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개념의 근본 요소-구원의 근본성사(구원의 보편 성사로서의 교회)

 

3.4 구원의 근본성사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루어진 하느님의 백성으로 이해한다면 이 양개념의 원천적인 일치에 대한 고찰도 의미가 있다. 우리는 교회를 위한 이 양개년의 종합을 ‘성사’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성사라는 말의 일차적인 의미는 자기자신이 아니라, 그 안에 본질을 포함하고 있으면서 자기자신을 넘어 부림받은 사실을 생각하는데 있다.




3.4.1 구원의 보편 성사로서의 교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여러 문헌에서 교히를 성사로 표현하고있다1). 일찍이 성서와 교부들의 시각대로 교회를 성사적인 범주안에 그 본질을 파악하려는 시도는 사뭇 중대한 의의를 가지는 교회론 발전의 진일보였다.


트리엔트공의회는 성사를 일컬어 “은총을 중개하고 가시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2)이라 하였다. 성사는 바로 ‘보이지 않는 은총의 보이는 형상’3)이해 되었다. 현대의 성사에 대한 고찰은 성사에 대한 트리엔트 정식을 비판하고 있다. 첫째로, 무엇보다 트리엔트 정식의 성사에 대한 고전적 정의는 성사의 수여자를 불분명하게 하고 있다.


성사는 표지라는 질서에 속하며 이 표지안에서 인격과 인격적 만남이 실현 되는 것이다. 표지는 또한 중재의 질서에 속한다. 이런 의미이ㅔ서 고전적 정의는 누가 성사의 수여자인지를 분명게 해주지 못한다.


둘째로, 누가 성사를 받는 사람인지를 불분명하게 하고 있다.


인간은 이 신적인 상징을 받는 사람이다. 하지만 하느님의 자기 양여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인간이어야 하는가하는 의문이 여전히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셋째로, 표지하는 말에 대한 이해의 차이이다. 대체로세가지 견해가 있었다.


① 은총의 그릇(waldenser, 발드교도. 프랑스 리옹에서 1176 petrus waldus에 의해 창설된 참회 및 청빈공동체. – 극도의 엄격주의 지향. 1184년 파문)- 이 견해는 성사가 수여자의 거룩한 정도에 따라 그 효과가 좌우된다는 약점.


② 하느님 안에있는 도구(R.Bellarmin.)-성사의 객관적 효력을 설명하기위해 성사를 도구로 이해하는 견해이나 하느님이 인간에게 도구를 이용해 작용하신다는 이 견해의 사고는 인격적 차원이 중시되는 오늘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③ 약속 – 이 견해는 성사란 지금, 여기에선 효력이 없으나 신앙안에서 종망\ㄹ에 이루어직 하나의 약속으로 주어진 하느님의 표지하는 사상이다. 이 견해는 성사 그 자체의 효력을 부인한다. 성사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효력을 내는 것이다.


오늘날 성사론은 수여자와 받는 자를 인격적인 관계로 이해한다. 성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인격성과 인간의 인격성에 관계한다. 오늘날 성사는 “인간과 하느님사이의 인격적 만남”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하느님과인간 사이의인격적인 만남의 객관적 효력을 어떻게 설명하느냐하는 문제가 현대 성사론의 주요한 과제라 하겠다. 19세기에 와서교회를 성사로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대두외었다. 교회를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그리고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복합적인 실체로 파악하려던 J.A.Mohler의 시도는 교회를 성사라는 모델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 이후로 수많은 학자들이 교회를 성사로 이해하게 된다4).


20세기에 들어와서 교회를 성사로 고찰하는 본격적인 연구가 전개 되었다. H.U.v.Balthasar (1905 -)은 1936년 Origenes(+253/54)의 사상을 토대로 교회를 성사로 고찰하였고 K.Rahner(1904-1984)는 교회를 참된 원성사(1955), 뿌리성사(1952,1955), 총체성사(Gesamtsakrament, 1954), 원성사(1960), 근본성사(1966), 세상 구원의 성사(1965)로 각각 칭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가장 큰 공적은 아무래도 O.Semmelroth에게 있다. 1953년에 출간된 그의 저작 ‘원성사로서의 교회(die kirche als ursakrament)’는 이러한 고찰의 대표적 결실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교회를 성사로 고찰하는 의미는 무엇보다 교회를 ‘일치의 성사’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Cyprian(+258)은 이렇게 고찰하고 있다.: “교회는 풀릴 수 없는 일치의 성사다. 누가 주교를 떠나 이교를 일으켜 사이비 주교를 세운다면, 거시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고 하느님께 대한 오해로 인한 명망이있을 뿐이다.”5) 여기에는 성사라는 말이 일치라는 말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사실그리스도교는 그 본질에서부터 일치의신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일치는 하느님과의 내적인 일치 또한 인간 상호간의일치를 지향하고 있다. 이 일치는 또한 공동체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의 일치를 의미하며 개인적이고 제도적인 차원의 일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둘째, 성사로 이해되는 교회의 특성은 바로 ‘그리스도론적’이라는 것이다. Augustinus(354-430)는 이렇게 고찰한다.: “하느님의 성사는 그리스도 이외에는 아무것도 또 누구도 아니다.”6) 교회를 성사로 보는 시각은 무엇보다 하느님과 그리스도부터 인한 교회릐 원천과 종속성을 보여준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종속성 안에서만 성사인 것이다. 모든 성사, 즉 교회의 모든 전례적 행위는 그리스도론적 구조를 가진다. 교회가 거행하는 성사는 교회의 성사성을 구체화하는 행위이며, 그리스도가 바로 원성사이고 교회는 그리스도에 종속된다.


셋째, 성사로서의 교회는 ‘가시적인 표지’이다. 교회는 하나의 표지인 것이지 교회 자체가 구원이 아니다. 성사로서의 교회, 하느님의 표지로서의 교회는 교회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넘어 자신의 과제를 실현해야하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교회는 순례를 계속하도 있고, 인간적인 요소는 바로 신적인 요소를 지향하며 그에 종속되어 있고, 가시적인 요소는 비가시족인 요소를 지시하는 한에서만 성사인 것이다. 교회의 세계 내에서의 가시성은 인간에의한 공동체, 인간을 위한 공동체로서 비가시적 신적인 실재의 표지요 보증인 것이다.


넷째, 이 거륵한 표지는 ‘전례적인 행위’를 요청하고 있고 전례적인 행위는 ‘공동체’를 요청한다. 거륵한 표지는 내적인 실재를 지향하고 있는데 내적인 샐재는 외적인 것으로부터 내면적인 것으로,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신적인 것으로, 시간적인 것으로부터 영원으로 그 효력을 드러내야한다.


교회는 또한 주님 영의 은총을 가시적인 공동ㅇ체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성사이다. 그러나 교회는 개별적이고 특별한 성사행위가 지금, 여기에서 인간들에게 효력을 줄 수 있도록 성사를 수여한다. 성사들은 성사로서의 교회가 자신을 실현하는 구체화이다.


다섯째, 성사로서의 교회의 기능은 ‘세상에서 하느님 구원계획을 위한 표지’이다. 한편으로 구언은 교회적으로 애해되고 양도되었으며, 또한편으로 이 구원을 실현해야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성사로 이해되는 교회론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교 동동체의 구체적인 책임에 대한 자각을 촉구하고 있다. 개개의 그리스도인은 그 삶에서 일상적인 증거를 통하여 그르스도와 결합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그것의 본질은 타인을 위한 존재, 즉 스스로를 위한 존재하는 타고난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타자를 위한 존재로 계속해서 새롭게 넘어감인 것이다. 여기서 선교의 본직고 의미가 드로난다. 교회는 현존하는 구원을 미리 보여주는 존재로 불림을 받은 것이고 선교는 본직적으로 교회가 표지라는 본질적 특성에 속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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