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두어야 할 점】
① 예수의 메시지를 종합하는 것이 쉽지 않다. 즉 바오로 신학, **신학이든지,∞신학 같이 예수의 신학을 이야기할 수 없다. 예수의 메시지 내용은 예수의 언어 사용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또한 예수의 말씀과 업적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서로 상호 보완적이다. 예수의 말씀은 학설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삶의 맥락 안에서 나타나고 생활되고 살아 있는 말씀이다. 예수이 메시지의 핵심 테마로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할 때 그분의 삶, 업적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② 하느님 나라(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는 성서적․교의적 관점에서 말할 수 있다. 교의적 관점에서 모든 신학과 연관되어 있는 핵심 테마이다. 실제로 그리스도론․교회론․종말론등 그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얘기한다. 특히 말씀과의 관계안에서 이 테마가 다루어진다.
③ 하느님 나라는 예수의 핵심 테마이고, 따라서 예수의 말씀과 행위를 보아야 한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개념은 모든 만물에 대한 하느님의 다스림을 말한다. 즉 역동적이고 활동적인 모습, 그런 순간을 나타낸다. 또 한가지는 종말적 의미에서의 나라로 가리킨다. 그래서 단순히 하느님 나라라고 할 때 우리가 말하는 ‘나라’가 예수 안에서는 습관적으로 잘못 이해할 수 있다 -문화적 습관 때문에 공간․시간․한정적 개념으로 이해할 여지가 있다. 예를 들면 ‘교회’라고 할 때 땅위에 있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다. 비록 하느님의 현실적 지배, 미래와의 관계되나 이를 단정지을 수 없다. 따라서 땅위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한다, 확장한다 라고 할 때는 이에 대한 해석이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나라’라는 고정개념을 사용하고, 교회와 하느님 나라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또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성취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하느님이 지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④ 하느님 나라라고 할 때 하느님의 접근을 나타내고 있다 물론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묵시적 전망과도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죽은이의 부활의 기다림, 보편적 심판, 인자의 모습과 인자에 대한 기다림, 사탄에 대한 결정적 승리 등. 그러나 예수는 종말론적 요소를 권위를 갖고 말하지만 결정적인 상태에 대한 세부사항은 관심이 없으시다(마지막 날은 아무도 모른다). 묵시적 사건에 대한 계산이 결여되어 있다. 당시의 묵시론자처럼 하느님 현시의 기초에서 묵시적 전망을 말하지 않는다. 하느님 나라는 결정적인 미래 사건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가르침 안에 존재하는 현실에 관계되어 있다. 루가 17,20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바리사이들에게서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는 지켜보는 가운데 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보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고 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보시오. 사실 하느님 나라는 (이미)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일부 Text에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다림이 묵시적 성취로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Text에서는 창조주 하느님과의 관계를 나타내기도 한다. 우리가 주의 기도를 볼 때도 묵시적 전망과 창조주 하느님과의 관계가 드러나고 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창조주 하느님」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실 하느님」 따라서 하느님 나라에 대해 얘기할 때 종말적, 현세적인 한쪽 면만을 강조할 때 잘못 이해될 수 있다. 예수는 인간이 사고할 수 있는 모든 예정된 스케마에서 벗어나 있다. 인간의 계획안에 예수를 삽입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과 행위에 따라 하느님 나라의 개념을 살피고자 한다면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을 선포하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은 예수의 말씀뿐 아니라, 현재 행위의 실천적인 면안에 메시지와 실천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하느님 나라의 예수의 메시지는 미래에 대한 어떤 것보다 구체적인 우리 자신에게 관계된 것으로 나타난다. 종말적 미래의 관계안에 나타나는 것으로써 볼 수 있다. 현재의 실천과 종말적 미래 왕국과의 관계로 나타내는 (futurum praesens : 현존하는 미래)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은 하느님 나라의 내용이다 (Kasper의 ‘예수 그리스도’ 참조할 것).

【알아두어야 할 점】
① 예수의 메시지를 종합하는 것이 쉽지 않다. 즉 바오로 신학, **신학이든지,∞신학 같이 예수의 신학을 이야기할 수 없다. 예수의 메시지 내용은 예수의 언어 사용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또한 예수의 말씀과 업적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서로 상호 보완적이다. 예수의 말씀은 학설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삶의 맥락 안에서 나타나고 생활되고 살아 있는 말씀이다. 예수이 메시지의 핵심 테마로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할 때 그분의 삶, 업적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② 하느님 나라(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는 성서적․교의적 관점에서 말할 수 있다. 교의적 관점에서 모든 신학과 연관되어 있는 핵심 테마이다. 실제로 그리스도론․교회론․종말론등 그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얘기한다. 특히 말씀과의 관계안에서 이 테마가 다루어진다.
③ 하느님 나라는 예수의 핵심 테마이고, 따라서 예수의 말씀과 행위를 보아야 한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개념은 모든 만물에 대한 하느님의 다스림을 말한다. 즉 역동적이고 활동적인 모습, 그런 순간을 나타낸다. 또 한가지는 종말적 의미에서의 나라로 가리킨다. 그래서 단순히 하느님 나라라고 할 때 우리가 말하는 ‘나라’가 예수 안에서는 습관적으로 잘못 이해할 수 있다 -문화적 습관 때문에 공간․시간․한정적 개념으로 이해할 여지가 있다. 예를 들면 ‘교회’라고 할 때 땅위에 있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다. 비록 하느님의 현실적 지배, 미래와의 관계되나 이를 단정지을 수 없다. 따라서 땅위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한다, 확장한다 라고 할 때는 이에 대한 해석이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나라’라는 고정개념을 사용하고, 교회와 하느님 나라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또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성취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하느님이 지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④ 하느님 나라라고 할 때 하느님의 접근을 나타내고 있다 물론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묵시적 전망과도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죽은이의 부활의 기다림, 보편적 심판, 인자의 모습과 인자에 대한 기다림, 사탄에 대한 결정적 승리 등. 그러나 예수는 종말론적 요소를 권위를 갖고 말하지만 결정적인 상태에 대한 세부사항은 관심이 없으시다(마지막 날은 아무도 모른다). 묵시적 사건에 대한 계산이 결여되어 있다. 당시의 묵시론자처럼 하느님 현시의 기초에서 묵시적 전망을 말하지 않는다. 하느님 나라는 결정적인 미래 사건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가르침 안에 존재하는 현실에 관계되어 있다. 루가 17,20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바리사이들에게서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는 지켜보는 가운데 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보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고 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보시오. 사실 하느님 나라는 (이미)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일부 Text에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다림이 묵시적 성취로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Text에서는 창조주 하느님과의 관계를 나타내기도 한다. 우리가 주의 기도를 볼 때도 묵시적 전망과 창조주 하느님과의 관계가 드러나고 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창조주 하느님」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실 하느님」 따라서 하느님 나라에 대해 얘기할 때 종말적, 현세적인 한쪽 면만을 강조할 때 잘못 이해될 수 있다. 예수는 인간이 사고할 수 있는 모든 예정된 스케마에서 벗어나 있다. 인간의 계획안에 예수를 삽입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과 행위에 따라 하느님 나라의 개념을 살피고자 한다면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을 선포하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은 예수의 말씀뿐 아니라, 현재 행위의 실천적인 면안에 메시지와 실천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하느님 나라의 예수의 메시지는 미래에 대한 어떤 것보다 구체적인 우리 자신에게 관계된 것으로 나타난다. 종말적 미래의 관계안에 나타나는 것으로써 볼 수 있다. 현재의 실천과 종말적 미래 왕국과의 관계로 나타내는 (futurum praesens : 현존하는 미래)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은 하느님 나라의 내용이다 (Kasper의 ‘예수 그리스도’ 참조할 것).