주 성신에 의해 소집되었으며, 분열된 전 교회를 대표하고, 그 권능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선언하고, 모든 신자 특히 교황까지도 신앙과 교회분열의 극복과 교회개혁에 관한 공의회의 결정에 복종해야 함을 선언하였다. 공의회가 교황우위에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요한 23세의 공격에 대해 Siegmund는 그를 체포하고, 1415년 5월 29일 폐위시켰다. 로마계 교황 그레고리오 12세는 1415년 7월 4일 스스로 퇴위, 아비뇽계 교황 베네딕도 13세도 Siegmund의 노력과 공의회에 의해 1417년 7월 26일 폐위됨으로써 마침내 3명의 교황시대는 끝나게 되었다.
공의회는 계속해서 교회일치를 회복하고 교회개혁을 시도하고자 했으나, 더 이상 개혁을 다루기 이전에 먼저 새 교황이 선출되어야 한다는 것이 요구되었다. 이렇게 해서 교황선거가 가능하게 되었다. 새 교황 선거는 각국의 이해관계와 그 동안 분열의 여파로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는 인물을 선출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것도 만장일치로 마르티노 5세가 선출되었다.(1417) 비단 공의회뿐만 아니라 전 서방 교회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40년간의 분열이 극복되고 일치가 회복되는 순간이었다.(교황은 일치의 상징. 준거점) 분열이란 그리스도교가 겪을 수 있는 최악의 것임을 서방교회 전체가 뼈저리게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분열의 여파는 결국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Konstanz공의회의 선언대로 공의회가 교황우위에 있다는 공의회주의(Konziliarismus)가 고개를 들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공의회주의가 강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공의화 이후 계속 큰 영향을 미치게 되어 16세기 마르틴 루터의 종교분열에까지 이르게 된다.
에우제니오 4세(1431-1447)교황이 Basel공의회를 소집하였을 때(1431) 공의회 주교들은 공의회를 교황보다 상급기관으로 인식하였다. 주교들은 교황을 초대하여 해명을 요구하였고 교회의 최고 재판소가 행정부로 자처하였다.
에우제니오 교황은 이에 대항하여 1437년 공의회를 Basel에서 Ferrara(1438) 그리고 Florenz (1439-1442)로 옮기자 급진적 공의회주의를 주장하던 주교들은 Basel에 남아 교령 ‘Sacrosancta’를 반포하여 Konstanz공의회가 선포한 교황에 대한 공의회의 우위를 교의로 선포하였다(1439). 이렇게 해서 급진적인 공의회주의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Basel의 주교들은 교황 에우제니오를 파면하고 새교황 펠릭스 5세를 선출하였다.(교회사상 최후의 교황분열) 그러나 교황 에우제니오의 지위가 확고했고, 더 이상 Basel공의회와 펠릭스 5세는 경쟁할 처지가 못되었다. 펠릭스 5세는 퇴위하게 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드러난 공의회주의의 영향은 오래 지속되었다.
공의회주의가 소생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이후 교황들에게도 계속 지속되었고 이러한 불안은 얼마 뒤 루터의 종교분열이 발발하였을 때 긴급히 요구된 개력에 대처하기 위한 공의회가 적시에 개최되지 못함으로써 서방교회는 또다시 분열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겪게 된 것이다.
Trient공의회가 1545년에 가서가 아니라 1525년 루터의 분열 직후 개최되었더라면 교회 분열의 역사는 완전히 다르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유럽인들은 교회분열의 책임을 져야한다. 아랫사람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는가. 더욱이 선교지역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이 분열의 여파에 휩싸이지 않는가.
공의회의 교황에 대한 우위를 선언했던 Konstanz공의회의 회칙 ‘Haec Sancta’와 Bssel의 공의회 회칙 ‘Sacrosancta’에 대한 논란이 있다.
첫째, 이 회칙들은 공의회에 교황이 없었기 때문에 무효이다. 이 주장은 전통적인 가톨릭적 시각이다. 이러한 연유로 교회 공식문헌들은 모든 Denzinger에 이 회칙들은 수록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비판 : 공의회가 불법적이었다면 공의회에서 선출한 교황도 무효이어야 한다. 그러나 Konstanz공의회는 새 교황 바르틴 5세를 선출하면서 교회일치를 회복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마르틴 5세가 공의회를 보증하지 않았는가.
둘째, 이 회칙들은 완전히 유효하다.(H.Küng)
비판 : 그렇다면 교회의 전통이란 존재할 수 없게된다. 공의회 문헌은 보다 더 큰 개념인 전통이란 원칙 안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바젤공의회는 공의회주의를 일방적으로 교의화했기에 교호에 받아들일 수 없다.
셋째, 이 회칙들은 비상회칙들이다.
비판 : Konstanz공의회는 교황들이 앞으로의 공의회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 안에 유사한 상황이 다시 발생했을 때 도대체 비상회칙들이 어떠한 확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넷째, ‘교황우위’ 또는 ‘교황아래’ 등의 범주는 교황과 공의회의 관계를 규정짓는 것이 아니다. Konstanz공의회는 어쨌던 교황이 교회분열을 원치 않는다면 어쨌든 전통에 충실해야 한다는 순명을 요구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