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3 章 교회의 현재와 미래- 교회의 위기(동요되는 사제직, 수도자 신분)

 

3.1.4. 동요되는 사제직, 수도자 신분


몇년 못가서 신하교, 수도원, 사제직은 텅텅빌 것이라는 성직자층의 우려가 점차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오늘날 교회의 위가가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무대가 바로 사제, 수도자들의 위기라 할 수 있다. 특별히 유럽, 남미, 북미의 사제, 수도자의 신원이 동요되고 있다. (저는 유럽에 있는 동안 세 방학을 수도원에서 보낸적이 있는데 제가 있던 수도원들(베네딕도회, 시토회) 사정이 참 딱합니다. 수백명 수용했던 커다란 수도원에 지금 15명이 살고 있습니다. 그것도 가장 젊은 분이 40대 중반. 평균연령이 65세 가까이 됩니다. 수녀원들도 사정이 마찬가진데 큰 수녀원에 할매수녀님들 20여명. 이분들이 수녀원 건물관리하기도 너무나 버거운 실정입니다. 수도원, 수녀원 간에 통폐합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장 심한 위기를 겪는 수도회들은 종종 전통적으로 제일 잘 교육되고 지식적으로도 가장 잘 무장된 곳들이었다.


이러한 사제, 수도자 위기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저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세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성소의 정체성, 신원에 대한 불명확한 인식.


부르심을 받은 삶이라는 명제에 있어서 이 부르심의 동기가 순수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왜 사제, 수도자가 되려 하는가.


-경제적으로 빈곤한 나라나 사회적으로 불안한 나라에서는 아직도 성소가 넉넉하다.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등) 반면 경제적으로 넉넉한 나라에서는 성소의 극심한 고갈을 겪고 있다. 신부나 수도자가 되면 일단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된다. 일단 사회적으로 안정된 신분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성소에 은밀히 내재되어 있는 동기.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이 한몸 바치겠다는 각오 뒤에 숨어있는 이러한 사회적 요소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 사제, 수도자가 세속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을 때는 성소가 넉넉했다. (유럽의 과거, 중세시대 지방 영주. 예컨대 salzburg영주는 주교였다. 주교가 정치, 종교의 권한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을 때는 오히려 출세의 목표가 되었다. 귀족들도 서로 사제가 되려고 줄을 대기도 했다.) 오늘날 사제, 수도자의 세속적인 요소가 제거되고 성소의 순수성만이 요청되게 되자 즉시 성소의 단절이 오게 되었다. (예컨대 Insbruck교구, 교구 규모가 서울교구, 제가 있던 6년 동안 신부 두사람 났다. 그리고 신부 몇사람 그만 두었다.)


이렇게 세속적인 특권과 힘이 사제, 수도자 성소에 내재되어 있던 동기, 동기 정화가 필연적이다. 바깥 세상 먹고 살기 편하게 되었는데 그런데도 왜, 사제, 수도자가 되려 하는가. 성소동기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것만이 진정 그리스도에 봉사하려는 의미에 합당한 일이다.


지금까지 사제를,


(1) Sacerdos(중개자): 위계적으로 평신도 위에 있는 신분으로 고착화


(2) 그리스도의 대리자: 평신도를 평민 취급하게 하고 마침내 성직자 중심주의를 낳았다.


(3) 지휘자, 장교, 천인대장: 평신도들을 부하, 졸병의 지위로 전락시킴.


(4) 본당의 관리자: 교회의 조직화, 제도화, 교회구조를 행정조직화. 구청이나 동사무소처럼 왜곡. 교회의 공무원처럼 인식. -교회의 관료화 관료주의화를 낳았다.


우리가 사제직이라고할 때 원래 이 ‘직무’라는 말은 성서적 용어가 아니다. ‘직무’라는 말은 본래 유래가 로마제국의 행정조직의 업무를 가리키던 말. 이 말이 정교가 혼합되면서 교회내에 들어오게 되어 교회내 봉사자들이 하는 일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이 말이 교회의 권력, 힘이 커지면서 직무담당자들의 권위, 독선, 지시 등의 부정적 개념으로 교회내에 고착화 되었다. 성서상의 용어는 ‘봉사’(diakonia)라는 말 성서와 초기교회내에서는 오직 ‘봉사’라는 말 밖에 없었다. 따라소 ‘직무’, 교회내 봉사자들의 근거는 오직 봉사의 범주안에서만 근거한다. 우리가 신부의 신원을 얘기할때 그 첫자리의 말은 ‘봉사’라는 말. 신원의 핵심은 봉사라는 말. 무엇을 위한 봉사인가 ①말씀 ②성사. 신부는 말씀과 성사에로의 봉사자. 그리고 그것이 전부이다. 수도자도 봉사라는 범주를 넘어설 수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제, 수도자 신원의 핵심은 바로 봉사라는 말”




2) 그리스도로부터 제정된 위계적인 교회구조에 대한 오해.


아직도 많은 사제, 수도자들이 교회의 구조를 오해하고 있다. 교회구조를 그저 ‘순명’이라는 위계구조로 제한시켜 건전한 인격관계를 질식시키고 있다. 교회를 그저 가시적인 조직과 구조로 고착시키고 여기에 오래된 관행과 경험의 무게를 실어 교회내의 상명하복 구조를 고착화 함으로써 화석처럼 굳어져 생명력을 잃고 있다. 교회의 위계구조도 너무나 조직화, 관료화되어 있다. 사제들은 교회의 공무원처럼 인식되고 있다. 그리하여 무서우리만치 교회는 영성적으로 활기없는 교회가 되어 버렸다. 살아있는 생생한 영성은 교회를 떠나 소수의 비밀스런 집회로 숨어버렸다. 교회안에서는 너무나 의식주의, 합법주의, 행정적인 통제가 팽배해 있다. 이러한 구조가 그리스도교를 너무나 쉬운 일로 만들어 주고 있다. 성인들은 조직의 관리자들이 아니었다. 성인들은 상상력을 지니신 분들이었다. 가슴이 따뜻한 분들이었다. 교회는 관리자들이 아니라 성인들을 필요로 하고있다. 이와함께 교회구조를 단순히 인간적인 산물로 보는 잘못된 경향 팽배. 즉 세속적이고 민주적이고 다원적인 사회를 특징짓는, 밑으로부터의 합의 형성이라는 ‘민주적인 메커니즘’에 따라 교회와 교회구조를 ‘성스러운 역할’로부터 ‘사회적인 역할’로 이행하기를 촉구하는 문화적인 압력이 강하게 퍼져있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신비로운 위계적 구조를 버리고 그럴듯이 보이는 인간적 조직으로 도피하고 싶은 유혹이 그것이다. 교회의 구조는 단순히 인간적인 산물이 아니다. 다수의 의견을 규합하여 그에따라 건설한 구조가 아니다. 민주적이라는 정치적 용어를 바로 교회에 적용하려는 것은 지극히 단선적인 안목이고 아직까지 교회구조의 신적인 근거를 모르는 이야기다.




3) 사제․수도자의 안일과 태만


사제․수도자로 살면서 점점 현실에 안주․타협함으로써 처음에 결심했던 성소의 순수한 동기들이 퇴색되고 때가 끼게 된다. 이점이 사제․수도자 전반에 고루 퍼쳐있는, 또 우리 모두가 공통으로 느끼는 치명적인 위기의 원인이 된다.


사실 저의 경험으로는 대략 35세까지는 열정과 순수성에 불타서 하늘에서 살게된다. 보다 거룩한 것을 지향하고 기성 사제들의 사는 모습이 비판적으로 와닿고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하고 각오를 하게된다. 35세가 되면서 이제 땅으로 내려오게 된다. 땅에 발을 붙이고 살게된다. 천상세계에서 드디어 인간세계로 내려오게된다. 그제서야 비로소 지상의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옆에 사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성의 필요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인간이 무엇인가, 사는게 무엇인가, 이런 문제들이 자주 다가오고 허망하다. 허무하다. 이런 생각들 (인스브룩 예수회 수사얘기) 한발씩 양보하게 된다.




<30대 후반에 ‘간통심리’가 가장 강하다.>


어릴때 친구들이 사는 모습도 보이게 된다. (친구집에서 자고 일어났는데  그집애가 아침에 자기 아빠에게 ‘아빠, 학교다녀오겠습니다’) 사실 요새는 그런 생각도 든다.  “집에 들어가면 된장 끓는 냄새도 좀나고 방에는 분냄새도 좀 나야 사람사는거 아닌가.”


사제․수도자 신원의 근본은 바로 말씀과 성사에로의 봉사. 이 거대한 소임에 외적으로 익숙해져서 자신도 모르게 타성에 젖어들게 된다. 그리하여 겸손과 신뢰를 바탕으로 자신을 저 높은 곳으로 들어 올리려는 노력 대신, 인간적인 “경험과 관행”의 범주안으로 안주해 버리고 마는 경향. 하나의 “요령과 기능”을 터득해 버리면서 보다 깊은 내면의 영성, 영적 가치의 풍부함을 외면하게 된다. 이것은 의식적이 아니라 여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되어가는것.


좀 심하게 말하면, 한국사회에서 30대에 벌써 제끼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 신부들뿐이다. (“유럽모임”- 느는 것은 몸무게와 취미실력뿐) 왜 그렇게 성송의 순수한 동기를 계속 유지해 나가는 것이 어려운지…




이렇게 우리는 사제․수도자 신분의 총체적 위기의 원인을 살펴보았다. 특별히 우리나라와 같이 성직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신자들의 일차적인 종교적 심성을 고려해야 한다. 참으로 신자들의 자율성, 자생적 활력이 부족하다 (신부가 있으면 잘되고, 없으면 안된다). 어떤 경우는 신부들도 별로 원하지 않는다. 사목하기 귀찮고 번거로우니까. 신자들이 ‘이거 좀 해보겠습니다’하고 건의하면 쓸데없는 소리로 묵살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풍토, 성직자에 대한 의존도가 유달리 높은 우리의 풍토를 인정한다면 한국교회 문제의 중심에는 성직자들이 있다. 주교를 포함한 사제들이 먼저 각성해야 한다. 특별히 신자들과 직접 접촉하는 본당 신부들의 각성이 시급하다 하겠다. 사제들의 어깨에 한국교회의 미래가 달려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우리들은 동료들 사이에서 대립을 피하고 형제애라는 대의아래 늘 일치를 보려고 애쓰며, 유별난 입장을 취해서 지나친 주의를 끌지 않도록 하는데 길들여져 있다. 따라서 종종 집단 정신에 젖어있고 조용하고 평화로움 삶, 순응주의에 길들여져 있는 다수는 분명한 목적을 가진 소수의 입장을 받아들이는데 익숙해져 있다. 집단정신을 받아들임으로써 판을 깨는 사람, 시대에 뒤진 사람, 개방적이지 않는 사람으로 보여지는 불명예를 피하는 것이다. 좋은게 좋은기다. 이런식.


물론 함께 결정한다는 것은 늘 근사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언제나 ‘소금과 누룩’을 잃어버릴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신학적 다원주의는 기실 많은 경우에 주관주의이고 동시에 개인주의일 수도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개인의 이성이란 사실, 경우에 따라 매우 다르고, 가장 예측하기 힘들고 가장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실제로 이 모든것이 성서 첫머리에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인간에 대한 유혹과 몰락의 핵심이 다음과 같은 선언적인 창세기 3,5에 담겨있다 : “너희는 하느님처럼 될 것이다.” 하느님처럼 된다는 것, 그것은 창조주의 법칙에 지배받지 않고 자기 자신이 창조자가 되고 자기자신이 주인이 되겠다는 것을 의미. 그러나 그 길의 끝에서 인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확실히 낙원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양한 요소는 분명히 유익하다. 하지만 근본적인 점에 있어서는 모든이의 일치가 반드시 필요하다.


가톨릭 교회의 중심은 두말할 것없이 주교, 7성사가 존재하는 곳. 주교의 임무가 무엇보다 문제의 핵심. 주교는 신앙의 스승이요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들의 목자로서 사도들의 직접적인 후계자하는 것이 전통적인 가르침.


① 주교는 관료주의적인 유혹을 직시해야 한다.


② 세상적인 시대정신과 사조, 대중적인 인기에 영합하는 타협을 직시해야 한다.


③ 주교는 비타협의 용기를 재인식하고 오직 진리를 증언해야 한다.


사도 바오로의 주교에 대한 훈계(2디모 4,1-5)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


“나는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앞에서 그대에게 엄숙히 명령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던지 꾸준히 전하고 참고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책망하고 훈계하고 격려하시오.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듣기 싫어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에 그들은 자기네 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마음에 맞는 교사들을 끌어 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꾸며낸 이야기에 마음을 팔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내며 복음 전하는 일에 힘을 다하여 그대의 사명을 완수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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