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3. 2. 1. 직무 사제직의 존재론적 근거
신약성서에서 사도들을 사제라고 부른 예는 없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성체성사 거행을 명하셨고(루가 22, 19), 사람의 죄를 사하는 권한을 주셨고(요한 20, 21-13) 세례를 주라고 명하셨다(마태 28, 19). 사도들은 신자들에게 안수로써 성령을 받게 하였고(사도 8, 14-17) 디모테오에게 안수로써 감독의 직무를 주었다(2디모 1, 6). 주님과 사도들의 이러한 처사는 모든 신자들에게 공통된 사제직 외에 특수한 권한을 특정인에게 부여하였음을 증언한다. 초대교회의 끌레멘스, 이냐시오 교부들과 디다케 문헌등이 한결 같이 증언하는 대로 교회 안에 특수한 직무 사제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일한 주님은 신자들이 한 몸에 결합되도록……신자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을 성직자로 세우셨다. 성직자는 신도 사회에서 제사를 봉헌하고 죄를 사하는 거룩한 신품권을 가지고,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공적 사제직을 수행한다.”1) 직무 사제직을 공통 사제직에서 구별지우는 특징은 이 직무 사제직을 수행하는 사제가 누리는 신품권에 있다.2)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세례와 견진 그리고 신품성사를 유효하게 받는이는 누구나 성사적 인호를 받는다. “성세, 견진, 신품성사를 받는 이에게는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어떤 영적인 표지인 불멸의 인호가 영혼에 새겨진다. 그러므로 이 세 성사는 동일한 인물에게 반복해서 집전되지 않는다. 나머지 네 성사는 인호를 주지 않기 때문에 반복해서 집전될 수 있다.”3) 그러므로 인호란 하나의 영적인 표지이며, 이를 받는 사람이 누리는 영예를 특징있게 표시하는 어떤 것이다. 성사적 표지는 유효하게 받은 성사에서 나오는 결과이다. 예를 들면, 성세 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성세의 인호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며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신비체에 가입하여 그 분과 합체된다.4)
따라서 사제적 인호는 신품 성사를 받는 사제의 영혼에 새겨지는 특별한 표식이다. “신품성사를 통하여 사제는 대사제이시며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와 결합되는 독특한 존재론적 결속 관계를 맺고 있다”5), “신품성사에 의하여 사제는 성신의 도유로써 특별한 영적 인호가 새겨지고, 이로써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행동할 수 있도록 사제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담게된다”6), “신품성사 중에 사제는 성령의 날인을 받는데 성령께서는 그를 언제나 그리스도와 교회의 봉사자가 되도록 인호를 새겨준다.”7)
신품성사를 통하여 직무 사제직으로 불리움 받는다는 것, 곧 축성되어 사제가 된다는 것은 그에게 사제적 인호가 새겨짐을 의미한다. 사제적 인호는 성부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유비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성부께서 거룩하게 하시고, 세상에 보내신”(요한 10, 36) 분이신 그리스도는 기름이 발리운 분이시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께서 명하신 제의적이며 구원적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축성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이사 61, 1-2)을 당신께 적용한다. “나에게 기름을 발랐기 때문에(도유로써 나를 축성했기 때문에) 주의 성신이 나에게 임하시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저하고 잡힌 이들에게 자유를 주고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기 위하여 나를 보내셨다”(루가 4, 16-21 참조). 즉 서품된 이들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명에 참여하는 것이며, 이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자국이 찍혀지는” 것이며, 신품성사를 통하여 성신이 서품 후보자에게 내리는 것을 통해 기름이 발리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그리스도처럼 “나를 보는 사람은 성부를 보는 것이다”(요한 14, 9)라고 말하는 것이며, 또 축성된 사람 역시 객관적으로 “나를 보는 사람을 바로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8) 인호란 닮은 모습의 표지이다. 이렇게하여 사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세워진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가 성부를 계시하신 것처럼, 사제가 그리스도를 계시할 사명이 유래하는 것이다.9)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명과 축성에 대한 참여는 영세와 견진에서 적용되는 인호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며, 단순히 다른 종류의 인호라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된다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리스도를 그대로 닮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신품성사를 받기 위해 전제되는 세례와 견진성사에서 박히는 인호는 공통 사제직에서 계속되는 것이고,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고유한 사도적 역동성을 가능케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품성사에서 박히는 인호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대리로 행동할 수 있도록 사제이신 그리스를 닮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대한 참여는 단순히 등급으로만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구분이 되는 것이다.10) 따라서 사제가 특별한 방법으로 ‘제2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로 지칭될 수 있는 것도 단순히 교회법적 위임이란 의미에서가 아니라, 사제의 영혼 안에 새겨진 대사제요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형상(figura) 때문에 그러하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행동한다.11) 따라서 사제가 수행하는 권한의 근거는 사제의 인호에서 나온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다.12)
인호는 하느님의 철회할 수 없는 선물이다. 그래서 “이 축성은 한 번 받았으면 부당할지라도 결코 해제되는 것이 아니다.”13) 이 인호는 사제를 다른 이들과 구분은 시키지만 분리시키지는 않는다. 공의회는 사제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제들은 그 성소와 서품으로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 어떤 의미로는 선택되어 있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백성이나 어떤 인간에게서 분리되어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사제를 선택하시어 맡기신 일에 온전히 헌신하기 위해서이다.”14) 그리스도의 인격을 대리하여 온 백성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봉사하는 사제는 미사를 비롯한 성사를 집전하는 협의의 사제직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예언직과 사제직과 왕직을 특수하게 수행하는 직무이기에, 성사 집전과 아울러 하느님의 백성을 형성하기 위하여 말씀을 선포하고 백성을 지도하는 등의 광의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제교령 4항에서 6항에 걸쳐 이런 관점에서 직무 사제직의 임무를 설명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