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2. 역사적 전개
로마 교황은 이미 살펴본대로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좌의 계승좌라는 지리적 조건, 로마가 로마제국의 수도라는 정치적 조건, 로마 제국 이후 계속된 사회적 혼란 속에 로마 교회가 유일한 안정세력이었다는 사회적 조건, 그리고 또한 유럽 사회의 게르만화 이후 게르만족의 가톨릭으로의 개종과 이에 따른 정교혼합이라는 복잡한 역사적 조건들을 거치면서 명실공히 교회 내의 일치의 준거점이라는 영적인 의미와 동시에 행정적 관리의 최고 통치권이라는 정치, 사회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로마 교황과 황제와의 대결은 후에 다루기로 하고 우리는 먼저 교황과 주교들과의 대결을 살펴본다. 여타 지역 주교들은 개별적으로 로마 주교인 교황과 대결할 처지가 아니었다. 동로마 제국 황제의 힘을 배경으로한 동방 교회의 주교들은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를 중심으로 로마 교황과 대결하게 된다. 이 결과로 1054년 동방교회는 결정적으로 로마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교회와 분리되게 된다. 그 이후 서방교회는 대체로 로마 교황권이 약화되면 주교들의 권한이 강화되고 로마 교황권이 강화되면 주교들의 권한이 약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Ⅶ세(1073-1085)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다. 자신의 회칙 ‘Dictatus papae'(1075)를 통해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은 보편적인 법의 제정권자요 최상의 통치권을 가진다고 선포했다 ; 교황은 새로운 법률을 제정할 수 있다. 교황은 주교를 해임하거나 재임명할 수 있다. 교황은 시노드와 공의회 위에 있으며 황제를 퇴위시킬 수 있다. 교황은 시민들의 충성서약을 면제시켜 줄 수 있다. 이러한 선언은 필연적으로 황제와의 대결을 불러일으킨다.(황제와의 대결은 후에 다룬다. 우선 교황과 주교들과의 대결을 살펴본다.)
Avignon유폐(1309-1377)에서 돌아온 교황 그레고리오 Ⅺ세(1370-1378) 사후 로마 가톨릭 교회는 커다란 분열과 혼란에 직면하게 되었다. 새 교황선거에서 16명의 추기경 가운데 11명이 프랑스인으로 이전 교황처럼 프랑스인이 새 교황으로 선출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로마인들은 무력으로 교황선거장을 점령하여 이태리인 새 교황 우르바노 6세(1378-1389)를 선출케 하였다. 3달 후 프랑스 추기경 11명과 스페인 추기경 1명이 로마교황 선거가 강요된 것으로 무효임을 선언하고 프랑스에서 새 교황 끌레멘스 7세(1378-1394)를 선출, 끌레멘스는 아비뇽을 교황청으로 정했다. 그리고 이태리 추기경 3명도 끌레멘스 7세의 진영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2명의 교황을 갖게 되었고 이 분열은 40년간 지속되었다. 그동안 각자의 후계자들이 이어졌다. 로마계는 우르바노 6세(1378-1389), 보니파시오 9세(1389-1404), 인노첸시오 7세(1404-1406), 그레고리오 12세(1406-1415), 아비뇽계는 끌레멘스 7세(1378-1394), 베네딕도 13세(1394-1417)였다. 분열의 결과는 무서웠다. 로마 가톨릭 전체가 두 편으로 갈라져 서로 투쟁하였고 두 교황은 서로 상대방과 상대방 진영을 파문하였으니 사실상 서방교회 전체가 파문상태였다. 분열은 모든 국가, 교구, 본당에 두루 미쳐 모든 직책과 성직록이 이중으로 점령되어 불화 속에 교회는 일찍이 체험하지 못한 가장 심각한 제도적 위기를 겪어야 했다.
파리대학은 1394년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3개 중재 방안을 제의했는데, ① 양측의 자발적 사임, ② 중재재판에 대한 교황들의 복종, ③ 공의회를 통한 결정이었다. 마침내 양편에서 13명의 추기경들이 교황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409년 Pisa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여 두 교황을 단죄, 폐위를 언명하고 새 교황 알렉산델 5세를 선출하였다. 알렉산델 5세는 이듬해 사망하고 그의 후계자로 요한 23세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로마계, 아비뇽계 교황은 퇴위를 거부하였고 교회는 불행하게도 3명의 교황을 갖게 되어 혼란이 더욱 가중되었다. 어떻게 이 혼란을 수습할 수 있을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이 딜레마를 해결한 사람이 바로 독일왕 Sigmund였다.
독일왕 지그문트(1410-1437)는 아무도 손을 쓸 수 없는 극심한 혼란에서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확신을 가지고 중재자로 나섰다. 지그문트는 분열된 교회를 새로운 공의회를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고, 요한 23세로 하여금 Konstanz에서 공의회를 소집하도록 하였다. 1414년 콘스탄쯔에서 공의회가 소집되었고, 요한 23세는 자신만이 유일한 합법적 교황으로 공의회를 통해 확인되기를 바랬다. 그러나 공의회는 3명의 교황을 모두 퇴위시켜야 교회일치가 회복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요한 23세는 공의회를 떠났고 공의회 해산을 명하고 위협하였다. 공의회 전체가 어수선하게 되었다. 그너나 지그문트는 교황 없이도 공의회가 계속될 것임을 선언하고 교회일치 회복을 호소하여 교황 없는 공의회가 속개되었다.
요한 23세가 온갖 방법으로 공의회를 방해하고 해산시키려는데 대항하여 콘스탄쯔 공의회는 교령 “Haec sancta”를 반포하였다(1415. 4. 6.). 교령은 공의회가 합법적으로 천주성신에 의해 소집되었으며 분열된 전 교회를 대표하고 그 권능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선언하고 모든 신자, 특히 교황까지도 신앙과 교회분열의 극복, 교회개혁에 관한 공의회의 결정에 복종해야 함을 선언하였다.
요한 23세의 공격에 대해 지그문트는 그를 체포하고 1415년 5월 29일 그를 폐위시켰다. 로마계 교황 그레고리오 12세는 1415년 7월 4일 스스로 퇴위하였고, 아비뇽계 교황 베네딕도 13세도 지그문트의 노력과 공의회에 의해 1417년 7월 26일 폐위됨으로써 3명의 교황시대는 마침내 끝나게 되었다. 공의회는 계속 교회개혁을 시도하고자 했으나 더 이상 개혁을 다루기 이전에 먼저 새 교황이 선출되어야 한다는 것이 요구되었다. 이렇게 해서 교황선거가 가능하게 되었다. 새 교황선거는 각국의 입장과 그동안 분열의 여파로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인물을 선출하기가 매우 어려웠지만, 놀랍게도 만장일치로 마르띠노 5세가 선출되었다(1417). 비단 공의회 뿐만 아니라 전 서방교회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찼다. 40년간의 분열이 극복되고 일치가 회복되는 순간이었다. 분열이란 그리스도교가 겪을 수 있는 최악의 것임을 뼈저리게 경험하게 되었다. 콘스탄쯔 공의회의 선언대로 공의회가 교황 우위에 있다는 공의회주의(Konziliarismus)가 고개를 들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공의회주의가 강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공의회 이후 계속 큰 영향을 미치게 되어 16세기 마르틴 루터의 종교분열에까지 이르게 된다.
에우제니오 4세 교황(1431-1447)이 Basel 공의회를 소집하였을 때(1431) 공의회 주교들은 공의회를 교황보다 상급기관으로 인식하였다. 주교들은 교황을 초대하여 해명을 요구하였고 교회의 최고 재판소요 최고 행정부로 자처하였다.
에우제니오 교황은 이에 대항하여 1437년 공의회를 Basel에서 Ferrara(1438)로, 그리고 Florenz(1439-1442)로 옮기자 급진적 굥의회주의를 주장하던 주교들은 Basel에 남아 교령 “Sacrosancta”를 반포하여 콘스탄쯔 공의회가 선포한 교황에 대한 공의회의 우위를 교의로 선포하였다(1439). 이렇게 해서 급진적인 공의회주의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Basel의 주교들은 교황 에우제니오를 파면하고 새 교황 펠릭스 5세를 선출하였다(교회사상 최후의 교황분열). 그러나 교황 에우제니오의 지위가 확고했고 더 이상 Basel 공의회와 펠릭스 5세는 경쟁할 처지가 못되었다. 펠릭스 5세는 퇴위하게 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드러난 공의회주의의 영향은 오래 지속되었다.
공의회주의가 소생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이후 교황들에게도 계속 지속되었고 이러한 불안은 얼마 뒤 루터의 종교분열이 발발하였을 때 긴급히 요구된 개혁에 대처하기 위한 공의회가 적시에 개최되지 못함으로써 서방 교회는 또다시 분열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겪게 된 것이다. Trient 공의회가 1545년에 가서가 아니라 1525년 루터의 분열 직후 개최되었더라면 교회 분열의 역사는 완전히 다르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유럽인들은 교회 분열의 책임을 져야 한다. 아랫사람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는가. 더욱이 선교지역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이 분열의 여파에 휩싸이고 말지 않는가.
공의회의 교황에 대한 우위를 선언했던 Konstanz 공의회 회칙 ‘Haec Sancta’와 Basel 공의회 회칙 ‘Scrosancta’에 대한 논란이 있다.
첫째, 이 회칙들은 공의회에 교황이 없었기 때문에 무효이다. 이 주장은 전통적인 가톨릭적 시각이다. 이러한 연유로 교회 공식문헌들을 모은 Denzinger에 이 회칙들은 수록되지 않았다.
비판 : 공의회가 불법적이었다면 공의회에서 선출한 교황도 무효이어야 한다. 그러나 Konstanz공의회는 새 교황 마르틴 5세를 선출하면서 교회 일치를 회복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마르틴 5세가 공의회를 보증하지 않았는가.
둘째, 이 회칙들은 완전히 유효하다(H. Küng)
비판 : 그렇다면 교회의 전통이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공의회 문헌은 보다 더 큰 개념인 전통이란 원칙안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바젤공의회는 공의회주의를 일방적으로 교의화 했기에 교회에 받아들일 수 없다.
셋째, 이 회칙들은 비상회칙들이다.
비판 : Konstanz공의회는 교황들이 앞으로의 공의회에 복종한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안에 유사한 상황이 다시 발생했을 때 도대체 비상회칙들이 어떠한 확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넷째, ‘교황우위’ 또는 ‘교황아래’ 등의 범주는 교황과 공의회의 관계를 규정짓는 것이 아니다. Konstanz공의회는 교황이 교회 분열을 원치 않는다면 어쨌든 전통에 충실해야 한다는 순명을 요구한 것이다.
제 1차 바티칸 공의회는 역사안에 오랫동안 전재되었던 교황과 주교들의 대결에 종지부를 찍고 있다. 공의회는 교황의 수위권을 선언하는 동시에 주교들을 토대로 하는 교회구조의 본질을 분명히 하였다 : 교황은 전체교회에 대하여 직접적이고 통상적인 재치권을 가지며(DS 3060. 3064) 교황의 수위권은 사도좌의 수위권으로 로마좌는 사도좌이다(DS 3059. 3065. 3069). 교황좌의 선언은 무류하다(DS 3074). 참된 교회는 다만 교황과 일치를 이루면서 주님 몸 안에 일치를 이루는데 존재한다(DS 3060). 주교들은 또한 사도들의 후계자로, 성령에 의해 참된 목자로서 신자들을 사목하고 이끄는 직무로 서품된다(DS3061).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원칙적으로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승하고 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부각된 주교들의 연대성은 다음 절에서 다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