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이해-교회적 관점(일치운동에 관한 교령-배경)

 

2. 배경




19세기 옥스퍼드 운동(Oxford Movement: John Kebel, R.H. Froude 그리고 John Henry Newman 이 주도)은 잉글랜드 학자들로 하여금 초대교회의 가르침을 재평가하게 하고 부흥하게 하였다. 이 운동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대한 초대교회의 견해를 다시 회복할 수 있는  문을 열었다. 그들의 노력은 개신교의 현대적인 성서 연구와 역사 연구의 발전으로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1919년 에든버러에서 개최된 국제 회의는 모든 부문의 일치운동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 회의는 주로 선교사들의 경쟁으로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다루었다. 그후 40여 년 동안 많은 교회들은, 선교활동과 사회 사업을 하면서, 서로를 존중하는 입장으로부터 시작해서, 함께 기도하고 조직의 일치에 대해서 토의하는 등 어느 정도 서로 협동하는 단계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1948년에는 개신교들과 동방정교회들이 수 십 년 동안 협력한 결과로 세계교회 협의회(WCC)를 창설하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런 발전으로부터 스스로 물러서 있었다. 어떠한 토론이나 활동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세계교회 협의회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다소간의 교회일치 운동에 대한 관심의 흔적은 있다. 1921년에서부터 1926년까지 벨기에의 말리네스(Malines)에서는 성공회와 일치에 대한 토의가 있었다.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의 수사들이 서로 비슷한 공동체 안에서 함께 생활하는 수도회도 설립하였다. 교회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일치 주간’이 1909년에 시작되었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1927년 교황 비오 11의 회칙은 교회일치 운동을 강하게 반대하였다. 공식적인 가톨릭 교회의 태도는 회의적이었고 초연하였다. 이 것은 ‘두고 보자(wait and see)’는 것이 최선이라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20세기의 정치적 사회적 변화는 교회가 지금까지 숨겨 놓고 이용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견해나 개념을 받아들이도록 재촉하였다. 종교 개혁의 논쟁이 다시 연구되고 다른 시각에서 보기 시작했다. 신학자들은 서로 다른 종파들의 공식적인 가르침 사이에 놓여 있는 차이점들을 설명하고 명백하게 하려고 노력했으며, 그 점들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논쟁하려 들지 않았다. 이 운동은 조사나 고발 따위가 아니라 대화와 토론이었다. 교회일치 운동은 일치시키는 성령의 감도에서 온 것으로 보였다.


신학자들은 교회의 본성에 대해 성찰하기 시작했고 일치에 대한 가톨릭 신학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교황청은 일치 문제를 다루게 될 가톨릭 국제 회의의 설치를 1952년에 허가했다.


1960년 교황 요한 23세는 베아(Bea) 윌리브란트(Willebrands) 추기경 밑에 그리스도교 일치를 촉진할 사무국을 설치했고, 세계교회 협의회에 대표자를 파견했다. 캔터버리의 피셔(Fisher) 대주교는 역사적인 바티칸 방문을 통하여 교황 요한을 예방하였다. 이것이 공의회를 준비하는 단계에서부터 대표자들을 관련시키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들도 공의회에 초대되었다.


1960년대까지 가톨릭 신자들은 비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기도하거나 다른 교회의 장례식이나 예식에 참석하는 것이 금지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 도움이 되겠다.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이 사실은 바티칸 공의회의 새로운 태도로 말미암아 일반 신자들에게 어떤 변화를 몰고 오게 되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상징이 될 것이다.




이 글은 카테고리: 신학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