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여러가지 규범과 전제 : 그런데 우리가 이미 어떤 구체적인 제도에 속해 있고, 이것을 일단은 정당하다고 간주한다고 하자. 이 제도에 관해서 말해야 할 것은, 첫째로, 이 제도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 본질에 결코 모순되는 것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 제도가 교회적으로 구성된 원초의 그리스도교로부터의 역사적 계속성을 가능한 한 선명한 모습으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처음부터 분명히 고려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자신의 구체적인 교회 소속을 양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반성의 방법을 얻는 것이다.
5) 기원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연속성의 기준 : 오늘날 프로테스탄트의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가톨릭의 그리스도인들에도 다음과 같은 교회론적 상대주의를 전제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실제로 존재하는 교회 공동체, 여러 교회, 여러 교파는 다소 동등한 것으로 보아야 하고 구체적으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어느 교회에 속하든 그것은 오히려 단지 역사상의 우연성과 개인적인 기호의 문제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교회론적 상대주의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이 구체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찾는다고 하면 다음과 같은 기준을 확립할 수 있겠다. 즉 예수의 교회는 원시 그리스도교와 원시 그리스도교의 교회에 가장 가까이, 가장 명확한 연속성을 가지고 있는 곳에 가장 순수하게 발견할 수 있다는 기준이다.
6) 그리스도교의 근본 본질을 보전하기 위한 기준 : 우리가 자기의 구체적인 교회 신앙을 정당화하기 위해 받아들이는 간접적 방법의 둘째 기준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 본질, 우리가 자기의 종교적 실존 가운데서 은총으로서 경험한 것이 이 구체적인 교회에서 원칙적으로 부정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개인은 저마다 구체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자신의 구체적인 신앙의 경험속에서 그리스도교가 무엇인지를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미 영의 힘에 의해서 경험한 그러한 영으로 소생된 그리스도교의 현실이 존재하는 데서만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교회가 존재하는 것을 믿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적 교회와 공동체는 자기가 실존에서 경험하는 그리스도교의 근본 본질에 모순되지 않는 한에서 자기에게 있어서 진정한 예수의 교회로서 생각된다. 성령의 증언이야말로 자기의 구체적 삶에서 개인적으로 그리고 실존적으로 그리스도 신앙의 현실을 증거하는 것이다.
7) 객관적 기준 : 세째 기준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확실히 종교적인 공동체로 자기의 주관성에 의존하지 않는 존재로서 “교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드시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교의 종교성은 구체적이고 사회적인 자기 주관성에 의존하지 않는 존재로서 “교회”가 아니면 아직 종교가 아니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는 점이다.
8) 우리 상황에서의 이 기준의 적용 : 이상에서 말한 간접적인 정당화를 위한 현실적인 여러 기준을 여기서 우리 가톨릭 교회에 적용해 보자. 우리는 자기 양심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란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물음에 대답이 다른 그리스도인의 대답에 모순될지라도 그 사실을 진지하게 물어야 된다. 왜냐하면 [교회 일치에 관한 교령]도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교의 여러 원리에는 “진리의 위계”가 있어서 모든 진리가 실존적인 구원의 의의를 동등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고 그 자유의 복음을 안다는 것은 교회에 관한 어려운 물음에 대답하는 것보다 훨씬 관계가 깊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 신앙의 양심에 있어서 자기가 가톨릭이고, 계속해서 가톨릭 교회에 소속한다는 것은 과연 정당한 것인지를 자주 묻는다. 서구의 가톨릭 신자에게 있어서 이러한 상황 아래서 심각한 문제로서 다가오는 것은 프로테스탄트의 여러 교회일 것이다.
9) 가톨릭 교회의 역사적 연속성 : 이상의 여러 전제들을 놓고서 가톨릭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일 수 있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보자. 가톨릭 교회는 구체적으로 극히 소박한 소견에 따라서 과거의 교회와의 역사적인 연속성을 사도시대에 소급해서 가지고 있고, 그 연속성이 다른 그것보다 더 농후하고, 더 자명하고, 곧 인정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에서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종교개혁이후의 교회와 고대 교회와의 사이의 역사적 연속성은 다른 교회적 공동체, 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파에 비해 더 크고, 더 명확하고, 더 자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교회의 주교제도에 관해서, 이 주교제도의 보통 자명한 계승에 관해서 그리고 베드로의 이 직무에 관해서는 고대 교회와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의 가톨릭 교회와의 사이에 더 자명하고, 더 계속적이고, 더 자연스럽게 전해진 연속성이 성립해 있다고 말한다.
10) 신앙의 근본 본질의 보전의 기준 – 종교개혁에서의 논쟁 : 가톨릭 교회의 역사성 연속성에도 불구하고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탈퇴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확신에 의한 것이었다. 즉, 그것은 이 구체적인 교회가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방식에서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 은총에 의해서만 구원될 수 있다는 교회의 가르침의 유지를 소홀히 한, 또는 그 유지방식이 충분히 명확하지 않았다는 확신이었다. 세개의 논쟁점을 여기서 고찰하자. 그것은 곧 은총주의, 신앙지상주의, 성서지상주의이다. 이 세 가지는 원래 종교개혁의 중심을 이룬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이유를 가지고서 프로테스탄트의 그리스도인은 당시에서나 오늘에서나 설령 가톨릭 교회가 원래 더 명확하고, 더 자명한 역사적 연속성을 가진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해도 역시 자기 양심에 따라서 이 가톨릭 교회에 소속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11) 은총 지상주의 : “은총지상주의”라는 말이 의미하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인간이 정말로 자유롭고 절대지고한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구원을 발견하고,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과 인간간에 결코 “신인 협력설”과 같은 것이 있을 수 없고, 인간은 하느님의 자유로운 은총에 의하지 않고는 자신이 구원에 대해서 아무런 공헌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한다면 이것은 단순히 가톨릭교의 속에서 문제 없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일 뿐 아니라, 또한 인간의 하느님께 대한 관계에 관한 가톨릭교의에 절대적으로 소속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리스도교적인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이 인간에게 무상의 사랑에 의해서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이다. 트리엔트공의회는 인간의 구원의 역사에서 자기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때도 그것은 하느님이 능력과 행위에서 가능하게 된 자유이고 구원을 위해, 사랑을 위해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순종을 위해 하느님이 해방하신 자유이다. 이것은 가톨릭의 교의이고, 바로 트리엔트공의회에서 어쩌면 중세 후기의 “유명론”의 경향에 대해서 명확히 정의된 것이다.
12) 신앙 지상주의 : 이는 인간이 다만 신앙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는 교의로서 “은총지상주의”의 주관적 측면이다. 하느님의 은총만이 인간을 성화하는 것이고, 이 은총에 대해서 대답하는 행위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신앙”이외에는 없다. 이 신앙은 단순히 교의적인 이론이 아니다. 이 신앙은 하느님의 순수한 은총에 대한 희망에 의해서 내적으로 짊어져야 할, 그리고 성서가 인간을 의롭게 하고 성화하는 사랑이라고 일컫는 것에 의해서 내적으로 빛을 받아 완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톨릭의 가르침이다.
13) 성서 지상주의 : 여기서는 프로테스탄트 신앙과 가톨릭 신앙과의 교의의 차이를 더 쉽게, 다만 용어상의 차이 뿐만 아니라 내용적이고 정말로 사항에 입각한 차이로서 인식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가톨릭 교의는 전승과 가톨릭의 교도직의 필연성과 타당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성서는 역사적으로 보아 원시 그리스도교단의 신앙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성서는 교회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성서는 교회가 구축한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이 교회는 전통에서 생생하게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는 교회이고 그와 같은 성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전승과 성서의 그러한 내적관련이 없이는 성서의 정전이라는 것을 정말로 교회를 구축하는 것으로서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도 말할 수 있다. 전통과 성서의 내적 관련을 생각하지 않고는 성서가 교회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권위적인 의의도 결코 정당화되고 논증될 수 없는 것이다. 성서란 교회의 생활한 증언이 문자상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교회와 선교는 성서가 쓰여지기 전에 존재하고 그리고 근본적으로 성서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성서에 쓰여진 것은 원래 모두 사도들의 선교이며 그밖에 다른 어떤 전통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지상주의라는 원리를 지지할 수 있다. 가톨릭 그리스도인에게도 전통과 교도직의 이해는 오직 성서 안에서만 그 내용을 이해할 원칙과 “다른 것에서 규범을 받지 않는 규범”을 가진다. 그러므로 가톨릭이기 위해 성서지상주의라는 원리에 다른 주장을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것은 가톨릭 교의학에서 말해도 인정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정해야할 원리인 것이다.
14) 종교개혁의 세 원리와 가톨릭 신앙 : 이상의 세 원칙으로 말한 바와 같이 프로테스탄트적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적 관심사가 가톨릭 교회안에서 조금도 가질 수 없다는 따위의 이유는 가톨릭적 신앙에서도 띄지 않는다. 이 세 원칙은 그리스도교의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공식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므로 가톨릭 교회에서 신자들을 끌어내야 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15) 가톨릭 교회에 있어서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가지고 있는 긍정적 의의 :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양쪽에 많은 문제점과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고 해도,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괜찮다. 즉,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의 의지에 기초해서 그리스도교적인 것의 전체를 보존하여 잘 지니는 것을 고백하는 교회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다만 궁극적인 근본 인식으로 환원해서 그것만을 그리스도교 신앙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아니다. 의화의 은총의 궁극적이고 근본적인 사건에서만 살아가고 있으며 더욱이 이 궁극적이고 기초적인 것을 전개하고 역사적인 것, 사회적인 것, 반성된 것 모두를 포함하는 넓이를 지닌 교회이고자 한다. 그리고 그때 그 궁극적인 힘과 원천에서의 발전을 필연적으로 원초적인 것에서의 타락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16) 그리스도교의 기본적 일치와 분열의 의미에 대한 물음 :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교 여러 교회 사이에는 교회의 사회적인 차원에서 많은 공통점이 보이는 한, 교회의 분열을 넘어서 일치가 존재하는 것이 자명할 뿐 아니라 더욱이 그 이상의 일치가 존재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를 신앙에서 결합시키는 것이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보다 훨씬 근본적이고, 훨씬 결정적이고, 훨씬 구원에 있어서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의 분열은 하느님께서 허용했는가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사실 교회 분열에 대한 물음은 신학적으로는 더 근원적인 모습으로 하느님 자신에게 물어야 할 물음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분열에서의 하느님의 구원의 섭리를 새롭게 묻는다. 즉,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과 그리스도교적 실존의 본래의 근원적이고 기초적인 진리들과 현실들을 모두 교회 . 사회적으로 똑같은 상황에 있을 때에 비해, 그리고 모두가 하나의 같은 교회에 당연히 소속해 있을 때에 비해서, 더 명확히 체험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과연 그리스도교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 그리고 자기의 생활한 그리스도 신앙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적 태도는 교회 분열 속에서 미래에 열려진 채로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일단 분열의 상황에 있고, 개개인의 양심이 하느님의 인도에 따라서 교회적 분열 상태에 있어야 한다고 확신하는 한, 우리는 이 상황의 구원에 있어서의 적극적인 의의를 묻고 더욱이 이 상황에서 최선의 것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가능한 한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지닌 진정한 근원성을 더 잘 이해하도록 서로 촉구해야 한다.

4) 여러가지 규범과 전제 : 그런데 우리가 이미 어떤 구체적인 제도에 속해 있고, 이것을 일단은 정당하다고 간주한다고 하자. 이 제도에 관해서 말해야 할 것은, 첫째로, 이 제도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 본질에 결코 모순되는 것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 제도가 교회적으로 구성된 원초의 그리스도교로부터의 역사적 계속성을 가능한 한 선명한 모습으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처음부터 분명히 고려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자신의 구체적인 교회 소속을 양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반성의 방법을 얻는 것이다.
5) 기원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연속성의 기준 : 오늘날 프로테스탄트의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가톨릭의 그리스도인들에도 다음과 같은 교회론적 상대주의를 전제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실제로 존재하는 교회 공동체, 여러 교회, 여러 교파는 다소 동등한 것으로 보아야 하고 구체적으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어느 교회에 속하든 그것은 오히려 단지 역사상의 우연성과 개인적인 기호의 문제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교회론적 상대주의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이 구체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찾는다고 하면 다음과 같은 기준을 확립할 수 있겠다. 즉 예수의 교회는 원시 그리스도교와 원시 그리스도교의 교회에 가장 가까이, 가장 명확한 연속성을 가지고 있는 곳에 가장 순수하게 발견할 수 있다는 기준이다.
6) 그리스도교의 근본 본질을 보전하기 위한 기준 : 우리가 자기의 구체적인 교회 신앙을 정당화하기 위해 받아들이는 간접적 방법의 둘째 기준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 본질, 우리가 자기의 종교적 실존 가운데서 은총으로서 경험한 것이 이 구체적인 교회에서 원칙적으로 부정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개인은 저마다 구체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자신의 구체적인 신앙의 경험속에서 그리스도교가 무엇인지를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미 영의 힘에 의해서 경험한 그러한 영으로 소생된 그리스도교의 현실이 존재하는 데서만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교회가 존재하는 것을 믿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적 교회와 공동체는 자기가 실존에서 경험하는 그리스도교의 근본 본질에 모순되지 않는 한에서 자기에게 있어서 진정한 예수의 교회로서 생각된다. 성령의 증언이야말로 자기의 구체적 삶에서 개인적으로 그리고 실존적으로 그리스도 신앙의 현실을 증거하는 것이다.
7) 객관적 기준 : 세째 기준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확실히 종교적인 공동체로 자기의 주관성에 의존하지 않는 존재로서 “교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드시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교의 종교성은 구체적이고 사회적인 자기 주관성에 의존하지 않는 존재로서 “교회”가 아니면 아직 종교가 아니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는 점이다.
8) 우리 상황에서의 이 기준의 적용 : 이상에서 말한 간접적인 정당화를 위한 현실적인 여러 기준을 여기서 우리 가톨릭 교회에 적용해 보자. 우리는 자기 양심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란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물음에 대답이 다른 그리스도인의 대답에 모순될지라도 그 사실을 진지하게 물어야 된다. 왜냐하면 [교회 일치에 관한 교령]도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교의 여러 원리에는 “진리의 위계”가 있어서 모든 진리가 실존적인 구원의 의의를 동등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고 그 자유의 복음을 안다는 것은 교회에 관한 어려운 물음에 대답하는 것보다 훨씬 관계가 깊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 신앙의 양심에 있어서 자기가 가톨릭이고, 계속해서 가톨릭 교회에 소속한다는 것은 과연 정당한 것인지를 자주 묻는다. 서구의 가톨릭 신자에게 있어서 이러한 상황 아래서 심각한 문제로서 다가오는 것은 프로테스탄트의 여러 교회일 것이다.
9) 가톨릭 교회의 역사적 연속성 : 이상의 여러 전제들을 놓고서 가톨릭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일 수 있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보자. 가톨릭 교회는 구체적으로 극히 소박한 소견에 따라서 과거의 교회와의 역사적인 연속성을 사도시대에 소급해서 가지고 있고, 그 연속성이 다른 그것보다 더 농후하고, 더 자명하고, 곧 인정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에서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종교개혁이후의 교회와 고대 교회와의 사이의 역사적 연속성은 다른 교회적 공동체, 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파에 비해 더 크고, 더 명확하고, 더 자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교회의 주교제도에 관해서, 이 주교제도의 보통 자명한 계승에 관해서 그리고 베드로의 이 직무에 관해서는 고대 교회와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의 가톨릭 교회와의 사이에 더 자명하고, 더 계속적이고, 더 자연스럽게 전해진 연속성이 성립해 있다고 말한다.
10) 신앙의 근본 본질의 보전의 기준 – 종교개혁에서의 논쟁 : 가톨릭 교회의 역사성 연속성에도 불구하고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탈퇴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확신에 의한 것이었다. 즉, 그것은 이 구체적인 교회가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방식에서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 은총에 의해서만 구원될 수 있다는 교회의 가르침의 유지를 소홀히 한, 또는 그 유지방식이 충분히 명확하지 않았다는 확신이었다. 세개의 논쟁점을 여기서 고찰하자. 그것은 곧 은총주의, 신앙지상주의, 성서지상주의이다. 이 세 가지는 원래 종교개혁의 중심을 이룬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이유를 가지고서 프로테스탄트의 그리스도인은 당시에서나 오늘에서나 설령 가톨릭 교회가 원래 더 명확하고, 더 자명한 역사적 연속성을 가진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해도 역시 자기 양심에 따라서 이 가톨릭 교회에 소속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11) 은총 지상주의 : “은총지상주의”라는 말이 의미하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인간이 정말로 자유롭고 절대지고한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구원을 발견하고,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과 인간간에 결코 “신인 협력설”과 같은 것이 있을 수 없고, 인간은 하느님의 자유로운 은총에 의하지 않고는 자신이 구원에 대해서 아무런 공헌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한다면 이것은 단순히 가톨릭교의 속에서 문제 없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일 뿐 아니라, 또한 인간의 하느님께 대한 관계에 관한 가톨릭교의에 절대적으로 소속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리스도교적인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이 인간에게 무상의 사랑에 의해서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이다. 트리엔트공의회는 인간의 구원의 역사에서 자기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때도 그것은 하느님이 능력과 행위에서 가능하게 된 자유이고 구원을 위해, 사랑을 위해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순종을 위해 하느님이 해방하신 자유이다. 이것은 가톨릭의 교의이고, 바로 트리엔트공의회에서 어쩌면 중세 후기의 “유명론”의 경향에 대해서 명확히 정의된 것이다.
12) 신앙 지상주의 : 이는 인간이 다만 신앙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는 교의로서 “은총지상주의”의 주관적 측면이다. 하느님의 은총만이 인간을 성화하는 것이고, 이 은총에 대해서 대답하는 행위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신앙”이외에는 없다. 이 신앙은 단순히 교의적인 이론이 아니다. 이 신앙은 하느님의 순수한 은총에 대한 희망에 의해서 내적으로 짊어져야 할, 그리고 성서가 인간을 의롭게 하고 성화하는 사랑이라고 일컫는 것에 의해서 내적으로 빛을 받아 완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톨릭의 가르침이다.
13) 성서 지상주의 : 여기서는 프로테스탄트 신앙과 가톨릭 신앙과의 교의의 차이를 더 쉽게, 다만 용어상의 차이 뿐만 아니라 내용적이고 정말로 사항에 입각한 차이로서 인식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가톨릭 교의는 전승과 가톨릭의 교도직의 필연성과 타당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성서는 역사적으로 보아 원시 그리스도교단의 신앙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성서는 교회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성서는 교회가 구축한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이 교회는 전통에서 생생하게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는 교회이고 그와 같은 성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전승과 성서의 그러한 내적관련이 없이는 성서의 정전이라는 것을 정말로 교회를 구축하는 것으로서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도 말할 수 있다. 전통과 성서의 내적 관련을 생각하지 않고는 성서가 교회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권위적인 의의도 결코 정당화되고 논증될 수 없는 것이다. 성서란 교회의 생활한 증언이 문자상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교회와 선교는 성서가 쓰여지기 전에 존재하고 그리고 근본적으로 성서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성서에 쓰여진 것은 원래 모두 사도들의 선교이며 그밖에 다른 어떤 전통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지상주의라는 원리를 지지할 수 있다. 가톨릭 그리스도인에게도 전통과 교도직의 이해는 오직 성서 안에서만 그 내용을 이해할 원칙과 “다른 것에서 규범을 받지 않는 규범”을 가진다. 그러므로 가톨릭이기 위해 성서지상주의라는 원리에 다른 주장을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것은 가톨릭 교의학에서 말해도 인정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정해야할 원리인 것이다.
14) 종교개혁의 세 원리와 가톨릭 신앙 : 이상의 세 원칙으로 말한 바와 같이 프로테스탄트적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적 관심사가 가톨릭 교회안에서 조금도 가질 수 없다는 따위의 이유는 가톨릭적 신앙에서도 띄지 않는다. 이 세 원칙은 그리스도교의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공식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므로 가톨릭 교회에서 신자들을 끌어내야 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15) 가톨릭 교회에 있어서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가지고 있는 긍정적 의의 :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양쪽에 많은 문제점과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고 해도,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괜찮다. 즉,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의 의지에 기초해서 그리스도교적인 것의 전체를 보존하여 잘 지니는 것을 고백하는 교회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다만 궁극적인 근본 인식으로 환원해서 그것만을 그리스도교 신앙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아니다. 의화의 은총의 궁극적이고 근본적인 사건에서만 살아가고 있으며 더욱이 이 궁극적이고 기초적인 것을 전개하고 역사적인 것, 사회적인 것, 반성된 것 모두를 포함하는 넓이를 지닌 교회이고자 한다. 그리고 그때 그 궁극적인 힘과 원천에서의 발전을 필연적으로 원초적인 것에서의 타락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16) 그리스도교의 기본적 일치와 분열의 의미에 대한 물음 :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교 여러 교회 사이에는 교회의 사회적인 차원에서 많은 공통점이 보이는 한, 교회의 분열을 넘어서 일치가 존재하는 것이 자명할 뿐 아니라 더욱이 그 이상의 일치가 존재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를 신앙에서 결합시키는 것이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보다 훨씬 근본적이고, 훨씬 결정적이고, 훨씬 구원에 있어서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의 분열은 하느님께서 허용했는가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사실 교회 분열에 대한 물음은 신학적으로는 더 근원적인 모습으로 하느님 자신에게 물어야 할 물음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분열에서의 하느님의 구원의 섭리를 새롭게 묻는다. 즉,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과 그리스도교적 실존의 본래의 근원적이고 기초적인 진리들과 현실들을 모두 교회 . 사회적으로 똑같은 상황에 있을 때에 비해, 그리고 모두가 하나의 같은 교회에 당연히 소속해 있을 때에 비해서, 더 명확히 체험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과연 그리스도교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 그리고 자기의 생활한 그리스도 신앙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적 태도는 교회 분열 속에서 미래에 열려진 채로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일단 분열의 상황에 있고, 개개인의 양심이 하느님의 인도에 따라서 교회적 분열 상태에 있어야 한다고 확신하는 한, 우리는 이 상황의 구원에 있어서의 적극적인 의의를 묻고 더욱이 이 상황에서 최선의 것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가능한 한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지닌 진정한 근원성을 더 잘 이해하도록 서로 촉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