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의 육화

1) 계약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계약을 맺으셨다. 예수 안에서 이런 계약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예수가 계약에 대해서 말하는 장면이 있다. 마르 14,24 “이것은 나의 피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에서 당신 자신과 계약을 동일시하고 있다. 마태 26,28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예수가 ‘나의’라고 할때, 출애 24,8에 보면 “모세는 피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뿌려주며 ‘이것은 야훼께서 너희와 계약을 맺으시는 피다. 그리고 이 모든 말씀은 계약의 조문이다’하고 선언하였다.” 여기서 나오는 계약의 피, 모세가 사용한 형식을 따르고 있다. 계약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설정된 단순한 관계를 넘어서 하나의 위격 자체로 나타나고 있다. 계약이 그리스도와 동일시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계약 자체이시다.
바오로 혹은 루가가 이야기하는 성체성사 설정에 대한 문제 1고린 11,25; 루가 22,20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 여기서 원문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잔과 계약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예수 자신도 계약과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새로운 계약이라는 것은 과거의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을 넘어서는 의미에서 새로운 계약이다. 그러나 계약을 인격화해서 나와 계약을 동일시하는 마르코와 마태오의 의미가 더 정확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의 있었던 모든 계약은 이제 계약 자체이신 예수 안에서만 그 의미를 찾게 된다. 구약에서 선포된 것이 당신 자신 안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당신 안에서 구약의 역사가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지금까지 구약에서 얘기한 계약이 모두 당신 안에 현존하는 것이다. 여기서 유일한 계약, 새로운 계약은 외형 뿐 아니라 예수 안의 존재론적인 고찰, 계약의 내적인 성취, 역사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계약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히브 9,15에서는 그리스도를 계약의 새로운 중재자로 이야기한다. 당신 자신을 계약으로서 이야기함으로써 이런 중재자를 초월한 분이다. 계약의 현실 자체가 당신 안에 있는 것이다. 이 계약은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을 초월하는 또 다른 계약이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계약이다. 이 계약 안에서 두 가지 의미를 나타낼 수 있는데 예수는 계약 자체이시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계약이다. 왜냐하면 계약은 첫째로 하느님의 업적이고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주어지는 하느님의 자신을 내어주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나의 계약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계약은 단순한 이스라엘 백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에게 확장되어 있다. 많은 이를 위한 피를 흘리는 것이다. 즉 전체 인류에게까지 이 계약이 확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이를 위해서 흘린 계약의 피는 전체 인류에게까지 당신의 계약을 확장시키고 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계약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한다. 예수 안에 인격화된 계약 안에서 이제 계약은 예수 안에 현존하는 것이다. 예수에 이르기까지 하느님 백성과 이스라엘 계약을 선포하는 이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와 함께 지금까지의 모든 계약이 완전히 실현된다. 당신 자신을 계약으로 지칭하면서 하느님과 인류를 일치시키는 계약으로 당신을 제시하신다. 신랑이라는 표현을 살펴보면 이런 것이 더 자세히 드러난다.

2) 신랑
구약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혼인의 계약을 맺는 것으로 나타낸다. 예수는 당신 자신을 신랑으로 제시한다. 요한 복음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 자신도 예수를 신랑으로 제시한다. 요한 3,29 “신부를 맞을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도 옆에 서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가 들리면 기쁨에 넘친다. 내 마음도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예수가 단식의 질문을 받을 때 이런 세례자 요한과 같은 말을 마르 2,19에서 제시하신다 ;잔치집에 온 신랑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 단식을 할 수 있겠느냐?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온다. 그 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을 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모든 논지는 예수가 신랑이라는데 기초하고 있다. 제자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혼인을 상기시키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이다. 예수는 신랑으로서의 현존을 강조한다. 동시에 앞으로 친구들을 슬프게 할 당신의 不在를 상기시키고 있다. 이런 예수의 주장은 이와 유사한 여러 상황에서 확인될 수 있다. 하늘나라를 왕이 준비한 혼인잔치에 비유하고 있다 (마태 22,2). 신랑을 마중 나가는 처녀들,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에 비유하고 있다. 가나안 혼인 잔치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혼인 잔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더 나은 술을 제공하심으로써 그 혼인 잔치에 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시고자 하는 첫번째 기적은 상징적인 가치를 가진다. 예수는 신랑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도 신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당신 자신을 신랑으로서만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것은 구약과 이스라엘 관계를 볼 때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합당한 신부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 하느님께, 예수께 충실한 신부가 있게 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호세 2장).
바오로는 이런 모습을 교회에 적용하게 된다. 그러면서 부부간의 일치, 사랑도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모습을 모델로 삼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에페 5장).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은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부로서의 사랑 안에 이루어져야 한다. 바오로는 예수가 말한 모든 것에 영감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신부에 대한 언급이 없이 신랑만을 언급할 때 신랑이라는 칭호는 보편적인 의미를 갖는다. 모든 혼인의 일치는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랑이라는 표현 안에서도 계약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역할, 하느님의 모습을 당신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구약에서 신랑의 이름, 야훼 하느님, 이스라엘을 재건하실 분에게 그 칭호가 주어졌다. 그러나 예수는 이런 이스라엘을 재건할 하느님께 주어진 칭호를 당신에게 적용시키면서 이제 구약의 예언이 당신 안에서 실현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구약성서에서는 야훼 하느님만이 신랑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똑같은 상징을 통해서 당신을 신랑으로 제시하면서 하느님의 역할을 당신에게 적용한다.
이런 혼인잔치의 비유 등은 보편적인 선택, 확장을 나타낸다. 처음에 잔치에 부름받은 사람들은 선택받은 유대 백성들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누구든지 초대되었다. 선택된 사람들이 소수라면 초대받은 사람들은 많은 숫자였다. 이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혼인계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모든 인류와의 계약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신랑의 역할은 특히 신랑의 희생안에서 드러난다. 단식의 날, 고행과 고통의 날이 주어지기 마련이다. 단식에 대한 질문이 주어졌을 때 그에 대한 대답으로 신랑이 없을 때를 언급하고 있다. 이제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온다. 예수님은 물질적 단식에서부터 더 심오한 정신적인 단식을 선포하고 있다. 당신의 수난에 직접적으로 제자들이 참여하는 단식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핵심적인 것은 신랑의 도래가 하느님과 사람들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형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랑의 현존과 신랑의 희생(不在)을 통해서 이런 것이 더욱 확인되고 있다. 신랑을 빼앗긴다는 것은 하나의 희생을 의미한다. 구약성서에서는 야훼 하느님이 얼굴을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감추실 때는 분노와 정의의 표현이었다. 그들을 벌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로서의 不在는 많은 이들에 대한 사랑과 구원의 여정으로서 나타난다. 많은 이를 위해서 흘리신 피에 대한 계약과도 연관된다. 희생은 계약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찌 보면 혼인 잔치를 이야기하고 다음에 부재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혼인 잔치의 기쁜과 슬픔이 상반되는 것 같이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와 인류와의 혼인 계약에 있어서는 당신의 不在가 오히려 이 계약을 성취시켜 준다는 것이다. 그 계약은 신랑의 희생과 고통과 수난을 통해서 더욱 더 완전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구약의 하느님으로서가 아니라 더욱 분명한 진정한 하느님의 모습, 자비의 모습, 새로운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의 계시를 성취하고 인류와 하느님과의 계약을 성취하신다. 바로 이런 신랑인 예수는 당신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인간을 구원하시고 인간적 삶안에 현존하시는 당신 자신을 제시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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