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평신도들의 모습-영성생활(하)

 

(3) 동정과 독신생활


동정과 독신생활은 하늘 나라를 위한 것으로 하느님 나라의 표지가 된다(마태 19,10-12). 전통적 한국 문화에 있어 출산으로 가문을 이어가는 것은 당시 매우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결혼을 포기하는 동정이나 독신생활은 이해되거나 용납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봉헌 생활을 실천하였다. 이는 자신들을 위한 은총의 생활을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이웃에 봉사하고 애덕을 실천하기 위하여, 특히 전교 활동을 하기 위한 것으로 당시 결혼을 윤리적 의무로 간주하던 유교적 사고방식에 따라 그리스도교적 동정성을 반박하던 박해자들까지도 다른 덕들과 함께 그리스도교 정덕에 대해 감탄하였다.1)


1801년 신유박해때 교수형으로 순교한 배마티아는 1799년의 순교한 배프란치스꼬의 동생으로, 입교하던 때부터 사제의 영입을 위해 줄곧 노력하여 실제로 여러 번 북경 왕래를 자원하여 다녀 오기도 하였다. 그의 강직한 성격과 희생정신과 열심으로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던 그는 모든 쾌락을 끊어 버리고 아내와도 절대적인 금욕 생활을 하며 살았다.2)


역시 1801년 4월초 순교한 황주 고을에 살던 심바르바라라는 동정녀는 성인들의 생애에서 보았던 위대한 모범에 감동하여 결혼을 단념하고 하느님께 자신의 동정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자기 집에 숨어 살며 열심한 모범으로 신앙 생활을 하다가 자수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19세의 나이로 참수 당함으로 순교와 동정의 두 가지 영관(榮冠)을 받게 되었다.3)


윤점혜(尹店惠) 아가다는 1795년에 순교한 윤유일 바오로의 사촌 누이였다. 그는 향반으로 태어나 양근 고을에서 살았다. 윤아가다는 천주교를 알자 곧 자기를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기를 원하여 동정의 서원을 하고 나서 집안에서 그의 거룩한 결심을 방해할 것을 염려하여 몰래 남자옷을 지어 입고 삼촌들 중 한사람의 집으로 도망갔다.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다가 윤아가다는 가족들에게로 돌아왔다. 그의 영웅적 결심을 조금도 이해 못하는 가족들의 간청에도 그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사촌 오빠 윤바오로가 외국에서 신부를 들여왔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받았기에 아가다 역시 고통을 당하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강완숙 골롬바의 집으로 가서 강골롬바가 자기집에 모아 가르치는 처녀들을 헌신적으로 가르쳤고 자기 성화에도 힘썼다. 윤아가다는 동정 성모의 발현을 보았으나 지극한 겸손으로 이러한 은혜가 실제적인 것이라 감히 믿지 못하였고, 선교사 신부에게 그가 본 것과 똑같은 상본을 보고 나서야 걱정이 가라앉았다. 윤아가다는 항상 자신의 주보 성녀 아가다처럼 순교하기를 원의 하였는데 2월 말경 대 박해가 일어난 초기에 윤 아가다는 강골롬바와 함께 체포되어 그와 같이 옥에 갇혀 고통을 겪고 강완숙 골롬바가 처형된지 이틀 뒤에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최후 순간까지 보여 준 그녀의 용기와 덕행은 많은 교우들 뿐 아니라 외교인에게 까지 강렬하고 유익한 인상을 주었다.4)


이밖에도 숱한 동정자들이 많았으나 특히 이순이(李順伊) 누갈다와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의 맏아들 유중철(柳重哲) 요한 동정부부의 모범은 하늘나라의 표지로 자신의 집과 온 이웃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겼으며,5) 1784년 천진암 강학회가 있기 훨씬 전 예산에 살고 있던 홍유한이란 사람은 1770년 천주교 서적을 발견하여 칠극에 의해 수덕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고적한 곳에서 묵상과 기도에 전념하기 위하여 소백산으로 들어가 13년 동안을 지냈다고 한다. 그는 이처럼 속세의 모든 일을 물리치고 절제의 생활을 실천한 것이다.6) 그외 동정과 독신을 지킨 사람은 1834년 전까지만 해도 심아기(바르바라), 정순애(바르바라), 조명수(베드로)와 권 데레사 부부등이 있다.7) 이처럼 교부들의 가르침과 초세기 동정 순교자들이 모범을 고려하면서 한국의 동정인들의 생활을 살펴볼 때 그 안에서 정통성과 신빙성을 확인할 수 있다.8)




(4) 순교


순교는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과 고대 순교 성인들의 모범에 의하면 하느님에 대한 최고 사랑의 표현으로 복음에 대한 가장 큰 증거이다. 한국의 순교자들은 순교의 일차적이고 기본적인 측면이 그리스도의 모방과 수난의 참여임을 올바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순교가 자신들을 위해 큰 은총일뿐 아니라,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다른이들을 위한 복음화와 성화를 위하여 교회에 풍요로운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임을 확신하였다. 또한 그들은 목숨까지 바치며 주님을 증거할 수 있다는 것이 자신들의 덕이나 힘, 또는 인간적인 열정이나 영웅심으로 가능한 것이 아님을 깨달아 오히려 자신들의 연약함을 자각하고 겸손되이 인정하면서 그들 안에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은총이 충만할 때 순교가 가능함을 고백하며, 항상 성령의 특별한 힘을 간구했던 것이다. 한국교회는 김범우의 순교를 시작으로 철저히 수많은 순교자들의 고귀한 피의 증거위에 세워진 교회이다. 신해박해, 신유박해, 을해박해 등을 통해 백 삼십 여명에 이르는 순교자가 나오는데, 그들은 당시 사회 상황으로 보아 이미 영세를 받고 입교하는 순간부터 믿음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세웠고, 믿음을 따라사는 그 자체가 순교를 뜻하였기에 그들의 나날이 순교였다고 할 수 있다.


나이 어린 소년으로부터 교육을 받을 기회가 전혀 없었던 시골의 노파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자세는 이미 초세기 순교자들 안에서 볼 수 있었던 두 가지 근본적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즉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 15,5)는 주님의 말씀과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필립 4,13)라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확신이다. 그들은 고통 중에 주님의 도움을 체험했고,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통하여 승리하였다.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성령의 자비로운 도우심으로 신뢰하고 하느님의 뜻에 온통 자신을 맡겼기때문이다. 이처럼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순교는 참으로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순교처럼 그리스도교적임을 알게 한다. 실로 고대 교회순교자들을 견고하게 하신 같은 성령께서 순응하던 한국인들에게 용기를 주셨기 때문이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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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3) 동정과 독신생활

    동정과 독신생활은 하늘 나라를 위한 것으로 하느님 나라의 표지가 된다(마태 19,10-12). 전통적 한국 문화에 있어 출산으로 가문을 이어가는 것은 당시 매우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결혼을 포기하는 동정이나 독신생활은 이해되거나 용납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봉헌 생활을 실천하였다. 이는 자신들을 위한 은총의 생활을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이웃에 봉사하고 애덕을 실천하기 위하여, 특히 전교 활동을 하기 위한 것으로 당시 결혼을 윤리적 의무로 간주하던 유교적 사고방식에 따라 그리스도교적 동정성을 반박하던 박해자들까지도 다른 덕들과 함께 그리스도교 정덕에 대해 감탄하였다.1)

    1801년 신유박해때 교수형으로 순교한 배마티아는 1799년의 순교한 배프란치스꼬의 동생으로, 입교하던 때부터 사제의 영입을 위해 줄곧 노력하여 실제로 여러 번 북경 왕래를 자원하여 다녀 오기도 하였다. 그의 강직한 성격과 희생정신과 열심으로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던 그는 모든 쾌락을 끊어 버리고 아내와도 절대적인 금욕 생활을 하며 살았다.2)

    역시 1801년 4월초 순교한 황주 고을에 살던 심바르바라라는 동정녀는 성인들의 생애에서 보았던 위대한 모범에 감동하여 결혼을 단념하고 하느님께 자신의 동정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자기 집에 숨어 살며 열심한 모범으로 신앙 생활을 하다가 자수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19세의 나이로 참수 당함으로 순교와 동정의 두 가지 영관(榮冠)을 받게 되었다.3)

    윤점혜(尹店惠) 아가다는 1795년에 순교한 윤유일 바오로의 사촌 누이였다. 그는 향반으로 태어나 양근 고을에서 살았다. 윤아가다는 천주교를 알자 곧 자기를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기를 원하여 동정의 서원을 하고 나서 집안에서 그의 거룩한 결심을 방해할 것을 염려하여 몰래 남자옷을 지어 입고 삼촌들 중 한사람의 집으로 도망갔다.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다가 윤아가다는 가족들에게로 돌아왔다. 그의 영웅적 결심을 조금도 이해 못하는 가족들의 간청에도 그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사촌 오빠 윤바오로가 외국에서 신부를 들여왔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받았기에 아가다 역시 고통을 당하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강완숙 골롬바의 집으로 가서 강골롬바가 자기집에 모아 가르치는 처녀들을 헌신적으로 가르쳤고 자기 성화에도 힘썼다. 윤아가다는 동정 성모의 발현을 보았으나 지극한 겸손으로 이러한 은혜가 실제적인 것이라 감히 믿지 못하였고, 선교사 신부에게 그가 본 것과 똑같은 상본을 보고 나서야 걱정이 가라앉았다. 윤아가다는 항상 자신의 주보 성녀 아가다처럼 순교하기를 원의 하였는데 2월 말경 대 박해가 일어난 초기에 윤 아가다는 강골롬바와 함께 체포되어 그와 같이 옥에 갇혀 고통을 겪고 강완숙 골롬바가 처형된지 이틀 뒤에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최후 순간까지 보여 준 그녀의 용기와 덕행은 많은 교우들 뿐 아니라 외교인에게 까지 강렬하고 유익한 인상을 주었다.4)

    이밖에도 숱한 동정자들이 많았으나 특히 이순이(李順伊) 누갈다와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의 맏아들 유중철(柳重哲) 요한 동정부부의 모범은 하늘나라의 표지로 자신의 집과 온 이웃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겼으며,5) 1784년 천진암 강학회가 있기 훨씬 전 예산에 살고 있던 홍유한이란 사람은 1770년 천주교 서적을 발견하여 칠극에 의해 수덕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고적한 곳에서 묵상과 기도에 전념하기 위하여 소백산으로 들어가 13년 동안을 지냈다고 한다. 그는 이처럼 속세의 모든 일을 물리치고 절제의 생활을 실천한 것이다.6) 그외 동정과 독신을 지킨 사람은 1834년 전까지만 해도 심아기(바르바라), 정순애(바르바라), 조명수(베드로)와 권 데레사 부부등이 있다.7) 이처럼 교부들의 가르침과 초세기 동정 순교자들이 모범을 고려하면서 한국의 동정인들의 생활을 살펴볼 때 그 안에서 정통성과 신빙성을 확인할 수 있다.8)


    (4) 순교

    순교는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과 고대 순교 성인들의 모범에 의하면 하느님에 대한 최고 사랑의 표현으로 복음에 대한 가장 큰 증거이다. 한국의 순교자들은 순교의 일차적이고 기본적인 측면이 그리스도의 모방과 수난의 참여임을 올바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순교가 자신들을 위해 큰 은총일뿐 아니라,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다른이들을 위한 복음화와 성화를 위하여 교회에 풍요로운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임을 확신하였다. 또한 그들은 목숨까지 바치며 주님을 증거할 수 있다는 것이 자신들의 덕이나 힘, 또는 인간적인 열정이나 영웅심으로 가능한 것이 아님을 깨달아 오히려 자신들의 연약함을 자각하고 겸손되이 인정하면서 그들 안에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은총이 충만할 때 순교가 가능함을 고백하며, 항상 성령의 특별한 힘을 간구했던 것이다. 한국교회는 김범우의 순교를 시작으로 철저히 수많은 순교자들의 고귀한 피의 증거위에 세워진 교회이다. 신해박해, 신유박해, 을해박해 등을 통해 백 삼십 여명에 이르는 순교자가 나오는데, 그들은 당시 사회 상황으로 보아 이미 영세를 받고 입교하는 순간부터 믿음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세웠고, 믿음을 따라사는 그 자체가 순교를 뜻하였기에 그들의 나날이 순교였다고 할 수 있다.

    나이 어린 소년으로부터 교육을 받을 기회가 전혀 없었던 시골의 노파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자세는 이미 초세기 순교자들 안에서 볼 수 있었던 두 가지 근본적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즉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 15,5)는 주님의 말씀과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필립 4,13)라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확신이다. 그들은 고통 중에 주님의 도움을 체험했고,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통하여 승리하였다.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성령의 자비로운 도우심으로 신뢰하고 하느님의 뜻에 온통 자신을 맡겼기때문이다. 이처럼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순교는 참으로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순교처럼 그리스도교적임을 알게 한다. 실로 고대 교회순교자들을 견고하게 하신 같은 성령께서 순응하던 한국인들에게 용기를 주셨기 때문이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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