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배경
사목헌장의 배경은 공의회의 다른 세 가지 헌장을 점차 유도해 낸 운동들과 대조를 이룬다. 1891년 교황의 사회적 회칙 (노동헌장: Rerum Novarum: Leo 13)이후의 전통을 제외한다면, 이 헌장의 길을 닦는 전례운동이나 성서운동 같은 어떠한 운동도 없었다. 사목헌장의 기원은 오히려 모호하며, 교회가 오늘의 세상에 말을 거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 했던 것으로부터 서서히 자라 왔다고 봐야 한다.
직접적인 자극은 수에넨스(Suenens) 추기경으로부터 왔다. 1962년 12월 첫 회기의 마직막에 공의회는 교회의 내적인 실제의 본성에 대해서 뿐아니라 동시대의 세계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이것은 공의회의 원래의 의안이 아니었기에 미리 준비된 원문이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나머지 3년간을 소요했고 많고도 격렬한 논쟁 끝에 합의에 이르렀으며 1965년 공의회의 마지막 날 승인되었다.
1963년의 초안은 추상적인 개념의 영원한 원칙들만을 천명하는, 순전히 윤리적인 명령을 강조했었다. 그러나 어떤 주교들과 평신도 조언자들은 실제적인 윤리 문제에 있어서 좀더 대담하고 구체적인 접근을 요구하기도 했다. 공의회 기간 동안 두 교황의 행동은 이 대담한 접근을 지원하는 전례를 만들어 냈다.
“선의의 모든 사람들에게”
1963년 교황 요한 23세는 그의 회칙 ‘지상의 평화’를 반포했다. 이것은 1891년 레오 13세의 산업화된 사회의 윤리적인 문제에 대하여 최초로 언급한 ‘노동헌장’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것이다. 후임 교황들은 이것을 더욱 발전시켜 현대의 경제 체계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가톨릭의 견해를 제시한다.
교황 요한 23세는 이 가르침의 범위를 더욱 확대하였다. 이것은 가톨릭 신자들뿐만이 아니라 선의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말한 최초의 회칙이었다. 더 나아가서, 이 회칙은 개발 도상의 경제와 군비축소를 연계한 최초의 회칙이었다. 이 예언자적인 선언은 교황 요한 23세가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마지막 행동들 중의 하나였다.
뒤를 이어 교황 바오로 6세는 1965년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유엔(UN)을 방문했는데, 그는 저 개발 국가에 대한 원조와 전쟁의 종식을 열렬히 탄원하였다. 유엔에서의 그의 연설은 인간 사정의 중요 흐름에 관여하는 다시 젊어지는 교회의 목소리로 들렸다. 이것은 이제 더 이상 교회가 반 현대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었고 현대 세계와의 대화에 충실함을 의미한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 힘을 얻어, 사목헌장은 전세계 방방곡곡의 사람들에게 천명되었고, 오늘날 인간이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지구적인 견해를 표명한 것이다. 이것은 경제 문제에 대한 교황의 가르침을 발전시킨 것이고 군비축소에 대한 최근의 가르침도 역시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사목헌장은 심리학과 사회학에서 나온 결론들을 이용하여, 현대 문화와 태도를 깊이 있게 분석함으로써 더 멀리 나갔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자연법적 철학의 일종인 관습적인 가톨릭적 원리인 사회윤리학보다도 성서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사목헌장은 세속의 전문가들, 신학적 조언자들 그리고 주교들의 길고도 깊은 대화의 결실이다. 교황 바오로 자신도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매개자가 되었다.
이런 요란한 연구 때문에 이 문헌은 다른 문헌들만큼 매끄럽지 못하다. 어떤 문제는 완전하게 다루지 못했기 때문에 이 헌장이 하나의 교본처럼 그 가르침을 간단히 적용할 수 없다. 어찌되었던 이것은 교회 역사상 유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공의회에서 교회의 질서나 교의를 다루지 않고 세계 안에서 삶의 실제적인 일을 다룬 세계적인 공의회의 유일한 선언문이다.
“교회는 모든 세대를 통하여 그 시대의 특징을 탐구하고 복음의 빛으로 그것을 해명해 줄 의무를 지니고 있다.” (GS4)

2. 배경
사목헌장의 배경은 공의회의 다른 세 가지 헌장을 점차 유도해 낸 운동들과 대조를 이룬다. 1891년 교황의 사회적 회칙 (노동헌장: Rerum Novarum: Leo 13)이후의 전통을 제외한다면, 이 헌장의 길을 닦는 전례운동이나 성서운동 같은 어떠한 운동도 없었다. 사목헌장의 기원은 오히려 모호하며, 교회가 오늘의 세상에 말을 거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 했던 것으로부터 서서히 자라 왔다고 봐야 한다.
직접적인 자극은 수에넨스(Suenens) 추기경으로부터 왔다. 1962년 12월 첫 회기의 마직막에 공의회는 교회의 내적인 실제의 본성에 대해서 뿐아니라 동시대의 세계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이것은 공의회의 원래의 의안이 아니었기에 미리 준비된 원문이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나머지 3년간을 소요했고 많고도 격렬한 논쟁 끝에 합의에 이르렀으며 1965년 공의회의 마지막 날 승인되었다.
1963년의 초안은 추상적인 개념의 영원한 원칙들만을 천명하는, 순전히 윤리적인 명령을 강조했었다. 그러나 어떤 주교들과 평신도 조언자들은 실제적인 윤리 문제에 있어서 좀더 대담하고 구체적인 접근을 요구하기도 했다. 공의회 기간 동안 두 교황의 행동은 이 대담한 접근을 지원하는 전례를 만들어 냈다.
“선의의 모든 사람들에게”
1963년 교황 요한 23세는 그의 회칙 ‘지상의 평화’를 반포했다. 이것은 1891년 레오 13세의 산업화된 사회의 윤리적인 문제에 대하여 최초로 언급한 ‘노동헌장’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것이다. 후임 교황들은 이것을 더욱 발전시켜 현대의 경제 체계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가톨릭의 견해를 제시한다.
교황 요한 23세는 이 가르침의 범위를 더욱 확대하였다. 이것은 가톨릭 신자들뿐만이 아니라 선의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말한 최초의 회칙이었다. 더 나아가서, 이 회칙은 개발 도상의 경제와 군비축소를 연계한 최초의 회칙이었다. 이 예언자적인 선언은 교황 요한 23세가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마지막 행동들 중의 하나였다.
뒤를 이어 교황 바오로 6세는 1965년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유엔(UN)을 방문했는데, 그는 저 개발 국가에 대한 원조와 전쟁의 종식을 열렬히 탄원하였다. 유엔에서의 그의 연설은 인간 사정의 중요 흐름에 관여하는 다시 젊어지는 교회의 목소리로 들렸다. 이것은 이제 더 이상 교회가 반 현대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었고 현대 세계와의 대화에 충실함을 의미한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 힘을 얻어, 사목헌장은 전세계 방방곡곡의 사람들에게 천명되었고, 오늘날 인간이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지구적인 견해를 표명한 것이다. 이것은 경제 문제에 대한 교황의 가르침을 발전시킨 것이고 군비축소에 대한 최근의 가르침도 역시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사목헌장은 심리학과 사회학에서 나온 결론들을 이용하여, 현대 문화와 태도를 깊이 있게 분석함으로써 더 멀리 나갔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자연법적 철학의 일종인 관습적인 가톨릭적 원리인 사회윤리학보다도 성서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사목헌장은 세속의 전문가들, 신학적 조언자들 그리고 주교들의 길고도 깊은 대화의 결실이다. 교황 바오로 자신도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매개자가 되었다.
이런 요란한 연구 때문에 이 문헌은 다른 문헌들만큼 매끄럽지 못하다. 어떤 문제는 완전하게 다루지 못했기 때문에 이 헌장이 하나의 교본처럼 그 가르침을 간단히 적용할 수 없다. 어찌되었던 이것은 교회 역사상 유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공의회에서 교회의 질서나 교의를 다루지 않고 세계 안에서 삶의 실제적인 일을 다룬 세계적인 공의회의 유일한 선언문이다.
“교회는 모든 세대를 통하여 그 시대의 특징을 탐구하고 복음의 빛으로 그것을 해명해 줄 의무를 지니고 있다.” (GS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